다행히 글쓰기 워크숍 비평 본선(?)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

그래도 올리라고 하셨으니 올립니다만,

부담없이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분석하고 비평하는 마음은 부디 접어주시공~ㅎㅎ

관능적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에 대한 어설픈 감상문입니다.

눈이 펄펄 마음과 교접하던 그날 쓴 것이라, 글속에 눈 이야기가 살짝 나옵니다.

글 맨 아래 있는 음악(베사메무쵸)을 BG로 깔아 놓고 읽으시면, 그나마 좀 낫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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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나잇 스탠드'보다 짜릿한 '47년의 기다림'

(by 준수)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
사랑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전제. 내겐 <첨밀밀>이 그것을 알려줬다. 처음으로가슴 짠하게 알려준 명제. 만남과 헤어짐, 그 엇갈림과 반복. 한숨을 쉬었다 뱉었다, 내 마음은 그들의 발끝에만 매달렸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렇게 흔들리는 내 마음에 <첨밀밀>은 속살거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돈 돼야지. 유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운명이잖아. 운명. 사랑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다.


나는 얼마 전, 또 하나의 운명을 접했다. 더 운명 같은 건, ‘쿠바’였다. 아직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이지만, 언젠가 꼭 디뎌할 그곳. 혁명이 있었고, 커피가 있으며, 무엇보다 섹시함이 상존하는 곳. 누군가 그랬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쿠바라고. 그는 일체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양, 단호하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내겐 로망이었던 쿠바는, 이젠 지상의 천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치코와 리타>, 그런 쿠바에서 시작한다.

 
1948년의 쿠바 아바나. 피아니스트 치코. 보컬리스트 리타. 그들이 만난 밤, 음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끌림’이었으리라. 끌림은 곧, 나에게 맞는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리듬은 음악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때, 운명은 그들에게 속삭였으리라. 치코에겐 리타의 목소리가, 리타에겐 치코의 연주가 그랬을 것이다. 리타의 ‘베사메무쵸’에 혹했던 치코는, 그녀를 위해 ‘리타(릴리)’를 작곡하고, 리타는 그런 치코에 반한다.

그러나 그것. 운명이라는 속삭임. 늘 정교하고 오차가 없는 것, 아니다. 운명도 수명이 있다. 차가운 유혹으로 끝나버릴 운명이 있는 한편, 그리움을 평생을 품을 운명도 있다. 운명이라는 속삭임, 마음은 쉽게 속는다. 그만큼 강한 끌림이 있을까. 영원하고픈 숙제, 사랑. 사랑의 시작도 언제나 운명에서 비롯되니까. “당신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느낌”이라며 리타에게 처음 건넸던 말, 오글거렸지만 진심 같았다. 그때 카바레(살롱) 분위기가 그랬다.

어쨌거나 치코와 리타의 (음악적) 조건(?)은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씨줄과 날줄의 조화. 음악이 매개로 작용하는 순간, 사랑은 더 큰 열정을 동반한다.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그들은 처음 만난 그날, 서로를 탐닉한다.

 

 

애니메이션이라지만, 리타의 몸은 팽팽한 활시위마냥 관능적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관능미를 느끼다니, 처음 한 경험이다. 치코가 앞뒤 재지 않고 빠질만하다는 생각. 두 사람, 몸을 섞는다. 선율과 리듬의 합치처럼 두 사람은 합한다. 맥락 없이 그들을 봤다면, ‘원 나잇 스탠드’라고 애써 무시할 것처럼.

원 나잇 스탠드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사랑은 시작됐다. 허나, 사랑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인가보다. <첨밀밀>에서 이미 확인한 바, <치코와 리타>도 엇갈림을 동반한다. 관능의 볼레로처럼 터질 것 같은 그들의 관계에도 질투와 오해가 틈입한다. 사랑의 가장 큰 적이 질투와 오해라고 했던가. 수시로, 그들은 시험에 든다. 세상의 모든 운명적인 사랑이 그러하듯.

전반부,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그는 뭔가 망설이고 주저한다. 첫 밤부터 그랬다. "당신이 걷는 땅에 키스라고 하고 싶"었던 남자의 태도치고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니, 까칠하지만 거침 없는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치코를 믿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대범하고 마음이 넓은 양, 우리는 착각한다. 살아보니 마냥 그렇진 않더라. 질투와 오해가 여성만의 것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착각이다. 리타는 그런 여자다. 한 남자를 품기에 더 없이 넓은 여자.


주변 환경 또한 그들의 사랑을 질투한다. 아바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공간이 뉴욕으로 바뀐다. 그들의 사랑도 바뀔 것임을 예고한다. 헤어짐이 당연하면서도 나는 안타까웠다. 결말을 알면서도 발을 굴러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니까.


뉴욕은 아바나와 다르다. 체제가 다르고, 관계가 다르며, 사람이 다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랑. 모든 것을 얻어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리라. 스타가 된 리타가 그랬다. 자신을 찾아 뉴욕에 온 치코에게 더 이상 아바나의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고 쏘아붙이지만, 사랑은 운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맨해튼의 키스. 질투와 오해는 키스 한 번으로도 충분히 가실 수 있는 것임을.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뉴욕, 그들의 사랑은 더욱 힘에 겹다. 사랑을 온전하게 그들만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자본이 개입하니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 거듭 어긋났지만, 영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에 있다”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나는 운명의 향기.

나는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리타가 마침내 자신을 돌고 돌아 찾아온 치코에게 건넨 이 말. “47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이 문을 두드려주기를.”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향기는 여전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세월.


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 운명이다. 사랑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야 만다는 <첨밀밀>의 향기는 쿠바에서도 여전했다. 한창훈은 《향연》에서 그랬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기다림, 그것은 때론 사랑의 다른 말이다.


<치코와 리타>.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한다. 리타의 노래와 춤, 치코의 연주, 그들의 사랑과 인생, 몸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음악을 통해 채운다. 마음이 교감한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 눈이 펄펄 내린다. 눈이 쌓인다. 그들의 사랑이 눈과 함께 아른거린다. 오늘의 노래는, 베사메무쵸. 아, 관능적이다. 이 음악, 만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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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입니다. 2012-02-0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철학자가 그러더군요. 정말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그녀를 보내주어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햇살이 잘 드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실 동안만 만나라.
그렇게 평생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런 대사를 하죠.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참....
감상에 젖어서 합평이 불가능하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는 없군요.

알라딘, 많은 청소년들이 들어오는데.
"사랑과 영혼"의 명장면을 떠올리게하는 피아노 치는 장면은 바로 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시실리 2012-02-05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 잘 보았습니다. 글이 아주 간결하고 깔끔하여 읽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말 글이란 이렇게 순하게 써야 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까칠하지만 거침 없는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현실에서도 이렇게 좋고 싫음이 확실한지 궁금할 정도로 이유가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네요. 음악까지 잘 듣고 갑니다.

꽃별이 2012-02-05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이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이상원 2012-02-14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준 님의 걱정에도 내리지 않으신 덕분에 저도 피아노 치는 장면 구경 잘 했습니다.^^
본 적 없는 애니메이션입니다만 말씀대로 관능적인 분위기는 물씬하군요.

'원 나잇 스탠드'가 제목에 등장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용을 읽었을 때 글쓴이께서는 둘의 첫날을 원나잇스탠드로 보지 않으신다고 이해해서요. 혹자는 원나잇스탠드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잡으신 제목일까요?

몹시 리타 편이십니다. '리타는 한 남자를 품기에 더없이 넓은 여자다'라는 문장만 봐도 그런데요, 리타는 여러 남자를 사귀어야 속이 시원한 유형이라는 뜻일까요?

제가 워낙 썰렁하게 살아서 그런지 운명 같은 사랑이라는 소재가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음이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혹은 이미 그건 차곡차곡 개켜서 기억의 서랍 속에 잘 집어넣어둔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