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1931년 7월 2일)이 난 또다른 직접적인 원인은 만주 본토의 중국인들은 밭농사를 짓고 조선인 이주민은 논농사도 지을 줄 안다는 것이었죠.장춘(만주국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수도라고 해서 신경으로 개칭, 또다른 대도시 심양은 봉천과 동일한 곳)의 만보산 밑에서 일어난 그 사건도 중국인들이 경작하던 밭에다가 조선인들이 물을 대니까 문제가 생긴 겁니다.그렇게 되면 중국인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지요.그런데도 현지 일본병력은 조선인들을 노골적으로 편듭니다.하지만 정작 이때는 큰 충돌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이 당시 조선일보는 이 곳에서 무슨 사상자라도 난듯 오보를 내고 이후 7월 10일까지 조선에서는 온갖 참혹한 일이 벌어집니다.강준만<한국 근대사>제8권에서는  조선일보의 이 오보를 크게 다룹니다.소제목이 아예 '일제음모에 놀아난 조선일보"입니다.이 오보사건은 화교학살을 다루는 책이 거의 다 다루고 있는데 책마다 그 강조논점은 다릅니다.강준만은 한홍구의 한겨레 21의 글<호떡집에 불지른 수치의 역사>를 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이 호떡집 수난 이야기는 그전에도 나왔지요.이상옥<한국의 역사>1969 제8권이 그것인데 이 씨는 일제시대를 직접 경험한 세대이니 더 생생했겠지요.그러나 그다지  한국인이 가해자라고는 분명히 적시하지 않았습니다.그냥 한국인의 습격을 받아 불이 안난 호떡집이 없었다는 정도였지요.그 무렵 나온 윤상근<태평양 전쟁>전 5권 중 1권 초반부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사를 주로 인용하여 보고서 쓰듯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물론 윤씨는 강준만 씨 정도로 조선일보의 오보사건을 규탄하진 않았고 폭동이 심각해지자 조선 동아 양측은 물론 사회각계에서 우려의 성명을 보내고 중국의 국민당 정부도 조선과 중국의 우호가 중요하다면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임산부의 배를 가른 이야기가 나온 조흔파<만주국>(육문사)은 이 사건을 다룬 역사물 중 가장 강도높게 당시의 한국인 폭도들을 비난한 책입니다.이 사건은 분명히 중국 거류민 대량 학살 사건이라고 썼지요.아예 강자인 일본인에게 허가 맡은 객기의 소산이라고까지 했습니다.1970년에 나온 이 책을 대학 도서관에서 읽고 만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저는 지금도 만주사변과 만주국에 관한 신간은 반드시 확인하여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고 있습니다.조흔파 씨는 얄개전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역사물 방송극을 많이 집필한 방송극 작가입니다.철종시대부터 경술국치까지의 격동의 역사를 다룬 <대한 백년>전4권을 <만주국> 이전에 집필하고 만주국 이후에는 아예 우리나라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다룬 방대한 <소설 한국사>를 집필했습니다.그런데 그의 다른 책은 헌책방에 지금도 가끔 나옵니다만 <만주국>은 통 찾아볼 수가 없군요.

  이 사건을 다룬 책에서 많이 나오는 당시 화교들의 사상자 통계인 사망 127명 부상 393명은 리튼 보고서에 나오는  수치입니다.국제연맹은 당시 관동군이 만보산 사건 직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우는 등 일본의 폭주가 계속되자 리튼을 단장으로 조사단을 꾸려 현지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내게 합니다.이 보고서는 <만보산 사건 연구>로 유명한 박영석 씨가 번역했는데 보고서 영어 원문도 함께 수록했으니 영어공부하는 이들도 참고할 만합니다.탐구당에서 나왔지요.강준만의 한국근대사 8권에는 이 당시 화교들의 재산피해를 250만원이라 적었지만 리튼 보고서에는 250만엔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쟁은 굉장히 심했습니다.1920년대 말,신간회 옹호에 나선 조선일보는 진보적이었고 동아는 브나로드 운동 자치운동 지향이라 보수적이었죠.조선일보에는 이 당시 좌파들이 많았습니다.그런데 조선일보가 만보산 사건 과장오보 기사로 욕을 많이 먹게 되지요.동아일보는 비교적 차분한 태도를 보여 대조를 보입니다.이 당시 만보산 사건을 대하는 양 신문의 태도를 집중 분석한 논문이 민두기<시간과의 경쟁>에 실려있습니다.중국근현대사의 권위자인 민두기 씨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낸 비장한 책입니다.

 이 시기 중국 국민당과 일본의 외교전을 다룬 본격적인 연구서는 유신순<만주사변기의 중일 외교사>신승하,박강.김지환 역 (고려원)입니다.저자는 중국 남개대학 교수인 조선족입니다.이 분야를 다룬 연구서 중에서 가장 두툼하지만 일본인이름이 모두 한자 그대로 표기되어 일본발음을 알 수 없으니 초보자들이나 일본어 못하는 이들은 좀 애를 먹게 생겼습니다.이 좋은 책을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옥에 티네요.

  강준만.윤상근,한홍구 모두 화교학살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위해 부추킨 음모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만 글쎄요....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의 모략을 비교적 강하게 내세운 방대한 책 데이비드 바가미니<천황의 음모>문일영 역 (노벨출판사)에선 만보산 사건은 만주사변이나 만주국 건국을 자세히 다룬 데 비해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한 계기는 되지만 인과관계의 면에서 일본이 굳이 일부러 화교학살을 일으키게 음모를 꾸몄다는 것도 좀 그렇고 또 그렇게 부추겼다고 해도 순식간에 그런 대참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요. 그냥 조흔파가 해석하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의외로 중국에서 나온 책은 위의 유순신 책도 그렇고 국민당 입장에 서있는 친 장개석 시각인 <장개석 비록>(서문당에서 <중국현대사>로 번역)에도 한국인 폭도들에 대해서는 적대감이 없이 차분한 편입니다.단 <장개석 비록>에선 폭동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 사건을 다룬 소설작품은 나중에 언급하겠습니다.최근 꽤 연구가 활발한 분야입니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8-12-1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흔파에 대해서 놀랄 사실을 노자님 글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위 책들을 한 권도 읽지 않아서 뭐라고 단정짓기 어렵지만 1920년대의 조선과 동아는 양대 언론사이다보니 비교라이벌 의식이 작동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묻습니다. 너희는 방방 뜨니까 우리는 차분모드로 나간다 뭐 그런식의.

노이에자이트 2008-12-1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흔파의 대한 백년은 제가 구한말 역사 공부할 때 아주 재밌게 보던 책입니다.제가 방송극작가 출신들의 역사실록물을 많이 사놓고 보는 편입니다.문장이 간결하고 박력있지요.
신간회 활동기간엔 조선 동아의 대립 구도가 활발합니다만 신간회가 해산되고(1931년) 만보산 사건 및 만주사변 뒤엔 조선일보도 동아일보와 거의 비슷하게 신중(나쁘게 말하면 몸사리기)하게 나가지요.재밌는 것은 현재 대단히 강경한 반공이념을 내세운 조선일보가 신간회를 지지했던 진보좌파 시절을 자랑스레 여긴다는 점입니다.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조선일보...이상하지 않습니까...한가지 알아둘 것은 신간회 지지하던 당시만 해도 조선일보는 방씨 일가 것이 아니었다는 것.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2의 창간을 한 것은 1933년입니다.

비로그인 2008-12-1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근대사> 8권과 나중에 소개해주실 소설 작품을 읽어봐야겠네요.
서점에 구경갔다가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이란 책을 잠깐 읽어봤는데요.
아사히신문 취재반이 쓴 책인데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나오는데 과거청산에 대한 한국측 노력이 부족하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시아 각 국에 일본이 뿌린 전쟁의 씨앗과 그 역사의 책임에서 빠져버린 일본의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았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시아사...는 저도 조금 훓어봤는데,남경학살에 관한 일본교과서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했던데요.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거기 국공내전 후 장개석 진영에 남은 일본군 장성 이야기에 주목해 보세요.이미 20여년 전 까치출판사에서 프랑스 학자들이 쓴 중국현대사에 그 내용이 나와서 인상깊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그리고 용산 전쟁 기념관에는 베트남 전쟁을 아직도 "자유를 지키기 위해 파병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8-12-12 18:02   좋아요 0 | URL
확실히 부분만 보고 와서 놓친점이 있네요. 그래도 이런 책이나 공동역사교과서 같은 책들의 출판은 긍정적으로 봐요. 용산 전쟁 기념관이 가까운 편인데 한 번 가봐야겠네요. 당시 자국의 자유도 통제당한 상태에서 누구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건지 명분이 참 재밌네요. 돈 때문에 갔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가봐요.

가시장미 2008-12-1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작품을 언급해 주시면 그 소설을 통해 이해해봐야 겠네요. 너무 어려워요 -_ㅠ

노이에자이트 2008-12-13 15:03   좋아요 0 | URL
조금만 기다리세요...

mahlerian 2008-12-1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 산책>도 나름 중도적이려고 애는 썼지만, 국내에서 생산된 기존 문헌들이 워낙 민족주의 편향적이라 한계가 컸다더군요. 강교수가 역사 전문가도 아니고...

노이에자이트 2008-12-15 13:11   좋아요 0 | URL
그가 인용한 방대한 문헌들을 보면 역사학 교수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원래 언론사를 쓰려고 했고 또 실제 쓰기도 했으니 본격적인 근현대사를 썼다고 해서 역사학자들이 폄하하기도 힘들겠지요.저는 그 각주에 나온 책이나 정기간행물 덕을 많이 봅니다.

mahlerian 2008-12-1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보산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이 문제는 한양대 임지현 교수도 자주 거론하는 문제 중 하나지요. 예전에 서울대학신문인가 어디서 인터뷰를 했던 대목이 있는데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근데 노이에자이트님은 이미 알고 계셨을 것 같기도 하고... ^^;


http://blog.paran.com/mukka/4515405

Q : 그런데 지금 쟁점이 되는 부분은 주로 근현대사 관련 부분이 아닌가요?

A : 현대사 부분이지요. 뭐 거기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 이웃을 억압했던 과거에 대해서 철저하게 생각해야 하겠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 한국의 근현대사 서술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가령 베트남 파병 같은 걸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냐는 거죠. 또는 일제 때 만보산 사건 당시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학살도 그렇고요.

Q : 만보산 사건 당시의 중국인 학살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A : 소설가 채만식이 동아일보인가 어디에 르포를 쓰기도 했는데, 만주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싸움이 난 겁니다. 식민지기에 조선 사람들이 만주로 많이 갔는데, 조선 사람들은 중국에 가서도 벼농사 짓고 중국 사람들은 밭농사 짓잖아요. 거기서 조선 사람들이 논에 물을 대니까 그 물이 밭으로 들어오고, 밭농사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조선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조선인은 그 때만 해도 2등 국민이긴 하지만 여하간 일본제국의 시민이니까 일본 영사관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던 거지요. 그래서 일본군이 개입해서 조선 사람들의 편을 들었고, 조선 거주민들과 일본인들은 한편이 돼서 싸웠거든요. 분노한 중국농민들은 조선농민을 습격하고. 그러니까 평양 같은 데서 성난 군중들이 '짱꼴라'를 학살해 버렸습니다. 이거 교과서에서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나오지 않나요?

-- 인터뷰가 끝난 뒤 확인한 결과, 국사교과서(6-7차 교육과정)에는 중국인 학살뿐만 아니라 만보산 사건 자체에 대한 서술이 없었다. 베트남 파병 역시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 두 사건은 심지어 연대기에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

그 외에도 '만주 특수'라던가, '남양 특수'라고 해서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을 확대했을 때 조선 사람들이 누렸던 혜택들에 대해서 교과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의 무소불위의 가공할 만한 파워를 가진 억압과, 거기서 2등 시민으로서 누렸던 그 지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의 조선 사람들이 1등 시민이 되려고 했던 욕망들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반성적으로 짚어보는 작업은 필요한 것 아닌가요? 그렇게 반성적으로 짚어본다고 해서 그게 후쇼사판 교과서와 같은 것들을 인정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우리 민족은 비껴가면서 타민족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비판이란 건 설득력을 갖기가 굉장히 어렵지요.

후쇼사판 교과서가 '자학 사관'을 비판하고 일본의 자라나는 세대에게 일본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에 입각해 쓰였다는 측면에서, 한국인들은 이것이 일본의 우경화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며 비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한국의 국사교과서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요?

당장 후쇼사판 교과서에 대한 반응만 봐도, 공무원 시험에 국사시험을 부활시켜야 한다, 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이구동성 아닌가요? 이는 후쇼사판 교과서에 대한 대항논리가 기본적으로 후쇼사판 교과서의 저자들과 같은 인식론적 선상에 서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저 놈들도 강화시키니 우리도 강화시키자는 논리인 거죠.

이런 식의 발상이 현재의 역사논쟁이나 과거에 대한 기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는 것인지는 참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산케이신문이 처음에 교과서 파동 났을 때 자주 언급하던 게 한국의 국정교과서를 본받으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왜냐면 자라나는 일본 세대들에게 자기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자부심을 부여하는 데 있어 한국의 국정교과서가 참 탁월하다는 거죠. (웃음) 일본인들 입장에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너희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적 정체성과 긍지를 강하게 심어주려 하면서 왜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냐?" 이럴 때 제 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면, 한국의 비판이란 건 별로 설득력이 없는 거죠.

-- 그 '설득력이 없는' 대응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 6일, 김진표 교육 부총리는 "중국의 고조선,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역사 교육 강화 방안으로 우선 올해 안에 근현대사 중심의 '보조학습자료'를 만들어 일선 고교에 보급할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

노이에자이트 2008-12-15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지현 씨가 적대적 공존 등의 책을 통해서 이런 사례를 많이 언급하지요.역사학을 애국심의 시녀 정도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어렸을 때 워낙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았기에 그런 거라고 봅니다.단,임지현 식 논리가 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데 대한 우려도 있지요.비슷한 식으로 만주 문학을 보는 김철 씨 같은 경우는 결국 과거사 반성 같은 것의 무용성을 주장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문제의식은 좋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논란이 많은 것 같습니다.인터뷰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해 주시니 매우 도움이 되겠습니다.배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