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중국집이라고 하면 중국요리를 하는 집을 뜻합니다.그런데 이 단어가 이상하다는 것은 일본집이나 미국집이라고 해서 우리가 일본식당이나 미국식당을 연상하지는 않는 데서 드러납니다.중국집하면 무조건 중국음식점이 떠오르는 것은 세계에서 화교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로 꼽히는 한국화교들의 슬픈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그들에겐 음식점을 하는 것 외엔 다른 분야 진출이 차단되어 있던 기나긴 시절이 있었으니까요.요즘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아진 것도 아니지만요.
1931년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 직후 그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이 화교들에게 저지른 행패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사건 중의 하나일 겁니다.교과서 식 설명을 하자면 한국인은 그때 일본의 계략에 속았고 나쁜 것은 일본제국주의다....이런 식이죠.그리고 간단히 말하면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부추켰다는 겁니다.하지만 이때 화교들이 당한 수난의 가해자는 분명히 한국인이었습니다.당시 일어난 폭력과 살인으로 죽어간 중국인들의 이야기는 차마 끔찍해서 듣기가 싫을 정도입니다.심지어 화교 임신부를 죽여 배를 가르기도 했다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고바야시 히데오<만주철도>에 나온 사진 중엔 평양의 중국인 포목점을 습격한 한국인들이 옷감을 끌어내서 길거리에 내팽개친 모습도 있습니다.그리고 몇달 안 가서 9월 18일 세칭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에서 한국인이 일본에게 이용당한 면은 분명하지만 당시 만주나 중국의 조선인들이 일본의 신민으로 중국인들에게 군림했던 면도 분명히 있었고 그러면서 못된 짓을 한 이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중국인들에겐 일본의 힘을 빌려서 위세를 부리는 앞잡이로 보였겠지요.특히 아편밀매에 뛰어든 한국인들이 꽤 있었습니다.이런 소재를 파고 든 학자가 박강입니다.그는 마약과 아편을 일본이 어떻게 이용해 식민지 경영자금으로 썼는지를 몇년 째 꾸준히 연구하고 있지요.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어떻게 만주 및 중국 본토를 잠식해갔는가도 함꼐 연구했습니다.참고로 말씀 드리면 일본은 만주를 먼저 중국에서 분리하여 만주국을 세우고 그다음 화북지방을 분리하야 역시 괴뢰정권을 세웁니다.그다음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남경정권을 세웁니다.이때 남경정권 수반은 왕정위(왕조명).그의 치하의 남경정부가 운영했던 정보기관이 그 무시무시한 체스필드 76호.이 정보기관 시절 이야기를 다룬 것이 얼마전 개봉하여 늙수구레한 아저씨들을 극장에 끌어들였다는 영화 <색,계>입니다.아나키스트 혁명가로 젊은이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것으로 정치역정을 시작한 왕정위의 인생 파노라마는 전기작가나 영화제작자들의 구미를 끌어들일 만합니다.
박강에 의하면 만주이주 한국인들이 아편,마약 밀수입에 종사하여 1932년 만주국 성립 직후 아편밀매에 종사하는 만주거주 한국인 숫자는 20000명을 넘겼다고 합니다.당연히 일본은 이들을 일본의 신민으로 여겨 묵인해주었죠.하지만 중일 전쟁(1937년)이후 아편전매제가 들어서면서 한국인들은 밀매를 못하게 되자 화북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깁니다.역시 일본국적으로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일본군과 함께 이동해서 보호를 받았죠.만보산 사건 때 논에 물대는 일로 만주 토박이 중국인들과 한국인 농민들이 싸울 때도 일본군은 한국인 편을 들었음을 상기하면 이런 모습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마약을 퍼뜨리는 것은 물론 떄론 중국군과 거래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일본군에게 알리는 못된 거간꾼 노릇도 했다고 합니다.1943년 청도,제남 등 화북 지역 6대 도시 헤로인 밀소매 상점 2700호 중 한국인 소유가 2500호로 추정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합니다.이런 한인들 때문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힘을 합쳐야 할 중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매우 좋지 않은 감정이 쌓였고 이런 감정의 결과, 일본이 패전하면서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테러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됩니다.중국인들에게 만주나 중국 땅에 있던 한국인들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보였던 것이죠.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고한 한국인들의 피해가 정당화되어선 안됩니다만...
이와 비슷한 일은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에도 있었습니다.영국에도 힘든 일은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합니다.이들이 집중적으로 영국에 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먼저 인도가 독립하고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잔인한 종교분쟁이 벌어져 수많은 힌두교도,모슬렘,시크교도 들이 죽고 난민도 많이 생겼습니다.이들 중 특히 박해를 피해서 모슬렘이나 시크교도들 일부가 영국에 오게 되어 힘든 일을 맡는 인력공급원이 됩니다.또다른 대규모 유입은 1960년대 초 아프리카 여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될 때입니다.우간다나 케냐 같은 곳은 독립을 이루면서 식민지 시절 상권을 잡고 있던 인도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이 인도인들은 여왕폐하의 신민 자격과 여권을 갖고 인도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갔지요.현지인들이 볼 때는 영국인들의 후원으로 자신들의 부를 빼앗아간 존재들입니다.영국인들이 물러가니까 끈떨어진 갓신세가 되었지요.그곳에 눌러살자니 독립한 나라의 인민들이 무섭고 인도로 돌아간댔자 딱히 먹고 살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영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이 차지한 위치는 중국과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차지한 위치와 비슷합니다.
요즘은 만주에 대한 연구서가 우리나라에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특히 당시 한국인들이 만주국이 생긴 이후 번영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인들은 못한 일을 일본인들은 해냈다는 생각과 함께 중국인들보다는 우리 조선인이 더 낫다는 식의 비뚫어진 우월감은 지식인들에게도 상당히 많았습니다.만주기행을 한 한국인 문학가들의 일기 등을 연구한 책들을 보면 그런 것을 알 수 있지요.인도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차지한 위치를 연구해 보면 제국주의 시절 한일 관계사를 또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