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체제는 정치가 불가피하게 내포할 수 밖에 없는 갈등과 이의 조정을 위한 타협 등을 무조건 당파분열이나 정쟁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정치자체를 불신, 혐오하게 하고 오로지 경제성장주의를 부추겼습니다.수출만이 살 길이다 등의 표어는 그런 시기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지요. 정치적 무관심이 구질서를 돕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어찌 박정희 뿐인가요?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 이야기만 나오면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한마디로 말해서 경제에 민주주의가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들이지요.이런 이들이 금과옥조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경제문제는 경제로 풀자는 거지요.그러면서 경제를 사업장 수준으로 한정지으려는 꼼수를 씁니다.하지만 민주화의 핵심은 그동안 민주적 통제 밖에 놓여 있는 부문을 민주적 통제로 끌어들이는 겁니다.경제문제 자체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며,단순히 계량적 전문지식을 갖춘 경제관료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3자 개입 금지를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이들을 보십시오.사실상 자율적인 노동조합의 존립과 활동 자체를 부정하자는 거지요.하급노조에 대한 상급노조의 지도와 협력 그 자체를 부정하고 산별노조를 해체하자 이겁니다.하지만 전경련을 비롯한 자본가 단체들은 수많은 제3자인 학자,관료,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고 접촉을 유지하고 있지요.이는 노사관계의 형평성을 무시한 주장입니다.
오로지 경제만을 강조하는 이들이 정치혐오를 조장하는 통로 중의 하나가 대중매체입니다.현재 언론에 비친 정치는 무능,부패,패싸움 등 부정적인 것 일색입니다.하지만 이런 식의 정치혐오는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칩니다.이런 식의 정치관을 인민이 지니게 되었을 때, 올바른 정치참여를 통한 민주발전은 백년하청입니다.냉소적인 인간이 탐욕으로 무장하면 건전한 시민의식은 전혀 없는 인간이 되지요.내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느냐 나가느냐에 대한 즉물적인 반응 외에는 그 어떤 일에도 무관심합니다.바로 이때문에 민주주의가 껍질만 남기를 바라는 지도자는 인민이 탈 정치화되기를 바라고 오로지 경제문제에만 관심사를 좁히기를 바랍니다.아예 정치혐오나 경멸을 조장하거나 방치하지요.이런 매커니즘은 지적하지 않고 애매한 고담준론을 일삼으며,정치 냉소를 부추기면서 자신은 마치 고상한 선비인 체하는 컬럼을 쓰는 먹물들은 독재자보다 더 극악한 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투표하지 않는 행위를 마치 자랑인 듯이 떠버리는 인간들이 얼마나 민주주의 발전에 해충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논문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강정인<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문학과 지성사1994)에 수록된 '정치불참의 의미와 성격'이 바로 그것입니다.미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논쟁을 정리한 논문인데 재미있는 것은 정치적 무관심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해서 이를 정치적 초연함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보수적인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반면 정치적 무관심을 민주주의의 실패로 간주하는 이들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삶의 영역이나 정치적 삶의 영역을 개척할 것을 주장합니다.이 논문 외에도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 만연된 법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논문,존 롤스의 시민 불복종에 관한 논문 등 알맹이 있는 글들이 많으니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시장독재와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현정부에서는 오로지 시장의 독재만 남고 절차적 민주주의도 점점 사그라져들고 있는 듯합니다.참여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윤리는 능률과 효율성의 원리만을 떠받드는 이들이 장기를 발휘하는 경제성장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이 자유와 평등에 의해 꽃이 피는 도덕적 범주의 영역이기도 합니다.하지만 정치혐오와 냉소로 무장한? 장삼이사들만 늘어난다면 만사휴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