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가 아닌 유럽 강대국은 토착 자본이 곧 민족자본인 경우입니다.하지만 식민지나 반 식민지인 경우는 토착 자본을 민족자본과 예속자본으로 나누어야 합니다.이런 분류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실천국면에서 필요했습니다.특히 1920년대 중국에서는 토작자본 모두를 민족자본이라고 생각하고 민족해방운동의 동맹세력으로 규정하다가 큰  타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믿었던 토착자본 일부가 외세와 연합하여 민족해방세력을 대학살한 1927년 상해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결국 기존의 등식(모든 토착자본은 민족자본이다)는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오랜동안의 논쟁을 거쳐 1930년대에는 토착자본을 민족자본과 관료매판자본으로 분류하여 부르조아 민족운동의 가능성과 한계가 이론적으로 명확해졌습니다.중국은 완전한 식민지가 아니라 반 식민지라서 제국주의와 매판자본이 활동하는 영역과 민족자본이 활동하는 영역이 분리될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완전 식민지였던 조선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반식민지였던 중국에 비해 조선은 민족자본이 그 정도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었습니다.예를 들어서 평양 메리야스 정도 되는 중소자본이라도 금융기관과 거래할 때는 반드시 식민지 지배구조와 접촉하게 됩니다.단순 자영업이 아니고 어느 정도 사업확장을 목표로 하는 경우는 어떤 의미에서건 예속성을 벗어날 수가 없었지요.그렇다고 완전 식민지에서는 민족자본을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해서도 안 되었습니다.민족해방투쟁의 동맹세력으로서 민족자본이 필요한 실천적 목표로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지요. 

  한상룡 같은 이들은 분명히  예속자본이었습니다.일본 제국주의의 독점경영의 일각으로 편입되어 그것을 발판으로 그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발전했습니다.그런 식으로 식민지 하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을 수 있었으니 일제에 맞설 생각은  나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김성수 일가 같은 경우가 복잡합니다.김 성수 형제는 1910년대에는 광산자본 겸 지주였다가 1차대전 후 경성방직을 세워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관련산업에도 진출합니다.산업자본으로 자립했으므로 민족적이었지만 식민지 체제 내에 있었기 때문에 예속적이기도 한 이중적 존재였지요.김성수 일가를 호남재벌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두드러진 특성은 동아일보를 통한 민족운동에 관여한 점입니다.1920년대엔 민족개량주의 운동으로,그러다가 1930년대에는 거의 예속적인 자세로 변해버립니다.여기서 종속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제국주의가 토착자본의 종속적 발전을 허용하는 것은 단순히 통치유지를 위한 정치적 양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제국주의 본국의 자본주의가 고도화함에 따라 그것과 수직적 분업관계를 가지면서 활동할 수 있는 토착자본의 종속적 발전이 필요하고 따라서 통제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것을 장려하기도 합니다.전면적 종속발전의 길이 안전하게 열려있는 여건이라면 굳이 민족독립-일국자본주의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김성수 형제가 그 예를 보여줍니다.1930년대의 대륙병참 기지화 정책 등으로 종래의 토착자본 중 어느 정도 민족자본의 성격을 띤 자본들도 일국적 자본주의 노선을 단념하고 전쟁체제에 협력하면서 새로운 예속자본이 된 것입니다. 

 김성수 형제의 주요경력을 보면 1940년대 초 전시통제경제하에선 각급 전쟁협력단체의 간부로서 포섭되어 있었지요.이를 두고 그들의 태도가 일제의 강권에 의한 비자발적 행동이라는 식의 해명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그러나 이들이 경제적 기반에서 일본인 자본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면 이같은 해명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김성수 형제 역시 다른 예속자본가들처럼 일본인 자본과 밀착한 은행,회사에 중역진으로 다수 참여하고 있었고 나아가 일본인 자본과 밀착된 은행,회사에 거액의 주식투자도 하고 있었습니다.이렇게 보면 이들은 역시 일본인 자본과 매우 밀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렇게 파헤칠 수 있으니 역시 경제학의  위력이 실감나는 대목입니다.이러한 종속적 발전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해방 이후 어떤 노선을 걸었던가요.민중지향 노선을 걸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김성수 일가로 대표되는 호남재벌 및 한민당이 미군정 의존체제로 방향을 틀었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변혁주체를 세운다는 실천적 목표가 아닌 경우는 민족자본이냐 예속자본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순경제적인 의미에서만 보면 중심부(본국) 총자본에 대하여 주변주(식민지)에서 파트너가 되는 자본이 중심부에서 이식된 것이든,토착사회로부터 새롭게 형성된 것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당연히 민족자본이냐 예속자본이냐도 문제가 되지 않지요.경제성장론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안병직 씨가 민족자본이라는 범주를 인정하지 않게 된 결과로 이런 식의 경제성장론자가 된 것입니다.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김성수 일가를 연구한 카터 에커트 역시 민족자본이냐 예속자본이냐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습니다.당연히 이들에게는 민족해방 투쟁의 변혁주체 문제는 빠져 있습니다. 

  식민지 경제구조 분석은 민족해방 투쟁의 변혁주체라는 실천적인 목표에서 나왔기 때문에 계급분석 등, 보수파에겐 껄끄러운 구석이 많습니다.1980년대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과 주변부 자본주의론 이론가였던 안병직 씨가 전향 이후 변혁주체보다는 순경제적 의미의 경제성장론으로 방향을 틀고 난 뒤 보수파의 환영을 받은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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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2-12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계발적인 페이퍼네요^^ 저도 이쪽 부분에 대해서 아는건 전혀(!) 없지만 관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때는 근현대사 시간이 가장 재밌었거든요ㅋ 쓰신 페이퍼 관련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한권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2 23:52   좋아요 0 | URL
헌책 중에선 <한국자본주의론>(1985까치) 중 장시원 논문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과 정운영 논문 '주변부 자본주의론'
역사비평 2002년 여름호의 안병직 정재정 대담은 안병직 씨의 전향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비로그인 2009-02-1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조금 어렵네요 ㅅㅅ

노이에자이트 2009-02-13 00:12   좋아요 0 | URL
어려우면 김성수 일가에 대한 것을 먼저 읽으시는 것도 한 방법이죠.

[해이] 2009-02-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자본주의론은 작년에 헌책방에서 사놓고 안읽은 책이었는데... 방금 댓글 보고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봤습니다ㅋ

노이에자이트 2009-02-13 00:52   좋아요 0 | URL
오호...열심이시군요.장시원 씨가 안병직 씨와 함께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지요.

바람돌이 2009-02-13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20년전에 머리터지게 공부하던 것들이 새록 새록.... ^^

노이에자이트 2009-02-13 23:27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머리 터지게 공부하고 있는데...
오호...새록새록 정도면 기억이 많이 남아 있군요.

Mephistopheles 2009-02-1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수일가와 동아일보의 관계 그리고 독립군과의 관계는 띨래야 띨수 없는 관계 중에 하나이긴 합니다. 그런데 김성수씨가 지금의 동아일보를 보고 뭐라 그럴까요.그건 좀 궁금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3 23:23   좋아요 0 | URL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그룸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가 해방 정국 뿐 아니라 그 후 한국 정당사 연구에도 방향을 규정하겠지요.
사실상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을 형성하면서 예전 동아일보의 시대는 끝났다고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