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비교사 분야는 학문적으로 파고 들면 온갖 복잡한 문제가 많이 등장하는 분야입니다.보편적인 역사 법칙이라는 게 과연 있느냐 하는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고, 과거사에 나타나는 현상이 겉모습만 비슷하다고 해서 현대사와 바로 비교할 수 있느냐는 쟁점도 말이 많지요.그래도 과거사를 예로 들어서 현대의 귀감으로 삼으려는 저자 거리의 보통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에는 역사만한 대상이 없습니다.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비슷한 인물이나 사건을 옛날 역사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는 그래서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들입니다. 

  한때 노무현 정부를 광해군 시절과 비교하려던 때가 있었습니다.노무현=광해군,친노세력=대북세력, 인조반정=탄핵시도 라는 도식으로 풀이하려던 호사가들의 설명이 꽤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어느 나라나 그렇듯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인상은 깊이 있는 학문적 저작보다는 드라마,영화 등에서 얻거나 대중적인 역사물에서 취하기가 쉽습니다.그렇게 본다면 광해군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폭군 광해군이라 하여 인목대비를 박해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죄를 지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당연히 대북파는 폭군을 방패로 호가호위하던 세력이었다는 해석이 뒤를 잇습니다.그러다가  민족자주적인 해석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일종의 줄타기 외교를 한 것을 높이 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조선 시대에서 가장 자주적인 외교를 한 군주로까지 평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었습니다.이때 자주노선을 주장하여 광해군을 보좌한 정인홍을 부각시키기도 했지요.북인의 시조인 남명 조식의 철학도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양명학까지 취한 유연성이 있으니 역시 햇볕으로 나왔구요.어찌 보면 대북세력은 광해군 때만 유일하게 집권했고 인조반정 이후로는 한번도 우리 역사 전면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에 일종의 동정심까지 겹쳐서 이런 움직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특히 노무현 정부 초기 이라크 파병 논쟁이 일어났을 때 노무현=광해군 으로 해석한 이들은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인 자세를 지혜 있는 중용외교라고 평가한 것까지 끌어들여 정당화하려는 시도까지 했지요.그 뒤 동북아 균형자론 역시 광해군의 자주 외교와 비슷하다는 통속적인 해석도 있었습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보수수구의 왕초라고 낙인 찍는 것도 상당히 유행입니다.인조반정을 보수파의 쿠데타라고 보는 이들은 당연히 그 뒤의 서인-노론 세력들 역시 수구파로 보고 남인이나 소론을 진보파로 보는 시각도 꽤 널리 퍼져 있는데 현대사 해석에 이를 끌어들여 역시 마치 노론을 우리나라 역대 보수정권과 비슷한 세력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하지만 이와는 달리 또다른 시각이 있는데 송시열 및 그 이후의 노론세력과 대립했던 남인 특히 영남 남인들을 실학사상과 연결하여 결국 이 세력을 박정희까지 연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대표적인 작품이 이인화<영원의 제국>인데 이문열 씨가 이 작품의 기본골격에 찬성하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이런 해석은 정조=박정희 의 도식을 내세우며 정조가 못한 일을 박정희가 마무리했다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노론을 비판하면서 현대사의 역대보수정권을 비판하는 논리를 내세우려는 이들도, 박정희를 내세우는 세력도 모두 노론에게 악역을 덮어씌우는 모습은 공통점이니 이 역시 역사의 심술궂은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요. 

  노론에 비판적인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가져온 영조와 노론을 단죄하고, 사도세자를 동정하면서, 혜경궁 홍씨도 노회한 노론 정객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이런 해석을 대중들에게 널리 퍼뜨린 저술가가 이덕일 씨입니다.정조와 정약용을 띄우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동정론도 내세우는 셈이지요.이씨는 <한중록>역시 노론인 친정을 옹호하고 사도세자에 대해선 은근히 죽을 짓을 했다고 암시하는 책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당연히 이덕일 씨와 반대 되는 해석을 하는 이는 혜경궁 홍씨를 당쟁에 희생된 불쌍한 여인이라고 동정하지요.하지만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이들이나 혜경궁 홍씨를 옹호하는 이들 모두 관심을 두지 않은 대상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사도세자가 죽여버린 궁녀나 내시들입니다.요즘 어떤 블로그에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이 이런 살인들 저지른 사도세자가 일종의 잔인한 연쇄살인범 같은 성격파탄자가 아닌가 하는 글이 있더군요.사실 살인당한 사람들 숫자를 든다면야 사도세자는 흉악범 소리를 듣기 알맞습니다.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이 사건을 꾸민 노론을 규탄할 수도 있겠지만 사도세자에게 비명횡사 당한  이들이야말로 가장 억울한 이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인목대비,인현왕후,혜경궁 홍씨는 모두 서인 및 노론 계열입니다.이 중 인목대비와 혜경궁 홍씨는 일방적인 희생자는 아니었다는 해석이 상당히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인목대비도 인조반정 후에는 원한에 사무친 마음을 풀려고 광해군 파 숙청에 적극 지지했고 혜경궁 홍씨에 대해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그런데 인현왕후에 대해서만은 그렇듯 서인격하 남인동정론이 대세인 가운데에서도 아직도 누가 나서서 비난하는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그녀의 라이벌인 장희빈은 남인이 지지했다는 사실이 있는데도...장희빈이 왕비자리에서 물러나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귀했지만 숙종은 이때 이미 마음이 최무수리(나중의 최숙빈)에게 가 있었고 영조의 어머니가 바로 최무수리 아닙니까.이덕일 씨는 최무수리와 영조가 노론과 한통속이라면서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해주지 않으면서도 그 비난을 인현왕후에게까지 돌리지는 않습니다.이래서야 장희빈이 너무 불쌍하지요.그녀는 정말 악독한 여인이기만 했을까요.그녀를 악녀로 보는 대중들의 인상은 신봉승 씨의 시나리오인 <조선왕조 500년>의 영향을 받았지요.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나온 박종화<아름다운 이 조국을>은 장희빈을 상당히 동정적으로 그린 대하장편입니다.

  노론에 대한 비판이 인조반정을 감행한 서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다가 요즘은 아예 서인의 시조인 율곡 이이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이의 십만 양병설에 대해선 그 전부터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이젠 교과서를 통해서 거의 정설이 되었습니다.하지만 유성룡 살리기와 함께 나온 것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날조되었다는 주장이죠.작년엔가 이덕일,이수광 양씨가 쓴 책 등 한참 유성룡에 관한 책이 나왔는데 강경한 보수적인 논객인 전 연세대 사회학 교수 송복 씨도 책을 내 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그는 유성룡을 칭찬하고 이이의 십만 양병설은 노론 가문의 후손인 이병도가 퍼뜨린 근거없는 주장으로 격하했습니다.노론을 비판하면 진보적인 인사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믿음이 아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이로써 명백해졌지요.송복 씨는 뉴라이트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으니까요.각자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전혀 반대파인 이들이 똑같은 인물을 높이 받들기도 하고 격하하기도 하니까 이런 점도 재미있습니다만 전문적인 역사지식이 없는 이들은 주의를 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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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는 기억나질 않지만 중국도 이런 경향이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에 중국인들이 침을 뱉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동북공정 같은 작업들이 진행되면서 전혀 다른 인물로 조명되면서 더이상 침을 뱉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16   좋아요 0 | URL
현대사 해석의 경우 한때 대륙에서 비난의 대상이던 장개석이 대만 독립을 반대한다는 목표로 뭉친 대만 국민당 세력과 대륙의 공산당 세력의 화해 덕에 요즘 다시 복권되는 것도 비슷하지요.

마노아 2009-02-1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덕일씨가 쓴 소설이 있는데 '운부'라는 제목이었어요. 지금은 다른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책에서 인현왕후가 장희빈 못지 않게 표독스러웠다는 표현을 씁니다. 실록의 예를 들어가면서요.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사극은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이랑 전인화 주연의 장희빈이에요. 그때 박순애씨가 너무나 온화한 인현왕후 역을 맡으셨었죠.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07   좋아요 0 | URL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이고 첫 부인이 일찍 죽었는데 성질이 좀 희스테릭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그 여성도 서인가문 출신인데 그 뒤에 인현왕후도 서인가문 출신이라 서인에 질렸겠지요.그래 놓고 역시 또 서인이 지지하는 최무수리와 눈이 맞아 연잉군(영조)를 낳는 걸 보면 참...

후애(厚愛) 2009-02-1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범서님의 소설 조선당쟁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노론과 서론의 당파싸움을 주제로 한 소설인데 읽을수록 조선시대의 역사를 알 것 같았지요. 한데 당파싸움 때문에 무고한 선비들이 누명을 쓰고 목숨을 많이 잃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당파싸움으로 인해 왕들도 편한 날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숨이 나오더군요. 정말이지 권력이 무섭긴 무섭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09   좋아요 0 | URL
최범서의 그 소설이 재밌지요? 작가가 어느 당파에 호의적인가에 따라서 이야기 전개가 결정됩니다.특히 정여립 사건 같은 경우 서인에 호의적인 사림은 정여립을 아주 못된 인간으로 그리지요.반대인 경우는 정철을 아주 못된 인간으로 그리구요.

드팀전 2009-02-1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크로체가 말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라는 말의 역설적 버전을 보는 듯 합니다. 어떤 종류의 개혁인가에 앞서모든 변화에 '개혁'의 외피를 씌우고자 하는 세력들이 늘 존재하니까요. 결국 역사적 대상들에서 자기에게만 필요한 부분을 절체하고 궁극적으로 그 집단이 원하는 어떤 이미지의 보정을 받으려는 셈이지요. 이런 작업들이야말로 이데올로기 작업의 전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정희가 이순신을 영웅에서 성웅으로 만들었듯이 정조라는 캐릭터 역시 그런 굴절들을 겪고 있는 듯 합니다. 거기에는 그 역도 존재하니까 송시열의 나라도 그런 설명이 가능하겠지요.(제가 제대로 읽었나요?) 역사를 현재에 투사하는 방식은 대중적인 호소력과 별도로 신중하게 접근해야하는 것이 기본일텐데, 의외로 어떤 흥겨운 해석 하나에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어떨 때는 TV드라마를 보고도 그러니 말입니다. 신윤복이 여자가 아니라는 것가지고 한참 이야기하기도 해야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3:36   좋아요 0 | URL
크로체나 카의 현대사론이 특정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역사해석을 자의적으로 해도 좋다는 면죄부로 악용되는 사례가 많지요.사료를 통해서 사실에 파고 드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해석하는 흐름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최근의 노론 격하운동에도 전혀 다른 의도를 품는 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경우도 있구요.정조 독살설도 근대화 이념으로 정조를 포장하려다 보니 엉성한 추리소설이 되어 버렸지요.
신윤복 하면 김민선이나 문근영 두 누나가 생각나지요...

ㅇㅇ 2009-02-17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잠깐 끼어들자면 대비전을 자전慈殿이라고 지칭하는 표현은 전혀 오만 불손한 것이 아닌데요; 정식으로 "대왕대비 전하"라고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문정왕후'는 시호이니 생전에 그런 칭호가 있었을리 없음은 물론이고요.
/장희빈을 악녀로 묘사한 '픽션'이라면 '인현왕후전'이 최초이죠. 이 책이 정조때 쓰여졌다고 하는데, 행간을 살펴보면 경종을 다소 폄하하고 영조를 내세우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장희빈이 민씨를 저주하려고 해골가루 섞인 옷을 바쳤을 때 옆에서 세자가 권유해서 그 옷이 중궁전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저주가 발동했다는 일화가 삽입돼 있죠. 이걸 세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국 중궁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투로 서술하고 있는 것. 장희빈이 죽고 세자가 숙종임금에게 세자위를 내놓겠다고 먼저 말했다가 반려당했는데 부왕의 처사를 따르기는 했으나 "평생 자신과 무관한 자리로 알았다"라고 쓴 부분이 있는 것. 인현왕후가 어린 영조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었으며, 영조도 추후 은혜에 보답하는 행동을 취하는 일화를 삽입한 것, 기타 등등. 분량은 많지 않지만 인현왕후전의 저자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죠.(혹은 이 자체가 소설의 저술 목적일 수도 있고요)
/근데 인현왕후전하니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네요. 인현왕후전에서 보면 민씨가 환궁했을 때 자꾸만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자칭하는데요, 이걸 두고 현대 사극에서는 그녀가 매우 겸손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해석을 많이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녀의 이미지는 여기서 온 것일 수도 있죠. 그런데 실록과 대조해 보니 인현왕후는 '폐위된 왕비'의 자격으로 환궁했더군요. 사실 동양에서 한때 왕비의 자리에 있던 사람을 폐위하더라도 그녀의 경우처럼 맨몸으로 내쫓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개 강등해서 궁호 정도 주고 '궁 안에' 감금하는 게 상식적인 조치거든요.(소설 보면 숙종이 박태보를 고문할 때 민씨를 일컫어 "사악하고 악독한 '계집'"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죠; 이게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일국의 국왕으로서 품위가...) 하여튼 그래서 이런 처사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그게 반영되어서 일단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인 거죠. 그녀는 아마도 서궁 정도로 불리게 될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죄인을 자칭할 수밖에요.. 이때 세자가 인사하러 오자 민씨가 일어나고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숙종이 일어나지 말라고 막고 그녀를 왕비처럼 대우해 주더니 금세 장씨더러 중궁전인 대조전을 비우라고 명령하고, 이튿날인가 복위 교지가 나오고..뭐, 그런 식이더군요; 이 맥락이 빠지니까 그녀가 마냥 겸손하게만 보이는 것이겠죠. 소설에서 보면 장씨가 '발악을 하면서' 민씨의 인사를 받겠다고 뻗대는 걸 매우 혐오스럽게 묘사해 놨는데요, 발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 자체는 실제 일어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7 16:10   좋아요 0 | URL
0님,그래서 비교연구에서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가 늘 발목을 잡는다고 봅니다.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느냐가 문제인데 결국 역사학도 특정이론의 적용이 필요하고 그럴 땐 불가피하게 비교의 문제와 부딪힌다고 봅니다.
결국 역사서술도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문제가 최종적으로는 고려대상이 되지요.베네딕트 앤더슨이 페리 앤더슨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 아하...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학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인 모양입니다.과거는 낯선나라다 는 분량 때문에 망설이고 있습니다.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00님.인현왕후전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습니다.역시 인터넷은 이런 식으로 좋은 정보를 주고 받으니 유용하군요.요 몇 년전 김혜수 주연의 장희빈은 장희빈을 조금 긍정적으로 그린 것 같았습니다.최무수리 역의 박예진도 기억나는군요.사실 숙종은 워낙 장희빈의 유명세에 눌려서인지 그의 정책은 요즘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고 여하튼 억울하기도 할 겁니다.사실 당쟁은 그 뒤 영조때도 상당히 피비린내가 날 정도였는데 유독 숙종 때만 당쟁이 심한 걸로 아는 대중들이 많으니까요.종종 오셔서 좋은 정보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Mephistopheles 2009-02-1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그때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과 이야기들의 진실은 존재할 터인데...시간이 흘러 그 역사를 판단하고 기술하는 입장에선 관찰자의 입김을 무시 못하나 봅니다. 그리고 역사는 이긴자들의 기록물이라는 말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한가지 사건에 판이하게 다른 견해...재미있고 우습죠. 역사의 기술과 기록 이전에 어떤 저의인가를 먼저 판단하고 읽어나가야 하는 것이 중요할꺼라 보여집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7 15:09   좋아요 0 | URL
역사 이전에 역사가의 성향을 파악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요.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