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이 9일 공개한 정조-심환지 간에 오고간 비밀서신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할 것 같습니다.이 서신을 발굴한 학자들은 정조와 벽파가 대립관계만은 아니었으며 항간에 있던 정조 독살설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이에 대해 이덕일 씨는 상당히 격한 언사로 이들을 비난했습니다.독살설을 주장하고 있는 이씨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다소 그 표현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서신을 발굴한 학자들이 "심환지가 그동안의 통념과는 달리 정조의 측근이었으며 이로써 정조가 벽파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은 잦아들 것이다"는 주장을 한 데 대해 "그렇다면 시저와 박정희는 측근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말이냐."고 말했습니다.그렇지만 이덕일 씨는 그동안 벽파와 정조가 대립관계였으며 그래서 정조독살에 벽파 및  정순왕후가 배후라는 주장을 해왔습니다.그런데 벽파의 좌장 격인 심화지가 정조의 측근이라는 설이 대두되자 이제는 측근이라고 살해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고 하는데...글쎄요. 

 이덕일 씨는 정조 독살설을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물론 그런 주장을 할 자유가 있습니다.그에 대한 증거문헌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비판엔 대응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 씨는 그동안 했던 주장-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노론 벽파에 대해 불리한 말을 못하게 압력을 넣는다.노론은 일제시대 친일 파가 많다-을 이번에도 하면서, 정조 비밀서신을 공개한 이들을 마치 친일파라는 듯이 비난했습니다.그러면서 독살설을 담은 이인화의 소설<영원한 제국>에 대하여 친근감을 표시했습니다.이덕일 씨는 신동아 1998년 7월호에 "이인좌의 난 이후 소외된 영남 남인들을 정조는 그 권력기반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이인화 씨 역시 자신이 영남 남인의 후예임을 늘 자랑스레 여기고 있습니다.하지만 이인화 씨가 친일파 청산에 대해 찬성한다는 얘기는 못들어 봤습니다.정조 독살설을 지지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는 친일이냐 반일이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정조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독살설은 주장하지 않는 학자도 있습니다.정옥자 씨가 그렇지요.그녀는 영정조를 조선사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높이 평가하고 정조 때 이루어진 학술편찬 사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그런데 정조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남북한 학계의 공통점입니다.저는 북한에서 나온 역사서도 몇 권 가지고 있는데 특히 조선후기 영정조 시기는 우리나라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실학이 융성한 시기라고 호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경제사적 시각을 우리보다 더 많이 반영하고, 특정 군주에 대한 호의를 삼가는 사회주의권의 특징은  있습니다만 거의 비슷한 서술이지요.우리나라 학계는 노론이 주류이고 그들이 자기들 입맛에 안맞는 논문이나 저술이 못나오게 압력을 넣는다는 이덕일 씨의 주장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보수파 중에서는 조선일보 기자인 이한우 씨가 그 대표입니다.그는 조선 군주 평전을 계속 내고 있는데 정조 평전에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 죽음에 관련한 이들에 가한 숙청에 대해 "사적인 원한을 너무 드러냈다"고 평했고 정조가 학문편찬 사업을 한 데 대해서도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과시한 나머지 권력을 이용해 이념을 퍼뜨리려 했다"면서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청산 등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조선일보사 기자가 노무현 정권을 거론할 때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 힘들지요.또 한명의 정조 비판자는 한겨레 신문에 글을 연재했던 강명관 씨입니다.그는 정조가 보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이념주의자이며 특히 문체반정 같은 것은 사상탄압에 가깝다고 평가합니다.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조선일보 기자인 이한우 씨와 한겨레에 기고하는 강명관 씨가 정치적인 입장에서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정조를 비판하든 차양하든 그것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 나눌 근거가 없다는 게 여기서 드러나지 않습니까.더군다나 독살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노론 옹호자라거나  친일이라거나 하고 주장할 근거는 더더욱 없지요. 

학술논쟁이 격해져서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예는 외국에도 있었습니다.독일에서도 나치 청산 문제를 놓고 좌우 파가 논쟁한 1980년대 중반 대논쟁에는 온갖 욕설이 난무했지요.하지만 이번 정조 비밀서신 문제는 해방정국의 지도자에 대한 문제도 아닌데 왜 친일파다 아니다 하는 말이 나오고 그러는지 안타깝습니다.물론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싸움구경이 재밌긴 합니다만 좀 더 이성적이고 생산적인 논쟁이 오고 갔으면 좋겠습니다.참고로 말씀 드리면 이인화 <영원한 제국>을 둘러싼 논쟁은 상당히 신사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영원한 제국 뒤편에 논쟁의 시말과 논쟁에 참여한 이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하지만 이번 비밀서신을 둘러싼 논쟁은 벌써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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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2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영원한 제국>을 입이 마르도록 추천했던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도 독살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죠. 이번에 서신왕래 기사를 보고는 달리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 친구는 그것보다 정조가 욕설을 했던 것에 더 관심을 두더라구요. 왕의 체통같은 걸 중시하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4:43   좋아요 0 | URL
영원한 제국은 소설로서는 잘 된 작품이라는 평가가 많아요.이인화 씨가 이 책 쓰기 전 수많은 유명 추리소설을 독파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작품의 후속이 박정희를 모델로 한 <인간의 길>이죠.
누군가를 숭배하면 그도 한 인간임을 망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당장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나요.

비로그인 2009-02-23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시사매거진 2580에서 정조독살설을 다루었는데 본페이퍼에서 다뤄진 부분이 많이 나오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3 21:53   좋아요 0 | URL
그 문제 가지고 나오는 쟁점이 거의 뻔하니까요.그 프로그램에선 독살설에 큰 타격을 입힐 자료가 나왔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으니 이인화,이덕일 씨가 좀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