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로 본 세계사 - 문화 교류가 빚어낸 인류의 도자 문화사 생각하는 힘 : 세계사컬렉션 18
황윤 지음 / 살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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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황윤의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이라는 책을 읽었다. 큰 기대 없이, 언택트 시대에 가상으로 경주 여행한 셈 치려고 구입한 책이었는데, 생각보다 책의 내용이 좋고 무엇보다 글에서 묻어나는 저자의 식견이 예사롭지 않아서 책을 다 읽자마자 저자의 다른 책들을 전부 구입했다. 이 책도 그중 하나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도자기를 통해 세계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도자기가 만들어진 건 중국의 고대 왕국 상나라 시대(기원전 1600~기원전 1046)로 추측된다. 당시 제작품을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표면이 균질하지 못하고 만듦새가 조잡해 보인다. 이때는 흙으로 만든 자기보다 청동기를 선호했다. 그래서 초기 단계의 도자기를 보면 형태나 색채가 청동기 시대의 제기와 비슷해 보인다. 중국의 도자기는 송나라 때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은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판인데, 이 가운데 세 개가 송나라 때 나온 것일 정도로 송나라 때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문화 부흥기였다. 송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여요'다. 


송나라 사대부들의 이상향을 표현했다는 여요는, 현재 완전한 형태로 남아서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아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다. '비색'으로 유명한 고려청자 역시 실은 송나라의 여요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고려청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반도에서는 도자기 '원조국'인 중국이 수입할 만큼 높은 수준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다 조선 후기부터 일본에 추월 당했는데, 단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갔기 때문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전부터 상류층을 중심으로 도자기를 즐기는 문화가 발달해 있었고(ex. 차 문화),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 열강들과 무역하며 도자기를 주요 수출 상품으로 정하고 개발한 덕분이다. 


조선백자가 한반도에서만 유행한 양식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당시 세계적인 트렌드는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백자가 아니라 화려하고 이국적인 느낌의 청화백자였다. 이는 당시 명, 청 왕조가 서아시아와 교류하며 서양풍의 화려한 양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은 '소중화' 사상에 입각해 새로 나타난 양식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며, 과거 송나라 시대에 유행한 여요를 본뜬 백자를 만들었다. 이 밖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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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지음, 이영미 옮김 / 엘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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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나라에 천재가 산다. 다시 읽고 싶고 더 읽고 싶다." (정세랑) 추천사를 읽고 책을 사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 책은 정세랑 작가님이 쓰신 추천사를 읽고 책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엔 정세랑 작가님도 천재 같은데, 천재가 알아보고 인정한 천재라니. 대체 어떻길래? 정말일까? 설마 아니겠어? 등등의 복잡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이 소설집... 아아, 정말 좋았다. "옆 나라에 천재가 산다."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작가 한나 렌은 교토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교토대학 SF 연구회에서 활동했고, 2010년 대학 재학 중에 <먼 저주>로 제17회 일본호러소설대상 단편소설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소설집 <소녀금구>를 출간하며 데뷔했다. 이 책은 그 후 9년 만에 발표한 첫 SF 소설집이다. 작가는 이 책의 5쇄까지의 인세를 '교토 애니메이션'에 기부했다. 책날개에 따르면 "자신의 상상력의 토대가 되어준 그곳이 2019년 7월, 방화라는 불행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작품 곳곳에서 쿄애니의 감성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표제작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여러 개의 게임을 동시에 플레이하듯이 수많은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세계를 그린다. 하나의 현실에서 일이 잘 안 풀리면 '매끄럽게' 다른 현실로 넘어가면 그만인 세계. 그런 세계에서 나 혼자만 그런 능력을 부릴 수 없게 된다면 어떨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이어지는 <제로연대의 임계점>,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 <홀리 아이언 메이든>, <싱귤래리티 소비에트>,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 등도 SF적 상상력에 기반해 인간의 본성과 관계의 가능성을 묻는 좋은 작품들이다. 정세랑 작가의 말대로 "다시 읽고 싶고 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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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친절한 중국상식 - 62가지 질문으로 들여다본 중국인의 뇌 구조
이벌찬.오로라 지음 / 미래의창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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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은 중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이후로 십 년 넘게 손을 놓고 있었는데, 지난여름 중국 드라마 <진정령>을 보고 중국 대중문화에 관심이 생겨서 중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중국어 공부와 함께, 중국 관련 책들도 꾸준히 찾아 읽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 책이다. 이 책은 조선일보에서 중국 관련 기사를 쓰는 이벌찬, 오로라 기자가 공저했다. 이벌찬 기자는 베이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고, 오로라 기자는 7살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3년간 중국에서 생활했다. 


이 책은 현재의 중국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를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이렇게 다섯 개의 테마로 정리하고, 각각의 테마에 해당하는 최신 뉴스를 소개한다. 미중 무역 갈등이나 중국의 사드 보복, 동북공정처럼 한국의 언론 보도를 통해 심심치 않게 접한 내용도 있고, '할아버지는 왜 자꾸 중국을 중공이라 부를까?', '중국 남자는 왜 자상할까?'처럼 언론 보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누구나 일상에서 가져봤을 법한 중국 관련 의문에 답하는 내용도 있다. 주목할 만한 중국의 문화 현상으로는 왕훙(왕홍) 열풍과 애국주의 영화, 사회주의 래퍼, 먹방 금지, <동물의 숲> 금지 등이 나온다. 몰랐던 내용이 많아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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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is 2020-12-22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 돌베개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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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그림책을 읽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좋은 책들을 어른들도 읽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에세이집 <나의 작은 화판>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저자는 1995년 첫 그림책 <만희네 집>을 출간하며 데뷔해 현재까지 10권의 그림책을 출간했다. 지은 책으로는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 <만희네 글자벌레>, <시리동동 거미동동>, <고양이는 나만 따라해>, <일과 도구>, <꽃할머니>, <피카이아>, <나무 도장>, <씩스틴>이 있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미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여자가 그림을 그리면 팔자가 세진다."라며 반대하는 바람에 미대에 못 가고 식품영양학과에 진학했다. 그래도 여전히 미술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서, 몇 개월간 입시 미술을 공부해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미술을 통한 사회참여 운동을 해왔다. 그러다 결혼 후 생계를 위해 일거리를 찾다가 지인의 소개로 그림책 작업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그림책 작가로 산 지 올해로 25년째다. 


책에는 지난 25년 동안 저자가 한 권 한 권 만들어 낸 그림책 작업 과정과 일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림책 작가 중에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원고에 그림만 그리는 작가도 더러 있는데, 저자는 자신이 직접 소재를 찾아서 스토리를 만들고 그림책으로 완성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려야 한다는 이중의 부담감에 시달렸고, 한 권 작업하는 데 몇 년이 소요되기도 했다. 그만큼 책이 완성되면 인생의 한고비를 넘은 듯 후련했고, 성공의 기쁨도 실패의 아픔도 온전히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밑거름으로 쓸 수 있었다. 


초기에는 자신의 일상이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소재를 찾았다면, 점점 역사나 사회 문제, 환경 문제 같은 큰 주제로 소재의 범위를 넓혀간 것도 눈에 띈다. 특히 일본군 종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꽃할머니>, 제주 4.3사건을 다룬 <나무 도장>,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씩스틴> 같은 작품들은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깊이 있게 다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책들과 함께, 저자가 직접 물리학, 진화학 공부를 하면서 느낀 생명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한 책 <피카이아>도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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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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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인생을 닮았고, 인생은 하루를 닮았다. 어쩌면 한 작가의 작품 세계도 그럴지 모른다. 하나의 작품이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닮았고, 그의 작품 세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을 닮았을지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단편집 <일인칭 단수>가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 전체를 빠르게 훑어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미성숙한 사랑과 성장통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일인칭 단수>에도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의 젊은 남성이 어떤 여성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예전과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여러 편 나온다. 대학생인 '나'가 단가 짓기가 취미인 여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돌베개에>, 재수생인 '나'가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녔던 여자아이로부터 연주회 초대장을 받고 혼자서 낯선 동네에 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크림>, 고등학생인 '나'가 학교에서 비틀스의 팬으로 보이는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위드 더 비틀스> 등이 그렇다. 세 작품 모두 평범한 청춘 로맨스 소설처럼 시작하지만, 도중에 주인공이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하는 - 혹은 성숙의 초입을 넘어서는 - 이야기라는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을 연상케 한다. <위드 더 비틀스>는 어른이 된 '나'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도 닮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는 주인공이 현실인지 허구인지 분간하기 힘든 알쏭달쏭한 상황에 놓이는 이야기도 많다. <일인칭 단수>에도 그런 이야기가 여러 편 있다. 대학생 때 쓴, 알토색소폰의 대부 찰리 파커가 요절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쓴 음반평으로 인해 몇십 년 후 기묘한 일을 겪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한 남자가 온천 마을의 허름한 료칸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원숭이를 만나는 이야기인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등이 그렇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말하는 원숭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동화나 우화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특정한 장소(시나가와)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처럼 현실의 무언가를 은유한 소설처럼도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6년 전에 발표한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렸어도 어울렸을 것 같은 작품들도 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남자가 얼굴은 못생겼지만 슈만의 <사육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한 여자와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사육제>,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옷을 입고 전에는 가본 적 없는 바에 가서 혼자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던 남자가 처음 본 여자에게 무례한 말을 들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일인칭 단수> 등이 그렇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소설(fiction)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실제로 야구 팬이자 야쿠르트 스왈로스 팬인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실제 삶과 작품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와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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