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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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인생을 닮았고, 인생은 하루를 닮았다. 어쩌면 한 작가의 작품 세계도 그럴지 모른다. 하나의 작품이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닮았고, 그의 작품 세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을 닮았을지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단편집 <일인칭 단수>가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 전체를 빠르게 훑어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미성숙한 사랑과 성장통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일인칭 단수>에도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의 젊은 남성이 어떤 여성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예전과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여러 편 나온다. 대학생인 '나'가 단가 짓기가 취미인 여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돌베개에>, 재수생인 '나'가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녔던 여자아이로부터 연주회 초대장을 받고 혼자서 낯선 동네에 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크림>, 고등학생인 '나'가 학교에서 비틀스의 팬으로 보이는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위드 더 비틀스> 등이 그렇다. 세 작품 모두 평범한 청춘 로맨스 소설처럼 시작하지만, 도중에 주인공이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하는 - 혹은 성숙의 초입을 넘어서는 - 이야기라는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을 연상케 한다. <위드 더 비틀스>는 어른이 된 '나'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도 닮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는 주인공이 현실인지 허구인지 분간하기 힘든 알쏭달쏭한 상황에 놓이는 이야기도 많다. <일인칭 단수>에도 그런 이야기가 여러 편 있다. 대학생 때 쓴, 알토색소폰의 대부 찰리 파커가 요절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쓴 음반평으로 인해 몇십 년 후 기묘한 일을 겪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한 남자가 온천 마을의 허름한 료칸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원숭이를 만나는 이야기인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등이 그렇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말하는 원숭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동화나 우화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특정한 장소(시나가와)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처럼 현실의 무언가를 은유한 소설처럼도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6년 전에 발표한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렸어도 어울렸을 것 같은 작품들도 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남자가 얼굴은 못생겼지만 슈만의 <사육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한 여자와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사육제>,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옷을 입고 전에는 가본 적 없는 바에 가서 혼자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던 남자가 처음 본 여자에게 무례한 말을 들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일인칭 단수> 등이 그렇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소설(fiction)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실제로 야구 팬이자 야쿠르트 스왈로스 팬인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실제 삶과 작품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와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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