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닉 페어웰 지음, 김용재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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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업무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챙겨야 할 부분도 많고, 계획을 세우고 새로 진행해야 하는 일도 많고 해서 너무 몰입해 읽어야 하는 무거운 책들은 좀 미루고 있다. 이런 저런 일들로 피곤해진 나의 머리를 쉬게 하기 위해 가벼운 작품들을 주로 읽고 있는데, 그래서 꺼내든 책이 바로 이 책, 닉 페어웰의 <GO>였다. 시간은 밤 열 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고, 하루 종일 누적된 피로와 지친 머리로 인해 나는 살짝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머리 쓰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집어 든 것이었으므로, 책을 읽기에는 가장 나쁜 자세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히고, 발은 반쯤 다른 의자에 걸쳐 올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튼 자세 말이다. 책을 대하는 가장 성의 없는 자세로, 그렇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특별한 직업도 없고, 치열하게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29살 젊은이의 독백이 정돈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졌고, 나는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문제의 페이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어쩌자고 이런 장면이, 이런 작품에 등장한단 말인가. 하면서 나도 모르게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바로 고쳐 잡기 시작했다.

 

문제의 그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 '독서와 작문 교실'에서 시 외곽에 사는 아이들에게 독서를 가르치기 시작한 두 번째 시간에, 그는 아이들에게 영화를 하나 보여준다.

 

"이건 SF영화야. 영화 제목은 <화씨 451>"

나는 다시 트뤼포에 의지한다. "이 미래의 소방수들은 불을 끄지 않아. 책을 불태우지. 왜냐하면 책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고 여기거든. 화씨가 무엇인지는 아니?.... 영화 제목 화씨 451은 책이 타기 시작하는 온도야."

 

무슨 영화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사랑영화'라고 대답하는 그 대목을 보면서, 나는 그가 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한 순간 알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나를 감..시켰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으며, 그의 삶을 이..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프랑스와 트뤼포 감독의 <화씨 451>이라는 영화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동명의 SF소설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트뤼포 감독이 1963년에 만든 영화로 책이 금지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책을 읽는 것이 금지된 미래, 그러니까 책을 보려면 몰래 벽에 숨겨서 봐야 하고,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방화수가 출동해 책들을 모두 불에 태워버리는 그런 시대이다. 원작에 비해 영화가 엄청나게 잘 만들어졌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왠지 짠하고, 울컥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참 오래 남았던 작품이었다. <GO>에서도 언급되는 시람 들이 좋아하는 책을 외우면서 호수 주변을 걸어 다니는 장면뿐아니라, 수많은 책들이 발각되어 거실에 잔뜩 쌓여 불태워지는 것을 보다 결국 그 불꽃 속으로 몸을 던졌던 노부인도 기억에 오래 남아 있던 영화의 장면이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책들을 소각시키는 방화수들에게 "이 책들은 살아 있어. 내게 말을 한다고."라고 말하던 노부인의 눈빛을 나는 너무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그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작품으로 남아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라고 해석하는 <GO>의 주인공이 그 순간부터 다르게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너무도 대충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살짝 미안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전형적인 루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별 생각 없는 방황하는 젊은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문득 든 것이다.

 

"이게 바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야. 이걸 위해 싸워야 하는 거야. 인생의 모든 순간마다 정말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여러분을 숨 쉬게 만들고, 쓰고 싶게 만드는 걸 기억하는 거야. 무언가를 쓰려고 할 때는 불을 가져야 해.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거기에 삶이 거칠게 섞여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해. 자신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을 느껴야 해. 여러분 주위의 모든 사물을 불태울 수 있어야 해. 그게 바로 우리의 생존에 관한 것이거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아이들이 하나 둘씩 교실을 나가면서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 이 작품을 '사랑 영화'라고 소개하는 선생님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이 자신을 이해할 거라고, 앞으로 책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거라고 확신한다. 잠깐씩 이렇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외에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고,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바에서 디제잉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젊은이가 이런 가치관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나는 놀라움과 희망을 보았다. 그는 극 중에서 매일 같이 소설을 쓴다. 밤을 세워 수십 페이지를 쓰기도 하고, 자신이 대체 뭘 쓰는지, 출판이 될 수나 있을지 기약도 없고, 방향도 분명하지 않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매일, 꾸준히 하는 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대한 내 유일한 충고.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 글자. 넌 이미 알고 있지, 모든 게 엉망일 때 두 글자로 된 이 단어를 기억해. GO. 글을 써, 그림도 그려, 사진 찍어, 춤춰, 연기해, 노래해. 그렇지만 모든 게, 모든 게 잘못될 때는 두 글자로 된 단어 하나만 기억해. GO. , 앞으로 가. 한 번 해보는 거야.

 

‘GO’라는 심플하고도, 직설적인 제목의 의미가 바로 이런 거였다. 포기라는 건 삶에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나쁜 형태의 죽음이니까. 현재에 안주하고, 실패에 낙담하는 건 쉽지만,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은 건 어려운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일단 한번 부딪혀보자.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멈춰 있는 것보다는 앞으로 가보는 게 진정한 삶을 누리는 거라는 걸 이 작품은 알려준다. 가장 평범하고, 쉬운 방식으로. 삶이란 누구에게나 좋은 순간도 있고, 나쁜 순간도 주어진다. 최악의 상황만 계속 이어지더라도, 두 글자로 된 단어 하나만 떠올려보자.GO. , 앞으로 가.” 까짓 것 그냥 해보는 거다. 어차피 한번뿐인 내 인생 아닌가.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순간은 바로 내가 앞으로 나아갈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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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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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여러 개의 자아를 갖고 있지. 저쪽에서는 저런 나, 이쪽에서는 이런 나, 어제는 저런 나, 오늘은 이런 나. 누구랑 있을 때는 이렇고, 또 다른 누구랑 있을 때는 저렇고, 도저히 수습이 안 돼! 대학 친구와 고등학교 친구를 우연히 한꺼번에 마주치면 왠지 좀 어색하지 않나? 그야 각각 다른 캐릭터니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연애도 마찬가지야!

 

여기, 너무도 다른 두 형제가 있다. 평범한 회사원인 동생 료스케는 결혼해서 세 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는데 반해, 엘리트 공무원인 형 다카시는 각기 다른 개성의 두 여자와 동시에 연애를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미술대회 입상, 육상대회 우승, 명문대 합격 등 하는 일마다 뛰어났던 다카시 덕분에 어릴 때부터 항상 다카시의 동생으로 불렸던 료스케는 형에 대한 열등감을 남모르게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개인사이트에 일기를 통해 아내도 모르게 자신의 그런 열등감이나 고민, 세상에 대한 불만 같은 것들을 웹사이트에 게재한다. 우연히 남편의 컴퓨터를 보게 된 아내 요시에는 항상 형을 자랑스러워하던 남편이었으므로, 정체 모를 거부감과 의아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다카시에게 남편의 홈페이지와 일기에 쓰인 내용에 대해 상담을 한다. 한편, 이야기의 다른 축에선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중학생 도모야가 살인에 대한 망상을 키우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 구가 아유미의 알몸 사진을 획득한 걸로 그녀를 협박(?)하고, 그걸 알아챈 그녀의 남자친구와 일행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도모야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지나치게 감싸는 엄마의 독특한 교육방식은 때로는 가혹하게 손찌검을 하기도 하는 등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점이 분명 많다. 그리고 도모야도 개인 웹사이트에 이에 관련된 일기를 기재하고, 그걸 본 누군가가 만나자고 연락이 온다. 도모야는 그렇게 악마를 만나게 된다.

 

다카시가 여자 친구인 지즈에게 하는 말처럼, 누구나 여러 개의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즉, 우리가 이중인격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면과 저런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표출되는 부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에너지가 넘친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에게 '조용하고 내성적이다'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나를 '리더십이고 활발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다른 누군가는 내가 '그룹에서 나서지 않고 조용히 도움을 주는 사람'인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두가 ''라는 하나의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카시는 남편이 있는 지즈를 만나는 것이 아무렇지 않고,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나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은 인간이 있을 리 없으니까, 같은 부분이 있는 사람끼리 유대를 맺고, 또 나머지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이렇듯 다카시와 료스케는 가치관부터,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다사시는 똑똑하고 잘나가는 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카시는 동생과 그의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여겨진다).

 

사형, 혹은 전쟁- 문제는 단 하나. 살인이 나 자신에게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야. 그게 바로 평화라는 것의 기만적인 정체야! 평화가 평화로 느껴지려면 평화롭지 않은 현실이 불가결하지. 어디에 얼룩을 찍을 것인가? 어딘가 먼 곳,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서 살인이 일어난다면 기가 막히게 이상적이지!

...자기 몸에 위험이 닥치지 않는 한.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어.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의 평화는 인간적인 의미에서 고귀하다. -그게 본심이야.

 

'악마'라는 인간이 늘어놓는 장광설은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듯하게 이해가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버스에 사람들이 타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난데없이 칼을 빼 들고 사람들을 위협을 한다면 어떨까. <어쨌거나 그 남자가 빨리 버스에서 내려주길 간절히 바라겠지. 밖에서는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어>라고 그는 말을 한다. 사실 이게 버스 안에 있던 모두의 솔직한 바램일 것이다. 밖에서 그 남자가 누군가를 해친다면, 나는 버스 안에 있었던 덕분에 살았다고,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테니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꼭 이기적이어서, 자기 밖에 모르는 존재라서가 아니라도 말이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에 갑자기 끼어든 살의는 무력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테고, 서글프지만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이란 이런 거니까 말이다. 물론 세계의 질서를 흐트리기 위한 악마의 살인을 동시다발적인 익명으로 활성화시키겠다는 의견은 과대망상 같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부분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맞는 말이다. <평화로운 대낮 횡단보도에서 넌 다른 사람들처럼 신호를 기다려. 빨간 불이지만 차는 없어. 그때 나중에 온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기 시작해. 그건 뭐지? 그는 단순히 길을 건넌 게 아니야. 거기 있는 모두를 모욕하나 거라고! 남들이 참가하고 있는 데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야> 한 사람이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면, 반드시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횡단보도에 대한 이야기는 놀라우리만치 현실성이 있다. 모두가 지켜야 하는 질서, 세계를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규칙이라는 것은 이토록 연약한 것이다. 한 순간 어긋나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악마는 바로 그런 점을 노린다.

 

오사카 출장을 가게된 료스케가 다카시를 만나기로 하고, 요시에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잘해서 문제점을 풀어나갈 거라고 기대한다. 다카시는 동생을 만나고 다음 날, 차를 빌려 지즈와 쿄토에서 밀월 여행을 즐긴다. 그리고 뉴스에서 전대미문의 토막살인사건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온다. 유체가 든 비닐봉지가 발견되고, 전국 각지에서 매스컴으로 범행 성명문이 보내지기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요시에게서 연락이 온다. 오사카에 출장을 간뒤로 료스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그이가 마지막으로 만난게 다카시 아니냐고. 그는 자신을 만나고 나서 홈페이지를 통해 알게된 닉네임 666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료스케가 만났다고 말하지만, 요시에는 666이 다카시 아니었냐며 그를 미심쩍어한다. 이후 이후 유체의 신원이 료스케로 판명되고, 요시에의 발언에 의해 다카시가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된다. 처음부터 실제 범인이 악마라고 칭해지는 사이코패스라는 걸 보여주지만, 정작 진행되는 스토리는 형인 다카시를 의심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악은 악일 뿐이야. -제아무리 그럴듯한 소리를 늘어놔도 그건 변하지 않아. 죄를 저지른 인간도 속으로는 모두 그렇게 생각해. 처음부터 근성이 썩어빠진 인간은 없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싶다. 그런데 계기가 없다. 아까처럼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바람에 화가 나서. 실은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나중에야 털어놓는 사람도 있어. 감옥 가는 게 무섭다. 그것도 본심이지. 솔직한 심정이야. 당신은 아닐지 모르지만..

 

2권의 중반 이후까지 형사들은 다카시가 범인일거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요시에와 그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증은 없지만 조사하면 할수록 심증만 깊어지고, 정작 다카시는 자백을 하지 않으니 그에게서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잘못된 심증이 얼마나 무섭게 수사에서 적용되는 요소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료스케의 일기와 요시에의 증언에 의해 드러나는 사실은, 피해자가 형에게 자격지심과 강한 원망을 품고 있다고 하고, 게다가 형이 피해자의 아내와 불륜관계였다는 소문까지 흘러나온다. 다카시의 주변에 대해 조사를 하면, 공부를 잘했으나 되바라져서 어른을 얕보는 면이 있었다는 담임의 신랄한 평가가 있는가 하면, 초중학교 동창생과 이웃주민은 착하고, 인기가 있고, 리더였으며, 인사성이 밝았다고 정반대 증언을 한다. 그러니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왠지 수상쩍은' 느낌이 들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물증은 없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나중엔 경찰의 목적이 '다카시를 자백시키는 것'에 있는지,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는데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수사는 다카시를 범인으로 몰고 가는데 집중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말로 진지하게, 누가 봐도 믿을 만한 얼굴로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족속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심증은 수사에 방해가 되는 최악의 요소가 된다. 심증만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심증은 점점 나쁜 쪽으로 굳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대로 가면 다카시가 정말 동생을 죽였다고 거짓 자백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싶을 정도가 되어서야 사건의 방향이 다른 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실제 범인이 자백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1권에서부터 이미 '악마'라는 존재가 살인에 대한 동기를 충분히 밝힌 상황이었으므로, 독자들 모두 누가 범인인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극중 인물들이 그걸 언제 알아차리느냐,에 관한 문제였는데 사실 히라노 게이치로가 노린 것은 추리극으로서의 서스펜스가 아니었으므로, 범인은 긴 수사과정이 허무하게도 그냥, 자수를 한다. 문제는 범인 한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모방 범죄와 '악마'의 범행 성명문에 영향을 받은 살인 사건들인지도 모른다.

 

, 이제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질문을 하겠다! 너는 '행복'한가, 아닌가?

 

누군가 당신에게 지금 당신은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상에 대한 불만도 없고,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번 작품 <결괴>에서 '악마'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희대의 살인마는 가장 불행해 보이는 인간을 골라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행복'한가, 아닌가?" 라고. '행복'하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가짜 행복을 갈구하지 말고, 억지로 행복 하려고 애쓰지 말고, 스스로 불행하다는 걸 시인만 한다면 '행복'의 제국에서 열등민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악의와 증오를 토해내던, 가족과 스스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던, 형에 대한 자격지심에 시달리며 불행해하던 료스케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소리친다. 사실은 이 세상이 좋고, 나 자신에게도 만족한다고, 나는 이대로 '행복' 하다고, 다른 누구도 되고 싶지 않다고. 극중 '악마'로 지칭되는 사이코패스는 인터넷에서 세상의 '행복'한 표정을 죽 훑어보며 죽어 마땅한 인간을 물색하다 '스우의 중얼거림'이라는 개인 사이트에서 일기를 발견한다. 그곳을 통해 스스로 '행복'이라는 단어에 집요하게 매달리지만, 놀랍게도 전혀 '행복'하지 않은 료스케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대책 없이 불행하지만, '행복'의 파시즘 세계에 계속 존재하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으려 했던 료스케는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전반적으로 이야기는 천천히 진행되는데, 가독성이 좋아 굉장히 빨리 읽힌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현대 사회에서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노골적으로 독자에게 던진다. 악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가장 밑바닥까지 깊이 들어가는 작가의 방식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한 악마 성을 마주하게 만들어 독자들을 꼼짝 못하게 한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 뒤로 이어지는 페이지마다 인물들의 장광설이 다소 현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만큼 곳곳에 포진하고 있지만, 사실 진정한 이 작품의 재미는 바로 그런 부분에 있다. <악의 반대가 선이 아니고, 악의 반대는 행복이다>라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깊이 있는 질문은 매우 흥미롭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의도가 작품에 얼마나 드러났느냐 보다는 이야기라는 매개체로서의 재미에 집중해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어떤 작품보다 술술 빨리 읽히지만, 분량은 매우 많고,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걸 따라가는 형식이지만 주제는 매우 철학적이라 독자로서는 그저 재미있을 따름이다. 매번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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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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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시길. 그의 영화를 싫어한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정이 안 간다는 얘기니깐. 그냥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다. 솔직하다 못해 찌질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감정 표현도 싫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는커녕 오로지 자신 밖에 모르는 개인적인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같이 있으면 옆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다음 행동이 어디로 튈지 너무 뻔히 보여서 오히려 당황스러운 사람이 싫다. 실제 현실에서 그런 인물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왜 우리가 '이야기' 속에서 조차 이런 인물들과 만나야 한단 말인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속물인데 누구보다 고고한 척하는, 허세 돋는 행동만 하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이 나에겐 좀 버거웠다. 어쩔 수 없이 김사과의 작품을 읽는 내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레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아 책의 진도가 정말 나가지 않았다. 두껍지도 않은 이 책을 끝까지 다 읽는데 며칠이 걸린 건지 모르겠다. 범상치 않은, 문제적 작가라는 평가를 듣는 김사과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첫 만남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느라 작품을 온전히 이해한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이야기는 맨해튼의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오 층짜리 아파트의 옥상에서 시작한다. 건물 전체가 아버지의 소유인 매력적인 뉴요커 써머와 그녀의 남자친구 댄,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케이는 공연과 파티와 마약으로 이어지는 세련되고 근사한, 힙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몇 달을 보낸다. 하지만 그렇게 반짝이는 한철은 케이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끝나버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그녀에게 일상의 모든 것은 시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왜 서울의 베이글은 이렇게 맛이 없어? 왜 서울의 커피는 이렇게 싱거워? 왜 서울에는 센트럴 파크 같은 게 없어? ? 왜 서울은 이렇게 후진 거야? 이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일이 잦아진다. 왜냐하면 뉴욕의 케이, 서울에서도 케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즉, 케이의 친구 누구도 그녀를 본명으로 부르지 않더란 말이다. 멀쩡한 이름 놔두고, 서울에 돌아와서도 다들 그녀를 '케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럽다는 거. 뉴욕에서 몇 달을 보내고 왔다고 해서 서울의 그녀가 뉴욕의 누군가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솔직히 요즘 케이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뉴욕에 갔다 온 뒤로 시작된 증세였다. 돌아온 뒤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덜 떨어지게 느껴졌다. 특히나 사람들이 그랬다. 세련되게 젊음을 탕진하는 귀여운 백인 여자애나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어딘가 천재 같은 유대인은 서울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은 점은 있었다. 하지만 나쁜 점도 그만큼 있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다. 돌아온 뒤, 모든 게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하나같이 어정쩡했고, 그 점이 정말이지 짜증났다.

 

케이는 서울 시내에 있는 한 사립여대의 국제학부에 재학 중인, 평범한 여대생이다. 우리가 소위 중산층이라 일컫는 무리의 대표 캐릭터라 하겠다. 같은 학부의 학생들 대부분은 돈이 많고, 영어를 잘하며, 명품 백을 들고 다니며 오로지 관심이라곤 외모를 가꾸는 것과 연애를 하는 것밖에 없다. 케이는 그런 여자애들을 경멸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도 같은 부류이긴 하다. 어정쩡하고 평범하고, 허세 가득한 남자애한테 반해서 그와 연애를 하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속물 근성이 가득한 그런 여대생 말이다. 그녀는 시종일관 서울에 대한 불평을 하며 뉴욕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지만 겨우 사실 한두 달 뉴욕에 다녀왔다고 해서 뉴요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케이네 집안이 아슬아슬하게 서울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있고, 아버지의 퇴직이 가까워오고 있었고, 저축보다 빚이 더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한다거나 학비가 부족해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뭐 이건 결국은 그녀 또한 다른 여대생들과 별다를 게 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인공과 등장인물은 비 호감이고, 그다지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부분도 없었지만, 인물들의 이야기 사이사이 작가가 짚어내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덤덤한 말투의 비판과 세태에 대한 건조한 문체는 매우 흥미로웠다. 인물들을 둘러싼 현실에 직설적인 어조로, 마치 기득권층에서 쏘아붙이는 기세로 말하는 대목들은 충분히 이해와 공감을 가져왔으니까. 출판사의 소개 글을 보니 <눈길을 끄는 것은 이야기 틈틈이 끼어드는 작가적 논평이다..거의 모든 인물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인공 케이와 그를 둘러싼 현실 자체에 대해서도 작가는 직접적인 논평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는다>라고 언급이 되어 있던데, 그렇다면 대체 이걸 왜  '소설'이라는 형태로 쓴 건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하다. 왜냐면 이 작품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는 그다지 매력이 없고, 마치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기름처럼 부유하는 느낌인데 반해, 작가가 설명하고 있는 '직접적인 논평'이라는 부분은 흥미롭고, 때로는 유쾌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 이래서 김사과라는 작가가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고들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거기는 천국이었어. 그런데 여자는 울어.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여기는 천국이야. 근데 왜 나는 울고 있냐고?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야.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데 여기가 천국이래. 근데 천국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잘못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행복해하지 않는 너라고. 슬퍼하고, 화가 나는, 이 천국을 부수고 싶어하는 너야. 이 천국을 의심하는 너야. 왜냐하면 여기가 천국이라니까! 너는 천국에 있는 거라고. 네가 이상한 거라고.

 

삶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 무력감에 시달리며 방황을 하던, 케이도 결국엔 답을 찾는다. 더 이상 뉴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화려한 뉴요커의 삶을 만끽하던 친구들에 대해서도 거의 잊어버리고. 왜냐하면 결국 기억이란 빠르게 희미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기억의 강을 건너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재의 서울, 여기에서 살아내야 하니까. 그렇게 숨쉬며 살아 있으니까 말이다.

 

수족관 속에 있는 물고기가 수족관을 부수면 어떻게 돼?

죽겠지. 뻔하지. 하지만 수족관 속에 있는 건 살아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이게 묻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누구에게나 평화롭다. 실제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건 간에. 멀리서 보기엔 뭐든 쉬워 보이니까. 안전한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겁이 나지만, 나가본 적이 없어서 무섭지만, 그렇지만 이 안에서 더 이상 즐겁지가 않다면, 행복하지가 않다면, 그렇다면 틀을 깨뜨려버리고 한 번쯤 나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당신의 천..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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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망아지.불만의 겨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존 스타인벡 지음, 이진.이성은 옮김, 김욱동 해설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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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비채의 모던&클래식 세 번째 작품은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으로 잘 알려진 존 스타인 벡의 마지막 작품인 <불만의 겨울> 그리고 그의 초기작인 <붉은 망아지>가 함께 수록된 책이다. 특히나 <불만의 겨울>20여 년 만에 현대적인 한국어로 새롭게 완역된 거라 존 스타인 벡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선물이 될 것 같다. <분노의 포도>가 대놓고 미국 자본주의를 비판했다면 <불만의 겨울>에선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조금 더 은연중에 비판적인 내용을 풍긴다. 아무래도 경제대공황기를 배경으로 했던 <분노의 포도>에 비해 이 작품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사회적인 비판 외에도 인간이 내면에 대한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마련인 '불만'이라는 감정에 대한 보편적인 갈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고전을 어려워하거나 재미없어하는 그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만하다는 말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추천했다는 걸로 잠깐 화제가 되었던 스타인 벡의 <붉은 망아지>부터 살펴보자면, 열살 소년이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붉은 망아지의 죽음을 통해서 나름의 인생을 배워가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4부작으로 구성된 중편이지만, 분량이 짧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 같은 느낌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스타인 벡 특유의 유머 감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더 유쾌하고 재미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망아지를 사주는 것도, 총에 실탄을 넣고 쏠 수 있게 되는 것도 모두 나이와 조건을 두어 제한을 두는 아버지에 대한 어린 조디의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고. <이 년은 기다리기에 너무 긴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주는 모든 선물에는 그 선물의 가치를 떨어 트리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달렸다. 아주 훌륭한 통제 방식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망아지가 죽고 나서 두 번째 망아지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조디에게 위로라고 던지는 빌리의 마음은 이렇게 표현된다. <조디가 호흡곤란으로 죽어버린 빨간 망아지 가빌란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빌리도 알고 있었다. 빨간 망아지가 죽기 전에 빌리는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이 빌리에게서 예전의 자신감을 빼앗아갔다> 라고. 그래서 그는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하면서 망아지를 돌보겠지만, 자신이라고 뭐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라고 말이다. <그는 잃어버린 자신의 특권을 생각하며 기분이 언짢아졌다. 빌리는 궁색하게 덧붙였다> 라는 대목을 잃으면서 심각한 표정의 조디와 그를 걱정하지만 겉으로는 퉁명스런 빌리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아 큭큭 웃고 말았다. 혹시라도 고전이 따분하고 지루할 거라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완... 오해다. 이런 대목들을 보고 있자면 두꺼운 분량의 페이지도 재미있어 하며 쓱쓱 그냥 넘어가고 말 테니 말이다.

 

저녁식사는 통닭구이가 훌륭하다며 외치는 감탄사와 그저 먹을 만할 뿐이라고 부인하는 감탄사의 연속이었다. 엘런이 모든 것을 다 기록할 듯한 눈초리로 우리의 손님을 살펴보았다. 머리와 화장의 세부적인 것에서 하나하나까지. 그 모습에 나는 여자들이 정말 어렸을 때부터 세밀한 관찰을 통해 자신들이 직감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초를 쌓는다는 것을 알았다. 엘런은 내 눈을 피했다. 자신이 결정타를 날린 것을 알고 있었고 나의 복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좋다, 나의 잔인한 딸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를 해주마. 나는 잊어버리겠다.

 

스타인 벡의 마지막 작품인 <불만의 겨울>은 조금 더 재미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에 나오는 첫 번째 대사에서 비롯된 불만의 겨울이라는 매력적인 제목만큼이나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중편이다. 한때는 내노라 하는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대부터 탕진하기 시작한 재산은 주인공 이선 대에 내려와서는 집안 형편이 말도 안 되게 나빠진다. 덕분에 이선은 좋은 대학을 졸업해놓고도 식료품 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하는 위치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인 메리는 그의 무능과 가난을 탓하고, 아들 또한 아버지가 잘 나가는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안팎의 압력으로 그는 가장으로서 체면도 살리고,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로 결심을 하고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서부터 도덕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선은 물질적인 성공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어차피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다른 부자들도 깨끗한 방법을 통해서만 부를 이룩한 건 아니지 않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나?

 

몰락한 가문의 후손인 이 남자의 도덕적인 갈등을 따라가는 내면 묘사는, 지금 현대에 가져와도 고스란히 감정 이입이 될 만큼 공감대를 형성한다. 기존 집안의 내력을 아는 이들은 옛 영광을 되찾으라고 부추기고, 가족들은 돈이 없는 가장의 무능력을 비난하고, 그런 상황에서 자신만 도덕적이고, 정정당당하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겠는가 말이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그는 자신이 일하던 가게의 주인을 불법 이민자라고 고발해서 가게를 인수하고, 술주정뱅이인 친한 친구를 속여서 땅을 빼앗는다. 원하는 것만 얻으면 그만이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이렇게 물질 만능 주의에 대한 맹신은 자본주의의 기본 가치와도 부합하기에, 사실 그를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도덕적 양심만 지킨다고 가문이 부활할 수 있는 것도,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도, 그에게 일자리와 양식을 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분명 예년과는 다른 해가 있는 법이다. 하루가 다른 날과 다를 수 있듯이 기후와 동향 그리고 분위기가 다른 해 말이다. 올해 1960년은 변화의 해였다. 비밀스러운 두려움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잠재되어 있던 불만이 서서히 두려움으로 변하는 해. 내게만 아니 뉴베이타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 지명을 곧 앞둔 데다가 불만이 분노로 변하는 분위기였는데 분노는 흥분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불만이 분노로 변하면서 어떤 행동이든 폭력적일 수만 있다면 그 행동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자 전세계가 동요와 불안으로 들썩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선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나쁜 행동에 대해 처벌을 받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자신의 십대 아들을 보면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듯이 그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아들 앨런은 유명 연설을 짜집기해서 글짓기 콘테스트에 입상하지만, 표절 행위가 밝혀졌을 때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아쉽게 사실이 발각된 것을 억울해할 뿐이다. 나쁜 행동을 해놓고도 자각은 커녕 타인을 속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로서 절망감에 빠진 것이다. 자신이 한 행동이 있는데, 어찌 아들을 비난할 수 있겠냐 말이다. 도덕적 기준을 벗어난 수단과 방법이 성공이라는 목적을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이름 뿐인 영광을 성공이라 부르는 사회 고위층이 허다하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성에 대한 부패, 도덕적인 타락, 성공에 대한 위선, 나만 잘 되면 된다는 부도덕은 비단 작품이 쓰여진 미국 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특성상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맹신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겨울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봄이 오듯이, 춥고 어두운 계절이 있으면 따뜻하고 밝은 희망의 계절도 언젠가는 온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스타인 벡의 이런 주제 의식도 참 좋지만, 독특한 묘사와 은근한 유머 감각을 좋아한다. <불만의 겨울>에서는 이런 대목들이 기억에 남는다. <월요일이 되자 배반의 봄이 겨울을 향해 홱 되돌아서더니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나무들의 연한 잎사귀를 차갑게 내리는 비와 으스스한 돌풍으로 갈가리 찢어버렸다> 라던가 <이 친구들은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에게는 그녀가 바로 잘 받아주고 판단하지 않으며 침묵을 지키는..... 일종의 안데르센의 우물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대목들. 고전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문장들이 페이지마다 넘쳐나서 머릿속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아마도 고전이 따분하다고 많은 이들이 여기는 이유는 두툼한 분량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반짝이는 문장들과 행간에서 넘쳐나는 보석 같은 깨달음은 충분히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를 한다. 아마도 현대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러니까 밑줄 긋거나 베껴 써보고 싶은 페이지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될 거라고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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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1-1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인벡은 아무래도 현대작가라서 문장이 간결하니 영어교재에도 많이 인용되더군요.저는 장편에 부담을 가지는 이들에게 스타인벡의 중단편을 권하고 있어요.<붉은 망아지> 외에 <진주>,<생쥐와 인간>은 재미도 있고 기분좋은 뒷맛이 있더군요.

피오나 2013-11-13 14:1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영어교재에도 자주 인용되는 작가인줄은 몰랐어요. ㅎㅎ '진주'와 '생쥐와 인간'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기분좋은 뒷맛이 있다고 하시니 궁금해집니다.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
 
대디 러브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들이 일종의 간접적인 대리체험이라고 했을 때, 내용이 궁금해서 보기는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체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작품이 가끔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들도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데, 전작인 <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유독 그랬던 기억이 난다. 내용은 미성년 성추행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 2년의 보호 관찰 형을 선고 받은 주인공이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충성과 사랑을 바칠 좀비 노예를 가지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뇌에서 자아를 지워버리면 좀비처럼 자신에게 복종할거라고 믿으면서 잔인한 범죄를 이어가는 다소 경악 스러운 내용이다. 이 책을 적극 추천했던 박찬욱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잠시 그 악인이 되어보도록 한다. 마치 입체영상을 보게 해주는 안경 같은 것이다. 이걸 쓰면 사이코 패스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 내면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사이코 패스의 매우 폭력적인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사실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이번 작품 <대디 러브> <좀비>처럼 악인의 입장에서만 서술되고 있지는 않아, 충격의 강도는 조금 완화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은 결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왜 찾아서 읽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 이 작품의 리뷰를 쓰면서 '괴물 같은 필력'이라는 표현을 썼던데, 나도 그 말에 적극 동의한다.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어디 한 둘이 겠냐만, 조이스 캐롤 오츠는 정.. 무서우리만큼 필력이 대..하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 읽는 동안은 좀 불편해지더라도 새로운 작품이 출간되면 읽어보고 싶을 수밖에.

 

이 작품은 유괴당한 아이가 범인으로부터 도망쳐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유괴'라는 소재는 여타의 작품에서 자주 다뤄지고 있지만, 조이스 캐롤 오츠가 주목하는 것은 유괴라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은 아이의 심리적인 변화이다. 순수하고 똑똑했던 다섯 살 아이가 '유괴'라는 폭력을 통해 어떻게 인격적으로 변하는지, 인간이 생존이라는 강박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녀 특유의 멋 부리지 않는 건조한 문체로 신랄하게 보여준다. 이쯤에서 자연스레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화이>에서는 자신을 유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아빠로 믿으며 자란 소년이 진실을 알게 되고 결국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유괴라는 소재로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출발점은 같으나, 물론 장준환 감독의 영화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은 각각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두 작품을 비교 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대디 러브>는 쇼핑몰 주차장에서 주차해둔 차를 찾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평소에도 다이너는 아들 로비에게 책임감과 관찰력에 대해 주지시키기 위해, 차를 어디에 주차했었는지 위치를 기억하는 숙제를 주곤 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쇼핑을 마치고 두 사람은 주차된 차를 찾는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에게 머리를 맞고, 로비가 그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이너는 그 남자의 차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피를 흘리고 무기력하게 의식을 잃는다. 로비가 유괴되기 직전까지의 5분 정도 되는 그 짧은 순간, 쇼핑몰 주차장에서 차를 찾기 전까지 벌어지는 겨우 5분 정도의 그 기억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재구성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1에서 <내 손 잡아. 그녀가 말했다. 아이는 그렇게 했다. 작은 손을 엄마 손 위에 올렸다. 유괴되기 오 분 전쯤의 일이다.우리 차 보여? 엄마가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가 차를 어디에 세웠는지 기억나? 이것은 그녀와 아들이 하는 일종의 게임이었다. 차를 쇼핑몰 어디에 세웠는지 기억하는 것은 아이의 몫이었다. 아들이 찬찬히 보고 기억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하던 게임이었다> 차를 어디다 세워뒀는지 찾는 일종의 게임이 시작되고..

 

그들이 차를 찾는 순간 시작되는 2에서는 <"내 손 잡아, 로비." 아이는 그렇게 했다. 통통한 손을 들어 엄마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아들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엄마와 다섯 살 아이 사이에 짜릿한 행복감이 지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파포시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말로 다 못한다는 뜻이다. 엄마 노릇을 하면서 말로 다 못 할 것을 많이 알게 됐다. "우리 차 보여? 아빠 차가 보여? 우리가 차를 어디에 세웠는지 기억나?"> 로 다시 반복적으로 그 5분의 기억이 재구성되며 로비가 유괴되고,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가 보여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3에는 <"손 좀 잡아, 로비!" 로비는 그렇게 했다. 엄마 손을 잡았다. 아이는 쇼핑몰에서 몹시 흥분했고, 엄마가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 말을 안 듣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다섯 살배기는 주차장에서 혼란에 빠져 기가 죽었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첫 번째 실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피곤하니, 아들? 삼심 분이면 집에 도착할 거야. 엄마가 우리 차를 찾도록 도와줘, 알겠지?: 이 일은 로비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게임이었다. 로비는 게임하는 걸 좋아한다. (보통은) 게임을 잘했으니까.> 를 시작으로 다시 그 날의 상황이 재구성되며, 과거에 로비가 아팠을 때 그녀가 떠올린 기억부터, 더 살이 덧 붙여진 사건 당일이 보여진다.

 

다시 반복되는 4에서는 <내 손 잡아. 그녀가 말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말했을까. 둘이 밖에 있을 때면. 아들은 순종적인 아이였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녀가 엄마였으니까, 그리고 책임이 있었으니까. 쇼핑몰에서 아이는 수 차례 그녀에게서 빠져나갔다. 꽥꽥 소리지르고 키득대며 엄마한테서 빠져나갔고, 그녀는 아이를 쫓아 달음질쳤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이었다. 게임을 하면 아이다운 웃음이 터진다> 는 문장으로 이어지며, 사건 이후 경찰이 수색을 시작하고, 그녀가 수술을 받기 위해 들어가는 장면으로 진행된다.

 

굳이 이 문장과 단락들을 이렇게 길게 옮긴 이유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 조이스 캐롤 오츠의 방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이다. 공포와 패닉 속에서 재구성된 기억, 혼란스러운 의식을 고스란히 독자들이 '체험'할 있도록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에서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범죄의 순간이지만, 그 누구도 절대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칠 수도 있다는 걸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장면을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비슷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서술되는 것 같지만 1장부터 4장까지의 내용은 미묘하게 다르게 묘사되고, 그만큼 다른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아이를 유괴당한 엄마의 내면을 이토록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가는 아마도 흔치 않을 테니 말이다. 고통스러운 5분 간에 대한 시간의 재구성 뒤로 이어지는 장은 교회에서 설교자로 신에 대해, 믿음에 열변을 토하는 체스터 캐시의 모습이다. 차가운 조각 같은 얼굴에, 민첩하고 매서운 눈빛을 가진, 누구에게나 호감 형인 그 설교자는 바로 로비를 납치한 연쇄살인범이자 성 범죄자이다. 허기진 영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축복의 씨앗을 뿌리는 설교자를 바라모는 신도들의 그 무한한 신뢰라니.

 

이후 7에서 다시 초반의 변주가 이어진다. <내 손을 잡아.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말하잖아, 아가, 내 손 잡아. 아이가 떨기만 하고 손을 올리지 않자, 말을 듣지 않자, 대디 러브는 손을 낚아챘다. 작은 손가락을 곽 움켜쥐자 새끼손가락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아이가 재갈을 문 채 비명을 질렀다>로 이어지는 이후의 내용들은 소아 성애자이자 연쇄살인자 유괴범인 체스터 캐시 로비의 이름을 '기드온'으로 바꾸고 자신을 '대디 러브'라고 부르게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벌을 주고, 자신의 말을 따르며 순종할 경우에만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상을 준다. 육체적인 폭력과 성적인 폭력을 가하는 대디 러브와 살면서 로비는 점점 기드온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대디 러브는 '나쁜 엄마'에게서 어린 로비를 자신이 '구출'했으며, 아이는 그와 함께 사는 것을 '고마워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인물이다. 그렇게 6년이 지나고, 기드온은 대디 러브가 자신을 대체할 다른 동생을 찾고 있으며, 이제는 나이를 먹고 커버린 자신을 여태껏 다른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대디 러브로부터 도망쳐서 부모에게 돌아간 이후의 이야기가 작품의 나머지 부분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알렉스에게 읽기와 산수 숙제를 도와줬다. 기드온은 친구가 간단한 단어나 숫자를 그렇게 틀리게 쓴다는 데 놀랐다. 알렉스는 글자와 숫자를 거꾸로 쓰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내가 거꾸로 된 괴물인 가봐. 알렉스는 말했다. 하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모두 다 괴물이야. 기드온이 말했다. 알고 보면 다 그래.

 

괴물로부터 도망쳐 다시 부모에게 돌아온 로비는 육 년 전의 그 수다스러운 아이가 아니다. 열한 살이 된 로비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영양실조, 빈혈, 심신 쇠약증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는 작품의 후반부는 그래서 매우 슬프고, 무섭다. 매체에서는 체스터 캐시에게 억류된 육 년 동안 로비가 도망치려고 시도하거나 억류된 사실을 주위에 알리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보도한다. 왜 소년은 유괴범과 지내는 동안 다니던 학교의 누구에게라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건지, 왜 육 년 동안 도망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건지. 로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무서운 추측을 하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차라리 눈을 감고 회피하고 싶어질 것이다. 불편하지만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이렇게나 소름 끼치게 잘 그려내는 이가 또 있을까 싶다. 사실 끔찍한 묘사나 고통스러운 대목들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참 아프고, 두려운 감정이 들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필력의 힘인 것 같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소설을 쓴 작가의 힘을 느껴보고 싶다면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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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8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멋진 리뷰입니다.

피오나 2013-11-11 09:30   좋아요 0 | URL
하핫.. 긴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