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책들의 상인
마르첼로 시모니 지음, 윤병언 옮김 / 작은씨앗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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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억해둬라. 세상 일을 안다고 해서 인생이 편해지는 건 없어. 아니, 십중팔구는 인생을 더 어렵게 만들지."
"상관없어요. 저는 알고 싶어요."


언젠가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하는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고서의 비밀을 밝히는 이야기였는데, 당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하더라. 그로부터 무려 10여년 이나 지난 지금, 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필적하는 단 한 권의 소설!이라는 카피를 걸고 나온 책이 있다. 바로 '마르첼로 시모니'의 『저주받은 책들의 상인』이다. 감히 '장미의 이름'에 견줄만한 책이 있을까 싶지만, 고딕풍 지적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오랜만에 머리가 즐거워지는 책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한때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후, 비슷한 장르의 책들이 한참 쏟아져 나온 시기가 있었지만, '지적 스릴러'라는 장르는 말처럼 쉬운 종류는 아니다. 작가가 해당 분야에 대해 엄청난 해박한 지식과 엄청난 자료조사가 밑받침되어어만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꼼꼼한 고증이 없다면, 이야기는 전부 거짓말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수많은 각주들을 참고 해가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분야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허구의 세계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믿음을 주기도 한다. 잘만하면 독자들이 깜빡 속아넘어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특정한 한 시기에 대한 실제 사실을 기반으로 풀어내는 이야기이므로, 가상의 이야기지만 정말 '진짜'같은 리얼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는 우리는 태생적으로 수수께기에 매혹되는 독자들이다.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각 장소에 숨겨져 있는 비밀의 책에 대한 수수께끼는 프로방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으로 나타나는데, 꼼꼼한 주석들을 참고해야 하지만 인물들과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그만한 수고로움을 감수하더라도 멋지다.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더 많은 책임감과 위기를 불러오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에 대한 욕망을 포기 할 수 없다면, 바로 이 책에 도전해야한다.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냐시오는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덩달아 두려워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우테르 벤토룸>에 대한 집착이 그를 유혹과 두려움에 무감각한 장님과 귀머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우테르 벤토룸>이라는 희귀도서를 둘러싼,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로 다른 욕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을 가지고 있던 비비엔 신부가 가면을 쓴 한 무리의 기사들에게 쫓기다 골짜기로 추락하면서 시작된다. 본격적인 스토리는 그로부터 13년 후, 비비엔의 친구이자 유골상인인 이냐시오가 등장하면서 벌어지는데,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비비엔 신부의 이름이 언급되고, 귀족 가문 출신의 백작이 희귀도서를 찾아달라는 은밀한 부탁을 하면서 이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이냐시오와 함께 모험의 여정을 떠나게 되는 윌라름과 우베르토의 이야기도 매우 재미있다. 두 인물의 성격이 분명하고, 가지고 있는 사연이 흥미로워 캐릭터의 색깔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다만 윌라름과 우베르토에 대한 캐릭터성은 명확한데 비해, 정작 주인공인 이냐시오라는 인물은 정확히 정의내리기가 어렵다.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도 않고, 일행들에게 말하지 않고 행동을 먼저 하는 경우가 많고, 과거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이 될 뿐 구체적이지 않다. 정의로운 인물인 것 같으면서도 뭔가 속으로 꿍꿍이가 있는 것 같고, 누군가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와 반대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모험의 끝까지 가보면 알 수 있다. 아하, 이런게 바로 반전의 묘미구나. 싶을 정도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후반부는 정말 엄청나다. 치밀하게 구성된 거대한 음모는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해준다.


이 책은 마르첼로 시모니가 구상중인 지적 스릴러의 첫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3부작의 두 번째 소설인 『연금술사의 잃어버린 도서관』이 얼마전에 현지에서 출간되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니, 두번째 작품도 어서 빨리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냐시오와 그의 일행들이 펼치는 또 다른 모험의 여정이 너무나 궁금해서 빨리 두번째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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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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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다보면, 시놉만 읽어도 아, 이 작품이 어떻게 진행되겠구나. 대충 감이 오는 지경에 이르른다. 그래서 더 새로운 이야기, 더 색다른 캐릭터, 상상치 못한 반전을 기다리며 더 많은 이야기를 찾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한달에 수십권을 읽어도 어딘가 부족한, 마치 중독된 것처럼 책을 탐닉하게 된다는 것.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가지의 이야기들은 어쩔수 없이 두 손가락에 꼽히는 플롯으로 정리가 된다. 이야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고, 서사는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일종의 변주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인화 작가의 신작인 이 작품을 내심 기대하면서 구입했다. 바로 작가가 직접 개발했다고 하는 저작 지원 프로그램이라는‘스토리헬퍼'라는 스토리텔링 저작도구 때문이다. 내년에 일반일들에게도 공개된다고 하는 '스토리헬퍼'는 머릿속에 든 온갖 분절된 아이디어를 이용해 장르·인물·상황·행동 등에 관한 29가지 객관식 질문에 답을 입력하면 A4지 한장 분량의 일관된 줄거리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리고 쓰고자 하는 글의 기본 정보를 입력하면 기존 작품들과의 유사성을 백분율로 알려준다고 하니, 이거 정말 엄청난 거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작가는 이번 작품인 '지옥설계도'가 세상의 어떤 이야기와도 유사성이 55% 이하라고 밝혔다. 신선하고, 독창정일거란 얘기다.


오호.. 자, 이쯤되면 작가가 8년만에 내놓은 신작에 대한 기대감이 뭉실뭉실 피어 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사의 패턴은 한정되어 있는데, 세상의 어떤 이야기와도 유사성이 낮다고 하니... 얼마나 독특한 이야기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카마엘은 인위적으로 천재들을 만들어 1년 안에 새로운 세계 1위 기술 백 개를 얻는다는 걔획을 새웠어요. 신기술을 적용한 공장 천개를 동시에 세우고 고임금을 견딜 수 있는 일자리 백만 개를 창출하자는 계획이죠."

"그래서 성과를 얻었나요?"

"사람이 많이 죽었죠. 강화 약물의 임상실험 대상이 되어서. 사형수들, 장기수들, 창녀들, 정치범들... 자오얼이 첫 번째 성공 사례였어요. 카마엘은 감격해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겠죠."

"자오얼은 머리에 복사기가 있는 사람 같았어요. 온갖 책들을 엄청난 속도로 읽어치웠고 모든 내용을 소화했어요. 수학적 추론, 논리적 추론, 언어 능력, 공간 시각화 능력이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죠. 외교, 경제, 사회, 산업 각 분야의 주제를 가지고 모든 전문가들이 놀랄 만큼 굉장한 보고소들을 잇달아 내놓았어요."

 

그러나 강화인간들은 스스로 부작용이 더 적은 약을 개발해, 새로운 강화 인간들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강화인간들의 눈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부족함이 눈에 뻔히 보였으니까. 높은 지능으로 이 세상이라는 무대의 뒤를 본 존재들이 과연 인간들의 아래에서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는게 애초에 말이 안되지 않나.. 현실에서의 살인사건과 가상세계인 인페르노 나인에서의 이야기가 병렬 배치되어있는 이 작품은, 어딘가 애매모호하다. 다양한 장치와 세계관을 늘어놓기는 하는데, 그것이 이야기속에 잘 녹아들어있지 않다는 느낌이랄까.. 게임마니아들이라면 또 다를지 모르지만, 특히 인페르노 나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내가 너무 기대를 한 걸까.. 보통사람보다 10배이상의 지능을 가진 강화인간은 어딘가 '제노사이드'를 떠올리게 하고, 최면 세계인 인페르노 나인은 어쩔 수 없이 '인셉션'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어딘가 낯익은 설정의 유사성만이 문제인 건 아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겠다는 '독창성'에만 신경을 쓴건지, 새로움은 있지만 '감동'이 없다. 잘 빠진 몸체는 멋진데, 심장이 없는 로봇같다는 느낌....ㅡㅡ;; 작가는 후기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설밖에 없다고 말한다. 황당무계하고 졸렬한, 대중이 좋아하는 새빨간 거짓말만 씌어 있는 나쁜 소설과 어떤 사회 속에서 부대끼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 그려져 있는 좋은 소설이라고. 그렇다면 이 작품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글쎄... 작가의 치열한 고민은 보이지만, 진심이 담겨져 있는지는 의문이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일생에 사랑이 몇 번 찾아올까.
열 번? 백 번? 터무니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여든 살, 아흔 살까지 살아버린다. 내일은 무한히 다양하고 극적이고 경이로울 것이며, 아마도 또 사랑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강화인간은 이런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눈을 뜨면 행복이 꿈처럼 아련하게 남아 있는 아침. 내가 진실로 그 사람의 사랑이었고 그 사람의 일부였고 그 사람의 존재가 줄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다 받았다는 느낌이 이어지는 아침. 천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아침. 그럼 아침은 일생에 한 번만 온다.


나도 일생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 그런 새로운 작품을 언젠가는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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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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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엔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증명'이라니. 증명이라는 단어의 뜻이 어떤 사항이나 판단 따위에 대하여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증거를 들어서 밝히는 거라고 하면,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한다는 얘기가 될까. 무슨 증거를 대야 우리가 인감임이 증명되느냔 말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갑답게 하는지, 최소한의 인간성이란 어느 정도인지, 이 작품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때 현장을 지나가던 교양 있어 보이는 노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부인은 괜히 참견했다가 험한 꼴을 본다면서 남편의 소매를 잡아끌어 도망쳤습니다. 목을 졸린 것보다 그 광경에서 미국의 진정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상관없는 사람이 죽든 살든 전혀 관심이 없다. 자신의 삶만 편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위협할 우려가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기피한다. 정의를 위한 싸움은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고 나서 한다. 상식적인 사회 구성원이 범죄를 보고도 못 본 척하게 된 것도 인종의 용광로 속에서 거대해진 기계 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기가 두렵게,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나름의 이유와 목적이 있는 살인도 있겠지만, 무차별적으로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해치는 사건도 일어난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 라는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세상이 무서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을 지키며 살때, 좀 더 살기좋은, 따듯한,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을 축으로 진행된다. 24살의 한 흑인 청년이 고층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다 죽고, 그 수사과정에서 밀짚모자가 단서로 발견된다. 그리고 사건 해결을 위해 형사 무네스에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과 몸이 아픈 남편을 위해 밤일을 시작한 미모의 아내를 의심하던 남편은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실종된 걸 깨닫는다. 그리고 사라진 아내의 흔적을 쫒는 과정이다.

 

아내의 불륜남과 함께 아내를 찾는 남편은 아내가 실종된 곳에서 낡은 곰 인형을 발견한다. 그 인형은 사회적 지위에만 연연하는 부모에게 지쳐 점점 더 어두운 범죄의 그늘로 빠져드는 미치코의 것이다. 그는 우발적인 사고를 저지른 미치코는 여자친구와 함께 미국으로 도망을 간 상태이다. 그리고 한국 경찰의 협조 요청으로 살해된 조니에 대해 조사하는 뉴욕의 경찰 켄이 있다. 그는 슬럼가 출신으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를, 과거 일본에서 군 복무 중에 한 남자에게 분풀이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일본인 옆에서 군인들을 노려보던 어린 아이가,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무네스에이다.

이야기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야스키 교코라는 한 여성에게로 집중된다. 매스컴의 명성을 얻고 있는 가정문제 평론가이자, 미치코의 가식적인 부모.. 그리고 살해된 흑인 청년과도 관계가 있는, 문제의 인물이다.

 

"야스키 교코에게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는지 한번 모험을 해보죠."
"인간의 마음을 시험한다고?"
나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일 그 여자에게 인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자백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자백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현재로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합니다. 야스기 쿄코의 인간성에 호소해 자백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인상적인 인물은 무네스에 형사이다. 사회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동물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풀어내기 위해서 형사가 되었고, 한 인간이 법률이라는 대의명분 아래에서 인간을 쫒을 수 있는 직업은 경찰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겐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가 적이었고, 형사는 국가 권력이을 짊어지고 모든 인간에게 보복하고자 형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매한 도덕가, 성숙하고 덕망 있는 성인의 가면을 쓰고 우정이나 자기희생을 역살하는 자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기 보신의 주판을 튕기고 있다는데에 물론 동의한다. 인간이란 동물을 파체혀보면 누구다 깊은 바닥에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을 미워하고, 믿지 않고, 불신하면서 살기란 어쩌면 더 힘들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발뻗고 자지 못한다는 말처럼,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혹사시켜야 그런 수준에 이를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런 동기를 만들어준 어린 시절의 끔찍한 광경이란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해서,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런 그가 작품의 후반에 이런 얘기를 한다. 야스키 교코의 인간성에 호소해서 자백을 받아 보자고.

 

그녀 곁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무네스에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도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야스기 쿄코는 아직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놓은 것이다. 무네스에는 교코가 자백한 뒤, 자신의 마음에 숨어 있던 모순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 없이 교코와 대치했을 때, 그는 그녀가 인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믿고 모험을 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역시 인간을 믿고 있던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무섭고, 슬프다. 어떻게 저럴 수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인간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마음에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어차피 그녀에게도 자신의 어머니가 사준 '밀짚모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테니 말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 추억의 대부분은 어머니와 연계되어 있다. 자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라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나의 어린 시절을 형성하고, 그 것이 어른이 된 나의 가치관을 만들어주고, 외롭거나 힘이 들때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감싸주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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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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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요일에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그런 식이었다. 맨 처음 제니, 그 다음에 데릭, 이제는 이언 메이플. 물론, 거기다가 로저 콜본까지. 모두가 제 나름의 방식으로 내 일정을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까지 정해주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최악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12월 어느 날, 한때 잘나갔던 배우 토비 플러드는 일주일 남은 순회공연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영국 남부의 휴양도시 브라이턴에 도착한다. 하지만 별거 중인 아내에게 뜻밖의 연락을 받게 된다. 며칠전부터 수상한 남자가 자신의 주변을 어슬렁대는데, 아무래도 당신의 팬인것 같으니 처리해달라는 것이다. 다른 남자와 살면서 결혼 준비 중인 아내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있던 토비는 그녀의 부탁으로 스토커처럼 보이는 그 남자를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그 남자, 데릭을 만난 뒤로 토비에게 엄청난 일주일이 시작 된다.

 

수상한 남자, 데릭 오스윈은 자신이 토비의 팬이며 그를 만나기 위해서 아내인 제니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라고 말한다. 데릭의 요구로 그가 쓴 '플라스틱 인간들'이라는 콜보나이트 회사에 관한 책의 출판을 검토해주기로 하고, 앞으로 제니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약속을 받지만 그는 지키지 않는다. 토비는 데릭을 만나기 위해 그날 저녁 공연에 빠지고, 대신 데니스에게 자신의 대역을 부탁한다. 하지만 데니스는 자신을 토니로 착각한 누군가에게 쫓기다 결국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여기까지가 도착해서 화요일까지 벌어진 일들로, 이 작품의 전개에 해당된다. 한물간 배우의 평온한 나날에 갑자기 이렇게 많은 일들이 생겼는데, 이게 겨우 시작이라는 얘기이다. 이 작품은 토비가 브라이턴에 도착한 일요일부터, 요일별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뒤 맞이하게 되는 토요일, 토비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상황은 인간보다 더 교활한 공모자다.
상황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어놓는다.


마치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이 토비를 나락으로 몰아넣기 위해 작당이라도 한 듯, 얽히고 설켜서 매일같이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위험에 처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숨겨진 비밀들이 속속 드러난다. 스토리는 종횡무진 앞으로 달려가고, 갑자기 사건 속에 휘말리게 된 주인공 토비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 다다른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후반의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정리되는 토요일 즈음이 되면 독자들은 로버트고다드가 엄청난 이야기꾼이라는 걸 공감하게 될 것이다.


잠깐 힌트를 주기 위해, 막판에 로저가 토비에게 한 대사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내 생각을 알고 싶나, 토비? 이번 주 내내 오스윈이 당신을 꼭두각시 취급한 거라고. 이쪽 줄을 잡아당겼다가, 저쪽 줄을 잡아당겼다가. 그렇게 당신을 조종해서 가능한 나한테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도록 한 거야.


물론, 여기서 로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직접 이 작품을 읽어 봐야한다. 과연 진짜 모습을 숨긴 채 끝까지 연기를 하는 것은 등장 인물 중에 누구인지 맞춰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고로 이 작품의 리뷰는 가능하면 짤아야 한다. 모든 것은 작품 속에 있다. 과연 누가 누구를 속이는 것이며,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위해 연기를 한 것은 누구일까? 가면을 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는 거의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작가가 치밀하게 설계한 사건의 전개는 누구라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교묘하고 탄탄하다.

 


덧.

1. 실존했던 작가 조 오턴의 진짜 작품도 궁금하다. <목구멍에 세 든 남자> 라니 제목부터 확 시선을 끌지 않나. 참고로 조 오턴은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뒤틀린 욕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난폭한 웃음극을 주로 집필한 작가라고 한다.

2.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 데릭 오스윈이 집필한 <플라스틱 인간>의 원본도 읽어보고 싶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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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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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내가 읽은 책은 총 110권이다. 그렇게나 부지런히 읽었는데, 이것밖에 못 읽었어. 하는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혀를 내두른다. 수치로 보면 거의 3일에 한권 꼴로 매일같이 책을 봤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우리 나라 직장인들의 1년 평균 독서량이 5권도 안되는 걸 아냐고 말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인데, 아무리 계산해봐도 1년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제한되어 있고 그렇다면 나의 남은 생애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이란 고작 3,000여권 내외일 거란 말이다. 하루에도 수백권씩 쏟아지는 책들, 매일같이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고, 서점에라 가지만, 내가 읽어야할 그 수많은 책들 속에서 어딘가 슬픈 기분이 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누구도 중요한 작품을 '모두' 읽을 수 없다는 것.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것 정도.

 


그래서 이런 나에게는 동지가 필요하다. 1년에 베스트셀러 한권 읽을까 말까하는 평범한 대다수의 직장인들 말고, 책에 대한 미칠듯한 애정으로 습관적으로 마구 책을 구입하거나, 희귀한 책들을 수집하거나, 강박적으로 읽어대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말이다. 이 책의 작가는 자신을, 책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애서가도 아니고, 책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는 독서광도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나는 그의 애정넘치는 서평이 재미있었고, 뭉클했고, 친근했다. 마치 나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당신은 묻는다. 영화 속 졸부들이 하드커버 껍데기로 서재를 채우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고. 그런 당신을 위도하는 에코의 일화가 있으니, 수많은 장서로 가득 찬 그의 서재를 방문한 사람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묻는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에코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정답!


그리하여 나는, 읽지 않은 책이 가득한 책장에 오늘도 몇 권의 책을 꽂는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즐거운 독서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일종의 스피노자적 행위. 사과나무엔 언젠가 열매가 열리기 마련이고, 종말은 아직 멀다.


움베르코 에코의 이런 일화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위로를 준다. 이미 읽은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책보다 한참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라는 것. 나이를 먹고, 지식이 쌓이고, 읽은 책도 높이 쌓이지만, 그만큼 서가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 말이다. 요즘엔 이북이 많이 나오고 있어 그나마 부피가 덜해졌지만, 종이 책들은 책꽂이를 늘어나게 만들고, 자리가 없어 방바닥에 쌓이고, 책상 위를 굴러다니고 있다. 이제 그만 책 좀 그만사라는 잔소리를 가족들에게 늘 듣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모든 책들은 내가 꼭 읽어야 하는 것들이란 말이다.

 

어떤 타짜들에겐 첫 패가, 어떤 당구 동호인들에겐 첫 타가, 어떤 일본인들에겐 찻잔 속의 찻잎이 그렇듯 새해 첫날 읽은 책이 그 해의 운수를 말해준다는 믿음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 듯하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 라는 이국의 속담을 바꿔말하면 "당신이 읽는 것이 당신"이고, 새해 첫 책은 이내 펼쳐질 한 해에 대한 암시인 셈이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모두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올해 나의 첫 책은 할런 코벤의 '숲'이었다. 흠, 우연이지만 나름 만족스럽다. 내가 영원히 사랑하는 장르의 책이니 말이다. 올해도 스릴러, 추리소설 분야를 열심히 달릴테니까. 그럼 작년 첫 책은 무얼까 돌이켜보니, 윌리엄 에이커스의 '시나리오 이렇게 쓰지 마라'였구나. 작년에는 작법 공부와 스터디에 충실했으니 딱 맞는 책이었군. 그럼 재작년에는 시라이시 가즈후미의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였다. 오호라, 어째 정말 첫 책이 그 해의 운을 말해준다는 게 맞는 것도 같다. 재작년에는 한창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져 행복에 허우적거리던 해였으니 말이다.

자, 당신이 올해 처음 읽은 책은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읽는 책이, 바로 당신을 규정한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단언처럼 들릴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매혹적인 마술같기도 하다. 아직까지 올해 아무런 책도 보지 않았다면, 자신의 한해 운을 만들어줄 멋진 책을 하나 골라서 읽어보라. 내년 이맘 때 즈음에 어쩌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미소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지금 당장 책을 집어들어라.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책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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