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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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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이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유행해서 다들 짧은 말로 자기소개를 하거나, 타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고. 그러므로 그 속에서 어떤 말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난 그건 다르다고 생각해. 짧고 간결하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니까 거기 선택되지 못한 말이 압도적으로 많은 거잖아. 그러니까 선택되지 못한 말 쪽이 더 그 사람을 잘 표현할 거라고 생각해. 그 짧은 말 너머에 있는 인간 그 자체를 상상해 주라고, 좀 더.

 

요즘은 전화나 문자보다는 카톡이 더 일상화되어 있는 소셜미디어 시대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SNS는 거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렇게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등을 오랜 기간 사용해본 이들은 모두 알 것이다. 사실은 온라인에서의 나와 오프라인에서의 나가 다르다는 것을. 실제로는 말이 적지만 온라인에서 수다쟁이인 사람도 있는가 하면,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글 솜씨는 대단히 뛰어난 경우도 있을 테니 말이다. 온라인의 나와 오프라인의 나가 완전히 다르다고 해서, 그걸 꼭 거짓말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습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이 될 테니 말이다. 각각을 다른 인물로 파악하는 건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상의 친구들과 오프라인 상의 친구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에서의 만남이 오프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각각 구분이 되어 있다. 온라인 상의 친구들이 보는 나와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보는 나가 다르다고 해도, 모두 진짜 ''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면을 보는 것이고, 누군가는 나의 저런 면을 보는 것이니, 당연히 다르게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온라인 상에서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허세를 부리는 경우가 꽤 많을 것이다. 사실은 커피숍에서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느라 짜증이 나 있는데, 멋진 풍경과 커피 사진을 찍어서 올리면서 분위기 있게 보일 수도 있겠고, 평소에 책이라고는 한 페이지도 안 보면서 책 펼쳐놓고 카페 사진 올리는 사람도 많은 걸로 안다. 하지만 나는 그게 굳이 나쁘다고는 보지 않는다. 허세나 과장 또한 '가짜'라기 보다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숨겨진 단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이 작품에서처럼 누군가 내가 온라인상에서 허세를 가득 부리는 걸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면 어떨까. 그에겐 내가 가식덩어리로 보일 테니, 얼마나 가소롭게 보일 것이며, 나중에 그걸 알게 된 나는 그야말로 등골이 서늘해질 것이다. 극중의 다쿠토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온라인 상 자신의 모습을, 가까운 누군가가 몰래 관찰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면서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관찰하기와 관찰 당하기, 소셜미디어 시대의 무서운 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는 트위터에도, 페이스북에도, 메일에도, 그 어디에도 쓰지 않는다. 정말로 호소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데에 쓰고 답장을 받는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보여 주는 얼굴은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느 순간 현실의 얼굴과 괴리가 생긴다. 트위터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면서, 하고 멋대로 불평한다. 자신의 프로필 사진만이 건강한 모습으로 줄곧 그곳에 있다.

 

이 작품은 최연소 나오키 상 수상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가 아사이 료의 작품이다. 이십 대 초반의 작가는 딱 실제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현실성 있는 이야기를 매우 리얼하게 그려낸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학생들,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매일같이 일상을 타인과 공유하지만 속은 외로운 바로 우리 주변의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즈키를 짝사랑하는 다쿠토는 취업활동을 위해 극단 활동을 멀리 하려고 한다. 그의 룸메이트인 오랜 친구 고타로 역시 취업준비를 위해 밴드에서 은퇴하려고 한다. 고타로의 옛 여자친구인 미즈키는 진지한 성격처럼 이미 취업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상태이다. 미즈키가 유학생 교류회를 통해 알게된 리카는 자신의 명함까지 만들면서 적극적으로 자기 PR을 한다. 그런 리카의 남자친구 다카요시는 취업활동을 하지 않고 독자적인 자기 미래를 모색 중이다. SNS 형식으로 소개된 등장인물부터, 극 중간중간 트위터 메세지가 지속적으로 보여진다. 실제 우리가 스마트폰을 통해서 자주 보는 것같은 딱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5명의 친구들이 취업에 대한 정보를 나누면서 구직활동을 해 나가는 게 주요 스토리이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떨어져서 좌절도 하면서, 이제 처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발을 딛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자동적으로 바뀌어 왔잖아? 초등학교 들어가서 6년 지나면 중학생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3년 지나면 고등학생이란 이름이 되고, 그런데 앞으로는 스스로 그걸 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거야.>라는 극중 대사처럼 사회에 나간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파악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된다. 그 동안은 부모님이 해주신 밥 먹고,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그 울타리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위험할 수도 있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더 나은 모습의 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나"라는 것. 어떻게 치장하고, 꾸미고, 감추어도 ""란 인간 바뀔 수 없다. 이상적인 모습이야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될 수 없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 말이다. 아사이 료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온라인 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점을 꼬집고, 사회로 나가면서 어떻게 자신을 직시 해야 하는지에 대해 리얼하게 이야기한다. 현실에선 그러지 못하면서 온라인상에서만 세상에서 제일 쿨한 척 하는 수많은 이들이라면,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몰래 싸이월드나 페이스북을 훔쳐보던 이들이라면, 아마도 뜨끔할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나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몰래 뒤에서 남의 일상을 관찰하는 이들이나, 나는 어쩐지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모두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거나, 외롭기 때문이니 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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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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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는 이웃들에게 던지는 표창원, 지승호 두 남자의 승부구!

“혹시, 당신도 공범 아닙니까?”

 

이 책에 실린 에피소드 중에 이런 게 있다. 전 세계 범죄 전문가들끼리 하는 농담 중에 누가 해결을 잘 하는지 형사 올림픽이 열린다면, 숲 속에 곰 한 마리를 풀어놓고 얼마 만에 잡느냐 경연 대회를 하는 것이다. 참여는 구 소련의 KGB, 미국의 FBI, 중국의 공안, 그리고 대한민국이다. 과연 여러분들은 누가 가장 먼저 곰을 잡아올 것인가? 우선 무기가 우수한 KGB가 미사일 포탄을 쏴서 곰의 잔해를 수습해서 가져온다. 규정에 죽이지 말라는 건 없었으니까. 그렇게 수습해서 가져올 때까지 걸린 시간이 다섯 시간이다. 이번엔 과학 수사로 유명한 FBI '저런 무식한 놈들' 하더니 헬기 3대를 띄워서 적외선 열 감지기를 총동원해 곰의 위치를 찾아낸다. 그리고 투망을 던져 곰을 잡기까지 걸린 시간 세시간. 그 다음엔 인력으로 밀어붙이는 공안이 10만 여명을 숲에 배치해 인해전술을 사용, 한 시간 만에 곰을 잡아온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한국은 두 명의 운동화 신은 형사가 쫄래쫄래 나오더니, 10분 만에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곰을 잡아 왔다고 하면서 품속에서 토끼를 꺼내, 토끼를 때리면서 "말해, 너 누구야." 하니까 토끼가 겁에 질려 '"저 곰이에요.'"라고 대답했다는 우스갯소리이다. 우습지만, 수사에 얽힌 어려움을 풍자한 슬픈 얘기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도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과거 80년대처럼 일부러 증거를 조작한 예가 아니더라도, 너무 잡고 싶으니까 정황상 그렇게 믿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혹은 상황에 몰려가다 얼떨결에 범인이 아닌데도 자백을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이렇듯 이 책은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문제점들, 과학수사의 어려움,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범죄를 사회가 방치하고 있는 부분까지, 잘못된 관행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범죄는 남의 일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범죄를 목격했을 때에도 나에게 피해가 올까 걱정해서 선뜻 나서거나 도와주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말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 발생하는 비극적인 범죄의 잠재적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표창원 교수의 신념은 가히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이다. 표창원 교수의 저서는 너무 많지만, 나는 그 중에 <한국의 CSI> <한국의 연쇄살인>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한국형 과학수사에 대해, 살인마에 대한 심리분석에 대해 아주 흥미로웠던 책으로 기억한다. 국내 최초의 프로 파일러라는 걸로 유명하신 분이지만, 요즘은 방송에서도 자주 뵐 수 있고, 책도 많이 출간되고 있어 그냥 작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국내 유일의 전문 인터뷰어로 알려진 지승호 저자의 글은 재작년 엄청 화제였던 김어준 총수의 인터뷰 <닥치고 정치>를 통해서 처음 만났었다. 인터뷰 대상도 선별해서 정하는 것 같고, 무엇보다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이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지승호가 인터뷰하는 표창원' 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연예인 인권의 그늘, CSI 신드롬과 CSI 이펙트, 범죄 영화에 대한 분석,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과 증가하는 학교 폭력과 가정폭력, 낮아지는 취업률, 심각해지는 빈부 격차, 잦은 권력형 비리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적으로 잠재된 분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한국적인 살인, 사회적 특성에 의해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살인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준다. 그리고 신창원이 표창원 교수에게 직접 보내온 친필 편지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는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언급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 지점에서는 속이 다 시원할 만큼 직설적이고, 흥미진진했다. 어느새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냥 '공범'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나와 상관없다고 정의를 모른 척 하고, 나에게 혹시라도 피해가 올 까봐 두려워하고, 다들 그렇게 하는데, 굳이 나만 고고한 척 바른 생활을 할 필요 있냐며 묻어가고, 그랬던 건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이들처럼 소신 있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나선다면,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좀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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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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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희비극을 아이러니로 풀어내는 작가 '위화'의 신작이다. 전작인 <허삼관 매혈기> <인생>에서 중국 소설에 대한 엄청난 재미를 주었던 작가이기에, 이번 신작도 궁금했었다. 사실 슬픈 내용을 감상적으로, 기쁜 내용을 더 강조해서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는 희극적인 내용을 근엄한 어조로 능청스럽게 표현하거나, 연민을 자아내는 비극적인 내용을 다소 코믹하게 느껴질 정도의 대사로 써낸다. 그래서 글을 읽고 있노라면 분명 내용만으로는 어처구니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장면인데도, 어딘지 웃을 수가 없어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위화가 만드는 이야기 속에서의 희극적인 장면은 가벼운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라는 것이다.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들이 역설적인 의미로 전달되는, 무겁지는 않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양페이가 사고로 죽고 나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7일 동안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양페이가 죽은 첫 째날, 그가 빈의관(화장터)으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씻지도 않고 수의도 입지 않은 평상복차림이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 몸을 씻고, 수의로 할 만한 하얀 비단 잠옷을 입는다. 그러던 중 빈의관에서 독촉 전화가 온다. 아홉 시 반인데 뭘 하고 있느냐고, 화장을 원하는 게 맞냐고. 화장을 하고 싶으면 얼른 오라고.

 

이렇게 시작부터 이야기는 블랙 코미디처럼 진행된다. 화장터도 은행처럼 번호표를 뽑아서 순서대로 기다렸다 진행되는 거라니, 그것도 당사자가 직접 번호표를 뽑고 가야하고 말이다. 양페이는 뭐 이런 일도 재촉을 하나 기분이 상했지만, 서둘러 준비를 하고 빈의관으로 향한다. 빈의관 화장 대기실에 도착하자 의자가 두 가지로 준비되어 있다. 플라스틱 의자에는 대기자가 무척 많았지만, 다른 쪽 소파에는 성공한 명사들로 보이는 사람들 다섯 명뿐이다. 늦게 온 양페이는 번호표 순서 A3에서 A64로 밀려났고, 자신의 앞에 54명의 대기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파에 앉은 귀빈 구역의 화제는 수의와 유골함이었다. 얼마나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걸로 했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데, 죽으면서까지 돈 자랑하는 사람들이라니. 빈의관은 이렇게 대놓고 빈부격차에 따라 화장이 진행된다. 대기실도 그렇고 가마도 그렇다. 국산품은 일반 대기자용, 수입가마는 귀빈 용이라 한다. 한참을 기다려도 순서가 줄어들지 앉아 물어보니, 시장님 시신 앞에서 고별식이 열리고 있어, 아침에 세 사람을 화장하고 가마가 멈춘 상태란다. 이 무슨 어이없는 일이란 말인가 싶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권력에 의한 불평등이 너무도 비일비재한 일이라 씁쓸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첫날은 양페이가 빈의관에서 겪게 되는 일과 그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된다. 양페이는 식당에서 전 부인인 리칭이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읽다가 갑자기 발생한 화재 사고로 죽게 된 것이다. 이후 리칭을 만나게 된 이야기가 둘째 날이다. 리칭은 아름다운 미모로 인해 회사 여직원들이 질투하고, 수많은 남자 직원들이 그녀와 사귀고 싶어서 꽃이며 선물을 보냈던 여자였지만, 결국 양페이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그들이 2년의 결혼생활을 하고 나서 양페이에게 다른 남자가 생겨서 이혼하기까지의 내용이 보여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살한 리칭과 그런 그녀의 기사를 읽다 사고로 죽은 양페이가 만나는 장면이다.

 

"이건 양페이 잠옷인데, 당신은 누구시죠?"

"내가 양페이예요."

그녀가 당혹해 하며 비틀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양페이 같지 않은데."

얼굴을 더듬어보니 왼쪽 눈이 광대뼈까지 튀어나오고 코는 코 옆에, 턱은 턱 아래에 있었다.

"얼굴 단장하는 걸 깜빡했어요."

내가 말하자 그녀가 두 손을 뻗어 바깥으로 떨어져 나온 눈동자를 조심조심 눈구멍에 밀어 넣고 옆으로 누운 코를 원래 위치로 옮긴 뒤 턱 아래로 늘어진 턱을 철컥, 하며 위로 밀었다.

그런 다음 한 발자국 물러나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이제야 양페이 같네요."

"내가 바로 양페이예요. 당신은 리칭같이 생겼네요."

"내가 바로 리칭이에요."

우리는 동시에 미소 지었다. 익숙한 웃음으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꽤 긴 대화를 이렇게 옮겨본 이유는, 이 대목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사실상 전체 작품의 색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재로 인해서 왼쪽 눈이 광대뼈 쪽으로 밀려나고, 코며, 턱도 얼굴에서 자리 이동을 했다는 묘사가 첫 장면에서 있었는데, 그 끔찍한 몰골 때문에 리칭은 양페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서 엉망이 된 얼굴을 원래대로 만들고는, 서로에게 익숙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리칭은 양페이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으나, 결국 그 남자 때문에 자살을 했다. 이혼한 전 아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맞이하는 양페이의 성격, 그리고 이렇게 별거 아닌 상황에서도 가슴 한 구석을 울컥하게 만드는 감정의 결을 숨겨두는 작가 위화의 노련한 솜씨. 이후 셋 째날, 넷 째날 계속 이야기는 전개되지만 주로 이런 식이다. 상황은 끔찍하고 비참하지만, 정작 작가의 어조에는 감정적인 부분이 배재 되어 있고, 대사는 우스운데 상황을 그려보면 슬픈, 아이러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셋째 날, 양페이는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슬렁거린다. 이승을 떠나기는 했으나,  매장될 무덤이 없고, 애도해줄 가족도 없는 그였기에 어차피 갈 곳도 없긴 했지만, 화장터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아직 이승에서 정리되지 못한 부분들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의 7일은 사람이 죽고 나서 이승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지나간 삶의 풍경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시공간이다. 이제 이야기는 양페이가 태어나던 날부터 그가 자라온 시절에 대한 것으로 전개된다. 양페이의 생모는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친정으로 가고 있다, 기차 안 화장실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 리는 기차가 순식간에 탯줄을 잘라버리고, 양페이는 21살 젊은 선로전환공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 양진뱌오는 친부모가 양페이를 기차 바퀴에 치여 죽이려고 철길에 버렸다고 믿고, 그를 각별히 아낀다. 하지만 그 덕분에 겨우 이십 대였던 양진뱌오는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도 사귈 수가 없었다. 딱 한번 결혼까지 얘기가 진행되었던 적이 있지만, 결국 그는 어린 양페이를 버릴 수가 없어 결혼을 포기하고 아들을 선택한다. 자신의 핏줄도 아닌 양페이를 위해, 평생을 바치는 것이다. 그저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어떤 이해를 따지지도 않고.

 

그렇게 넷째 날, 다섯 째 날이 이어지면서 죽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 영아 시체를 의료 쓰레기로 취급하는 병원, 정부의 강제 철거 피해자들의 시위 등 소외된 사람들과 사회 문제들이 치밀한 현실 묘사로 드러난다. 세상의 그늘에서 살던 사람들, 가진 자들에게 핍박 받던 사람들, 가족이 없어 죽고 난 뒤 상장도 스스로 달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여진다. 우중충하고 비참한 얘기라 어둡지 않을까 우려할 수도 있지만, 위화는 독자들이 웃음을 잃지 않도록 매 장면 공을 들인다. 경찰의 가혹 행위에 대해내 불알을 돌려달라며 항의하는 시위, 자살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이상한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 진품이 아닌 짝퉁 아이폰4S를 생일 선물로 받고 투신자살한 젊은 여인의 이야기 등은 씁쓸하지만 매우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다. 작가의 낙천 성이 이런 따뜻한 유머를 통해서 인간의 비극을 마치 희극처럼 그려내고 있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이 작품은 양페이가 겪는 7일의 시간을 통해 '생과 사'라는 문제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서러움과 슬픔, 억울함과 분노, 만남과 헤어짐, 부당함과 이기심, 이런 감정들은 모두 죽고 나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감정들이지 않나.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대한 아이러니와 인생의 진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멋진 작품인 것 같다. 작가가 인물에 대해 너무 '아는 척'하거나, 감정에 취해 '연민의 시선' 으로 바라볼 때, 독자들은 오히려 감정 이입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위화처럼 담담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상황을 보여줄 때 오히려 페이지 마다 푹 젖어 있는 감정의 기폭에 따라 마음껏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죽은 뒤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수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다뤄진 적이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다니, 새삼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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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뎀션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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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여기서 죽은 건데.

내가 무사히 죽도록 도왔는데.

넌 계속 살아 있었어.

내가 살 수 있도록 도왔으니까.

 

여기,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던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존 메이어 프레이. 열일곱이던 그는 열여섯 여자친구의 살해혐의로 기소되었고, 사형을 선고 받아 사형수동에서 10년을 보냈다. 살해된 엘리자베스와 그는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부터 사귀어온 사이였다. 그녀의 집안 곳곳에 그의 지문이 있었고, 그녀의 몸에 그의 정액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범죄현장에서 그를 봤다는 목격자도 없었고. 현장 어디에서도 그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쉽게 흥분하는 다혈질에다 소년원도 두어 차례 들락거렸던 그의 이력이 혐오할 대상이 필요했던 사람들에게 적합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주지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딸이 살해당했으니 누군가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했고, 권력을 이용해서 사형제도를 지지하는 배심원들로 배심원단을 꾸리는 게 가능했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그가 무고한지는 작품의 끝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지만, 어쨌든 무고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다른 나라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스토리적인 재미를 위해 그가 '어떻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했고, '어떤' 방법으로 지금의 삶을 살고 있었던 건지에 대한 부분은 밝히지 않겠다. 이 부분은 직접 책을 읽으면서 그 재미를 느껴봐야 하니까 말이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2퍼센트, 혹은 3퍼센트 정도는 잘못된 증거나 강압수사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경우라고 세계적인 연구결과가 밝히고 있다고 한다. 무고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얘기이다. 만약 이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사형이 집행되고 난 뒤에는 무죄가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형폐지론자들은 죄값을 목숨을 빼앗는 걸로 치르는 것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정의실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있을 경우 사형이란 결국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것이고, 사형제도고 존속이 된다고 하더라도 강력범죄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므로, 굳이 국가의 이름으로 살인을 행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사형존치론자들은 억울한 사형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수사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이지 사형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살인자가 사형을 선고 받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갈수록 흉악한 범죄들이 많아졌고, 그들을 수감하느라 국민들의 세금이 쓰이는 것도 말이 안되고,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 유족들도 물론 알고 있다. 살인범이 죽는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가 치뤄 지지 않고,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과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수 십 년간 매일, 매 시간, 죽은 가족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그들에겐 내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증오하는 감정을 흘려 보내고, 슬픔과 회환, 안도의 감정과 함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는 간다.

 

난 마커스빌 교도소가 문을 열 때부터 거기서 일해왔소. 평생 재소자들과 함께 살아온 셈이지. 30년 넘게 일하면서 온갖 종류의 범죄자들을 대해봤고 그 인간들이 저지른 짓도 속속들이 알게 됐소. 난 형벌제도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형벌을 가하는 사회야말로 제대로 된 규범을 가진 사회라고 생각하니까.

 

, 한 가지 예외는 있소. 바로 사형제도. 규범을 가진 사회는 살인하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는 말이오. 사형수동에서 몇 년을 보내고 나서야 그걸 이해하게 됐소. 어느 교도소를 가든, 수사상의 오류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있기 마련이오. 나뿐만이 아니라 교도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관리하는 사형수동에도 그런 무고한 사람들이 있소. 난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제도 존폐에 관해서 논란이 일고는 한다. 작년에 사형제도 존속여부에 대해서 여론 조사를 했을 때. 찬성하는 쪽이 과반수를 훨씬 넘어섰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갈수록 흉악한 범죄들이 많아지자, 사람들 모두 보다 강력한 처벌로 재범 방지와 유사한 다른 사건을 막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국가가 사람을 죽일 권한은 없고, 사법부가 오판을 할 가능성도 있으며, 범죄자의 인권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법적 근거는 헌법에 기초한 것이고, 그 법적인 근거를 믿지 못한다면 애초에 사법부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범죄자의 인권과 생명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는 게 아닐까. 우선 이 작품에서 작가의 입장은 사형제도폐지론자 쪽에 가깝다. 무고한 누명을 쓴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하고, 피해자의 가족의 슬픔보다는 그들이 막무가내로 사형을 요구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고, 실제 죄의 유무보다는 국가적인 입장과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모습도 반영되어 있으니 말이다. 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법적 권한의 부당함도 맞는 말이고, 희생자 유족에게 적법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형제도가 무고한 국민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극적인 정의 실현으로 인해 이후 벌어질 각종 범죄들에 대한 예방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97년 이후로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형대기수라는 명목으로 스무 명 가까이 수감 중인 걸로 알고 있고, 그들 흉악한 범죄자들을 위해 국민들의 세금이 매년 얼마나 낭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 추리소설 학교에서 염건령 교수님의 범죄학 강의를 들을 때,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수치는 아니지만 실제 사형수 한 명당 1년에 쓰이는 금액이 5.000만원인데 그에 비해 피해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 500만원 정도라고 하셨던 걸 기억한다. 사실 가해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떠들면서, 정작 피해자의 보상이나 인권에 대해서는 언론이든 경찰 측이든 배려가 그만큼 되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무조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사형으로 판결이 나는 것도 아니고, 죄질에 따라서 합당하게 판결이 나는 것이므로, 사형제도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갈수록 사형제도 폐지 국가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강력범죄가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죄를 지으면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과거에야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한 것도 아니었고, 강압수사에 의한 자백도 있었고 하니 오판에 대한 우려도 당연한 것이지만, 현재 국내 검찰들의 수사 기반에서는 전혀 의미 없는 걱정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범죄자가 뉘우치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개과천선만을 기다리며 피해자가 받아야 할 상처와 고통, 그리고 사회적 혼란을 묵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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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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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를 애지중지하셨을까.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소중해진다. 그분이 사랑한 나의 좋은 점이 내 안에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건 삶이 비루해지려는 고비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아마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면서 자꾸자꾸 사진을 찍어대듯이 사람이 한세상 살고 나서 남길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다면 자꾸자꾸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손자가 고삐를 잡은 마상에 앉아서 이 힘든 여행이 훗날 손자에게 무엇이 되어 남을까 상상해보며 부디 사랑 받은 기억이 되기를 빌었다

 

요 며칠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더니, 월요일 아침부터 완전 넉 다운된 기분이다. 소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곤 하니 말이다. 마음 상태가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라는 컨디션이다 보니, 잘못 말을 거는 누구에게든 본의 아니게 날카롭게 대꾸를 한다거나, 퉁명스럽게 반응을 보인다거나 하게 되고 말았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일들인데, 이런 소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물론 내가 억지를 부리거나 트집을 잡은 건 아니므로, 상대방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바깥으로 화를 표출하다 보면 결국 내 속이 더 불편하고, 답답해지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진 나를 감싸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수수한 이야기 속에 번지는 유머와 따스함이 화난 내 표정까지 누그러들게 만들었다고 할까. '조금만 너그러워지면 결국 네 속이 편하지 않겠냐'고 웃는 얼굴의 박완서 선생님이 옆에서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다고 할까.

 

2010년에 마지막으로 발표하셨던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었던 기억이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돌아가신 지 이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박완서 선생님의 미발표 글을 볼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어쩌면 행운이다. 이 작품집은 2000년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 집에서 쓰신 글의 모음으로, 짧은 단편들은 그 길이와 상관없이 깊이 있고, 따스하고, 예리하면서도 여유롭다. 특히나 글들 사이사이에 그려진 일러스트들은 글의 맛을 더해주는데, 글과 그림이 더해져서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가슴 뭉클하다. 구구절절 감상을 적기 보다는, 너무 예쁘고도 마음 아픈 단편 하나라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이 작품의 읽어보고 싶게 만들 것 같다. 짧은 단편이니 글의 맛과 그려지는 풍경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러다 별안간 허방을 밟은 것처럼 비참의 밑바닥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평생 제 입밖에 모르는 영감과 살아왔거늘 이제 와서 웬 지옥 불 같은 증오란 말인가. 하긴 저 영감이 무슨 잘못이람. 아들을 저따위로 키운 시어머니 탓을 하다가, 난 또 뭔가. 내가 저 영감을 저렇게 길들인 걸. 자신을 다독거렸다가, 그래봤댔자 남는 건 허망감 밖에 없다. 한바탕 허망감이 휩쓸고 지나가면 뼈에는 숭숭 구멍이 뚫리고 입술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빗장처럼 무겁게 닫힌다.

 

영감님은 마나님이 왜 토라졌는지 아직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십여 년을 해로하면서 어찌 좋은 날만 있었겠는가. 툭하면 토라지기도 잘하지만 뒤끝이 없어 언제 그랬더냐 싶게 헤헤거리기도 잘하는 마누라였다. 그래 버릇해서 영감님은 한 번도 마누라가 왜 토라졌는지 그 근본 원인을 캐 들어간 적이 없다.

 

마나님의 토라짐도, 영감님의 서글픔도 그냥 다 이해가 될 것만 같다.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처럼도 보이고, 이 상황은 지금 우리 세대의 이야기에 대입시켜보아도 공감이 충분히 된다. 게다가 <마음이 그들먹했다. 허방을 밟은 것처럼. 뼈에는 숭숭 구멍이 뚫리고> 이런 단어들, 표현들은 너무나도 정겨우면서도 감정의 결을 미세하게 포착하게 만들어준다. 마나님은 비싼 굴비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귀한 것을 나누어 먹는 그 마음씀씀이를 바랐기에 서운했던 것이고, 영감님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 평생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미처 생각지도 못하는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머를 잊지 않는다. '살을 어찌나 알뜰하게 발라먹었는지 머리와 꼬리를 잇는 등뼈의 가시가 빗으로 써먹어도 좋을 정도'라는 표현에선 피식 웃게 만들고 만다. 마나님이 왜 토라졌는지 모르는 영감님이, 그나마 자신있었던 화해의 방법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대목에선 마음이 싸해지고 먹먹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은 어린아이처럼 되고, 젊을 때 남편의 눈치만 보던 아내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닌 것이다. 사소한 부부간의 투닥 거림이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쓸쓸함으로 이어진다.

 

살다 보면 참 바쁜 일도 많고, 기분이 상하는 일도 많다. 왜 이렇게 시간은 없는데 할 일은 많고, 왜 이렇게 짜증나는 일 투성이고.. 그럴 때 한번 멈추고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이 작품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네 마음이 바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바쁜 것인지, 네 마음이 화가 나서 그런 마음의 형태대로 보이는 세상에 기분이 상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여유를 가진다면,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생각대로 쉬운 것이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 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좀 멀리 보아야겠다고 새삼 다짐을 한다. 뾰쪽한 내 마음을 감싸주는 따듯함이 페이지마다 그득해서 괜시리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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