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 - 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
올린카 비슈티차.드라젠 그루비시치 지음, 박다솜 옮김 / 놀(다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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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돌이켜보면, 이제부터는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셰브를 만난 것도 그런 순간이었다. 그는 내게 사랑의 좋은 것들을 전부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천천히 광기에 잡아 먹히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서서히 그를 옭아매는 광증에는 곧 과대망상이 따라왔다. 그 모든 일이 고작 한 달 만에 일어났다. 정신이 온전한 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길고 느리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지켜보는 것과 같았다. 실제로 그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새크,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기억해줘."     -'우리의 플레이리스트', p.43

이별을 하고 나서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린 다음에 가장 난감한 것이 떠나간 그 혹은 그녀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함께 찍은 사진, 서로에게 쓴 편지, 함께 읽은 영화와 책들... 집안 곳곳, 거리 곳곳에 떠나간 연인에 대한 기억들이 가득할 테고 그 흔적들을 정리해야 비로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보통은 그 사랑의 덧없는 잔해들이 잔혹하고, 슬프고, 실패이기 때문에 흔적을 제거하고, 기억을 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스러운 물건을 버리지 말고, 기억과 함께 저장할 수 있는 보관소가 있다면 어떨까. 결과야 어찌 되었든 당시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순간들이었고, 행복한 추억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주 특별한 보관소 '이별의 박물관'이 탄생하게 된다.

2006, 크로아티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전시가 열렸다. 사랑의 크고 작은 순간들을 기념하는 것처럼이별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4년간 사귄 연인이었던 올린카 비슈티차와 드라젠 그루비시치는 사랑이 끝나고 남은 물건들의 처분을 고민하다 이별 보관소를 만들기로 한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별을 상징하는 물건과 그에 얽힌 사연을 보내왔고, 이별의 박물관은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모든 헤어진 연인들의 망명처 역할을 하고 있다.

 

낡아 해지고 모래가 묻은 이 책들은 최근에 끝난 길었던 사랑의 상징이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프루스트의 책에 중독되었다. 특히 휴가를 가면 나는 그녀에게 그의 소설을 소리 내어 읽어주곤 했다.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알가르베의 타비라섬에서 보낸 몇 번의 여름 동안 읽었다. 우리는 인적 드문 백사장으로 걸어 나가 부목과 대나무, 실크 사롱으로 은신처를 만들고선 대서양의 둔탁한 파도 소리를 배경음 삼아 마치 최면을 거는 듯한 이 산문에 빠져들곤 했다.    - '읽지 못한 결말', p.141

다리가 몇개 남지 않은 지네 인형, 종이접기 꽃, 점토로 만든 여우, 낙하산 장치, 어린이용 자동차, 깨진 거울 조각들, 실리콘 가슴 보형물, 머리카락 타래, 바이올린 로진, 휴대용 체스판, 스틸레토 힐 한짝, 하트 모양 메달 장식, 콘크리트 조각 등등.. 이것들은 이별의 박물관에 사연과 함께 보관된 물건들이다. 이별의 박물관에 전시된 각각의 물건과 사연 들은 사랑이 지속되었던 기간,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와 함께 기록되어 그곳에서 지나간 시간을 영원히 박제 시킨다. 이들의 사연들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한 너무 사소하다. 평범해서 지루하고, 파격적이어서 놀랍기도 하고,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고 내용 또한 가지각색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고, 또 헤어지며 살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가장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별담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지나간 사랑과 이별의 추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 책에는 박물관 설립자 올린카 비슈티차와 드라젠 그루비시치가 직접 선별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애틋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흔하디 흔한, 특별할 것 없는 이별담이 당사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이 책은 그 수많은 이별담 중에서 나쁜 기억은 지워버리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따뜻한 위로를 전해준다. ‘잠시라도 존재했던 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위한 박물관이라는 별칭만큼 이곳의 존재 이유는 특별하다. 그 누구도 현재 진행형인 사랑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버린 이별에 대해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와 헤어지고 힘들어할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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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빛나고 있어요 웅진 모두의 그림책 19
에런 베커 지음, 루시드 폴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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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 모두의 그림책 19권은 에런 베커의 아름다운 아트북이다. 에런 베커하면 <머나먼 여행> <비밀의 문> <끝없는 여행>으로 이어진여행 3부작시리즈로 유명한데, 이번에 만난 책은 기존의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책이었다.

 

아름다운 빛을 어딘가에 고이 담아 소중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시작된 작은 생각이 3년의 치열한 연구와 실험을 거쳐 이 책으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책의 실물을 보게 되면 더욱 놀랄 수밖에 없는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책이다.

 

 

우선 책 표지를 보면 12개의 작고 둥근 창들이 알록달록한 빛깔을 뽐내며 태양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은 창들이 모두 반투명 상태로 앞에서 보아도 책 뒷면까지 보이는 상태이다. 책을 뒤집어 보면 '해를 향해 책을 펼치면 아름다운 빛이 책에 담겨요'라는 문구가 있다. 책을 빛에 비추어 읽으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책이라니,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쳐보기도 전에 기대감에 설레이는 기분이었다.

 

 

빛이 있어요.

첫새벽을 부르는.

 

첫 장을 넘기면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의 이미지를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양한 색상의 빛들이 쌓이게 된다. 표지의 작고 둥근 창들에 있던 여러 색상들이 다채롭게 겹쳐지면서 책을 들어 배경을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선사하는 것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책을 펼쳐보고, 초록빛깔의 잔디를 배경으로도 들어보고, 알록달록한 꽃들을 배경으로도 책을 펼쳐보았다.

 

 

제목인 '당신은 빛나고 있어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의미도 뭉클하게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빛이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드러나 보이는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직 드러나지 않아 다를 뿐이지 우리는 모두 각각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에런 베커의 <머나먼 여행>에서 모두들 너무 바쁘기만 해서 혼자 외롭고 심심했던 소녀가 방 한구석에서 마법의 펜을 발견하고, 그 펜으로 벽에 문을 그려 환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글이 없는 그림책이라서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각자의 판타지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그 작품처럼, <당신은 빛나고 있어요> 역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아트북이다. 그야말로 상상력을 풍부하게 자극할 수 있는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낯선 아트북을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건지, 어떤 방법으로 활용해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이리 저리 들여다 보면 어느 순간, 빛에도 다채로운 빛깔이 숨어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빛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빛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만으로도 놀랍지 않은가. 나는 그 아이디어와 상상력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에런 베커의 그림책을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그의 새로운 시도인 이 아트북도 함께 경험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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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길을 잃었어 I LOVE 그림책
조쉬 펑크 지음, 스티비 루이스 그림, 마술연필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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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전체가 잠들어 있는 어느 새벽, 고요한 맨해튼의 도서관 앞에서 돌사자 용기가 잠에서 깨어난다. 용기는 짝꿍인 인내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인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인내는 매일 밤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도서관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오지 않은 적이 없었던 인내였기에 용기는 걱정이 된다. 그래서 한 번도 주춧돌 위의 자기 자리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용기였지만, 인내를 찾기 위해 도서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게 된다.

크고 웅장한 도서관 안으로 처음 들어와 본 용기는 코끼리 열두 마리만큼 높은 천장과 물소 열 마리만큼 넓은 공간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처럼 느껴진다. 용기는 도서관 내부를 이리 저리 구경하며 미로와도 같은 방들을 헤매고 다닌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방들을 지나가야 인내를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용기는 모리스 센닥과 신시아 라일런트와 제인 욜런과 제리 핑크니와 주디 블룸의 책 사이를 지나다닌다. 그때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용기는 무사히 인내를 만날 수 있을까.

이 책은 뉴욕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자 세계 5대 도서관으로 꼽히는 뉴욕 맨해튼에 자리한뉴욕공공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림책의 주인공인 돌사자 '인내' '용기'는 실제로 5번가 입구의 뉴욕공공도서관 건물 앞을 지키고 있다.

도서관을 누비는 용기와 함께 우리는 애스터 홀, 로스 메인 열람실, 에드나 반스 살로몬 룸 등 뉴욕공공도서관 안의 여러 명소들을 실감나게 방문해볼 수 있다. 뉴욕공공도서관은 3개의 중앙 도서관과 크고 작은 80여 개의 지점 도서관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데, 이 그림책을 통해서 잠시나마 곳곳을 가볼 수 있어서 특별한 경험을 안겨 준다.

 

사실 뉴욕공공도서관은 여행을 간다면 필수 코스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유명한 장소이기도 하다. 맨해튼 한복판에 마치 궁궐처럼 버티고 서 있는 건물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기도 한 곳이니 말이다. 게다가 도서관 내에는 3 800만 점이 넘는 도서와 소장품들이 무려 120km에 달하는 책꽂이에 진열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첫 작품집, 제퍼슨의 독립 선언문 자필 원고 등 희귀본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곳이라 더욱 가치 있는 장소이다. 개인적으로는 넓은 천장과 아치형 창문이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중후한 분위기의 3층 열람실에 있는 긴 테이블에서 책을 읽어 봤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었는데, 이 그림책을 통해서 잠시나마 뉴욕으로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도 들었다.

도서관만큼 길을 잃기에 좋은 장소도 없을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도서관에 갔을 때 미로처럼 빼곡한 서가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장소는 길을 잃고 헤매고 다녀야만 생각지도 못했던 책을 발견하는 깜짝 선물을 안겨주는 곳이기도 하다. 극중 용기와 인내처럼 아무도 없는 한밤의 도서관이라면 정말 멋질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고, 어른들이 읽기에도 너무 따뜻하고 매혹적인 그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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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인문학 - 천천히 걸으며 떠나는 유럽 예술 기행
문갑식 지음, 이서현 사진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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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기말 불꽃처럼 등장한 이들의 주요 무대는 어디였을까? 바로 살롱과 카페다. 빈이라는 도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커피라는 단어와 무척 밀접하게 느껴진다. 빈의 카페를 누비고 다녔던 수필가 알프레트 폴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카페란 혼자이고 싶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 동시에 옆자리에 벗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처럼 예술가와 지식인에게 살롱과 카페는 자유롭게 작품을 구상하고,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설파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p.53~54

사진작가인 아내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문갑식 기자,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매번 여행하는 곳과 관련 있는 예술가와 작품을 찾아본다고 한다. , 소설, 그림, 조각, 음악 등 우리가 걸작이나 명작이라 부르는 작품을 한껏 감상하고 여행지로 떠나면, 단지 눈에 보이는 그 공간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까지 여행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카페 센트럴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프로이트, 폴가, 츠바이크, 로스가 한자리에 모여 열을 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유럽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위해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위대한 예술가 15인의 삶과 예술을 펼쳐놓으며, 그들이 살았던 생생한 삶의 현장까지 소개하고 있다. 클림트, 모차르트, 랭보, 단테…, 그리고 카사노바까지 흥미진진한뒷이야기로 만나는 예술가들의 맨얼굴을 만나 보자. 평범해 보이던 장소도 예술이라는안경을 쓰면 완전히 다르게 보이곤 경험을 할 수 있다.

 

그의 진짜 직업을 둘러싼 논쟁 못지않게 재미있는 것이 존 르카레라는 이름이다. 그는 가명을 쓰는 스파이의 특성상 실명으로 책을 출판할 수 없었고, 상관이 책을 읽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가명으로 내더라도 인세를 받는 것이 문제였는데, 그는 고민 끝에 이런 방법을 썼다. 은행에 입금된 인세를 바로 찾지 않고, 예금액이 일정 액수에 도달하면 연락을 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가 되자, 마침내 은행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전화를 받은 이후 그는 기분 좋게 사표를 던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로망을 실현한 인물이라 하겠다.    p.268~269

개인적으로는 안개 자욱한 스파이와 판타지의 세계를 산책하는 '영국'편이 흥미로웠다. <나니아 연대기>를 탄생시킨 C.S.루이스의 옥스포드, 그리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존 르카레, <자칼의 날>의 프레더릭 포사이드의 런던이다. C.S.루이스와 J.R.R.톨킨이 돈독한 우정을 쌓았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나니아 연대기>가 띠고 있는 기독교적인 색채에 대한 배경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하드보일드 작품들을 좋아하고 즐겨 읽었던 독자로서 존 르카레와 포사이드의 작품과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 또한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을 여행하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바로 산책하듯 여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며 걷는 것, 충분히 시간을 들여 곳곳을 살펴보고 그 곳에 숨겨진 이야기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는 산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보티첼리와 단테의 피렌체, 클림트의 빈, 랭보의 샤를빌 메지에르, 고흐의 생 레미 드 프로방스 등 곳곳에 남아 있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덧 유럽이 가깝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유럽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도 들 것이다. 예술 기행 혹은 문학 기행이라고 해서 여행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는 인문학 서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한 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우리는 책을 통해 세계를 여행한다. 이 책도 여행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을 통해 더 깊게 여행하는 방법, 더 감각적으로 산책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으니 훌륭한 유럽 예술 여행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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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 삶, 용기 그리고 밀림에서 내가 배운 것들
율리아네 쾨프케 지음, 김효정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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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후로 나와 다른 이들이 품은 가장 큰 의문은 3킬로미터 가까운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내가 어떻게 경미한 상처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나 하는 점이었다. 비록 한참 후에는 의식을 되찾은 순간에 감지한 것보다 부상이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추락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내 상처는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쇄골을 제외하면 부러진 데가 없었고 피부에 입은 상처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p.118~119

1971 12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열일곱 살 소녀 율리아네 쾨프케는 엄마와 함께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푸카이파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로 겨우 1시간 거리였고, 오전에 이륙한 비행기의 처음 30분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륙 20분 후 샌드위치와 음료로 구성된 간단한 아침식사가 나왔고, 10분 뒤에는 승무원들이 식사 뒷정리를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승객들은 저마다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폭풍전선을 만났다. 조종사는 뇌우를 피하지 않고 지옥의 먹구름 속으로 똑바로 돌진했고, 환한 대낮이 밤처럼 어두워졌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번개가 내려쳤고, 열린 짐칸에서 머리 위로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고, 물건들이 날아다녔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그렇게 급속하게 비행기는 추락했고,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기적처럼 단 한 명만 빼고는 말이다.

율리아네 쾨프케는 3000미터 상공에서 페루의 다우림으로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인적이 없는 깊은 밀림 속에서, 쇄골이 부러지고 다리에 찢어진 상처를 입은 채 깨어난 그녀는 극적으로 구조될 때까지 무려 11일간 홀로 사투를 벌이고 살아남는다. 무려 3킬로미터 가까운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어떻게 경미한 상처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도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적은 딱 거기까지였을지도 모른다. 밀림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우림은 살벌하기만 한 곳일 테니 말이다. 그곳은 온갖 생명이 들끓는 곳이지만 인적은 찾아 볼 수 없고, 질척대는 습기와 각양각색의 곤충들과 악어와 뱀, 왕대머리수리 등 목숨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요소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율리아네 쾨프케의 부모님은 동물학자였고, 어려서부터 많은 것들을 경험해왔으며, 실제로 밀림에 들어가 살아본 적도 있었다. 당연히 야생 생활에도 익숙했고, 수많은 곤충과 동물들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정말 영화 같은 생존 실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주위에 딱정벌레, 개미, 풍뎅이, 진드기 같은 생물이 몇 마리나 기어다니고 날아다니는지 알아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한테 무슨 소용이 있죠?"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연구를 통해 잘 알게 된 대상만 제대로 보호할 수 있습니다. 숲과 생물다양성을 눈앞의 이익을 위해 파괴하는 것보다 보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유익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겁니다."    p.246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열일곱 소녀는 이제 쉰여섯이 되었다. 그녀를 유일한 생존자로 만든 그날의 추락 사고는 그녀의 나머지 인생 전체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녀의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했다. 그녀가 떨어졌던 팡구아나 밀림이 일생을 걸고 지켜야 할 삶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사고 이후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페루 밀림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학자로서 평생 헌신해왔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부모님을 두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전 세계의 생물다양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따라야 할 행동 규칙들을 숙지하며 밀림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에 기적처럼 추락 사고 후에 생존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인생 행로가 정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민가에서 한참 떨어진 열대 우림 한가운데서 11일 동안 헤매는 일을 아마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견뎌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1971년 비행기 사고가 일어난 지 꼭 40년 만인, 2011년에 독일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물론 그 동안 수많은 곳에서 출간 제의를 받았지만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독일의 거장 영화감독 베르네 헤어조크를 만나 그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희망의 날개>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왕좌의 게임>에 출연한 소피 터너가 영화화 판권을 사들여 조만간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엄마를 잃은 슬픔과 홀로 살아남았다는 자책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한 여성의 성장기이자,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페루 밀림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한 한 동물학자의 분투기는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이다. 실화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스토리라서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작품이기도 하다.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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