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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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이야기 때문에 해부학에 역겨움을 느낀다면,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해부학자들도 서로 다른 관행의 윤리에 대해 계속 논쟁을 벌이고 있고, 심지어 해부학이 정말로 좋은 일을 하는 사례들(예컨대 법의학 분석을 통해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는 경우처럼)에서도 연구의 밑바탕에는 늘 섬뜩한 측면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 법으ㅢ해부학 중 상당 부분은 1849년에 하버드의학대학원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점에서 이 사건은 이 분야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 벌어진 대결이었다.            p.125


역사상 최초의 비윤리적 과학 실험을 설계한 사람은 클레오파트라였다고 한다. 태어나기 전 아기의 성별을 구별하기 위해 사형 선고를 받는 여종이 나올 때마다 끔찍한 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집착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의 광기를 보여주는 클레오파트라의 사례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 책은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넘어 범죄와 비행을 저지르는 원인에 대해서, 위대한 과학적 성취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하고 있다. 


미국 최초의 해부 폭동은 터무니없는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1788년 어느 날 오후, 뉴욕종합병원에서 한 의과대학생이 한 여자의 시신을 해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리에서 놀던 꼬마들이 창밖에 서서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해부에 집중할 수 없어 신경이 쓰였던 학생은 아이들에게 겁을 준다. "이건 네 엄마 팔이야! 내가 방금 파낸 거야!"라고 소리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중에 실제로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은 소년이 있었고,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울어내며 그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삽을 들고 아내의 무덤으로 갔고, 예상대로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의 무덤에서 시신 도굴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격노해 이웃들과 함께 뉴욕종합병원으로 쳐들어가자고 제안했고, 수백 명의 군중이 폭도가 되어 병원으로 향한다. 그걸 계기로 폭도 수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또 다른 병원 건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에도 의과대학교들이 시신을 충분히 확보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 벌어졌던 시신 발굴과 매매, 살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오싹해지는 느낌이다.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라고 말했다. 오래전에 이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코웃음쳤다. 과학자가 착하건 말건 누가 신경 쓴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오로지 발견이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을 쓰고 나서 나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과학은 세계에 대한 사실들의 집합체이며, 그 집합체에 뭔가를 추가하려면 발견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학은 그것을 뛰어넘어 더 큰 것이기도 하다. 과학은 세계에 대해 추론하는 사고방식이자 과정이자 방법으로, 우리의 희망 사항과 편견을 드러내고 그것을 더 심오하고 신뢰할 만한 진실로 대체하도록 도와준다.                 p.436


과학과 스토리텔링, 두 가지 관심사를 결합해 현재 과학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샘 킨은 이 책에서 과학적 성취와 얽혀 있는 잔인하고 섬찟한 범죄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찰스 다윈이 존경한 당대 최고의 박물학자였던 윌리엄 댐피어는 약탈을 일삼은 해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흰개미집 연구자 헨리 스미스먼은 연구 자금 조달을 위해 노예 거래를 했으며, 해부용 시신이 부족했던 해부학자들은 무덤에서 시신을 훔치거나 도굴꾼과 거래를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영웅으로 칭송받던 토머스 에디슨은 개와 말에게 전기 실험을 감행했고, 나치 의사들은 끔찍한 실험을 강제 수용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행했으며, 명성에 눈이 멀어 얼음송곳으로 뇌 수술을 감행한 의사도 있었다. 


지식에 대한 집착과 광기 어린 야망으로 타락한 의사와 과학자들의 사악한 행위들,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과학의 잔인한 역사는 웬만한 범죄 소설 못지 않게 오싹하고 스릴 넘친다. 한때 세상을 들끓게 했던 과학 범죄 사건들은 실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잔인하고, 엽기적이고, 끔찍한 부분이 많았다. 대체 과학자들은 왜 악행을 저지른 것일까? 범죄자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과학적 목적으로 비열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책임을 져야 할 행동을 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이러한 짓을 저지른 이들이 미치광이가 되는 이유가 논리나 이성이나 과학적 안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너무 철저히 하려고 하다가 도가 지나쳐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 버린다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이 책에 수록된 자극적인 사건 사고들은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의 도덕성과 윤리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 준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 아니라, 인성이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이 긴 여운을 남겨준다. 과학과 의학의 어두운 역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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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 좌절의 시대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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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다'는 느낌이 한 사회의 도덕 수준을 높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우리가 불편함을 더 많은 곳에서 더 자주 느끼는 예민한 사람이 되면 사회가 더 나아질까? 타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 도덕적 목표가 될 수 있을까? 2020년 한국사회의 뉴 노멀 중 하나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된다'이다. 이 '사람들'의 자리에 '대중'을 넣느냐 '시민'을 넣느냐에 따라 이 명령에 대한 평가도 천지 차이로 달라질 테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중과 시민으로 명쾌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p.66


작년에 장강명 작가가 중앙일보에 발표한 칼럼이 한참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그 글은 젊었을 때는 생각의 깊이보다 속도에, 완결성보다 경쾌함에 끌렸었지만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고 보니 젊을 때 반짝반짝해 보였던 또래들의 이야기가 얄팍하고 껄렁해서 놀란 적이 여러번 있다고 말하며,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중년들에게 주름 제거 시술보다 시급한 문제가 바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장이 요지인 글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후 그의 명쾌하고 단호한 조언에 대한 다른 중년 남성들의 반응이었다. 그를 공개 저격하는 교수의 글에 이어 장강명 작가가 반박글을 올리기도 했었고, 한 동안 SNS가 떠들썩 했던 기억이 난다. 


장강명 작가의 글은 그렇게 칼럼뿐만 아니라 발표하는 작품마다 자주 이슈가 되곤 한다. 소재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기도 하고, 실제와 유사한 설정으로 실감 나는 리얼리티를 선사하는 동시에 불편함을 자극하기도 하며, 높은 시의성과 현실 감각으로 무장한 허구의 이야기들은 오직 장강명 작가만이 써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작년에 화제였던 바로 그 칼럼이 수록된, 신작 산문집이다. 장강명 작가가 2016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그리고 몇몇 잡지에 쓴 칼럼 백삼십 편 중에서 구십여 편을 추려 책으로 묶은 것이다.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에 복잡한 사유를 풀거나 논증을 치밀하게 펼치기에는 부족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칼럼들은 굉장히 시의 적절하고, 날카롭고, 통찰력 있어 읽으면서 새삼 11년간 일간지 기자로 일했던 그의 이력을 떠올리게 된다. 




내 관찰로는 영리한 청년이었다가 내용물 흐릿한 중년이 된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영리함과 순발력으로 삼심대를 버틴 것이다. 정신의 어떤 부분을 제대로 훈련하지 않은 것이다. 그 훈련은 근력 운동과 흡사하다... 다른 경험들이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내게는 걷기 운동으로 코어 근육을 단련할 수 있다는 소리만큼 전망 없게 들린다. 한 업계에서 이십 년 정도 일하면 부장급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을 원하면 정신에 꾸준히 간접 체험과 지적 자극을 공급해야 한다. 나는 독서 부족이 노년에 마음의 병을 일으킬 거라 믿는다. 삶이 얄팍해지는.             p.372~373


이 책에는 거의 8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풀어내온 칼럼들이라 굉장히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당선, 합격, 계급>, <재수사>등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현실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서 있는 작품들을 발표해온 작가답게 짧은 칼럼으로 만나는 글 속에도 날카로운 문장들과 예리하고도 정확하게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담겨 있다. 여러 주제들을 모은 글이라 각각의 이슈를 네 개로 나누어 구성했다. 사회 분야의 이슈를 다루는 1부, 한국사회의 정치 풍경을 담고 있는 2부, 우리네 삶의 경험과 일상을 다루는 3부, 그리고 책과 영화 등 문화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만날 수 있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글들이 많았는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표제작 '미세 좌절'의 시대라는 글도 인상적이었다. '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 상황에 '미세 좌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했는데, 작가가 만든 말이지만 어찌 그리 찰떡 표현인지 밑줄을 긋는다. 별 것 아닌 불행들이 쌓이면 결국 제아무리 난관적인 이도 굴복하게 마련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네'의 원인을 명확히 짚어낼 수 없다면 그 무력한 분노는 더해질 것이다. 그 외에도 영국의 '외로움 담당 장관' 임명, 코로나19 시절의 배달 노동 문제, 소셜 미디어를 통한 밈의 부작용, 인공지능 시대에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세대 간 충돌 문제, 진보와 보수 두 진영의 민낯, 정치 팬덤, 남북 대립 문제 등등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사유하는 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언제나 부지런히, 성실하게 글을 써온 장강명 작가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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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게이트 1 - 비밀의 숲
바시티 하디 지음, 내털리 스밀리 그림, 김선영 옮김 / 다산어린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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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블루 피터 북 어워드 수상작가 바시티 하디의 그리핀 게이트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리핀 가족은 모어랜드의 국가 안전을 지키는 수호자들이다. 모어랜드 전역을 보여주는 그리핀 지도는 그리핀 가족이 지도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하는 수많은 관문을 지니고 있다. 어디선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리핀 지도에 표시가 되고, 그리핀 가족은 순간 이동 기술을 이용해 문제가 생긴 모어랜드의 모든 장소로 향한다. 그리핀 지도를 발명한 건 그레이스의 증조할머니인데, 지도가 발명된 뒤로 모어랜드의 범죄율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그리핀 가문은 지금껏 지도의 수호자로 활동해왔다. 그레이스의 엄마인 앤 그리핀과 이제 열다섯이 된 오빠 브렌 역시 수호자였고, 그레이스는 2년이 더 지나야 혼자 수호자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레이스는 호빠인 브렌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더니 자신이 더 뛰어난 사람인 양 굴면서 더는 동생과 함께 훈련하려 들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자기방어라면 그레이스도 오빠만큼이나 잘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 그레이스와 브렌은 그리핀 지도의 방에 있었다. 엄마는 외출하셨고, 브렌은 초인종이 울려 현관에 나간 사이, 마침 지도 위에서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파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북쪽의 머드포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호출이었다. 그레이스는 어쩌면 이 기회가 나이 제한이 터무니없는 규칙이란 걸 증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도로 달려가 반짝이는 게이트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핀 가족의 말하는 까마귀인 왓슨과 그레이스는 그렇게 게이트를 넘어 첫 임무를 향해 간다. 담쟁이넝쿠르 원뿔 모양 지붕들, 삐뚤빼뚤한 옛날 건물들이 가득한 그 곳은 동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마을이었다. 마을 광장 너머 '실리아 철물점'이라는 가게 문 앞에서 어떤 여자가 그레이스를 향해 손짓했다. 


"괴물이.... 숲속에 괴물이 있어. 그 괴물이 오늘 낮에 마을을 습격했어. 마을 사람 모두 겁에 질렸어."


몇 주 동안 마을에서 물건들이 없어지고 있어 사람들이 서로를 범인으로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그러다 오늘 낮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괴물은 숲속으로 사라졌고, 바로 수호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하필 그레이스가 출동한 것이다. 과연 그레이스는 괴물을 물리치고, 혼자만의 첫 임무를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공기가 살을 에듯 차갑고, 곳곳에서 흙과 곰팡이의 축축한 냄새가 풍기는 비밀의 숲, 그 속 어딘가에 있을 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라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가득한 작품이다. 게다가 기발한 발명품들이 가득하고, 자기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픈 당찬 소녀가 주인공이다. 겁이 없고, 용감함으로 똘똘 뭉친데다, 똑똑하기 까지 한 우리의 주인공 그레이스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위기를 헤쳐 나간다. 


이 작품은 여러 나라에 출간되었고 영국에서 권위 있는 어린이 문학상인 블루 피터 북도 수상했다. 시리즈가 4권까지 출간되어 있으니, 그레이스의 다음번 모험도 곧 만나볼 수 있게 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판타지와 모험 이야기야말로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고, 조금씩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싶다. 모험심 넘치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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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세탁소 -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하이디 지음, 박주선 옮김 / 북폴리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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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아침에 제가 마지막 남은 원두를 다 썼어요. 그러니 이 캔이 비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고 말할 수도 있죠. '비었다'라고 해서 꼭 빈 것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여백'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미 가득 차 있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여백'으로 가득 차 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여자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고, 들리고, 손에 닿아야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없는' 것일까?                p.49


막다른 골목 안에 위치한 1900년대 초반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세탁소, 사람들은 이곳에 특별히 소중한 것을 맡기곤 했다. 이유는 손님이 가져온 물건이라면 크기나 가격에 상관없이 최대한 깨끗하게 세탁해 돌려주기 때문이다. 성실하고 온화한 표정의 세탁소 주인은 부드러운 이목구비와 동그란 안경 등에서 문학 청년 느낌이 나서 서점 주인에 더 어울려 보이는 인상이다. 실제로 세탁소 한 켠에는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자리하고 있어 작은 도서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등학교 교복 차림에 긴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소녀가 조심스럽게 세탁소로 들어선다. 등교하기 전에 와야 했기에 시간은 새벽 6시 50분이었다. 소녀는 도톰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손수건을 세탁해 달라고 말한다. 보일 듯 말 듯 팥알만한 얼룩이 묻어 있는 손수건이었다. 좋아하는 선배에게 받은 손수건이었는데, '잠시 사귈래?'라는 그의 말에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선배의 고백에 설레었지만 그는 올해 졸업이었고, 곧 대학에 진학할 텐데 앞으로의 일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덥석 사귀어도 되는지 나름 고민이었던 거다. '잠시' 사귀자는 말이 신경 쓰이는 소녀에게 세탁소 사장은 말한다. 인생은 아주 많은 '잠시'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이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계속해서 '눈앞의 현재'에 집중한다면, 매번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 받는 소녀의 고민은 해결될 수 있을까. 




“저 사람 진짜 너무해요. 분명히 샤오루한테 전화로 버리라고 했으면서 왜 그러죠? 어머니의 유품이라면서 왜 애초에 버리라고 했을까요?”

아모도 자책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거야. 많은 일이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 때로는 어떤 것을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단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p.170


첫사랑의 고백으로 고민 중인 10대 소녀의 손수건, 매사에 너무 바쁘고 급한 회사원의 셔츠, 아이를 잃은 엄마의 속싸개, 작가라는 꿈을 이루고 나니 오히려 불안해진 20대 남자의 네모난 손가방 등 세탁소에 도착하는 물품들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문제가 있거나, 고민을 가지고 있다. 세탁소 주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정한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타인의 생각과 기준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고민하는 이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너무 바쁜 이에게는 여백의 의미에 대해서 들려주고, 슬픔에 휩싸여 있는 이에게는 감정과 생각들을 충분히 표현하고 털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고, 자신만의 어려움이 있다. 극중 세탁소의 역할은 모든 옷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있다. 세탁소 사장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그들의 구겨진 감정을 펴주고, 찢어진 관계를 이어 붙이며, 묵은 감정을 씻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이,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세탁소라니, 실제로 존재한다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작가가 심리 상담가로서 상담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온 것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라 작품을 읽으면서 치유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두려움과 실망, 상실감과 자책 등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정화시켜주는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지는데, 가볍게 읽히면서도 따스한 여운이 남아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상처받고, 고단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힐링 소설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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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구픽 콤팩트 에세이 6
남유하 지음 / 구픽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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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소설을 쓰다 보면 사람들에게 듣는 단골 질문이 있다. 바로 "귀신을 믿나요?"라는 질문이다. 나는 유물론자라서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다. 가위에 눌린 적도 있고, 분신사바를 혼자 했을 때 기이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귀신을 '본'적은 없다. 그리고 가위눌림과 분신사바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근거를 찾았기 때문에 그쪽을 더 신봉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한 내 답은 "아니오."다. 나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p.54


영화 <파묘>가 한 동안 화제였다. 호러라는 비주류의 장르로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끌어 모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 작품을 만든 장재현 감독은 <검은 사제들>, <사바하> 등 오컬트, 호러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어 오면서 이 장르에 특화된 재능을 선보여왔는데, 이번 <파묘>로 인해 그 정점에 선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호러를 좋아하는 걸까? 왜 일부러 시간과 비용을 들여 뒷골이 서늘해지고, 소름 끼치는 오싹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 호러 장르를 소비하는 것일까. 어쩌면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감정을 경험하고 싶어서,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호러 이야기 속 그것과는 반대로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가 무섭고 기이한 것들에 끌리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 역시 귀신 들린 집,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저주, 실재하지 않지만 어딘가 진짜 있을 것만 같은 유령, 마음을 휘저어 놓고, 겁에 질리게 만드는 으스스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호러 장르는 호불호가 많이 나뉘는 편이고,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진입 장벽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 장르의 인기 때문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누구나 부담없이 호러 장르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책이 바로 여기 있다. 제목처럼 '호러'가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다니, 깨닫게 해주는 가이드라도 봐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경험담부터 풀어내고 있어 에세이처럼 술술 페이지가 넘어 가는데, 읽다 보면 점점 호러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는 마성의 책이 아닐까 싶다. 




호러 작가는 고달프다. 독자를 만족시키는 일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장르라도 모든 독자의 입맛에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호러는 ─ 호러 장르의 독자라 하더라도 ─ 작품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다. 예를 들어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면서 고어는 싫어할 수도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호러는 인간의 내면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장르라서 그렇다. 누구나 저마다의 공포를 품고 있다. 호러 장르 강의에 들어오는 수강생들에게 "당신의 공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들이 나온다.             p.73


구픽의 콤팩트 에세이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이다. 그 동안 SF, 뚝배기, 타로, 옛날 영화, 백합 장르 등의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호러'편이다. 호러 마니아이자 다양한 호러와 SF 소설을 발표하며 확고한 장르소설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남유하 작가가 실제 호러 작가로서의 고충을 비롯해 호러의 모든 것에 대해 알려준다. 호러란 무엇인지, 사람들은 왜 괴담을 좋아하는지, 호러에 대한 기본 지식들과 호러 거장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정리했다. 러브크래프트, 에드거 앨런 포, 셜리 잭슨, 조이스 캐롤 오츠, 이토 준지, 리처드 매시슨,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등 작가의 취향이 드러나는 추천작 소개도 흥미롭다. 그리고 호러의 하위 장르, 호러와 타 장르의 결합, 나라별 호러의 특징 등을 호러 영화 작품들과 함께 별도로 부록으로 묶었다. 


마지막에 작가의 미발표 단편인 호러 로맨스 작품 '영화관의 유령'도 수록되어 있어, 호러 종합 선물 세트의 대미를 장식한다. 호러 마니아라면 반가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호러 문외한이라면 호러라는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싹틀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 같다. 얇고 가볍지만 알짜배기 정보들로 가득한 구픽의 콤팩트 에세이 시리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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