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보이스 문지 푸른 문학
황선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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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분식집’은 정감 있게 느껴지는 장소중 하나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돈을 모아 떡볶이며 튀김을 시키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곳, 그리고 그곳은 마땅히 놀러 갈 곳 없는 우리들에게 (뭔가를 주문함과 동시에) 수다를 나눌 수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분식집은 왠지 모르게 좀 특별하게 다가온다. 배고픔도 채우고 마음도 채우는, 친구들과 사이를 돈독하게 나누는 그런 곳인 셈이다.


  소설에서도 분식집이 등장한다. 번듯하고 큰 건물 사이에서 용케 버티고 있는 이 분식집은 소년들 사이에서 ‘틈새’로 통한다. 저마다 상처를 가지고 방황을 하는 네 명의 소년들은 사실 그렇게 썩 친밀한 사이는 아니다. 공통점이라고는 6시에서 7시 사이에 틈새에 모여 김밥이나 라면, 떡볶이를 먹는다는 정도. 그 중 한명이자 화자이기도 한 ‘무’는 자신들을 친구라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일회용 관계라고 여길 따름이다.
  ‘무’는 어렸을 적 친구의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것도 무를 힘들게 한다. 아버지는 그를 부정했고, 어머니는 미혼모로 그를 키워왔다. 지금은 다시 어머니와 살고 있지만 어렸을 적 두 번 정도 버려졌던 기억은 그렇게 쉽게 사라진다거나 괜찮아지는 게 아니었다.


  ‘윤’은 형편도 넉넉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틱장애가 있어 입만 열면 욕이 나오는 상황이고, ‘도진’은 유학을 다녀온 후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하는데 무는 그의 밋밋함과 힘없는 말투를 마뜩잖게 생각한다. ‘기하’는 본인 말로는 전교1퍼센트 성적에다 아르바이트로 주가 조작한다고 하는데 실제 뭘 하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다.


  처음에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사이였다. 대화다운 대화 없이 그저 일정한 시간대에 틈새에 들러 저녁을 먹는 사이. 관심도 없었고 서로를 잘 알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어느 사이엔가 조금씩 서로 관여하게 되고, 신경을 쓰게 된다. 귀찮거나 그냥 못 본 척 내버려 두면 되는데 그게 되지 않는 것이다. 어색하고 서툴고 낯간지럽지만 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친구가 되어 간다. 그리고 자신들 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상처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그 순간만큼은 자신에게도 진짜임을 바라보는 ‘무’의 시선에, 그리고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소년들의 모습에 한없이 마음이 뭉클해짐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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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간의 잠 - 에곤 실레
임순만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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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 그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만큼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것 같다. 누군가 에곤 실레의 그림이라며 명화집을 보여주었는데 드로잉이 무척 인상 깊었던 것이다. 그 거칠고 강렬했던 선의 잔상은 아직도 뇌리 속에 남아 가끔씩 불쑥 떠오르곤 한다.


  이 소설은 그런 에곤 실레에 대해, 그가 살았던 삶과 사회,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예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 에곤은 비엔나 북서부 작은 도시 툴른의 기차역 관저 2층 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든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다. 가족으로는 아버지 아돌프, 어머니 마레, 누나 멜라니, 여동생 게르티가 있는데 에곤이 열넷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다. 에곤은 그림 그리는 것만을 좋아할 뿐, 규격화된 생활을 강요하는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다. 고모부이자 후견인인 치하체크는 에곤에게 기술을 배워야지 그림을 공부하면 뭐하냐며 그를 무시하지만 에곤이 16세의 나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입학 허가를 받자 아카데미를 마칠 때까지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

 
  실레는 3학년에 올라가자 역사 화가인 그리펜케를 교수와 갈등을 빚게 된다. 실레는 선이 빠른 편이었는데 그리펜케를은 고전을 강조하며 오랜 시간을 들여 인체습작을 하길 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교수는 학생들에게 분리파 미술에 대한 접근을 금지했다. 분리파는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관영화된 전람회와는 별도로 자기들의 전람회를 스스로 기획하고 조직하기 위해 창립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이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분리파 초대 회장으로 초대되었으며 당시 사회에서 연일 돌풍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리펜케를과 클림트 사이에서 고민하던 실레는 학교에 제시한 아카데미 개혁요구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졸업 1년을 남겨두고 동료들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있더라도, 실레는 무명 화가였고, 가난한 화가였다. 추위와 굶주림의 어려운 생활이 지속된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투박하고 거친, 난해하고 기괴한 면이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분을 맺고 초기에는 그의 영향을 맺기는 하지만, 실레는 장식적인 구석을 버리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그의 자화상 역시 불편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전기고문을 당한 듯 위로 삐친 머리카락, 기괴하게 번쩍거리는 눈빛, 놀란 듯 반쯤 뒤로 돌린 시선, 불안과 고뇌로 가득 찬 얼굴표정, 수술용 메스로 살을 발라낸 듯 야위고 각진 어깨뼈. 화가의 도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실레는 그런 몰골로 참회의 기도를 올리듯 한쪽 손은 올리고, 반대편의 한쪽 무릎은 꿇고 있다. 여기에 화가는 갈색과 녹색을 덧칠해 칙칙한 육체가 부패하는 듯한 느낌을 불어넣었다. 이전의 어떤 화가가 시도했던 역사적 관련성이나 사회성도 찾기 어려운 자화상이다. (p.143)


  클림트는 실레에게 모델을 보내준다. 발레리에 노이칠(발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수모를 겪더라도 실레를 위해 누드모델로서 모든 포즈를 다 취해주고, 심부름도 하며 그의 곁을 지켰지만, 실레는 결국 에디트와 결혼하며 발리를 버렸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초기에 사이가 좋지 못했다. 에디트가 실레의 모델을 해보지만 표현력이 부족했고, 실레는 1차세계대전 때문에 프라하로 징집되어 군대생활을 해야 했다. 남편의 욕구를 받아들이는데 고통스러워하는 에디트였지만 나중에는 남편도, 남편의 그림도 다 받아들이게 된다. 실레 역시 여러 곳으로 전출되다가 육군병참 부대에서 여러 특혜를 제공받게 되면서 생활도 나아지고, 그림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불안하고 불편하던 표정과 포즈 대신 편안함, 신뢰와 확신의 이미지가 많이 담기게 된다. 그러나 1918년, 아내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고, 실레 또한 아내에게 감염되어 세상을 뜨게 된다. 28년 4개월의 삶. 서른을 채우지도 못한 젊은 화가의 이른 죽음이다.


  얼마 안 있으면 에곤 실레 사후 100주년이 된다. 날이 갈수록 재평가 바람을 일으키며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는 에곤 실레. 그가 어려운 삶을 버티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림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 덕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백 년 후에 부는  바람, 에곤 실레의 예술관 그리고 그의 순수성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던 시간이었다.

 

  실레 붐의 근원은 화가가 인간의 고통과 성과 죽음에 대해 집요하게 탐색했고, 그의 그림이 지속적으로 화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화가의 순수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인간적 순수함이 후세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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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의 기억력을 훔쳐라 - 한국 최초 국제 기억력 마스터가 전수하는 "기억력"와 "두뇌 개발"의 모든 것!
정계원 지음 / 베프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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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 이 추리소설은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여전히 전 세계인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셜록 하면 왓슨 역시 떠오르지만, 그래도 셜록이란 인물이 독자들의 마음을 가장 크게 사로잡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특히 셜록은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한 번 본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하여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꺼내 쓰는 능력을 보여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며, 우리도 셜록의 기억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다름 아닌 이 책을 쓴 저자가 그것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셜록을 드라마 감상으로 끝내지 않고 직접 도전하고 연습하고 노력해 2015년 세계 기억력 대회에 참여하여 국제 기억력 마스터 타이틀을 획득한 것이다. 책에는 기억력 스포츠 대회 준비 과정과 실전 경험담,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기억력을 높일 수 있는지 노하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쓴이에 따르면 이 '기억의 궁전'이라는 '장소 기억법'은 과거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쓰이던 기억 방식이라고 한다. 기억력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다들 각자의 머릿속 안경을 통해 다른 이미지로 해석하고 있다. 여정법, 로먼룸, 기억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장소 기억법의 핵심은 장소에 기억해야 할 대상을 이미지화하여 그 장소에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가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의미 부여’다. 기억에 남으려면 조금이라도 다르고 특별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인상적이면 다른 것들 보다 기억이 더 오래가는 법이다. 그러니 좀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이미지화를 넘어서서 오감을 활용해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책 중간중간에는 <기억법 레슨>들이 실려 있는데 ‘원카드 시스템 한글 자음 모음 활용 예시’라든가 ‘몸이 기억해야 하는 기억술의 문법들, 변환의 기법’같은 부분처럼 중요 포인트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장소 기억법을 활용해 장기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친숙한 장소가 도움이 되겠지만, 글쓴이는 사실 무엇이든 장소가 될 수 있으며, 꼭 실제 장소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글쓴이는 오픈 월드라는 컴퓨터 게임을 통해 게임 속 장소를 자신만의 기억의 장소로 만들었다고 한다.
글쓴이가 알려주는, 기억의 궁전을 만드는 네 가지 단계는 다음과 같다.
1)큰 부분으로 나누기->2) 흐름 만들기->3)장소 포인트를 번호로 정리하기->4)장소에 감정담기

 


  우선은 실제 자신의 집을 대상으로 연습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익숙해진 뒤 차근차근 반경을 넓혀나가 장소의 수를 늘린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자신만의 멋진 기억이 궁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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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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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의 언어 마법사’라고 불리는 존 밴빌. 『바다』는 부드럽고 유려한 문장, 살아 숨 쉬는듯한 풍경 묘사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처연한 슬픔을 자신만의 문체로 아름답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는데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존 밴빌의 특유한 분위기, 감각적인 언어에 푹 빠지게 되는 느낌이다.


  주인공 맥스는 아내 애너를 병으로 잃은 뒤, 슬픔을 달래기 위해 어린 시절 여름휴가를 보냈던 바닷가 휴양지를 찾는다. 무려 50여 년 만이지만, 그레이스 가족(칼로 그레이스와 그의 부인, 쌍둥이 남매 클로이와 마일스. 보모인 젊은 여자 로즈)과 처음 만났던 그 집, 시더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다. 현재 그곳은 바버수어 양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되어 있었으며 맥스는 시더스에서 잠시 머무르기로 한다. 어렸을 적 만났던 그레이스 씨네 가족과 보낸 여름, 아내가 살아있었을 때, 그리고 현재. 이야기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오가며 생생한 시선으로 한데 잘 어우러진다.

 


  주인공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니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와 해변의 바스락거리는 모래가 나의 여름은 어땠느냐고 물음표를 던져오는 것 같다. 그런데 쉽게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는다. 하다못해 바로 일주일 전, 아니 엊그제라도 어떤 일이 있었나 되짚어보지만 가물가물한 느낌만이 머릿속을 맴도는 걸 보니 기억은 그새를 못 참고 공기 중으로 휘발되었나 보다. 어쩌겠는가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수밖에.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렸을 때의 어떤 기억들’은 꽤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마치 다시 눈앞에 재생되는 것처럼.


  그날의 온도, 하늘의 색감, 손끝에 닿았던 물건들의 질감, 주변에 함께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나 웃음소리 등등. 어찌 보면 평범하고 소박한 기억의 조각들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햇빛에 반짝반짝하는 나뭇잎처럼 특별하고 강렬한 기억으로 각인된다.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 맥스도 그해 여름 바다에서 보냈던 시간이 그렇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맥스는 이내 깨닫는다. 바닷가 마을은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더 이상 예전의 그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더스는 변한 게 없는 것 같지만 세세히 보면 많은 것들이 변했으며 자신 역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말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이 집의 모형이 원본에 적응을 하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계속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약간씩 균형을 잃었고, 모든 각도가 약간씩 어긋나 있었다. (...중략...) 현실, 지독하게도 자족적인 현실이 내가 기억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휘어잡은 뒤 마구 흔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형태로 맞추자 나는 거의 공황 상태에 이를 뻔했다. 뭔가 귀중한 것이 해체되면서 내 손가락들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빠져나가도록 방기해버렸다. 과거, 그러니까 진짜 과거보다는 우리가 내세우는 과거가 더 중요하다. <『바다』中에서>

 

 

  그래도 바다는 맥스에게 쌍둥이(클로이, 마일스)와 함께 매일같이 시간을 보냈던, 어렸을 적 추억의 장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곳은 주인공에게 있어 두 아이가 바다로 걸어 들어 간 뒤 보이지 않게 된 곳이기도 하기에, 아내의 죽음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이 소설은 왠지 크고 작은 파도가 계속 이어지다가 잔잔하게 수그러들며 차분하게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기분을 자아낸다. 순수함이 사라졌든, 아니면 어른의 눈으로 진짜 현실을 보게 된 것이든 어렸을 적 즐거웠고, 호기심에 가득 찼고, 좋았고, 재밌었던 것들이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안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다. 어쨌든 너무 과거에만 매여 살아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도움 안 되는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과거에서 위안과 위로를 얻지 않던가. 아이러니하지만 현재의 아픔이나 상실감을 다독여주는 것은 과거의 추억일 때가 많다. 아마도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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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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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하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전쟁, 나치, 히틀러가 아닐까 싶다. 전쟁은 특히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남긴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 할지라도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중심에 있던 독일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이 책은 저자 제바스티안 하프너가 도이치 제국의 성립부터 제국 해체까지를 포함해 도이치 제국의 80년 역사를 요약한 책이다. 우선 도이치 제국은 지리적으로 매우 열악했다.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영국, 남쪽과 남동쪽에는 당시 아직 강대국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국가, 동쪽에는 강력한 러시아 제국으로 그야말로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형태였다. 따라서 80년의 역사 동안 얼마나 많은 대립과 화해, 동맹, 긴장 상태, 협상이 오고 갔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이치 제국은 대對덴마크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처럼 전쟁 제국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을 대표하는 의원으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으며, 프로이센이 도이칠란트의 지배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인물이었다. 총리가 되고 나서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지만 정권은 그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리고 제국의 건설과 동시에 창설된 두 개의 새로운 정당, 중앙당과 사회민주당과의 싸움은 그를 힘들게 했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통치 기간에 경제 침체기라는 불운도 감당해야 했다.
  외교적으로는, 사이가 안 좋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있고, 그 사이에서 난감해하는 도이치를 상상하면 될 것 같다. 한때는 세 나라가 [도이치-오스트리아-러시아]의 삼제동맹을 맺기도 하지만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한다. 비스마르크는 양쪽과 각각 친밀하게 지내보려 하지만 어쨌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갈등을 겪고, 이것은 훗날 1차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도이치 또한 강대국 프랑스와의 갈등이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다음 황제 시대에는 영국과의 갈등도 불러오게 된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났다. 책에서는 일목요연하게 전쟁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은 그 시작점이 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그리고 동맹국들에게 어떠한 결실도 없으면서 피로만 쌓이는 소모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두고 싶어도 질 수 없기에, 여기서 조금만 더 버티면 승리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계속 싸워야 했다는 점. 하지만 그 대가로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죽는 상황이기에 전쟁은 역시 끔찍할 따름이다.
  도이칠란트는 내부적으로도 약해져 있었다. 해병 폭동이 일어났고, 이것은 제국 대부분 지역으로 혁명의 형태로 번져갔으며 황제 퇴위를 요구했다. 황제는 네덜란드로 도망쳤고 막스 왕자는 통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도이치에는 군주제 대신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그런데 1차 대전 후, 도이치는 엄청난 전쟁배상금 지불 때문에 힘들어하고,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그대로 두거나 의도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전쟁배상금을 갚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국가적으로는 전쟁배상금을 떨쳐냈다지만, 정작 가난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국민들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궁금했다. 학살과 독재자로 악명 높은 히틀러가 처음에 어떻게 독일에서 급부상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이 책을 통해 그에 대한 부분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차 대전 때 자원병으로 도이치 군대에 입대한 인물이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히틀러의 민족주의-사회주의[=나치] 정당은 점차 2정당에서 1정당으로, 히틀러는 마침내 총리에 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민족주의-사회주의 정당이 강력하게 된 이유로 세 가지(가난, 다시 깨어난 민족주의, 히틀러라는 인물이 힘)를 들었는데 국민들은 가난을 해결해줄 지도자가 필요했고, 히틀러는 자신이 가난을 해결하겠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당시에만 해도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전후戰後 여러 해 동안이나 수많은 사람이 지도자를 갈구했다. 가혹하면서도 영리하고, 질서를 만들어내고 민족의 기강을 바로잡고, 정당 체제를 종결시키면서 스스로 단독 지배권을 차지하고 그것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인물을. 그것도 특히 외교적이고도 전투적인 사람이어야 했다. 중략 그리고 히틀러는 이런 이미지에 잘 들어맞는 듯이 보였다. (...중략...) 그는 무시무시한 웅변 능력, 잔인함, 가혹함, 단호함,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능력, 어려운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탈출구를 찾아내는 재능 등을 지녔다. (p.211)


  히틀러는 제국 총리로 임명되고, 짧은 시간 안에 전권을 장악, '획일화'[=관제화] 과정을 추진한다. 그의 통치수단은 선전과 테러였다. 히틀러 시대 동안에는 완전고용, 군대 재무장, 저항적인 외교정책 승리와 같은 긍정적인 모습도 있지만, 유대인 학살이라는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과 그의 자살에 이르기까지 도이치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후 도이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연합국의 점령 아래에 놓이게 되며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 1961년 베를린 장벽에 가로막힌다.

 


  1990년 10월 3일. 이 날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체제 아래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날이다. 그러나 저자는 통일은 아직 전혀 완성되지 않았다 말한다. 물론 하나로 통일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 번에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그러하다. 그러나 지금은 저자가 죽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만약 저자가 살아있고, 지금의 독일을 바라본다면, 그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국가가 존재하고 역사가 흐르는 한 크고 작은 갈등은 늘 존재하는 만큼, 어쩌면 저자는 21세기 ‘도이치 문제’를 새롭게 제시하며 또 한 번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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