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약,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의 삶과 바꾸어 살 수 있다면?
이처럼 『하얀 성』은 꽤 흥미로운 설정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베네치아의 학자로, 배를 타고 나폴리로 가던 중 터키 함대에 끌려와 이스탄불에서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호자를 만나게 되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과 닮은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만다. 파샤는 그를 호자에게 선물로 주고, 그는 이제 호자의 노예가 되어 호자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는데...

 

 
  그런데 이러한 닮은꼴이라는 설정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어렸을 적 읽었던 명작동화 『왕자와 거지』라든가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도 ‘도플갱어’, ‘닮은꼴’이라는 소재가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평행우주 너머의 ‘또 다른 나’라는 매혹적인 설정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가끔 TV 예능에서도 연예인을 닮았다며 역사 속 인물이나 해외에 사는 일반인의 사진을 놓고 나란히 보여주기도 하는데, 볼 때마다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덩달아 한두 번쯤 해본 것 같다.

 


  소설에서 호자와 ‘나’는 닮은 외모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비슷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당연하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오던 전혀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비는 소설 속에서 호자는 동양을 대표하고 ‘나’는 베네치아에서 왔기에 서양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극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물론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기에 딱 부러지게 동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소설은 좀 더 역사적인 시대를 반영해 호자를 동양인으로 내세우고 있다. 반면 ‘나’는 문화와 종교가 다른 서양인이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교도 취급을 받는 상황이다.

 


  호자는 ‘나’에게 학교에서 배운 것을 포함해 천문학, 의학, 공학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달라고 말한다. 호자는 서양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수없이 나와 토론을 하고 의견을 나누며 지식에 대한 욕구와 학문의 갈증을 채워나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다. 바로 우위가 수시로 바뀌는 두 사람의 관계이다. 기본적으로 호자와 나는 주인과 노예 관계이지만, 호자는 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나는 호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그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나니 나의 우월감은 곧 사라지게 된다. 이제 나는 호자를 부러워한다. 책상 앞에서 스스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호자를 보며 그게 자신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한편, 파샤가 호자보다는 내게 관심을 가졌을 때는 또 우쭐해졌다. 그러나 호자가 황실 점성술사가 되어 파디샤와 친밀해졌을 때, 상황은 다시 역전된다. 자신감에 넘치는 호자와 달리, 나는 호자가 존재를 알아주지 않아 섭섭함을 느낀다. 대가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함께 해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호자 그 자신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상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둘은 학문뿐만 아니라 개인의 어렸을 적 추억이라든가 가족들, 습관 등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대화를 통해 주고받았다. 어느새 그 둘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생각도 행동도 서로를 이해하고 닮은 ‘우리’가 된 것이다.

 


  어느덧 소설의 후반부, 무기를 만들지만 전쟁에서 효과가 없게 되자 모두들 베네치아인 노예가 불운하기 때문이라며 그를 죽이라고 말한다. 호자와 나는 침착하게 말없이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서로의 신분을 바꾼다. 호자는 베네치아에 가고 거기에서 터키에 관한 책을 써서 유명해진다. 그리고 나는 호자의 신분으로 행복하게 살아간다. 여기에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별별 소문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내가 내가 아니라는 소문도 늘 뒤따라 다녔다. 호자가 된 나는 그것을 칠 년 정도 견뎌야 했다. 나는 어느새 그것마저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 나를 불안하게 했던 내 정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제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들 이지요."라고. (p.187)  

 

소설의 중반에 호자가 "왜 나는 나일까?"라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은 신분을 바꾸어 또 다른 나로 살아가게 된다. 그럼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노련한 대답을 읽고 보니 그렇다 아니다 결론내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디에서 살아가든 결국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은 본인 자신이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내면적인 본질은 꾸준히 모색하고 가꾸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들. 다시 한번 이 말을 되새기며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미안 2017-12-0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아정체성을 위한 수많은 탐색경로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그러면서 자신만의 모습을 찾아가는 거 맞지요?

연두빛책갈피 2017-12-05 23:50   좋아요 0 | URL
수많은 탐색경로. 마음에 드는 표현이자 멋진 표현이네요.
자신만의 모습은 스스로만이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니 그 답을 내리기까지 여러 상황에 놓일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닮은 사람을 앞에 두고,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있고, 스스로 느낀바에 의해서도 그렇고요.

그래서 데미안님이 써주신 ‘수많은 탐색경로‘라는 표현에 한번더 고개를 끄덕여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