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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는 없다 1 - 그림과 문학으로 깨우는 공감의 인문학 ㅣ 롤리타는 없다 1
이진숙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책 또는 그림. 그동안에는 각각 전혀 다른 분야의 것이라며 개별적으로 바라보고는 했었다. 비교할 일이 있어도 문학과 문학, 그림과 그림의 대결구조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책, 『롤리타는 없다』는 문학작품과 미술을 하나의 연장선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통합적인 사고는 독자들의 사고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발판 역할을 한다. 1권은 크게 [사랑, 죽음, 예술]의 범주로 나누어지고 있다.
[사랑], 인간이 해야 하는 일
사랑이란 주제에서는 진부한 사랑이더라도 밀당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었던 부그로의 「에로스에게서 자신을 지키려는 젊은 아가씨」, 지속 가능한 사랑을 살펴볼 수 있었던 루소의 소설『신 엘로이즈』가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선택하라면 랭보의 시 「감각」과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를 꼽고 싶다.
여름날 푸른 저녁에, 들길을 걸어가리라.
밀 잎에 찔리며, 잔풀을 밟으며
꿈을 꾸듯이 발끝에는 차가움을 느끼리.
맨머리에는 바람이 감싸는 것을 느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내 영혼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사랑이 샘솟으리.
그러면 나는 집시처럼 멀리, 아주 멀리 떠나리.
자연 속으로 - 마치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
-아르튀르 랭보, 「감각」, 『지옥에서 보낸 한철』에서
(p.29~30)
이 시의 맨 마지막 문장에 주목해보자.
"마치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as happy as if I were with a woman/Heureux, comme avec une femme)."
글쓴이는 이 부분에서 시인이 부정관사 'a'를 씀으로써, 여자는 특정되지 않은 '한' 여자임과 동시에 '모든' 여자일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a'에 해당하는 것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에서는 흐릿한 거울이라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거울은 비너스의 얼굴을 뚜렷하게 비추지 않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랭보의 시와 이 그림을 마주했을 때,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으로 여겨 자신의 상황을 대입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우리의 사랑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 살아가는 기술이 된다.
혹시 인연이 없다고 낙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 말기를. 사람만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주어진 세상을 완전히 특별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랑을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동물이든 공부든 취미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을 하고 열정을 바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더 많은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한다.(p.38)
[죽음],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꽤 불편해하며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결국 죽음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삶의 가치가 소중하다고 해도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느낄 것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겨워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싶기도 하고, 오히려 사는 게 지옥 같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럴 때는 단테의 『신곡』을 읽거나 로댕의 「지옥의 문」을 마주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지옥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 고통과 괴로움이 영원하다고 한다. 그러니 글쓴이는 시간이 흐르는 이곳이 분명 지옥보다 나은 곳이라 말한다. 부디 우리도 시인 릴케가 그러했듯 “삶, 이 놀라움”을 재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젊은이들이여, 죽지 말라. 시간은 당신에게 때로 나쁜 것만을 던지면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흐름을 바꾸어 좋게 흘러갈 수도 있다. 이 지리멸렬한 삶을 견디는 것은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p.135)
[예술], 삶의 순간들을 숨 쉬게 하는 것
사실 ‘예술’은 아직도 낯설고 어렵다. 책은 그나마 텍스트가 있으니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고 해석도 해볼 수 있지만 예술은 무엇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가 많다. 아직은 보는 눈이 부족해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글쓴이의 문장은 좋은 선생님이자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예를 들면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 그랬다. 앙리 마티스의 「생의 기쁨」. 그림을 봐도 그냥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조언에 따라 논리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색깔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니 그림이 한결 편하고 자유롭게 다가오는 기분이다.
당시 마티스는 삶이 행복했다기보다 삶을 행복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삶의 여러 군데가 아직 삐걱거렸지만 적어도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캔버스 위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그는 캔버스 위에 온통 입안에 군침이 도는 주황색, 오렌지색, 레몬색을 잔뜩 올렸다. 그 위에 초록색, 라벤더색 같은 감미로운 색을 토핑해서 캔버스 위의 삶을 달콤새콤한 기쁨에 찬 무엇으로 만들었다. (p.173)
책을 읽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이것은 단순하게 작품들끼리의 공통분모만을 살펴보는 게 아닌,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인문학적 모색임을 말이다. 그림과 문학작품을 넘나들며 삶에 관한 다양한 고찰, 공감을 할 수 있었던 책! 글쓴이 덕분에 작품 감상은 물론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무척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