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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요즘 들어 종종 느끼는 게 있다. 어렸을 때는 동갑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누군가와 금방 친구가 되었는데 지금은 그게 참 어렵다고.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나이만 같으면 다 친구라는 사고방식은 엄청난 단순함이었고, 아무것도 따질 필요 없이 바로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시절만의 순수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나는 가끔 그 시절의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점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서로 마음을 내보이며 친구가 되는 것. 이제 그것은 꽤 드물게 찾아오는 일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의 간단명료함은 대체 언제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제는 약간의 경계심, 점점 많아지는 생각, 한 발자국 물러서는 조심성 같은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중이다.
문화교류 행사로 일본 고등학교에서 온 쇼코와 동갑내기 나 「쇼코의 미소」,
독일에서 서로를 챙기며 가깝게 지냈지만 베트남전쟁 이야기에 한순간 마음의 거리가 생겨버린 응웬 아줌마와 엄마 「씬짜오, 씬짜오」,
어렸을 적, 할머니의 옷 수선집에 일자리를 얻은 순애이모와 언니가 생긴 것이 무척 좋았던 엄마의 이야기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프랑스 수도원에서 봉사자로 지내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던 나와 케냐 출신의 한지「한지와 영주」,
대학 시절 노래패 활동을 같이 했던 나와 미진 선배, 러시아에 도착해 미진선배를 아는 율랴와 함께 선배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먼 곳에서 온 노래」,
딸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은 엄마와 뉴스에 잠깐 비춘 엄마의 모습에 엄마를 찾으러 광화문 광장으로 나선 딸「미카엘라」,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던 손녀를 생각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편지를 쓰는 할머니「비밀」.
책 소개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서로에 대한 마음의 ‘기댐’과 ‘기댐 받음’”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다 보니 7개의 단편은 저마다 다 다른 인물들과 삶을 다루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안에는 친밀감, 그리고 관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쇼코의 미소」에서 쇼코는 한국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동갑내기인 소유의 집에 머물게 된다. 지방 도시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공통점, 게다가 같은 나이이기에 두 소녀는 금방 친해지게 된다. 쇼코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편지를 주고받지만 어느새 연락이 끊기게 되고, 우연히 쇼코 소식을 듣게 된 소유는 대학교 사학년 여름, 쇼코의 집에 찾아간다. 쇼코는 예전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유를 맞이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다.
어렸을 때 쇼코가 지었던 웃음과 같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차갑고 어른스럽게 보이던 그 웃음에서 나는 쇼코의 나약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읽었다. 쇼코를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쇼코는 약했다.
분명히 쇼코도 그때 느끼고 있었겠지. 내가 쇼코보다 정신적으로 더 강하고 힘센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마음 한쪽이 부서져버린 한 인간을 보며 나는 무슨 일인지 이상한 우월감에 휩싸였다. (「쇼코의 미소」, p.26)
이번 장면은 그랬지만 다음에는 상황이 반대가 되기도 한다. 쇼코는 자신감이 가득하고 잘 지내는 반면 소유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스스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나 대등할 것만 같았던 관계, 그러나 삶이든 마음이든 전반적으로 한쪽은 안정적인 상황이고 다른 한쪽은 위축된 상황이 되면 대개의 사이는 높낮이와 거리감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여전히 보고 싶고 생각도 나고 애정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약간의 불편함도 느낀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평형은 점점 깨어지게 된다. 작가는 이런 부분을 다른 단편 속에서도 잘 표현하고 있다.
가끔씩 통화를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이모는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엄마 또한 그랬다. 엄마는 살얼음판을 딛듯이 이모의 상처가 닿지 않은 마음들만을 디디려 했고 이모는 엄마가 이모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할까봐 애써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심지어 이모가 안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조차 몰랐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p.114)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p.115)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한때 상대에게 무엇이든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던, 끈끈하고 소중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만큼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상관없이 오로지 너와 내가 중심이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상대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기댔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주어진 환경과 삶 속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고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 보니 사람은 어느새 변한다. 사실 변화는 나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지 그 변화라는 게 사람 사이에서 마음의 형태, 기댐이 더욱 견고해지는 방향이면 좋겠지만, 대부분 단단함에서 약해지는 쪽으로 변해가기에 안타깝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프고 슬프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 특별함이 여전히 계속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언제까지고 그 생각에만 머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냥 받아들이고 흘러가게 둘 줄도 알기를.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 우리는 그래야 한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한지와 영주」, p.164~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