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롤리타는 없다 2 - 그림과 문학으로 깨우는 공감의 인문학 ㅣ 롤리타는 없다 2
이진숙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고전을 통해 공감 능력과 인문학적 감성을 키워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롤리타는 없다』. 이 책은 문학과 미술이 만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중요한 가치들을 다루는 책이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한다. 2권에서는 욕망, 비애, 역사의 큰 카테고리로 나뉘는데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글들을 중심으로 공감한 부분들을 풀어나갈까 한다.
[욕망],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발튀스의 「꿈꾸는 테레즈」
의자 위에 무릎을 세우고 기대어 있는 소녀가 있다. 발튀스의 그림 「꿈꾸는 테레즈」는 소설『롤리타』보다 먼저 나온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치 소설의 한 부분을 재현하는 듯해 묘한 위험마저 느껴지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소설 『롤리타』에서 롤리타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지낼 곳도 없고 고아원에 맡겨지는 게 싫어 의붓아버지 험버트 험버트와 지내게 된다. 그런데 험버트 험버트는 어린 소녀의 삶을 빼앗고 유린해놓고는 오히려 서로 사랑했다며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비뚤어진 욕망에 불과하고 인간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글쓴이는 말한다. 나보코프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인간의 어두운 심리와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는 점. 일방적인 소통 관계는 아무리 미화하려고 노력해도 결코 미화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니 험버트 험버트가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더라도 그의 추악함은 절대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진실은 화려한 언어로 가릴 수 없는 법이다.
[비애],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존 밀레이의 「오필리아」
아버지의 죽음, 삼촌과 어머니의 결혼, 그리고 나타나는 아버지의 유령.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을 텐데 햄릿은 어머니와의 대화중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인물이 숙부인 줄 알고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 뒤에 있었던 건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오필라이의 아버지, 재상 폴로니어스였다. 결국 오필리아는 햄릿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미쳐서 물에 빠져 삶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존 밀레이는 이런 비극적 여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으로 재탄생시켰다. 「오필리아」는 죽음을 다루면서도 치밀한 묘사와 사실적 풍경 덕분에 어쩐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To be, or Not to be?" 햄릿하면 빠뜨릴 수 없는 대사다. 글쓴이는 "또는(or)" 이라는 접속사가 전혀 상관없는 상반된 두 문장을 결합시키고 충돌을 일으켜 주인공들을 혼란에 빠뜨린다고 언급한다. 인물들 간의 갈등과 고통, 불행 속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였을까. 그래서인지 햄릿의 혼란스러움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다. 그런데 우리도 늘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이 or을 사이에 두고 수없이 고민해야 하는 날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는 잘 선택할 수 있기를, 부디 개인의 운명이 빠져나올 수 없는 비극으로 내달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역사],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과 브뤼헐의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흔히들 역사를 말할 때 위인들, 이름난 인물들과 그들이 활약했던 사건들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영웅들만의 것도 아니고, 그들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름 없고 평범한 모두에 의해 이루어진 것, 라블레와 브뤼헐은 민중 문화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예술을 펼쳐 내고 있다.
프랑스의 문인 라블레와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억압당하던 웃음을 복권시킨 것은 16세기. 이때는 르네상스의 발흥과 종교개혁 등 중세의 낡은 관행들을 뚫고 근대가 새롭게 움트던 시대였다.
라블레와 브뤼헐은 탁월한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웃음 속에는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과 연민,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희망이 동시에 담겨 있다. 웃음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p.207)
웃을 일이 없는 요즘, 특히 지금의 사회를 보고 있자면 21세기에도 그러한 웃음은 아주 많이 필요해 보인다. '팡타그뤼엘리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팡타그뤼엘리즘이란 라블레가 작품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표현한 말로 "평화로이 즐겁고 건강하게 언제나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이 웃으며 현재를 이겨낼 수 있기를! 그리고 모두가 팡타그뤼엘리즘을 이루며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그날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