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겨울 2020 소설 보다
이미상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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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2021년의 1월이었다. 다행이라고 쓴다. 크게 상처 될만한 일도 크게 기뻐할 만한 일도 없었기에. 아침 6시와 7시 사이에 일어나려고 애를 쓴 게 다였다. 도서관에 한 번도 못 간 게 아쉽기는 하다. 1월 계획을 세울 때 책은 열 권을 읽자고 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오랜만에 공부를 하다 보니 책은 뒷전이었다. 달력을 보니 여덟 권을 읽었다. 2월은. 더 분발해보자.


『소설보다 겨울 2020』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틈틈이 읽어나갔다. 정확한 시간을 재어보진 않았지만 단편 하나를 읽는데 한 시간은 걸리는 듯하다. 하루에 세 시간 투자를 못해서 일주일 내내 읽었다. '겨울, 이 계절의 소설'이라는 부제가 달린 세 편의 소설. 전하영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지난 기억들을 한꺼번에 불러 모았다. 생각만 해도 볼이 뜨거워지는 부끄러운 과거가. 나와 나를 둘러싼 치졸한 이야깃거리가 생각났다.


오랜만에 읽는 단편인데 걸리는 문장 없이 읽혀서 좋았다. 우리는 정상적인 삶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기억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담담히 말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소설 속 화자의 모습이 지금의 나와 비슷한 처지 같아서 더 연민이 갔다. 미래는 없고 과거만 있는 삶. 현재는 과거에 묻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다들 그러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 척 할 뿐.


임현의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는 얼마 전에 있었던 나의 바보 같은 행동을 환기시킨다. 시간 강사로 일하는 '나'는 극도로 조심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대학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강사로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은 어이없게도 실패로 돌아간다.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삶의 돌발성임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해보지만 이미 일어난 일 앞에서 자책감만 깊어간다.


나는 이 세계에서 완전무결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는 의문으로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는 나아간다. 그럴 수 없다는 답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하나라고 착각한 세계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우리를 혼란으로 몰고 간다.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내가 등장해 화를 내기도 한다.


제목이 특이한 이미상의 「여자가 지하철 할 때」는 분열된 자아마저도 사랑으로 감싸는 소설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뻗어나가는 이야기는 지하철 곳곳을 통통 튀어 날아간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 믿기지 않지만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가고 있다.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나를 꿈꾸기도 하지만 「여자가 지하철 할 때」의 문장인 '사무실은 언제나 아득히 멀다'를 되뇌어 보며 인과 관계없는 우연한 인생을 살고 있으니 저 알아서 흘러가겠지 약간의 체념으로 무기력을 이긴다.


더 조심해질 순 없었을까. 자책했던 2020년 12월의 어느 시간. 그런데 얼마나 더 조심하며 살아야 해. 화가 나고 우울하기도 했다. 찢긴 마음은 복원하기 어려워서 내버려 두었더니 단단한 부분만 남았다. 오늘은 도서관에 다녀왔다. 가방 가득 책을 빌리고 아이들로 가득한 버스에 탔다. 아는 얼굴도 있었던 듯. 책이 나를 기다고 있다. 나보다 부지런하고 재능 많은 이들이 쓴 책은 나의 세계에 실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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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 - 하루를 두 배로 사는 단 하나의 습관
김유진 지음 / 토네이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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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30분에 시작하는 학원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6시 30분에 일어나는 요즘이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니 안다. 수업을 받으면서 나 자신에게 무척이나 실망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낸 건지 회의감마저 들었다. 기준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다르지만 한동안은 나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영어 자판을 외우지도 못해. 엑셀 프로그램을 사용하지도 못해.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도 못해.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실은 취직하고 싶어) 수업을 신청해서 듣고 있다. 하루 네 시간. 아침형 인간이 아닌지라 오전 수업은 힘이 든다. 처음 며칠 수업을 들으며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일찍 일어나자. 일어나서 영타 연습을 하자.


알람 소리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머리맡에 다이소에서 산 시계를 놓아두고 눈이 떠지면 시계를 본다. 처음에는 8시 가까이에 일어났다(알람은 8시 15분에 맞춰 놓았다). 불안감 때문일까. 며칠 지나자 6시와 7시 사이에 눈을 뜨게 됐다. 졸린 눈으로 컴퓨터를 켜고 한컴 타자 연습을 한다. 음악은 아무래도 신나는 걸로.


이제는 6시 30분 정도에 일어난다. 한 달 정도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영타는 빨리 치냐고.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한글만큼은 능숙하지 못하다. 아, 위대한 한글. 엑셀에 들어가는 함수 계산식을 설명하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아무 말이 없으셨다. 다들 이해를 못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던 듯하다. 나조차도 그랬으니까. 여긴 어디. 난 누구. 하는 마음으로 머리 위에는 물음표를 가득 단 채.


수업을 멈추시고 유퀴즈 온더 블럭에 나온 김유진 변호사 이야기를 해주셨다.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는 그분의 이야기, "내가 특별하면 평범한 하루가 좋고 내가 평범하면 특별한 하루가 좋다."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단다. 더불어 김유진 변호사가 쓴 책도 추천해 주시면서 읽어보기를 권했다. 우리가 이렇게 매일 힘든 수업을 받고 있지만 이 같은 평범한 하루가 쌓여 특별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며.


그래도 함수는 어려워.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와서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를 읽었다. 책에는 자신이 왜 새벽 기상을 실천하게 됐는지부터 현재를 어떻게 꾸리며 사는지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유명 인사들의 루틴도 소개해 주고 있다. 매일매일이 평범하다. 특별한 날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는다.


눈 뜨면 출근하고 업무 보고 퇴근한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잠이 드는 매일이다. 김유진 변호사 역시 그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나 잘하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어느 날 눈을 떴는데 새벽 4시 30분이었다.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모두 잠든 시간에 나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유진 변호사는 하루를 이렇게 나눈다. 새벽은 "내가 주도하는 시간", 그 밖의 시간은 "운명에 맡기는 시간"이라고. 나만의 시간이 없다고 투덜될 게 아니다. 전날 일찍 잠을 자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만들면 되는 거다. 심지어 돈도 들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 많은 걸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음악을 들으며 하루 계획을 짜거나 책을 읽고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면 그걸 하면 된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되는 거다. 새벽은. 나에게 먼저 묻는다. 무얼 하고 싶은지. 지금 무기력하고 슬픈 기분이 왜 드는지. 하루에 하나씩 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는다. 그걸 왜 새벽에 하냐고 묻는 이가 있을 것 같다. 일하고 공부하는 것도 피곤한 마당에. 알람이 울리는 순간 안다. 이제부터 타의에 의한 하루가 시작됨을.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이 펼쳐짐을.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는 의지를 다지고 싶어서 읽었다. 낯선 컴퓨터 용어를 듣다가 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니 그 순간이 밝게 빛났다. 누구나 딸 수 있는 자격증 시험을 고시 공부처럼 하고 있는 나. 호들갑과 유난을 떨면서 공부하고 있다. 좋아하는 책 읽기는 잠시 미뤄둔 채.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를 읽으니 알겠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었음을. 2021년 새해도 밝았고 새로운 한 해에 의지를 다지고 싶은 이에게 추천한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었구나 그것도 넘치게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새벽 4시 30분은 무리다. 난 못해. 할 수도 있다. 똑같이 남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부족한 컴퓨터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6시 30분에 일어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앞으로도 쭈욱.


책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그래서 이제는 시간 관리를 하지 않는다. 대신 나 자신을 관리한다. 이를 위해 매일 조금씩, 천천히, 하나씩 성장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렇게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의미 있는 보상이 주어졌다. 어떤 일이든 꾸준하게 계속하는 습관은 물론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할 원동력이 생긴 것이다." 맞는 말. 시간을 관리하겠다는 턱도 없는 발상 보다 나를 관리하며 특별한 내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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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
미즈키 히로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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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소재의 다양성에 놀란다.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해 일본 소설을 많이 읽곤 했다. 이사카 코타로, 시마다 소지, 유즈키 아사코, 마리 유키코, 하라 료 같은 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을 둘러싼 음험함과 일상에 숨어 있는 광기와 비밀스러움을 파헤치는 소설을 좋아한다.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분명 불합리하고 꺼림칙한 일이었는데.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며 대리 만족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인간이 가진 어두움을 표현하고 사건으로 이야기를 확장해 가는 구조를 보고 있으면 경이로움을 느낀다. 미즈키 히로미의 소설 『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는 노동 문제를 다룬 미스터리 구조의 소설이다. '미스터리 소설'이 아닌 '미스터리 구조의 소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미스터리 중심이 아닌 노동 문제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미스터리는 슈가 파우더처럼 빵에 살짝 뿌려진 정도.


노동 문제로도 미스터리 소설을 쓸 수 있구나. 과연 세심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일상 밀착형 소설을 좋아한다. 하나 더 얹어서 미스터리가 추가되면 금상첨화. 소설을 읽는 이유는 나마저도 잊고 싶은 기분일 때 일상의 모든 것을 제거하고 싶은 심정 때문이다.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팽개쳐둔 채 이야기에 빠진다. 그 안에서 나와 비슷한 인물을 만난다. 바보 같으며 어리석은 행동으로 일관하는 주인공을 응원한다.


노무사라는 직업을 알고는 있었으나 대체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자세히 몰랐다. 노무 관련한 문제로 정보를 얻고 싶어 인터넷 검색과 유튜브를 보면서 지금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일을 하는 직업이구나를 알았다. 노무사, 노동 문제, 사회보험이라는 소재로 소설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읽어나갈 책을 정리하던 중 『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를 발견했다. 아싸.


책 표지에 쓰인 '직장내불화, 출산휴가, 연장근로수당, 재량노동제, 산재, 해고, 악덕고용주, 남일같지않은, 긴장감, 몰입도, UP'이라는 문구를 보는데 왜 내 심장이 나댈까. 소설은 스물여섯의 여성 히나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학교를 졸업했지만 정규직으로 입사하지 못했다. 파견 회사에 등록했고 총무부 일자리를 얻었다. 총무부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사회보험, 월급, 세금 계산 등 돈에 관한 일을 맡아 하면서 회의감이 들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오해를 받아 계약 연장을 하지 못했다. 히나코는 자신의 손으로 단단한 무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파견 회사에서 보내오는 메일에 노무사 관련 수업이 있다는 걸 알았고 총무부 일도 해봤으니 자격증을 따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일하면서 3년을 준비했다. 시험에 합격해 당당히 노무사가 되었다.


히나코가 야마다노무사사무소에서 일하며 겪는 에피소드 다섯 편이 실렸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소재로 『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는 전개된다. 보험료가 올라가지 않으려고 근무 시간을 조정한다. 잔업 수당을 줄 수 없는 회사는 거짓으로 퇴근 기록을 남긴다. 여성의 결혼과 출산을 좋게 보지 않는 시선이 존재한다. 파견직이라는 이유로 우정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당당히 노무사가 되었지만 히나코는 클라이언트인 회사에 가면 어린 취급을 받는다. 또래 여성이 계획적으로 다가와 자신의 고충을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히나코는 자신의 직업적 소임을 다하고 일에서 오는 보람을 중시하며 일을 처리해 나간다. 응원합니다. 히나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다감한 성격으로 클라이언트로 모시는 회사의 노무 문제를 해결한다.


히나코가 노무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에피소드 「장식보다, 불빛보다」가 좋았다. 현실의 나에게 삶의 의지를 보내준다. 병아리 노무사에서 성장한 히나코의 다음 이야기도 읽고 싶다. 노동 미스터리 소설, 『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노동 지식을 소설 안에 쉽게 풀어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지식도 쌓고. 나약한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다는 응원도 셀프로 할 수 있다. 나 자신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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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 이슬아 서평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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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시와 소설을 썼다. 낙서 수준까지는 아니고 뭐가 좀 돼보려고 시도 차원에서 썼다. 응모도 했다. 떨어지는 게 일. 처음엔 서운했다가 나중에는 그 감정마저도 사라졌다. 재능과 소질은 둘째치고 끈기와 노력도 없다는 게 함정. 쓰다가 안되면 읽었다. 읽다 보니 알겠더라. 세상에 읽을거리는 많고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쓰고 있다. 나보다 부지런하고 재능도 많은 작가들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는 마음으로 이제는 읽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쓰지 않아도 사는데 읽지 않고는 못 살겠다. 그래서 읽는다. 박완서 소설가는 전쟁 중에 피란을 갔는데 책 한 권을 못 챙겨갔다. 읽을 것이 없어 도배지 대신 벽에 붙인 신문지를 읽었다더라. 스마트폰을 쓰기 전, 화장실에 갈 때는 꼭 책을 챙겨 갔다. 이렇게 쓰니 옛날 사람 같네. 책 읽기 말고도 즐거운 게 한가득이지만 결국 돌고 돌아와 책을 읽는다. 한동안 텔레비전 보기에 빠져 살았는데.


종이책과 전자책을 번갈아 가면서 읽는다. 올해부터는 종이책을 읽을 때는 밑줄을 치면서 읽으리라 계획을 세웠다. 이런 것도 계획이 될지 모르겠지만. 기가 막힌 문장,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 내가 쓰리라 예상한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더 깊이 있는 사람으로 2021년을 보내고 싶다. 이슬아의 서평집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뒤늦게 읽었다. 근래에 내가 쓰는 글이란 죄다 서평이다. 서평이라고 쓰니 대단한 거 같은데 서평을 빙자한 나의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다, 서평은. 능력치 최고인 이들이 쓴 글에 내 이야기를 밀어 넣는다. 논리적인 분석은 없고 왜 읽었는지 읽으면서 어떤 마음이었는지 읽고 나서 나의 내면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쓴다. 책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은 이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을 쓴다. 감각도 없어서 책 사진을 예쁘게 찍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라이언을 옆에 두고 찍을 뿐이다. 폰카라서 화질도 구리다.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읽으며 응원뽕 맞았다. 서평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쓸 필요 없구나. 그저 친한 누군가에게 이 책 한 번 읽어봐, 나는 좋았는데 너는 어떨까 하는 기분으로 쓰면 되는구나, 깨달았다. 이슬아는 연인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서평을 완성해 나간다. 서평을 써 본 사람은 안다. 책을 읽고 나서 좋다, 좋은데 이 좋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가 고민스럽다. 그래 쓰기가 망설여진다.


이슬아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책의 좋음과 괜찮음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준다. 얼마 전에 황성희의 시집 『가차 없는 나의 촉법 소녀』를 사서 읽었다. 리뷰 대회에 응모하려고. 시 리뷰는 학교 다닐 때 빼고는 써보지를 않아서 포기했다.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모르기도 하거니와 시를 읽고 분석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에는 시집 리뷰도 있다.


이슬아는 욕심부리지 않고 시집에 있는 시 한 편을 골라 엄마에게 연인에게 읽어보기를 권한다. 시가 가지고 있는 서글픔과 아련함을 말해준다. 그렇구나. 평론가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저 한 편의 시를 누군가에게 권하고 그이가 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면 되는구나.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먼저 읽고 『가차 없는 나의 촉법 소녀』를 읽었으면 뭐라도 썼을 텐데. 아쉽다.


영어와 수학식이 범벅된 책을 몇 날 며칠 들여다보다가 한글을 읽으니 그것도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책을 추천하는 글을 읽으니 그중에 읽은 책도 꽤 되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구나, 헛살지 않았구나를 느끼며 자존감이 한껏 높아졌다. 이슬아의 글은 그렇다. 없는 자존감도 생기게 해준다. 아니 없던 게 아니라 있었는데 꽁꽁 숨어 버려서 찾지 못한 자존감을 찾아준다.


나도 쓸 수 있다. 좋은 책은 그런 게 아닐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글쓰기의 욕망을 마구 불러내주는. 너도 쓸 수 있어, 인마. 말해주는 책. 이슬아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부지런함을 읽는 사람에게 나눠준다. 매일매일 글을 쓰다니. 저 사람 미쳤는데 대단해. 책을 읽으면 매일이 주말인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잠시 잊는 것이다. 내일의 출근과 자동이체 금액과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읽고 나서 글을 쓴다면 매번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데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읽고 서평을 쓰려고 했는데 나의 다짐과 각오만을 늘어놓고 말았다. 기어이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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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김포공항 쏜살 문고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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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어 평소에는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있다. 바로 아침 일찍 일어나기. 머리맡에 시계를 두고 잔다. 알람은 듣기 싫어 맞춰 놓지 않은 채 눈이 떠지면 틈틈이 시간을 확인한다. 긴장 상태에서 자서 며칠은 피곤했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괜찮아졌다. 새벽 네시에서 다섯 시 사이 눈을 떠 시간을 확인, 안심하고 다시 잔다. 한두 시간은 더 잘 수 있겠는데. 이러면서. 정확하게 여섯 시에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 즈음에 일어난다. 1월이니까. 1월에는 뭐든 계획을 한 번씩 세워 보고 실천하다가 실패도 해보고 그래도 열한 달이나 남았으니까.


박완서의 네 편의 소설이 실린 『이별의 김포공항』을 오전 시간에 읽었다. 브이로그 보면 오전에 일어나 공부를 하거나 요가를 하던데. 작고 귀여운 판형의 쏜살 문고 시리즈라 읽고 있으면 시간이 정말 쏜살처럼 흐른다(이 거지 같은 비유). 사는 게 시시하고 텔레비전 보는 것도 지칠 때. 시간이 많은데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을 때. 젊은 작가의 소설이라더니 나이를 보면 그다지 젊지는 않지만 그래도 출판사에서 미는 작가인 것 같아 책을 사서 읽었는데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나는 몰라 내가 왜 이걸 샀을까. 마케팅에 놀아난 것일까. 자책하는 나에게 박완서의 소설을 건네준다.


얼마 전에 읽은, 차마 제목을 밝힐 수 없는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이제 글렀구나. 한국 문학의 첨단에서 멀어졌구나 했다. 첨단에서 멀어지면 다시 그리운 시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나는 그곳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꿰뚫는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야기꾼의 품에 안겨본다. 『이별의 김포공항』은 박완서 소설의 정수만을 모아 놓았다. 박완서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자가 있다면 이 책을 자신 있게 건넨다.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는 박완서 소설.


먼저 표제작인 「이별의 김포공항」은 외국병 그것도 미국병에 걸린 자식들의 사연을 가진 노파가 등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어찌어찌 미군 부대에 빌어서 살아가는 자식들은 하나같이 미국에 가지 못해 안달이다. 한바탕 난리굿을 친 끝에 그들은 각자 미국은 못 가고 브라질, 괌, 서독으로 탈출하듯 이 나라를 떠난다. 그 소동을 기억하는 노파의 손녀. 노파는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갈 수 있게 되었고 손녀는 떠나기 전 할머니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추억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안온한 생활에 드리운 불안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남들이 봤을 때 괜찮게 살아가는 두 여자. 「지렁이 울음소리」의 여자는 작은 일탈을 감행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권태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님을 보여준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속 여자는 세 번 결혼을 한다. 감행한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허풍 앞에서 여자는 부끄러움을 배우고 싶다고 느낀다.


「카메라와 워커」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조카를 키운 여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 너 좋으라고 내 뜻이 네 뜻이 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지만 실패한 여자의 허무를 그려내는 소설이다. 네 편의 소설에 등장한 여자들의 서사는 과거를 날아와 현재에 도착한다. 흘러간 몇 십 년 전의 과거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반복되고 있는 허무요, 슬픔이다. 나는 비뚤어진 시선으로 인간을 그리는 소설이 좋다.


올바르고 괜찮은 척 점잔을 떠는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전부 집어치워 소리고 지르고 싶어진다. 박완서의 소설은 그런 게 없다. 인간이 가진 속물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꼬이고 부정적인 모습을 하나하나 꺼내서 해체하듯 보여준다. 인간의 속이 이렇게 시꺼멓다고. 아울러 악랄한 모습도 숨기고 있다고. 나, 당신, 우리가 위선을 떨고 위악을 부리며 살아간다. 말해준다.


올바른 인간으로 살아볼까. 새벽에 일어나 이것저것 하는 척하는데. 이 짓도 얼마 안 갈지 모른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는 일찍이 글렀는데. 다만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다.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는 「이별의 김포공항」 속 노파는 자신의 삶을 뿌리가 뽑혔다고 생각한다. 뿌리가 뽑힌들 어떠랴.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단단한 땅이 있으면 내 자리인 척 비비는 것도 좋을 터이다. 각자의 자리는 없다. 자리가 있다고 믿으며 살아갈 뿐이다.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 대신 더는 나빠질 수 없다는 오기로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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