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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평점 :
뉴스를 보지 않은지 한 달이 넘었다. 일상의 변화란 가령 이런 것이다. 저녁 시간에 3사의 뉴스를 보지 않으니 시간이 남아돈다. 뭘 봐야 할지 몰라 5년 전의 드라마를 보고 있다. 분노가 잦아들었다. 각 방송사별 편파적인 뉴스의 논조에 대해 헐뜯지 않아도 되니 화가 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기사 헤드라인을 읽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일을 하다가도 청소를 하다가도 한숨을 내쉬고 있진 않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 타인의 감정에 동화되지 않고 있다. 뭘 모르니 대체로 일상은 그럭저럭 흘러가고 있다. 다시 뉴스를 봐야 할까. 생각이 들지만 당분간은 좀. 대신 유튜브를 열심히 본다. 집 치우는 거. 집 꾸미는 거. 보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하다가도 힘이 나지 않아 보고만 있는 게 함정.
김누리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한 번에 읽지 못했다. 뉴스를 보지 않고 남아도는 시간에 책이라도 열심히 읽으면 생산적인 사람이 될 텐데. 넷플릭스는 많이 재밌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주인공 윤지호는 이런 말을 한다. 애정과 사랑이 있는 결혼은 금수저들만이 하는 거라고. 집이 없는 지호는 집이 있지만 2048년까지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세희와 계약 결혼을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경쟁이라는 걸 한 쪽으로 치워버린 채 살아간 나조차도 이렇게 힘이 든 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무한 경쟁의 압박 속에서. 대학교 갔더니 취업해야 하고 취업했더니 결혼해야 하고. 당연한 수순처럼 그래야만 하는 삶. 가장 확실한 건 부동산밖에 없다고 젊은 애들이 말하며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사는 삶.
내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건. 한 출판사 유튜브를 구독해 보고 있는데. 음. 보고 있으면 뭐랄까. 자격지심의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때 꿈을 크게 가지고 행동력을 끌어냈더라면 어땠을까. 괜히 후회해 봤자 속만 상하는 거 아는데. 나에게도 기회라는 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나의 피해 망상에 근거를 달아준다.
사실 피해 망상이 아니라고도 해주는 책이다. 개인의 불행에 개인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는 것이다. 독일과 한국의 사례를 제시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준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68혁명의 개념과 실체를 들려준다. 정치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사회, 교육, 복지, 일상의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알려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건. 내가 노력하지 않은 탓이라고. 잘못된 생각이었다. 애초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독일의 경우 대학생이 되면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까지 지원해 준다. 학교 자체에 서열이 없으며 입학시험을 치르고도 사정이 있으면 나중에 가도 된단다. 단답형과 주관식 시험이 없다. 아이들을 경쟁 사회 속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니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드러내고 자격지심을 내보인다. 내가 저기 들어갔으면 저보다 높은 직급이 됐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꼬여 있다. 우리의 불행이 당연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나니 속이 시원해진 건 아니지만 나의 분노, 나의 망상, 나의 치졸함을 받아들여도 되겠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2022년의 대한민국이 이렇다는 걸 믿기 힘들다.
정신 차리고 1분 괜찮으면 5분, 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다시 뉴스를 보긴 봐야 한다. 뭘 모르는 건 나쁜 거니까. 돈 많아서 이민 가지 않은 이상 흉악한 꼴을 계속 봐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데. 그런 내 탓이 아니고 사회 구조의 탓이라는 걸 인지하면 고통의 크기는 줄어들 수 있으니까. 기회가 없는 사회에서 기회가 한 번이라도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나를 착취해서는 안 된다. 내가 느끼는 죄의식을 버리면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