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선인장 하나 키우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언감생심.
자꾸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다. 꼭 해야 할 일이 있고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할 일도 할 말도 못 하고 있는 것 같은. 영혼 없이 웃고 영혼 없이 말한다. 크게 웃을 일이 아닌데 크게 웃다 보니 크게 웃어도 되는 것 같아 크게 웃는다. 한심한데 한심하면 또 어떤가.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필요가 있지만 노력이라는 말이 제일 뭣 같아서 아무것도 안 한다.
이기호의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에 나오는 주인공 강아지 이시봉의 성품은 '명랑'이란다. 성별은 수컷이고 예방접종은 했다. 견종은 비숑 프리제. 이것만 가지고 이시봉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좀 더 자세히 이시봉의 생애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시봉의 성품이 '명랑'이라서 인간사와 관계없이 명랑함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졌다.
무엇이 괜찮아졌냐고 하면. 지금의 상황이. 이시봉의 주인 이시습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사람들이 없는 새벽에 이시봉과 산에 올라 술을 마시는 것도 전화벨이 울리면 극도로 예민해져 순간 아무것도 못하는 나의 상황도. 소설 속에는 이시습 옆에 명랑한 강아지 이시봉이 있고 소설 밖에서는 명랑한 이시봉을 소설로 만날 수 있어서. 괜히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에 잘못 넣어둔 게 아닐까 싶은 이시봉의 포카를 계속 들여다봤다.
이시봉 없는 삶.
이시봉 대신 다른 명사를 넣어도 된다. 이시습에게 이시봉 없는 삶은.
소설은 새벽 산책만을 기다리면서 집에서 시습과 함께 살아가는(시현과 엄마도 있지만 주로 시봉을 돌보는 건 시습이다.) 이시봉의 생각지도 못한 과거가 소환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우울한 명랑함으로 그려낸다. 그렇다. 우울한데도 명랑할 수 있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매 맞지만 명랑한 년 이모님 강현남처럼. 이 공식에 모든 걸 대입할 수 있다. 사기 당했지만 명랑한. 아픈데 명랑한. 슬픔을 명랑으로 덮으려는 것 같은 수작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기 당하고 아프고 슬퍼도 모름지기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 시습이 브리딩 업체로부터 반려견 분양 계약서를 받으며 시현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부분에서 나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동물 복지에 관한 심오한. 인간의 우매함. 자본주의의 천박함.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조용히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을 내밀겠다. 책이 많이 두꺼워서 당황하셨죠? 그 안에 웬 강아지 포카가 들어 있어서 더 황당하셨죠? 책을 열면 작가의 사인 옆에 강아지 발 도장도 있어서 더 그러셨죠? 그러지 말고 읽어봐여. 한 번 읽으면 멈출 수 없어여.
어떻게 그저 열심히 산 것뿐인데 희망보다는 절망이 낙관보다는 비관이 더 자주 찾아오죠. 남한테 큰 소리 한 번 안 내고(음식에 머리카락이 나와도 그저 꾹 참는데) 세금 체납 없이 살았는데 왜 이런 불행들이 닥쳐 오는지 실의에 빠져 누워만 있었는데 명랑하다 못해 순수한 귀요미 이시봉과 그런 이시봉을 조건 없이 아낌없이 사랑하는 시습의 무해한 사랑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하나 정도는 괜찮아진다.
매일 술을 먹는 건 이러한 시간들을 버티기 위함이었다는 것. 그런 시습의 곁에 명랑한 이시봉이 있는 것처럼 나의 곁에도 명랑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 사랑은 명랑이라는 걸 알고 나면 씻고 버스를 타고 다이소에 가서 장바구니에 물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게 사랑. 알면서도 당해주는 게 사랑. 알면 알수록 나의 모든 걸 전부 다 주고 싶은 게 사랑.
이시봉과 이시습은 그런 사랑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누군가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건 내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나의 염원이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속에 나오는 모두가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속에 나오지 않는 나 또한 마찬가지로 하루에 한 번씩은 큰소리로 웃었으면 좋겠다. 왠지 그렇게 될 거 같은 예감이 든다. 명랑한 시봉과 함께라면. 명랑한 ♡♡과 함께라면.
하트에 각자 좋아하는 걸 넣으면 된다. 시봉 없는 삶이 아닌 시봉과 함께 하는 삶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