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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명세서 - 자아에 가격 매기기
김나연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10월
평점 :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용카드가 없다. 카카오뱅크와 농협 체크카드 두 장으로 살고 있다. 신용카드의 좋은 점은 알고 있다. 잘 쓰고 잘 갚으면 신용점수가 올라가고 무이자 할부를 요리조리 활용하면 큰 금액대의 물건을 부담 없이 살 수 있다. 오늘의 나는 못 갚지만 다음 달의 나는 갚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싫어서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았다. 신용점수가 지금의 나와는 무슨 상황인데 하는 것과 큰 금액대의 물건은 어떻게 사든 부담이 된다. 할부는 빚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간 목록에 올라와 있는 김나연의 에세이 『가난의 명세서』는 표지부터 직관적이었다. 표지에는 저자의 카드 승인 내역이 누적금액까지 그대로 올라와 있다. 제목도 그러했다. 최근 나의 화두는 가난이기에 이러한 제목을 보고서 책을 사지 않으면 번뇌를 계속 앓을 것 같았다. 책의 표현대로 '가난할 때는 이 궁핍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서, 풍족해지니 이걸 잃을 날이 곧 올 것만 같아서, 매일이 불안했다'는 정확히 그간의 나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몸이 가난을 기억한다는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에 버금가는 진리였다, 살아보니.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든 행동의 기저에는 가난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란 의심이 들 정도로 매사에 자신감과 의욕이 없다.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고르는 일에서조차 망설이고 주저한다. 가성비와 가심비 사이에서 고민하는 동안 결국 사지 않기로 한다.(책은 예외다. 한두 번 정도 고민하고 구매한다.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의 비유에 긍정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소비.) 계속 생각한다. 그렇게 아껴서 죽을 때 가져갈래?
아니. 안 가져가는 게 아니라 못 가져가. 그러니 궁상 좀 그만 떨어. 마음의 소리는 가차없다.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대신 체크카드를 쓰면서 합리적인 소비를 해보려고 하지만 한 번씩 마음의 고삐가 풀릴 때가 있지만 그마저도 체크카드 안에 돈이 있을 때나 가능해서 요즘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김나연의 『가난의 명세서』를 읽는 동안 6개월 전에 나와 지금의 나를 심각하게 비교할 수 있었다.
저자 김나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다. 평범이란 가장 이루기 어려운 삶의 형태라는 점도 깨닫는다, 살면서. 평범은 도달할 수 없어서 김나연은 스스로를 평범의 범주 안에 넣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책은 두 가지의 챕터로 나눠져 있다. 할부로 결제한 10월 카드 명세서와 일시불 명세서로. 각각의 지출 내역에 그에 따라오는 이야기가 현실에 닿아 있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추리와 스릴러 소설도 아닌 가난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이토록 긴장하면서 읽을 수 있다니. 『가난의 명세서』는 현실을 압도한다.
되지도 않는 희망과 낙관을 달콤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난과 빈곤이 주는 사회 경제적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해서 읽는 사람마저 심각해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가난의 명세서』는 오늘 여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들을 비춘다. 카드 영수증으로 말이다. 쿠팡에서 5만 원 이상 사면 무이자 할부가 되고 (그래서 저자는 꼭 5만 원을 채워서 산다.) 구매처마다 무이자 개월 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거 이런 거 또 나만 모르고 있었지.
가난한 집에서 공부를 잘해서 가난한 집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김나연은 최선과 열심을 다한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다. 살만해지면 병이 든다. 아등바등해서 겨우 돈을 모았지만 그 돈은 가족의 병원비로 쓰이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할 때는 궁핍의 끝을 알 수 없어서 풍족해질 때는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까 (잃을 게 많지 않은데도 가지고 있는 이것마저 잃을까 싶어서.) 걱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사회학을 공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저자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 2025년이 아직 다 가지는 않았지만 올해 읽은 에세이 중 제일 좋았다, 『가난의 명세서』는. 저자의 다른 책은 종이책이 절판되어서 전자책으로 구매했다. 그 책도 후기가 좋아서 기대된다.
가난한 자들이 행해야 할 수칙 같은 건 없다. 몸이 가난을 기억한다고 암울하게 생각하지만 죽을 때 가져갈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나를 가스라이팅 하면 갖고 싶은 북 커버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직 2025년이 끝나지 않았지만 올해 제일 잘한 소비는 다이소 북 커버이다. 자꾸 책을 넣어서 읽고 싶게 만든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나 책 좀 읽는다는 뿌듯함과 만족을 오천 원으로 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