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맨
스티븐 킹 지음, 최세진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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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러닝 맨』이 나왔다는 건 매일 신간 목록 새로고침을 하면서 알고는 있었다. 결정적으로 구매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민음사TV의 쇼츠를 보고서다. 민음사 해외문학 편집자 민경 님의 압도적인 소설 설명을 들으며 어머 이건 사야 해(알고 보니 그녀는 영업의 달인이었다. 민경 님이 옥장판을 팔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이 밈처럼 떠돌고 있었다.) 홀린 듯이 결제창의 비번을 입력하고 있었다. 


때는 1982년 스티븐 킹이 문학적 성취를 위해 부캐를 만들었으니 그 이름은 리차드 바크만이었다. 『러닝 맨』은 리차드 바크만의 이름으로 나온 소설로 2025년을 배경으로 한다. 놀랍게도 (스티븐 킹은 항상 놀랍다. 지금까지 소설을 쓰고 있으며 소설의 편차가 심하지 않다는 것) 1982년의 소설은 2025년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해 그려낸다. 


빈부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공기의 질마저 떨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사능에 노출된 채 노동 현장에 투입된다. 출산은 기적에 가까운 시대에 리처즈는 어린 딸 캐서린을 위해 결심을 한다. 아이는 독감에 걸렸지만 제대로 된 약을 쓰지도 못하고 의사를 만나 진료를 보는 건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다. 리처즈는 직장을 잃었고 생계는 그의 아내가 매춘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해결하는 지경이다. 


리처즈는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서바이벌 쇼 '러닝 맨'에 참가하기로 한다. '러닝 맨'은 사냥꾼과 경찰, 사람들의 감시를 피해 30일간 도주에 성공하면 상금을 받을 수 있다. 신체검사를 받고 쇼에 출연한 리처즈는 카메라와 사람들의 감시 속에서 목숨을 건 도망을 시작한다. 이야기의 달인 스티븐 킹의 화력은 막강하다. 짧은 챕터로 이루어져 읽는 재미와 속도를 선사한다. 


상금을 건 서바이벌 쇼. 목숨을 담보로 한. 어딘가 익숙한 포맷이지 않은가. 소설가는 예언가이기도 하다는걸(소설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무한의 세계를 그려내므로) 한 번 더 실감한다. 어디든지 카메라가 있으며 사람들은 돈에 열광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인간성 상실에 망실을 거듭해 가는 2025년의 풍경을 1982년에 상상한다.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는 지구의 현실. 


리처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이 가진 유일한 목숨을 걸고서 게임에 참가한다. 그 속에서 게임사 프리비가 감춘 비밀을 알아내고 이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러닝 맨』의 결말을 읽으며 스티븐 킹 다운 박력과 에너지는 가히 최고라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끝으로 가는 동안의 쾌감은 이야기의 제왕이 암울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선사하는 선물이다. 


『러닝 맨』은 소설이면서 현재를 정확히 그려낸 예언서다. 소설과 예언서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러닝 맨』. 탑승할 준비가 되었는가. 한 번 올라타면 중간에 내릴 수 없다. 리처즈를 따라 달려가야 한다. 끝까지. (매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투표에 스티븐 킹의 이름을 적는다. 2026년에도 그러할 것이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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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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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산에 가보지 않았다. 마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한 권 읽었을 뿐이다. 가보지도 않고 겨우 읽었으면서 마산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읽은 자는 가보지 않은 자에 비해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모르니까 마음 놓고 떠들 수 있는 호기로움을 보여주겠다. 김기창의 소설 『마산』은 그렇다. 마산을 알아도 몰라도 마산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


가보았으나 이제는 가 볼 수 없는 도시 마산. 경상남도 중부에 있었던 도시. 마산이라는 이름 대신 마산합포구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


『마산』을 새벽의 병원 소파에서 읽었다. 두 달 넘게 얼굴에 생긴 피부병이 낫질 않아 괴로웠다. 검색 끝에 찾은 피부과는 대기가 길다고 했다. 새벽에 도착에 순서를 적었다. 일찍 갔다고 생각했는데 열한 번 째였다. 다들 피부과 아프고 그런데도 부지런하구나.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청소부는 쉼 없이 걸레질을 했다. 청소를 마친 청소부는 나에게 다가와 종교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겪은 신천지 신도와의 일화를 늘어놓았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던가. 분명 처음 만나는 이임에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길래 하품을 참으며 대꾸를 해주었다. 손에는 읽다만 『마산』을 들고서. 


내 손에는 1974년 원하지 않는 회사 동료들과 등반을 하는 동미가 있는데. 난 동미의 서사를 좀 더 알고 싶은데 청소부는 청소가 끝났음에도 돌아가질 않고 있었다. 병원은 9시부터 환자를 받는데 그 시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꾸 얼굴이 붉어지고 뜨거워지고 잠은 오고 『마산』의 검은 바다와 직장에서 잘릴 위기에 처한 동미와 나의 피부병과 청소부의 수다와.


겨우 진료를 마치고(조그만 연고 하나에 만 원이라니.) 『마산』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1974년의 동미의 시간을 거쳐 1999년 IMF를 살아내는 준구의 시간으로 2021년 코로나 때문에 인생이 망하리라는 예감에 휩싸인 은재와 태웅의 서사로 『마산』은 우리가 겪어낸 고비들을 마산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풀어간다. 


IMF는 학생 시절이라 위기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사보던 만화 잡지의 가격이 올라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하나 남았다. 문제는 은재와 태웅이 살아간 2021년의 코로나 시절이다. 팔 년 넘게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아서 어리둥절한 채 학원을 다녔고 자격증 시험을 보고 다른 직장을 구했다. 은재와 태웅은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를 대마를 재배하는 일로 넘기려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소리는 하지 말자. 살아남으려면 현실에서는 더 한 일도 할 수 있다. 『마산』의 청춘들에게는 대마가 손바닥에 놓였을 뿐이다. 예전 일을 기억하기 싫은데 싫어도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후회를 하지 않기로 나를 달랜다.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한동안 그 시절을 생각한다. 후회가 드는 순간 다른 기억으로 대체한다. 


『마산』을 읽고 나니 쓸쓸했다.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살아가는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라기보다는 동미와 준구, 은재와 태웅의 내일이 짐작되기 때문이다. 살면서 제일 쓸모없다고 여겼던 건 희망이다. 살아보니 그래도 쓸모 있다고 여기는 것 또한 희망이다. 쓸모없지만 쓸모가 있어야 할 것 같은 희망. 오늘보다 내일이 망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희망 때문에 생겨난다. 


빨개진 얼굴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청소를 한다. 내일의 나는 피부가 낫길 바라며 진료를 기다리며 청소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한 권의 책을 들고 있을 것 같다. 아니 오늘의 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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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 - 중년의 불안을 쓸고 닦는 법
송은주 지음 / 시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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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쇼츠의 세계에서 본 영상 하나. 나이 지극한 할머니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 할머니는 40대라고 말한다. 뜻밖에 대답에 당황해서 왜 그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다시 묻는다. 마흔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나이라면서 그때로 돌아가면 공부든 뭐든 다 할 수 있다면서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나이는 스무 살도 서른도 아닌 마흔이다. 


우문에 현답으로 말하는 재치를 가질 수 있는 건 할머니 나이여서 가능하다. 마흔이 지나고 오십에 청소노동자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다. 직관적인 제목의 『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는 직장인으로서 살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이 단절된 채 겪은 우울과 불안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우울했고 불안했다가 아닌 자신이 읽은 책에 빗대어 상황을 그려낸다. 전직 인터넷 서점의 직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말이다. 맞벌이에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면서 겪는 경제적 불안에 함몰되지 않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로서의 갈망은 삶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든다. 죽음이 쉽지 삶은 어렵다. 


『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는 어려운 삶을 살아내는 엄마, 아내의 자리를 거쳐 한 인간의 삶의 분투기가 담겨 있다. 우연히(삶은 인과 관계가 없다. 핍진성 있는 앞과 뒤를 구현하는 건 말조차 되지 않는다.) 병원 청소 일이 나왔고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들 덕분에 돈을 모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라진다. 나 하나 정도는 이제 하고 싶은 대로 살아봐도 되지 않겠냐는 각성이 들었다. 


그래서 병원 청소 일을 한다. 그전에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게 전부였다. 전혀 다른 인생의 노선이 펼쳐진 것이다. 새벽에 서 너 시간 일을 하면 150~160만 원을 벌 수 있다. 내가 움직여 돈을 벌수 있다는 감각을 잊은지 오래였다. 남들에게는 푼돈으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친구와 함께 병원 청소 일을 하기 시작했고 곧 그 일이 자신에게 맞다는 걸 깨닫는다. 


청소 일을 하면서 많은 게 달라진다. 돈을 벌어서 내가 필요한 걸 산다. 외벌이로 살 때와는 다른 경험이다. 저금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생의 반환점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았지만 책을 읽고 책을 놓지 않으려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한 저력 덕분인지 『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의 문장과 사유의 내공은 깊다. 


그가 읽어서 들려주는 책의 목록을 보기만 했는데도 내가 뿌듯하다. 알아주지 않아도 모르면 모를수록 더욱 읽고 써야 한다는 그래야 삶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나의 쓸모를 내가 재단하지 않을 것. 나이가 들어도 경력이 없어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한 군데 정도는 있다. 이력서에 쓸 때나 나이 때문에 주눅이 들지 막상 면접 보고 합격해서 일할 때에는 나이의 감각이 필요 없다. 나이가 많아도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신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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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잖아
김의경 외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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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맞닿아 있는 소설을 읽는 일은 즐겁다. 고된 업무로 온몸이 절여진 듯한 기분에도 현실에 충실한 소설이라면 읽을 수 있다. 소설의 상황이 내가 겪은 상황 같고 소설의 인물이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인물 같아서 이입이 잘 된다.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소설 모음집을 좋아한다, 이러한 점에서. 집을 주제로 한 세 번째 기획 소설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잖아』가 나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제목만 보고 샀는데 사고 나서야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소설 모음집이라는 걸 알았다. 제목을 잘 뽑았다, 그러한 점에서.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모두 집에 대해 말한다. 캣맘 자매의 집 구하기 이야기(「애완동물 사육 불가」부터 빌라 전세 사기를 당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마빈 히메이어 씨의 이상한 가게」로 넘어가면서 소설 속에서 펼쳐 놓는 가혹한 현실 때문에 압도 당한다. 어쩔 땐 많이 불안하고 어쩔 땐 조금 불안한, 늘 불안이 기본값인 상황에서 말이다. 


비단 집이 없어서 일 수도 있지만 삶은 매일이 어렵고 불편하다. 가만히 있는데도 물벼락을 맞아 온몸이 축축해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일 수도 있다. 괜찮아요?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다.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잖아』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이 드는 한 주에 월, 화, 수, 목, 금(소설이 다섯 편이니까)에 한 편씩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공통점은 집을 원한다는 거다. 펜트하우스나 큰 평수의 집 말고 나와 내 반려동물과 내 짐을 들일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요즘 시대에 그건 특별함을 바라는 거라는 소리는 하지 말자. 입고 먹고 사는 것은 기본이란다. 이 기본이 이제는 특별해졌겠지만 그래도 우리 기본은 지키면서 지켜주면서 살아가자.


정명섭은 작가노트에서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잘못이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말로 위로를 건넨다. 그가 쓴 『평수의 그림자』는 어느 날 사람의 그림자가 그 사람이 사는 집의 그림자로 보이는 이야기를 그린다. 발상의 기발함 뒤에 피해를 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마음까지 시간을 들여 소설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라는 끝도 없이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내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암담함을 그린 정진영의 『밀어내기』 역시 읽고 나면 마음이 스산해진다. 최선의 선택이었음에도 지금의 상황 때문에 잘못된 선택이라고 자책하게 만든다. 후회가 남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기에 끌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렸다고 하는데 이 리뷰에서는 네 편의 이야기만을 다뤘다. 마지막 한 편 최유안의 「베이트 볼」의 정보는 아껴 두겠다. 이 또한 집 한 채에 담긴 서글픈 시절을 다뤘다. 우리 집은 진정 우리 집이 될 수 있을까.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잖아』는 우리 집이란 무엇일까를 묻는다. 각자의 대답은 다르겠지만 공통된 마음은 어찌 됐든 우리 집 한 채 있으면 좋겠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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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올리브에게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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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필요했다. 피곤하고 어두운 지금을 잊을 수 있는. 


여백이 필요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글자들이 아닌 여백이. 


몇 주 전에 사 둔 책이 떠올랐다. 읽으려는 의욕이 앞선 시기에 산 책. 지금은 읽고 싶어도 그저 눈으로만 책이 거기 있다는 걸 아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야기와 여백이 필요하므로 그 책을 읽으면 되겠다 싶었다. 잠이 쏟아졌지만 책장을 펼치면 손 글씨와 우표가 붙어 있는 책을 소중하게 꼬옥 안았다. 옆으로 휘어진 나무와 그 아래 의자가 있는 장을 넘기면 개 한 마리가 따라오라는 듯한 그림이 나온다. 


녀석의 바람대로 그림과 이야기 속으로 따라 걸어간다. 루리의 『나나 올리브에게』는 이렇게 시작한다. 손 글씨와 우표, 알록달록한 그림은 나만을 위해 준비한 유일무이한 책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착각이어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나에게 와서. 지친 내가 시간을 얻어서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을 수 있어서. 이런 경험은 다정하다. 


그 집에 가면 휘어진 올리브 나무가 있고 나무 이름을 딴 나나 올리브가 살고 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나 주소도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가보았고 나나 올리브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에 있던 사람에게는 눈 주변이 까만 개 한 마리가 올리브 나무 집으로 이끌고 갔다. 그렇게 사람들은 지쳐 있거나 죽음의 순간에서 올리브 나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공간적, 시간적 배경 말이다. 어느 때일까 어느 장소일까. 책을 읽어갈수록 그런 걸 생각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나 올리브에게』의 배경은 지금 여기를 말하고 있다. 전쟁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죽거나 다치고 고통받고 있으니까. 배경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기억 속 올리브 집을 떠올리며 잊고 있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스는 여행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상처와 아픔을 치유한 적이 있었기에 지금이라는 놀라운 시간을 살 수 있었다. 올리브 나무 집에서 만난 군인 월터에게 연락을 취한다. 그는 암이 발병해 항암 치료 시작 전이다. 기억 만으로 그 집을 찾을 수 있을까. 


다리스는 올리브 나무 집을 찾아낸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한 시절을 보낸 기억은 진짜였다. 집은 폐허가 되었지만 몇 군데는 놀랄 정도로 깨끗했다. 나나에게로 시작하는 편지가 담긴 노트 한 권을 발견한다. 『나나 올리브에게』는 나나 올리브에게로 보내는 편지가 대부분 주를 이룬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당신의 코흘리개'로만 자신을 밝히는 이가 그리운 마음을 담아 나나에게 편지를 쓴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면서까지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으며 지나가 버린 시절을 생각했다. 지나갔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 말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지나가 버린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 여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잊어버려도 되고 기억해도 된다. 살아가다 문득 그때를 떠올리는 건 힘을 얻기 위해서이다.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 


언젠가는 끝이 날 편지를 써보려고 한다. 나나에게. 나나는 모든 이름이 될 수 있다. 마음이 아파 부르지 못할 이름에 나나를 대입해서 그리움을 마음껏 드러내면 상처받아도 곧 아물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보다 더 먼 날을 상상하는 것.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으며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조심스럽지만 일 년 후와 이년 후와 그 이후의 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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