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스
이승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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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치인 나는 면접장을 찾지 못해서 헤맸다. 겨우 발견한 입구로 들어갔고 들어가서도 교육실을 찾지 못해서 두리번거렸다. 그런 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면접 보러 오셨어요? 작은방으로 들어가 신분증을 주고 이름을 적었다. 면접비라며 상품권을 주었다. 잠깐 울컥했다. 겨우 이런 걸로 가지고 생각하겠지만 면접이라고 불러놓고 신변잡기적인 질문만 하고 불합격 문자 한 통을 보내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정규직 아닌 계약직. 기간의 정함이 있는. 그런 곳인데도 면접자들이 많았다. 옆이나 앞에 앉은 상대를 보지 않기 위해 제3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이승형의 『아르고스』를 펼쳤다. 일상에서 잃은 자신감을 비현실에서 얻고 싶었다. 쿠팡의 물류센터가 있는 김해시(이런 대범함이 좋다. 지명과 기업체를 숨기지 않는다. 익명성 뒤로 안전하게 숨지 않는다.)로 일하러 온 계약직 야간 구급 대원인 정재일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서울 그것도 강남에서 피부과를 운영한 재일은 욕심을 부리다가 망한다. 망함. 망함. 망함. 망해서 서울에서 3만 7000원의 시외버스비를 내고 김해로 내려온다. 작업장 온도는 38도. 한 시간에 네 번 분류장을 왕복하면서 쓰러지거나 다친 사람들이 있는지 살핀다. 재일은 곧 이곳 작업자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심야에 일을 하면서도 전혀 지치거나 힘든 기색이 없다. 교대조가 와도 물러나지 않는다. 잠을 잃은 사람들. 

『아르고스』는 곧바로 이야기로 돌진한다. 망한 의사 재일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빚을 변제하기 위해 쿠팡 물류센터에서 김해사랑상품권으로 일급을 받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에게 선택이란 없다. 선택은 가진 자들의 특권이다. 왜 계약직으로 일하냐고? 정규직과 계약직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내겐 없거든. 소설의 시작이 흥미로워서 이대로 책을 읽고 싶었지만 이름이 적힌 명찰을 걸고 사람들과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도와 습도와 분위기와 서류 넘기는 제츠처 같은 것으로. 마냥 없던 눈치가 면접장에서만 생긴다. 상품권과 생수 한 통만 챙기겠네. 떨어질 거라는 뜻이다. 얼른 집에 가서 『아르고스』를 읽어야지. 재일은 수아를 발견한다. 아니 수아가 재일에게 발견된다. 재일은 의사의 촉으로 물류센터 노동자들에게서 신체적인 이상을 감지한다. 잠을 자지 않고 24시간 동안 물건의 바코드를 찍는다. 음식을 먹지도 않는다. 로봇처럼. 잠을 자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돈을 번다. 잠을 거래하고 잠이 화폐가 된다. 

잠을 자지 않은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잃어간다.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감정을 잃는다. 빚 3억을 갚기 위해 재일은 그들에게서 피를 뽑는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 약이 만들어진다면 그 약을 자신이 만들 수 있다면. 재일은 점점 자신이 잠을 잃은 것도 모른 채 혈청을 얻기 위해 노동자들의 팔에 주사기를 꽂는다. 그곳에서 오직 수아만이 잠을 자고 꿈을 꾼다. 서로의 존재를 자각한 두 사람은 선택이란 걸 할 수 있을까. 

잠을 자지 않고 피로를 느끼지 않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 『아르고스』는 그러한 물음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아르고스는 물류센터의 물동량을 관제하는 AI 시스템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100개의 눈을 가진 거인은 오늘 주문 내일 도착이라는 입력어를 실행하기 위한 눈으로 오늘날 새롭게 태어났다. 밤과 잠을 뺏긴 사람들을 곁에 두고. 

일만 남은 인간이라는 소설의 문장이 면접장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다. 경력이 없어서 때론 경력이 많아서. 뽑지 않겠다는 건데. 대체 어쩌란 말인지. 일이 나를 구차하게 만든다. 일이 나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내일은 모르겠으니 오늘은 잠을 자고 꿈을 꿔야겠다. 그게 지금 일을 빼앗긴 내게 남은 최고의 복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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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빛 2026-09-14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내용을 면접장의 분위기와 맞추어 쓰신 글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 은행나무 시리즈 N° 20
권혜영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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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하지 못할 슬픔도 고통도 없 아니 있다. 이게 진짜 일리 없어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매번 찾아온다. 그럴 때 반복적으로 나를 위로하고 은근슬쩍 넘어갔다. 넌 강한 아이다. 이겨낼 수 있다. 힘내, 인마. 하나마나 한 말을 해주었다. 뭐 이겨 내고 다시 일어서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다가. 그러다 괜찮지 않은 걸 알았다. 포기하고 싶었구나. 그럼에도 꾸역꾸역 살아갔구나. 


어떻게 알았냐면 어느 날부터 이 애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일 년 동안 입지 않은 옷과 신지 않은 신발부터. 휴일에 낮잠도 자지 않고 물건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분리수거장을 몇 번이나 드나드는 것이다. 가만히 지켜보았다. 말을 걸거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려나 보자. 그랬더니 이제는 읽지도 않은 책들도 중고 판매하기를 신청하고 있네. 


아무것도 되지 않고 단기 계약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나름 비참한 현실에(이 애는 자기 연민이 강하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샀다. 책장과 책상에 쌓인 책들. 그래놓고 읽을 책이 없다고 계속 샀다. 흘려보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썩은 마음에는 불안의 지분이 높았다. 꼭 읽을 책만 남기자.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어도 치우기 편하게 물건의 수를 줄이자. 그러면 책부터 없애야겠지. 


권혜영의 첫 장편소설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는 비움 속에서 남은 책이다. 신간이기도 하고 전에 읽었던 단편집이 내 취향과 맞았다는 기억이 남기도 했다. 박치기 한 번에 영혼이 뒤바뀐(《신입사원 강회장》) 약간의 막장이 가미된 드라마의 정주행이 끝나기도 해서. 양심상 책 한 장은 읽어줘야 할 것 같아서.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를 펼쳤다. 한 장 아니 한 챕터만 읽으려고 했는데 다 읽어버렸지 뭐야. 


서른여덟에 과로사로 죽은 '나'는 눈을 뜬다. 죽었는데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어?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소설 속 이 세계는 앞으로 더 한 일도 펼쳐질 거니까. 작가가 그렇게 썼다면 아 네 그렇습니까 하면서 읽어내기.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눈을 떴는데도 하필이면 회사 책상이다. 젠장. 일하다 뒤졌는데(이런 과격한 어휘는 쓰고 싶지 않지만 뒤지게 쓰고 싶다.) 눈을 떠도 회사 책상이라니 믿을 수 없어 다시 눈을 감고 싶지만 죽었는데 어떻게.


할 수 없이 눈을 뜨자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의 속마음이 말풍선으로 떠오른다. 이게 뭐지. 나는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확인한다. 거울 앞에는 쿨뷰티 계열의 미소녀가 있었다. 살아생전 블랙 기업의 야근 머신이었지만 오타쿠이기도 한 나는 곧 이곳이 이세계 회귀물 안이라는 자각을 한다. 얼굴은 예쁘지만 통장 잔고는 그렇지 못한 이누리 주임으로 회빙환의 세계로 들어왔다. 


아하. 요즘 트렌드구나. 현실의 내가 방금 본 드라마도 그랬지. 대기업 회장과 다리 다친 축구 선수의 영혼이 바뀐 드라마의 세계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그래도 연결성은 획득했다. 소설에 몰입이 제대로 되겠어. 오랜만에 책을 정주행했다. 쿨뷰티 미소녀 이누리 주임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으니까.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는 그게 그러니까 어떤 소설이냐면. 음. 


모든 걸 다 포기하면 좋겠기에 물건 정리를 하는 나를 다시 책 앞으로 데리고 온 아주 고맙고 친절하고 웃기고 관대한 소설이다. 이제는 무엇이 되려고 하기보다 진만(드라마 모자무싸의 주인공의 형)의 말대로 그냥 존재하기를 바라는 나에게 존재하기 얹고 책 읽기(근데 책은 당분간 사지 말고 있는 거 읽어)라고 한 번 더 말해주는 소설이다. 동만(드라마 모자무싸의 주인공)의 말대로 웃기는 사람 되기가 삶의 목적이 되면 좋겠다고 말해주는 소설이다.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는 요상하게 사람을 웃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잠을 쫓아내고(훠이 훠이 물러가라) 읽었다. 어차피 죽을 거니까 지금 죽지 말라고 말해주는 이세계의 귀한 소설. 버리니까 읽을 수 있었다. 버리니 남았다 같은 역설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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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임시 보관 중
가키야 미우 지음, 김윤경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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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를 남기며 살지 말자고 다짐해 봐도 살아가기는 늘 후회의 연속이다. 어제 많이 먹었어. 그 말은 하지 말 걸. 거기에 가지 않았어야 했는데. 같은. 과거의 나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과거의 가장 깊은 후회의 순간이 있기 마련인지라 가키야 미우의 『인생 임시 보관 중』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중학생의 나로 돌아가는 이야기. 뻔한 시간 여행의 소재이긴 하지만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 싶다의 열망을 가지면서 살고 있기에 『인생 임시 보관 중』을 즐겁게 읽었다. 


63세의 마사미는 오타니 쇼헤이의 만다라 차트를 보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세계적인 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 오타니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을 한다. 인생의 계획표를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한 그만의 치열한 노력에 감화를 받기보다 남성이기에 가능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져도 오타니는 그의 커리어가 중단되지 않는다. 


반면에 그녀 자신은 전문대를 나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정규직 일자리는 갖지 못하고 파트 타이머로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남편과는 대화 자체가 불가하다. 무엇을 하며 지금까지 살았나 슬픔과 후회로 가득한 어느 날 카페에서 오타니를 흉내 내어 만다라 차트를 적어간다. 지금 시대에 여성으로서 살아가기는 불합리하다는 생각에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해보고 싶은 목표를 쓴다. 그러다 만다라 차트의 가운데로 빨려 들어간다. 


눈을 뜨니 중학생이 되어 있다. 결혼하기 전 성인 기타조노로 불리는 마사미는 63세에서 중학생으로 인생 2회차를 살게 된다. 한 번 살아봤으니 후회나 미련 따위는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솟아오른다. 각성한 기타조노는 세상을 바꿔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인생 임시 보관 중』은 그런 소설이다. 시간 여행, 여성 인권, 남존여비 같은 닳고 닳은 소재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 놓는다. 


영웅의 이야기는 아니다. 중학생으로 돌아간 기타조노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여성 비하의 노래 가사를 쓴 작사가나 문부성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지만 답장은 받지 못한다. 부단히 노력하지만 기타조노의 인생 2회차의 시간은 만만치 않다. 사이다 같은 시원한 에피소드는 없다. 읽어갈수록 답답하다. 나의 현실조차 바꾸지 못하는데 세상을 바꿀 생각을 꿈꾸다니 어리석다고 느낄 뿐이다. 


그러다가 소설의 마지막에 가면 답답함과 어리석음을 해소해 준다.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묘책을 들려준다. 두 번 살지 못하는 인생.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내가 벌인 일을 수습하면서 살아가야 할 오늘이 있을 뿐이다. 미래는 더더욱 알 수 없고. 그저 오늘 하루가 나에게 주어진다. 오늘은 슬프고 싶지 않아.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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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 - 월급사실주의 2026 월급사실주의
강보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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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겠지만 서류 몇 장을 받는 일이 끝나고서야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2026년 소설집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에 실린 첫 번째 소설 강보라의 「우리의 투어」를 읽었다. 총 네 장의 서류를 받기까지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언젠가 이 경험을 기억해서 소설로 써봐야지 혹은 리얼리즘 시로 써야지 결의를 다졌다.


「우리의 투어」에는 그동안 내가 겪은 일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나는 한 발 아니 두 발, 세 발 늦은 거다. 나만의 특수한 경험이라고 착각했다가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에 실린 첫 번째 소설 강보라의 「우리의 투어」에 자세히 나온다. 나 대신 작가님이 수고를 맡아주셨다. 제가 다른 평행 우주에서 강 작가님을 만났던가요. 왜 이렇게 다 알고 계시죠?)


일 년을 넘게 기다렸는데 한 시간을 못 기다릴까. 좁은 의자에 앉아서 이름이 불릴 때까지 초조해서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조금만 긴장이 되거나 슬퍼지면 얼굴이 빨개진다. 그렇게 빨개진 얼굴로 서류에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굽신거리는 게 성격이 된 것 같다. 살다 보니.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에 실린 소설들 전부 다 내 이야기 같아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읽는내내 얼굴이 뜨거웠다. 예민한 얼굴을 잘 달래주면서 살아야 하니 피곤하다. 소설을 순서대로 읽지 않고 목차를 보고 흥미가 당기는 이야기를 먼저 읽었더니 처음 읽은 소설은 성혜령의 「퇴직금 돌려받기」였다. 퇴직금. 퇴직금. 퇴직금. 


정신병 걸린 사람처럼 퇴직금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쓴 이유는 「우리의 투어」에 자세히 나온다. 이쯤 되면 궁금해서라도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을 구매 혹은 대출해서 읽어보시겠죠. 안물안궁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서도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내가 먼저 쓰려고 했는데. 강보라 작가님이 먼저 써버려서. 다시 「퇴직금 돌려받기」로 돌아가자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나의 현재 상태를 대신 말해주고 있어서 또 놀라움으로 한가득. 


책의 제목대로 일하면서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 맞다. 그럼에도 적어도 괴롭힘당하면서 일하고 싶지는 않다. 임금 체불은 노노노이고. 소박한 바람인데 바람으로만 남을 것 같아 두렵다. 


-경희야. 나는 사려고 사는 것 같아. 자꾸 뭘 사고 있어. 어쩔 때는 택배가 왔는데 뭘 시켰는지 내가 모를 때도 있다. 

-나 명품백 살까봐. 

경희의 말에 지우가 멈칫하더니, 임실장의 가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까 들어올 때 봤는데, 저거 뭐냐?

경희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 명품백이 필요한가봐.

.

.

.

-경희야, 가방 사. 백 개 사. 그게 뭐 별거라고. 그냥 카드 할부로 긁어.

지우가 목련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 가지기 어려운 건 저런 거야. 저 주먹만한 목련꽃을 살 수 있겠어? 사서 주머니에 넣고 한 달 두 달 간직할 수 있겠냐고.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 박연준 「경희와 경희 아닌 것」中에서)


또 나는 열심히 하는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출근 시간 한 시간 전에 미리 가 있다. 가방에서 오늘의 간식과 도시락을 꺼내 정리하고 칡차 티백을 우려내서 물을 마신다. 경희 엄마처럼 말이다. 여름 바지를 주문하고 홍당무 얼굴을 진정해 줄 크림을 찾아다니면서 일을 한다. (옷은 꼭 매장에서 소재를 만져보고 사자. 바지 구매 실패해서 개우울.)


앞으로 내 미래 따위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것보다 15초 쇼츠마저도 힘겹게 보여주는 휴대전화를 바꿀지 말지 고민하는 게 미래지향이고 건설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휴대폰 사. 백 개 사. 그게 뭐 별거라고. 그냥 카드 할부로 긁어.

그러려면 신용카드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될까. 카드 할부로 사는 것도 권력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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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 매일과 영원 7
김남숙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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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다 보니 매주 금요일 밤에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다른 요일에도 마셔볼까 시도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그러고서 일하러 가야 하니 술까지 마셔 버리면 이도 저도 안 되는 피곤한 하루를 보낼 상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금요일 밤은 관대하다. 내일이 토요일이라서. 오늘 밤만은 뇌 빼고 내일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셔도 된다는 여유로움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니 이번 주 금요일에도 술을 마시겠지. 생각했겠지만. 이번 주 금요일은 안 마실 예정이다. 예정이라서 마시는 거 아니야 하겠지만 김남숙의 에세이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을 읽고 큰 아니 작은 그것도 아닌 중간 크기의 깨달음을 얻었다. 김남숙은 소설가인데 나는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고 에세이만 읽고. 언젠가는 소설도 읽겠지만 허름하게 누워서 읽은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이 내 마음을 쓰윽 만지고 갔다는 것.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을 읽은 독자들은 유추가 되겠지만 그는 술을 꽤 즐겨 하는 사람인 듯하다. 글의 시작부터 자신을 새해 인간이라고 밝히면서 여전히 술을 마신다고 했으니까. 중간에 가서도 끝에 다다라서도 술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잠을 잘 못 자고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만 공허함을 이기지는 못하는. 소설가와 생활인의 자아가 충돌하면서 요즘의 나처럼 황동만(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울다가 잘 웃는 유쾌한 주인공)처럼 불안을 친구 삼아 사는 듯하다.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유추이자 추측. 


소설가가 되었지만 생활을 해야 하니 일을 다닌다. 치과에서 근무하기도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가방에는 책 한 권씩을 가지고 다닌다. 꼭 나 같네. 전부 읽지는 못하지만 가방에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문학을 놓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연체 문자와 독촉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여기는 지옥이다. 가만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두 죽는다는 것. 그러니 더 이상 불안해하지도 애를 쓸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미지(드라마《미지의 서울》에 나오는 고졸에 서른, 백수이기도 한 주인공)의 할머니가 울고 있는 미지에게 해주는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알 수 없다는 말을 되뇐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숙취를 껴안고 일어나는 게 불안을 이길 수 있다면 그렇다면 소설가의 하루로써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냥 그래도 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부디 이런 오늘이 최선이었기를 바라는 것도. 술을 그만 마셔야 소설을 쓰지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살짝 있지만 많이 먹고 많이 취해서 많이 괴로워봐야 그만해야지 깨닫는 거다. 평일에는 장시간의 노동 때문에 책을 읽기 힘들어 책을 사는 걸로 문학하고 싶은 마음을 달랜다. 성공은 바라지도 않지. 애초에 그딴 게 나한테 올 리가 없으니까. 동만이의 말처럼 불안하지 않게 사는 거. 가만한 지옥에서의 유일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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