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도 있다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포레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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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그런 날도 있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읽었다. 느긋해지기 위해 마스다 미리의 책을 골랐다. 그런 믿음을 주는 작가가 있다. 어떤 장을 펼쳐 읽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현실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위로의 말을 들려주는 작가. 내게는 마스다 미리가 그렇다. 신간이 나오면 꼭 읽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의미 없이 보내진 않았을까 조바심 나는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의미 없이 보낸 게 아닌 의미를 찾아가는 하루였다고 말한다. 『그런 날도 있다』에 실린 글은 대략 2007년에 쓰였다. 책에서 밝히는 마스다 미리의 나이는 서른여섯. 첫 장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도쿄로 상경한 10년 전에 일을 그리고 있다. 스물여섯에 마스다 미리는 연고도 없는 도쿄에 온다. 퇴직금과 가지고 있는 돈을 가지고서.


평소 성격대로라면 그 돈을 아끼고 아껴서 살아가야겠다고 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단다. '저금이 바닥날 때까지 느긋하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반 년을 지냈다.


그나저나 아무것도 안 했던 그 반년은 뭐였을까? 불현듯 떠오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유쾌해서 참을 수가 없다. 그 시기는 도쿄라는 대도시에서 상처받지 않을 힘을 비축하기 위한, 나만의 소중한 휴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마스다 미리, 『그런 날도 있다』中에서)


좋다. 이런 글. 온 마음을 다해 내게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조급해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최근에 한국에 번역돼 나온 마스다 미리의 책들 중 『그런 날도 있다』가 가장 좋았다. 무려 13년 전에 쓰인 글인데도.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일상에서 겪어내는 다양한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경스럽다. 불합리한 일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따지기도 한다.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코트와 냄비, 구두를 산다. 친구와 셀럽 모임을 만들어서 유명 식당을 탐방한다.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고 피아노를 배운다. 세뱃돈 주는 걸 아까워하는 부분에서는 깊은 공감을 했다. 돈을 주면서도 이 돈으로는 이걸 샀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마스다 미리. 자신을 자책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해 준다.


반성하고 깨우쳐야지 하는 계몽 의식으로 자신을 꾸짖지 않는다. 나마저도 내가 싫을 때가 있다. 그 순간에 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잘못했다고 말하면 될걸. 미련한 고집을 부려 타인에게 상처를 준 나. 캄캄한 곳으로 숨고 싶을 때. 종일 누워서 그 일을 되짚어 보는 바보 같은 나에게 『그런 날도 있다』를 건넨다. 기운이 나지 않는다면 목차만이라도 읽어 보라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뒹굴뒹굴 누워 『그런 날도 있다』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찡그리고 분노하는 내가 아니게 된다. '어마어마한 사치'를 하거나 '포기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으로 돈을 돌려받는 용기를 내거나. 평범한 일상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고 말해준다. 카페를 가지 못하면 창가 쪽에 의자를 하나 두고 앉아 있는 일로.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문을 닫지 않도록 전화를 걸어 주문해 놓고 마스크를 쓰고 디저트를 찾아오는 일로.


우리에게 그런 날도 있었지. 암담한 기억이겠지만 회상해 보면 배시시 웃음 지을 수 있도록 오늘을 기분 좋게 살아내자. 『그런 날도 있다』는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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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공간 - 나를 이루는 작은 세계
유주얼 지음 / 허밍버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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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글이다. 유주얼의 『자기만의 공간』은. 다시 도서관이 열렸다. 코로나19로 달라진 것 중에 하나는 도서관을 갈 수 없다는 거다. 예전에는 휴관일을 빼고는 아무 때나 갈 수 있었다. 여유롭게 가서 책을 고르고 넓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곤 했었다. 지금은 눈치 게임처럼 가야 한다. 거리 두기 단계가 올라가면 휴관. 다시 내려가면 문이 열린다. 도서관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놨다.



열린다는 공고가 뜨면 얼른 가서 빌려온다. 2층, 3층까지 자유롭게 갈 수는 없지만 신간 코너에서 미리 찜해둔 책을 찾아서 나온다. 『자기만의 공간』은 신간 코너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요즘 공간에 꽂혀 있기 때문에 당연히 빌렸다. 집순이인 나는 집이 좋다. 집 꾸미기가 좋다. 유튜브로 오늘의 집을 보는 걸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공간에 살고 있나. 어떻게들 해놓고 사나.



공감 가는 글이 많았다. 최소주의 생활에 입문하게 된 계기부터. 이웃을 이해하는 방법. 친구와 절교 후에 느꼈던 당혹감.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를 찾아가는 『자기만의 공간』의 글은 편안했다.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지 않고 과한 수사 없이 마치 자신에게 건네는 듯한 무심한 위로의 말이 들어 있었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이곤 한다. 유주얼은 단정한 사람일 듯하다.


생활을 꾸리는 형태로 보나 세계를 이해하는 건강한 시선으로 보나. 그동안의 집 주소가 적힌 초본을 떼어 볼 때. 나 역시 많은 곳을 다니며 한곳에 정착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 내 이름과 주소를 남겼다. 변기가 막혀 심야에 사람을 불러야 했을 때. 어떤 의도도 담기지 않은 "여기 혼자 사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주얼은 당황한다.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라는 의미로 묻는 좋은 일에 대해. 그 좋은 일은 없지만 다른 좋은 일은 많다고 외친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어렵다. 실패에 관해서는 더더욱. 누군가를 미워하지만 그 일에 대해 쓰는 건 조심스럽다. 상처를 주었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에는 서툴다. 『자기만의 공간』을 읽으며 미움과 질투라는 감정에 차분히 생각을 해보았다.


자기만의 공간에 산다는 건 그 모든 감정을 껴안고 나를 미워하지 않아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하고 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일. 소박한 오늘 하루의 투 두 리스트이다. 창고를 비우는 일이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 일은 내일로. 그래야 내일이 기다려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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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의 주둥아리는 도무지 쉴 줄을 모른다 - 장래희망이 인기 유튜버인 중년 디자이너의 일상 탐구기
이지원 지음 / 지콜론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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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관점과 생각을 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단 누군가와는 만나서는 안된다. 이게 무슨 말? 만나서 대화를 해야 관점과 생각을 알지. 노노노. 요즘엔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카페라도 가고 싶은데 포장만 되니 여의치 않다. 코로나19가 아니어도 사람 만나서 웃고 떠드는 건 질색이었다. 억지로 고개를 끄덕여야 하고 간간이 눈도 마주쳐야 한다. 개피곤.


그래도 알고 싶다. 이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대들의 신선하고 날 것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이왕이면 가식 없이 냉소와 비꼼이 한가득 담긴 시선에서. 이지원 교수의 『교수님의 주둥아리는 도무지 쉴 줄을 모른다』를 읽어볼까. 전작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를 재미있게 읽었더랬다. 이번에 나온 신간의 부제는 '장래희망이 인기 유튜버인 중년 디자이너의 일상 탐구기'이다. 프로필을 보니 '내일은 옵치왕'이라는 닉네임으로 유튜버로도 활동 중이다.


고등학생 셋이 찾아와 진로에 대해 물을 때 이지원 교수는 고민한다. 내가 과연 그걸 알면 이 자리에 있을까. 시각 디자인의 암울한 미래를 들려주자니 청소년의 꿈을 짓밟는 것 같기도 해서. 평범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뒷맛이 개운치는 않다. 게임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에서 지금까지. 게임과 함께 했던 유구한 자신의 역사를 들려줄 때는 신이 난다. 지나친 스마트폰 중독에 관해서도 신랄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책이니까 내 면전에 침이 안 튀니까 즐겁게 들어줄 수 있을 정도의 사회 현상 일반에 대한 장황함이 『교수님의 주둥아리는 도무지 쉴 줄을 모른다』에 들어 있다. 제목 그대로 이지원 교수님의 주둥아리는 쉼이 없다. 일상인으로서 교수로서 게임 유튜버로서의 자아가 혼재된 책. 과연 휴일에 뭐 할까. 이 사람은. 알고 싶지 않지만 들려주니 들었는데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은데 웃음이 있다.


어떤 이가 고맙다는 말을 하면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가만히 있자니 건방져 보이고 웃자니 이것 또한 건방져 보이고.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그나마 사회화된 인간으로 보일지 교수님의 주둥아리는 도무지 쉴 줄을 모른다』에 나와 있다. 책을 읽어 보시면 아실 거다. 과연 그 말이 적절하겠군 할 거다. 일상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갈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 사람을 모르고서 하는 행동이겠고. 책을 읽어가다 보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들이 있지 하며 웃어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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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돈독하게 -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김얀 지음 / 미디어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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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2020년 12월 11일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매달 11일은 중요한 날이다. 바로 11번가에서 대대적으로 티 멤버십을 껴서 할인을 해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낙을 쇼핑으로 풀던 시절 나는 그야말로 온라인 쇼핑몰의 노예였다.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대신 휴대전화 소액 결제를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한도 내에 썼다. 결제는. 다음 달에 내가 할 거야 하는 심정으로. 그런데 진짜 다음 달에 내가 한다.


이러다 파산하는 거 아냐. 할 때쯤 쇼핑몰 앱을 지우고 11번가 하나만 남겨 두었다. 귀찮음 때문이었다. 최저가 비교하고 쿠폰 받고 무료 배송 때문에 뭘 하나 끼어 넣고 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 그리하여 최종 안착지는 11번가.(이거 홍보하는 거 아닌데. 그냥 어쩌다가 내가 쓰는 통신사의 멤버십 할인이 된다는 걸 알고 11번가에 뼈를 묻은 건데.) 그래봐야 사는 건 커피, 쌀, 김치, 화장지, 물걸레 등등.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밤.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심장아 나대지 마라. 12시가 되자마자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던 물건들을 결제한다. 이것저것 뿌려주는 쿠폰을 먹이고 먹여서. 1원까지 남김없이 포인트를 끌어모아서. 결제. 이런 풍경은 11월까지였다. 어제는 달랐다. 왜냐. 나는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김얀의 『오늘부터 돈독하게』라는 책. 나는 귀가 얇아서 누구의 말도 잘 듣기 때문에 시키는 건 잘한다.


김얀은 집을 구하기 위해 은행에 간다. 대출 상담을 받으러 간 건데. 거기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연소득 480만 원으로는 대출의 대자도 꺼내지 못한다는 거. 그리하여 김얀은 꿈을 수정한다. 대문호에서 대부호로. 『오늘부터 돈독하게』는 여타의 부자 되기 책과는 다른 지점이 있다.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으로 승부를 보려는 자가 어느 날 부자가 되겠다는 계시 아래 하나씩 자신의 습관을 바꿔가며 돈을 모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무슨 돈을 밝혀. 돈 이야기는 좀 그렇네. 할 수 있나. 당장 내일 먹어야 할 쌀이 없는데. 공과금 고지서가 책상 위에서 나를 째려보고 있는데. 요즘 최애 프로그램 싱어게인에서 미니 데이트를 부른 윤영아 가수는 이런 말을 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 아티스트 좋은데 우리는 또 살아내야 하지 않냐." 그녀는 마트에서 캐셔 일을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반해 윤영아를 응원하기로 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가수도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일을 한다.


『오늘부터 돈독하게』에는 돈이라고는 쓸 줄만 알았지 버는 것에는 1도 관심 없던 김얀의 돈 공부에 관한 이야기가 솔직 발랄하게 담겨 있다.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치기공과를 나온 김얀. 치과에서 일을 하다 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에세이, 드라마 대본, 소설을 쓴다. 결과는. 음. 별로 좋지 않았다. 나름 잘 나간다는 연애 칼럼니스트였지만 책도 냈지만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행에서 대출 거절이라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닥치는 대로 부동산, 경제, 돈에 관한 책을 읽어 나간다. 어머니의 종잣돈을 빌리고 다시 치과에서 일을 해서 부천에 작은 빌라를 산다. 방 두 칸을 세내어 주고 자신은 파티션을 쳐서 거실에서 지낸다. 돈을 모으고 싶다면 일단 아끼는 것에서 출발하라는 만고 진리 불변의 말.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게 쓰는 건 쉽지만 아끼는 건 어렵다. 그렇기에 쉬운 선택으로 아끼지 않고 쓰기만 해서 신용 카드와 대출의 노예가 된다.


『오늘부터 돈독하게』를 읽고 있지 않았다면 11일인 어제 나는 많은 품목들을 쓸어 담아 결제했겠지. 할인을 더 받기 위해 얼마 이상을 채워 넣으며.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는 습관으로 시작한 김얀의 돈 모으기 프로젝트. 물 한 잔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팔 굽혀 펴기를 한다.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자질구레한 물건을 사는 게 아닌 그 물건을 파는 회사의 주식을 사고 아껴서 모은 티끌 같은 돈이 조금씩 커진 티끌이 되는 걸 확인했을 때의 희열로 살아가기.


확실한 건 책을 읽으며 나의 건강하지 못한 습관 하나씩을 버릴 수 있다는 거다. 그리하여 어제는 무엇을 샀느냐. 현미쌀 10Kg. 딱 그거 하나 주문했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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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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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누구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휴대전화에 입력된 주소록을 보았다. 통닭집, 고용부, 콜택시, 관리사무소, 피자집, 돈가스, 만둣집이 있었다. 이런. 가게 번호가 아닌 사람의 번호를 보여달란 말이다. 엄마가 생각났다. 살아 있을 때 엄마는 심야에 전화를 걸어왔다. 술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았다. 두서없는 이야기 끝에 불쌍한 내 딸,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그래도 내가 너를 많이 생각하고 사랑한다 같은 멀쩡한 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말을 하고 끊었다.


딱히 무슨 대답을 듣자고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전화기를 꺼내니 목록에 내 이름을 발견했으리라. 그렇게 나는 아무 때나 전화를 걸면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못되고 무심하고 정이 없는 딸의 위치였다. 이제 나도 그러고 싶은데. 통화 버튼만 누르면 신호음이 가고 여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안심하며 대화를 시작하고 싶은데. 못 견디게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운 밤이 내게도 있는데. 엄마는 없다.


김영민 교수의 『공부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책은 사회와 자아의 중간에 있다. 사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독서에 몰입할 수도 있고, 자아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책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 책의 내용은 언어로 되어 있고, 언어는 사회가 공유하는 것이며, 그 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한다. 사회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다가 거꾸로 소통을 위한 언어가 풍부해지는 역설이 독서 행위에 있다.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中에서)​


우연인지 몰라도 김영민 교수의 책을 읽는 시점에는 마음이 복잡하고 일이 안 풀릴 때이다. 누가 들으면 대단한 일 하며 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가 숭고하고 대단하고 진지한 일 아닌가. 그저 하루를 사는 게 아니다. 하루를 산다는 건 운이 좋으면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뜰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어제는 진지하게 아침도 아닌데(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영향으로) 삶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저녁에는 희망을 생각하자며 의지를 다져 놓고서는.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새삼 나의 공부 인생을 돌아보았다. 학과 공부를 충실하게 한 건 딱 중학교 때까지였다. 그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며 살아갔다. 책 읽기도 그중에 하나다. 책에는 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담겨 있어 독자의 신분으로 팔짱 끼고 앉아서 뭐 니들이 그렇지 하는 자세로 읽으면 정말 재미있다. 신난다. 나와 비슷한 구질구질함을 책에서 발견하면 놀라기도 하고 뭐 니들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식으로.


『공부란 무엇인가』를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이 책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로 바꾸어 읽어도 좋겠다는 것이다. 공부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필요하다. 정답을 맞혀서 좋은 대학에 가고 취업에 성공하는 공부에서조차도 인간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사회가 싫어 도피해 책으로 안착했지만 그 안에서도 여지없이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기괴함으로 뭉친 인간 군상을 만난다. 그러면서 배운다. 사회에서 만나면 이렇게 행동해야지. 수준 낮은 대화와 비판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요령이 『공부란 무엇인가』에 있다.


한동안 리뷰를 쓰고 제목을 달지 않았다. 귀찮아서. 제목의 효용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글의 완성을 짓는 건 제목이라는 말에 서둘러 이 글에도 제목을 달았다. 서평이란 무엇인가. 글은 뜨끔했다. 서평에 기대어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나의 신세 한탄을 늘어놓곤 했는데 서평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좋은 서평은 그걸 읽고 책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것이라는 말. 그동안 나의 서평 쓰기는 실패였다는 말을 듣는 듯해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럼 제대로 써야지 안 그래?


이 글도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고 쓰는 서평인데 시작부터 힘들다느니 죽은 엄마와 통화하고 싶다느니 누가 들으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만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걸 누가 진지하게 읽을까. 나조차도 긴 글을 웹페이지로 힘들어하는데. 그저 자존감 낮고 시간은 많은 열패감에 찌든 사람이 책을 읽고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쓴 글인데. 이걸 읽고 미치도록 읽고 싶다, 당장 사서 봐야지 할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내 마음대로 쓴다.


다만 기억할 것은 청중과 독자의 반응은 원래의 말과 글에 대해서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독자나 청중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이다. 마치 '악플'이든 '선플'이든 원래 글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 '리플'을 단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中에서)


『공부란 무엇인가』는 무슨 책인가.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비밀을 알려주는 책인가. 책을 읽으면 공부뽕이 올라 당장 인강이라도 끊게 된다는 책인가. 공부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책인가. 읽고는 싶은데 시간은 없어 누군가 쓴 리뷰를 보며 읽은 척하고 싶어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시간 낭비. 제가 쓰는 서평은 서평일 수 없지만 서평인 척하고 싶은 서평입니다. 책에 대한 정보 대신 한 인간의 나약함과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며 자신이라는 존재의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글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든 김영민 교수의 저 말처럼 그 반응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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