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다는 것 (양장)
김중미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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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미의 소설 『곁에 있다는 것』을 흡입하듯 읽었다. 보던 드라마도 팽개쳐둔 채 말이다. 시작부터 나를 압도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인용한 첫 부분을 보고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인생 책 불멸의 1위인 최애 책. 난쏘공의 배경인 은강이 『곁에 있다는 것』에 다시 등장한다. 작가의 말에는 김중미 작가가 조세희 작가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허락을 받아 난쏘공의 은강을 소설로 가지고 왔단다.


소설은 은강에 사는 아이들의 시점에서 그린다. 고3 지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강이, 여울이, 우리의 이야기까지 소설은 먹먹한 감동을 준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시차를 두고 쓴 『곁에 있다는 것』은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1970년대에서 2021년까지 한국 사회는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그대로인 채 숨 가쁘게 달려왔다. 겉모습만 풍요로워졌을 뿐 그 안은 텅 빈 채 말이다.


은강방직 해고 노동자 이모할머니를 만나러 간 지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은강에서 살아간 그들이 외치고 싶었던 진짜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알리고 싶다. 지우의 엄마는 돌봄 교사로 일하면서 보육 종료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봐 준다. 아빠는 은강 인터넷 신문의 객원 기자로 일하면서 은강에서 일어나는 일을 글로 쓴다. 지우는 부모님을 보면서 은강에서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은강을 사랑하고 아낀다.


모든 이가 지우처럼 은강을 애정 하지 않는다. 강이는 외할머니와 살면서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은강을 끔찍해하지는 않지만 은강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한다.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한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알아보지만 학원비가 비싸 고민한다. 강이에게 국비 지원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현실의 내가.


여울이는 공부를 잘해서 교육 대학을 목표로 하는 아이다. 야무지고 똑똑하다. 지우와 강이와는 절친이지만 약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은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해 따로 산다. 엄마와 만나면 공부와 가치관 때문에 다투기도 하지만 엄마를 좋아한다. 은강에 빈민 체험관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소설 속 아이들의 고민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나의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부끄러웠다. 나의 문제만 문제로 여긴 지금의 시간 역시. 며칠 전에는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방이 추워서 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밀고 숨을 쉬면 입김이 생겼던 그때를. 그때 추위에 단련되어서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겨울을 지낼 수 있다고. 대학을 가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조언을 해주거나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저 내가 결심하고 결정했다.


다행히 문학을 알게 되어서. 책으로 도망칠 수 있어서. 나는 비뚤어지지 않았다. 어렵고 힘든데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학에 있었다. 가난한데 남을 미워하거나 자기 비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때론 냉소와 적대감을 가진 인물들에게서는 세상을 마냥 착한 사람의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위로가 되었다.


그때랑 다르지 않은 현재. 아이들은 더 힘들어졌다는 것을 『곁에 있다는 것』을 읽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어른인 나보다 더한 짐의 무게를 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망을 품고 있다. 은강을 개발하면서 원주민의 삶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어른들에 맞서 은강의 아이들은 연대한다. 손을 내밀고 힘을 모은다. 촛불 집회에 나가 하루 일당을 모금함에 넣고 당당하게 1인 시위를 한다.


『곁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오늘의 소설이다. 최고의 문학이다. 찐문학이다.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과거의 내가 문학을 읽으며 꿈을 다졌던 것처럼 『곁에 있다는 것』을 읽으면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안다. 절망의 상황에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 한심하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어설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버티면서 스스로 쌓아야지 얻을 수 있는 삶의 내공 같은 것이다, 용기와 희망은. 문학은 절망을 가진 나를 토닥여주는 작은 손이다. 『곁에 있다는 것』은 그 몫을 톡톡히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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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건너뛰기 트리플 2
은모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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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워킹데드》에 미쳐 있을 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나머지 오프닝 건너뛰기를 과감하게 눌렀다. 안다. 오프닝 시퀀스 역시 그것까지 작품에 포함된다는 것을. 《워킹데드》의 오프닝은 훌륭했다. 등장인물들의 본명도 알려주고. 그러나 그걸 읽기에는 다음 편의 이야기가 궁금했기에 얼른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눌렀다. 20~30초의 짧은 시간을 할애하면 되는데 그걸 못 참았다.


지금은 웨이브로 넘어왔다. 한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다들 나만 빼고 이 재밌는 걸 보고 있었단 말이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밌다, 드라마 보기. 은모든의 소설집 『오프닝 건너뛰기』의 작가 에세이에 나오는 것처럼 웨이브에는 오프닝 건너뛰기가 없다. 10초 뒤로 가기 기능은 있다. 세심하게 시간을 조절하지는 못해 그냥 타이틀을 본다. 새삼 놀란다. 이렇게나 드라마를 잘 만들다니. 추리, 범죄, 스릴러물에 심취해 있는 요즘이다.


은모든의 소설 『오프닝 건너뛰기』에는 세 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표제작 「오프닝 건너뛰기」는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의 코로나 일상을 그리고 있다. 2020년은 소설의 문장처럼 누구에게나 지워버리고 싶은 한 해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고 여행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미술 학원 강사인 남편은 월급이 밀려 있다. 아내는 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받으라고 말하지만 남편은 주저한다. 나중에야 원장이 처자식이 있는 직원한테는 월급을 준 사실을 알게 되고 남편은 할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전화한다.


두 번째 소설 「쾌적한 한 잔」은 문학 교사로 일하는 은우의 어느 저녁을 그린다. 모처럼 나간 동창회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얄궂은 농담을 듣는다. 급기야 동창 하나는 고백 아닌 고백 같은 고백을 하고 은우는 부드럽게 거절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호기심으로 보는 저녁의 시간 은우는 단골 술집에서 위안을 찾는다. 은모든의 소설은 일상의 주변을 더듬는다. 주인공으로 내세운 화자는 주인공 같지 않은 위치에 선 채 주변인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들려준다.


마지막 소설 「앙코르」의 주인공 세영 역시 가방을 잃어버린 가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대신 떠난 여행지에서 만난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고자 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게 은모든 소설의 장점이다. 남에게 하지 못하는 슬퍼지는 나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세밀한 일상을 그리는데 탁월하다.


우리 삶을 한 편의 드라마도 본다면 무척이나 지루해서 오프닝이 뭐야 한 편 전체를 스킵 해 버릴지도 모른다. 드라마가 아니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니까. 어쩌면 그게 소중한 이유가 되니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한 문장 한 문장 정성 들여서. 극적인 사건도 아름다운 결말도 없지만 누군가 들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기도 함을 알고 있기에. 쓴다. 은모든의 소설은 이상하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물들이 나누는 주사 같은 이야기는 아침이 되면 전부 잊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간절히 듣고 싶은 나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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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레인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2
은소홀 지음, 노인경 그림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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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해도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원하는 게 있어도 대부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는 있지만 막상 그 일이 내게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까지는 숙지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렸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했던가. 열심히 하기까지의 마음을 먹기가 힘들고 막상 열심히 했을 때 결과가 좋지 않음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오늘이다.


은소홀의 『5번 레인』은 수영을 향한 끝없는 집념을 가진 아이들이 등장한다. 초등학교 수영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싱그럽다 못해 푸르고 눈이 부시다. 이야기를 읽어가는 내내 그 아이들이 가진 꿈의 크기 때문에 가슴이 자꾸 설렜다. 한강초 수영부에는 강나루를 비롯한 여러 아이들이 오직 수영이라는 꿈을 위해 모여 있다. 처음엔 좋아해서 하다 보니 실력을 쌓고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수영을 한다.


주인공 나루는 수영 에이스다. 언니와 함께 시작한 수영은 나루의 전부가 되었다. 좋아하는 수영인데 잘하기까지 한다. 그 애 김초희가 등장하기 전까지. 소설의 시작은 나루와 초희가 대회를 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팔이 길고 신체 조건이 좋은 초희는 나루의 1등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예선 1위로 올라온 초희는 나루를 제치고 우승까지 거머쥔다.


초희의 수영복이 유독 반짝인다는 걸 발견하지만 대회 규정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나루의 반에 태양이가 전학을 오고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에 나루와 친해진다. 『5번 레인』은 특별한 성장 소설이다. 서사는 흔히 볼 수 있는 성장 구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들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 때문이다.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잘못을 할 수도 있다.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 『5번 레인』은 질문한다. 나루가 저지르게 된 잘못을 통해 우리는 어제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삽화 역시 예쁘고 근사하다. 문장을 읽고 상상하게 되는 풍경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열세 살의 우리는 나루처럼 좋아하는 걸 발견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오늘의 내가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면 되는 거니까. 열심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실패를 극복하는 건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나루의 말처럼 나의 팔과 다리로 해내야 한다. 나의 의지가 담긴 행동으로. 팔과 다리를 움직여서 어제와 오늘이 아닌 내일로 걸어가야 한다. 확실한 오늘의 나는 불확실한 내일로 가기 위해 존재한다. 미칠 때까지 미쳐 보는 것. 각 레인의 출발선에 선 아이들의 내일을 응원한다. 스타트가 조금 늦어도 괜찮아. 출발 신호보다 몸이 먼저 나가도 괜찮아. 우리의 내일은 계속 돌아올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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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그 말이 어때서요? - 나도 모르게 쓰는 차별의 언어 왜요?
김청연 지음, 김예지 그림 / 동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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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때도 없이 들어가 보는 구직 사이트에 이런 공고가 올라왔다. 아이들 책 읽기 수업을 할 수 있는 선생님을 뽑는다는. 토요일 하루 수업이며 반은 두 개가 개설되었다고 한다. 한 권의 책을 선정해서 읽고 토론하고 주제에 맞는 글쓰기 수업을 해주면 된다고. 그 공고를 보는 순간 읽고 있는 책 『왜요. 그 말이 어때서요?』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쓰는 차별의 언어'라는 주제인 이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쓰는 어떤 말은 남에게 상처를 준다. 처음엔 몰랐다고 하더라도 알고 나면 상처의 말은 쓰면 안 된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일은 늘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에서 알았으니 실천해야지 다짐한다.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준다, 배움이란. 어릴 때는 남에게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거친 말을 썼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우리 말의 속담 중에 말에 관한 게 왜 많은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는 것처럼 말의 파급력은 크다. 말을 거칠게 한다고 해서 나를 어렵게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만만하게 본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말을 줄이려 한다. 『왜요. 그 말이 어때서요?』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철없는 어른도 읽으면 좋을 책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차별의 언어가 가진 형태에 대해서 간결한 언어로 알려준다. 직접 말을 건네는 듯한 문체로 현상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준다.


각 제목에는 특정 단어를 비워둔다. 본문을 읽기 전 맥락에 맞게 단어를 유추해보라는 의도이다. 전부 알아맞히지는 못했지만 몇몇에는 단어를 넣을 수 있었다. 부끄러웠다. 단어를 넣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그 말은 쓰지 말아야 했지만 일상에서 한 번쯤은 써 봤기 때문이다. 말을 할 때 재치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 쓴 적도 있었다. 반성합니다, 과거의 제 자신.


'급식충, 다문화, 틀딱, 짭새, 주인아줌마' 등 우리가 알고도 쓴 말의 문제가 무엇인지 왜 쓰면 안 되는지 이야기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대학과 학번을 묻는 것은 실례를 넘어 무례라는 것 또한. 차별과 혐오의 시선이 담긴 말이 왜 쓰이게 됐는지 현상을 알고 나면 씁쓸해진다. 과도한 경쟁 사회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능력이 있어도 배경이 뒷받침돼주지 못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사회에서 말은 우리의 나약함을 파고든다.


그 말은 쓰면 안 돼. 말하면 왜요, 그 말이 어때서요?라고 반문하겠지. 그럴 때 『왜요. 그 말이 어때서요?』를 건네면 잔소리하는 꼰대가 아닌 과묵하고 현명한 어른처럼 보이는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할 바에야 잘 정돈되고 훌륭한 사례가 담긴 책을 주면 읽으면서 깨닫는 바가 클 것이다. 훌륭한 어른을 만나는 것보다 훌륭한 한 권의 책을 만나는 게 현실적으로 더 쉽다. 토요일 하루가 아닌 그보다 많은 시간을 만나고 싶다. 가서 책을 읽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이야기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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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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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려고 앉아 있는 지금, 약간 행복하다. 이렇게 쓰기까지 일말의 노력이 필요했다. 자세하게 이야기할 건 아니고 간단하게 말해보겠다. 자격증 공부를 이틀 하다가 멈췄다. 변명 같은 건 안 하겠다. 공부를 멈춘 이유를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이유는 없다. 그냥 멈췄다. 밥 먹고 책상에 앉으려고만 하면 머리가 아팠다. 진짜. 엄살이 심한 나이지만 머리 아프다고는 해본 적이 없다. 비염, 축농증, 배 아픔, 귀울림 이런 걸 가지고 엄살을 떨었긴 했지만.


웬일인지 머리가 아프고 난리다. 공부하기 싫다는 마음의 신호를 몸이 받아들인 걸 수도. 그런 상태로 문제집을 펴봤자 장비빨로 내세운 형광펜으로 색칠 공부나 할 것이기에. 과감하게 드러누워 웨이브에 접속. 서핑하다 '러브라인 없는 드라마 목록'이라는 페이지를 발견, 북마크 해 놓은 걸 보고 한 편씩 뽀개기로 했다. 그리하여 어제 낮부터 《붉은 달 푸른 해》를 보기 시작해 오늘 아침까지 전편을 끝냈다. 우와, 16부작. 이제는 한 회를 쪼개서 32부작. 대장정을 마치고 잠에 들었다.


양심상 일어나서 구인 사이트 훑어보다가 라이언 인형 옆에 놓아둔 이북 리더기의 전원을 눌렀다. 몇 달째 읽고 있는 아고타 크리스토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오늘은 끝내보려고.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다. 그때는 대부분을 모른 상태로 살았고 지금은 약간만 모르는 상태로 살기 때문이 아닐는지. 제3부로 구성된 소설은 충격과 충격을 넘어선 슬픔과 감동을 준다.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어본 사람은 없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는 소설이다. 한 번 읽게 되면 시차를 두고서 다시 읽게 되는 소설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내가 이걸 전부 이해했나 의심하고 내가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외국 문학을 애호하지 않는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단 한 명의 작가는 아고타 크리스토프다. 『어제』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소설의 어느 한 구절을 공책이 바뀔 때마다 앞 장에 적어 두었다.


『어제』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읽을 때마다 전율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외국으로 망명한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모국어인 헝가리 어가 아닌 배워서 익힌 프랑스어로 쓴 소설이다. 왜 이걸 강조하는지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복문이 거의 없다. 단문으로 밀어붙인 소설이다. 문장은 힘이 넘치고 세련되었다. 좋은 소설의 강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문장, 파괴적인 이야기, 충격을 주는 결말.


어머니에 의해 할머니 집에 맡겨진 쌍둥이 형제의 성장 소설처럼 보이는 1부를 지나 한 형제가 떠나고 홀로 남은 형제의 성년기를 다룬 2부, 3부에서 밝혀지는 형제의 진실을 목도하면서 이야기는 나라는 알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마주 보게 만든다. 2부까지 읽으면 자아의 분열이라는 뻔한 주제로 소설을 압축하며 읽는 나를 안심시켜가며 읽을 수 있다. 방심하면 안 된다. 3부에서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나 자신을 작가가 비웃기라도 하듯.


아침까지 본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는 인간이 가진 죄책감을 다룬다. 유년을 함께 보낸 형제자매에게 가지는 죄책감.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방관하며 회피했던 고통의 순간을 기억 속에서 지운 채 어른이 된 아이의 비극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주인공 루카스, 클라우스 형제 역시 고통을 나눠 가지려 했지만 서로를 위해 이별을 한다. 완벽한 이별을 꿈꿨지만 실패한 두 형제의 이야기. 그들은 둘일까, 하나일까.


소설을 읽어갈수록 그들이 애초에 둘이었는지 하나였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중요한 건 나를 이루는 거짓말은 몇 개인가 하는 것. 소설에서는 세 가지라고 밝힌다. 아버지, 나이, 이름. 정리하겠다. 약간의 행복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가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공부를 멈춰 놓겠다는 결심을 한 것. 러브라인 없는 드라마를 이제 한 편 끝냈다는 것.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한 번 더 완독하고 리뷰를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


약간의 고통조차도 허락하지 않겠다. 약간의 고통이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겨울과 봄 내내 알았기에. 약간의 행복을 위해 약간의 기쁨을 위해 집착, 욕심을 제거해 나가기로 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떠올린다. 아버지, 나이, 이름은 거짓말이었다. 나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건 단 하나의 행복이다. 지금의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최선의 행복. 살아 있음의 증거로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잊지 않고 읽어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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