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소아정신과 의사 오은영이 공부에 대해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대화의 희열 3》에서 MC들에게 고등학교 때 점수를 물었다. 아무도 점수를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은 있느냐고. 다들 그 기억은 있다고 했다. 점수를 기억하진 못해도 그때 열심히 했던 기억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거라고 오은영은 말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지만 얼마 전에 떨어진 시험 점수는 기억합니다. 1점 차로 떨어졌거든요. 아깝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 받고 열심히 책을 읽었던 기억으로 나는 살아간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나는 종일 집에 누워서 책을 읽고 일기인지 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글을 쓰며 지냈다. 의지와 상관없이 백수가 된 지금. 자격증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잘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미래에 내가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근육을 기르고 있는 것이리라. 공부 근육으로 열패감과 우울을 무찌르겠어요. 가수 성시경이 그랬다. 공부하는 사람은 건강한 것이라고.
정지아의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을 읽기 전 나는 예전에 나온 『행복』을 읽었던 때가 떠올라서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책 한 권을 사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서. 너무나 소중해서. 투명 비닐로 책을 감싸 주었다. 때 묻지 말라고. 그때는 잘 몰랐다. 정지아의 소설이 좋은지. 그냥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남았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적』을 읽으며 면접 탈락의 씁쓸함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기는 부분이 있어서. 나만 웃긴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집에는 소설가 정지아가 아닌 일상인 정지아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이 등장한다. 제목부터 정지아를 떠올리게 만들게 하는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서는 페북으로 졸지에 시골에서 인기 스타가 된 정지아의 어쩔 수 없이 신나는 일상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간 정지아는 말만 시골 생활이지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텃밭을 일구고 반찬거리를 해결한다. 그 모습이 푸근하고 보기 좋다. 입이 무거운 아주머니와 친해진 시골 생활이 부럽다.
잘 팔리지 않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때론 주변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면 안 되지만 『자본주의의 적』을 읽으며 현실 속 정지아의 삶이 어느 정도 예상된다. 좋아질 날이 올까. 구질구질한 내 인생. 소설은 요즘 세태를 완벽하게 그려낸다. 가장 나다운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감독 봉준호가 말했듯이 나의 하루, 나의 신념을 보여주는 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카페에서 커피 잘 마시다가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폐 가족이라 불리는 가족의 과거와 현재를 애정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나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였다니. 책은 계속 읽고 볼 일이다. 내 맘대로 2021년 올해의 소설집을 꼽으라면 『자본주의의 적』이 1위이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의 슬픔을 감히 엿볼 수 있고 유통기한 지난 냉동 갈비를 들고 집에 가는 처연함을 통해 고통의 크기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이다. 버스가 병원 앞 정류장에 멈춰 섰다. 뒤에서 다급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버스 기사는 앰뷸런스가 지나가기 쉽게 차선을 바꿨다. 왜 그 순간 울컥했을까. 우리는 살아간다. 이름도 모르는 이의 선의로. 『자본주의의 적』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선의로 가득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