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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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고 싶지 않겠지만 근황 하나 투척한다. 단기 알바 하나를 끝냈고 계속 서류를 내고 있다. 오늘은 처음으로 면접 연락을 받았다. 열람만 하고 연락이 오지 않아서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였다. 오죽했으면 '오늘의 운세'를 매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아무 상황에나 대입할 수 있는 뻔한 말이지만 긍정적인 문장이면 그런대로 기분이 좋아진다. 가만있자. 오늘은 '허풍에 조심하세요'라네요.


자격증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안달복달, 애면글면, 반드시라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되더라.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어보자. 가지겠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겠지만. 적어도 급한 마음으로 일을 망치려 들지 말자.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오늘의 운세에 심취한 사람의 문장력이다. 책 많이 읽고 꽂히는 음악이 있으면 그것만 듣는 시간이 언제 다시 올까. 시간을 가진 사람이 부자라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내가 직업이 없지 가오가 없냐. 있을 때 누리자. 시간.


이장욱의 장편 소설 『캐럴』을 읽는 동안 눈이 내리는 겨울이 그리웠다. 따뜻한 남쪽 지방에 살고 있는지라 겨울이 되어도 눈 구경 하기 힘들다. 간혹 폭설이 내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기대를 하는 시간이었다. 내일 버스가 끊겨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캐럴』을 읽고 줄거리 요약을 해보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줄거리를 아는 게 무의미한 소설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읽는다. 다 읽고 나서는 어떤 마음이 들지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캐럴』은.


1999년을 기억하는지. 기억한다면 당신은 나와 동시대를 산 사람. 세기말 감성에 젖어 모든 걸 비관적으로만 보던 청소년이었다. 나도 너도 세상도 다 싫은 겁은 많아서 비행청소년은 못 되고 말 안 듣는 아이 자칭 문학소녀였더랬다. 지금도 생각하면 식겁한다. 그때 문학을 알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풀렸을까. 풀리지도 못한 채 접혀서 찌그러져 있었겠지. 아니 더 괜찮은 쪽으로 풀렸을까.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자격증 서적 코너에서 잠시 후회를 하긴 했다. 인문계를 가지 말 걸. (구인 공고를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문송합니다.)


『캐럴』은 1999년을 사는 도현도와 2019년을 사는 윤호연이 시간 차이를 극복하고 만나면서 시작된다. 도현도는 람페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대학 수업 때 선우를 만나 호감을 가지지만 그녀와 헤어진다. 어느 날 아침 도현도는 채권 추심인의 방문을 받는다. 그도 모르는 빚이 있다는 거다. 최악의 아침인 게 람페가 죽었다. 끈질긴 채권 추심인의 방문과 전화를 받고 도현도는 지하 7층의 사무실로 불려간다. 그곳에서 2019년을 사는 윤호연과 연결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1999년의 시간이 무척이나 생각났고(그래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고민도 아닌 고민을 잔뜩 이고 학교에 다니는 그 시절의 나의 모습이 갑자기 소환돼서) 2019년이 그리워졌다. 마스크 없이도 자유롭게 돌아다녔던. 도현도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선우는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불면이 아닌 비면으로 살아간다. 소설은 친절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지 않는다. 그들의 미래는 알려주지 않은 채 과거와 현재를 이어간다.


한동안 낮과 밤이 바뀐 채 생활했다. 어떤 날은 밤에 깨어 있는 게 미치도록 좋았고 어떤 날은 나 자신이 싫어졌다. 이중적인 생각이 들게 만드는 밤의 시간. 내일이라는 미래는 창밖으로 다가와 있는데 현재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캐럴』은 후회와 회환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해 주는 일 정도. 그래도 죽음은 닥친다. 이틀 후 나는 면접에서 무슨 말을 하게 될까. 궁금한 건 그 정도. 과거와 현재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미래는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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