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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0 소설 보다
강화길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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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제 구월. 아직도 2020년이 지속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많은 일이 일어나고 많은 일을 경험하고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 같은데. 이렇게 가다가는 영원히 2020년이 계속되고 있지 않을까. 스티븐 킹 식대로 이해한다면 다른 세계에서 2020년을 무한 반복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도 같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과 소중한 시간이니 감사히 살아가야지 하는 두 개의 마음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계절의 소설로 문지에서 기획한 '소설 보다 시리즈' 여름을 뒤늦게야 읽었다. 『소설 보다 여름 2020』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는 혹은 환멸에 가까운 감정으로 복기한다. 순간을 살아가다 보면 순간을 놓친다. 뒤늦게야 깨닫는다. 그때의 감정과 기분은 처참했으며 대뇌피질 어느 구석에도 저장하고 싶지 않다고.


강화길의 「가원佳園」은 밥값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외할머니를 이해하기 위한 소설이다. 담임 선생님의 좌우명이 '밥값을 하자'였더랬다. 초등학생인 나는 그 말에 살짝 감동했다. 정직, 믿음, 사랑 같은 추상어가 아닌 일상어로 신념을 이야기하는 어른을 처음 만난 것이다. 그 이후로 한동안 나의 좌우명도 밥값을 하자였다. 이 말은 지키기가 어려운 성질의 것임을 나중에야 깨닫고는 되는대로 살고 있다. 밥값을 하는 인간 보다 밥이라도 실컷 먹는 인간이 되자는 식으로. 강화길은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다르게 들려준다. 「음복」에서는 제삿날 며느리의 목소리로. 「가원佳園」에서는 평생 한량으로 살아간 남편을 둔 아내의 목소리로. 각자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나직하게 외친다.


서이제의 소설은 처음 읽어본다. 「0%를 향하여」. 어쩐지 서이제의 소설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읽을 것 같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독립 영화를 보기 위해 대전까지 찾아간 기억으로 지금은 영화를 만들다 백수로 지내는 '나'. 모르는 사람과 허물없이 대화를 하고 친구들을 찾아가서는 물회를 얻어먹으며 한국 영화의 독립을 꿈꾼다. 독립이 되지 않을 것임에도. 한국 영화 100주년의 역사를 귀엽게 훑어가면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같은 감히 내가 건드리지 못할 것 같은 사조를 비꼰다. 관념, 추상, 현학적으로 소설이 흘러가지 않아서 좋았다.


미주신경성 실신을 앓고 있는 이 병은 질환은 아니고 증상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미주신경성 실신 증상이 있는 진영. 임솔아의 「희고 둥근 부분」은 진영이 증상의 완화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모가 겪은 죽음에의 기억.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의 기억은 대를 건너서 진영에게로 옮겨 온다. 진영 역시 가르치는 학생을 방관 혹은 간섭했다는 추측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실신을 하고 죽음의 위협을 느낀다. 어렴풋하고 희미한 희고 둥근 부분을 찾아다니며 삶의 기운을 회복한다.


겨우 구월. 고통은 끝나고 삶은 계속된다. 나는 나대로 살아갈 힘을 찾는다. 책을 읽고 신기한 경험을 하는 일로. 『소설 보다 여름 2020』을 다 읽었더니 서점 앱 푸시 알람으로 『소설 보다 가을 2020』이 나왔다고 떴다. 우연일까. 장바구니에 쏘옥 가을을 집어넣었다. 며칠 후면 가을이 배달되어 오겠지. 괜찮고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겨울을 읽을 수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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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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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계절은 가을로 변해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매미는 안녕이라고 말했을까. 엄청 크게 인사하고 떠났을 텐데. 못 들었다. 그 자리에 풀벌레들이 찾아왔다. 어서 와. 가을이야.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에 담긴 여덟 편의 소설을 읽어나가는 일은 과거의 시간을 소환하는 과정이었다. 서랍 속에 부끄럽고 치졸했던 시절을 안 보이게 넣어 놨는데.


『여름의 빌라』의 첫 번째 소설 「시간의 궤적」에서는 관계의 무심함을 이야기한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주인공이 주재원인 언니를 만나고 함께 한 시절을 회상한다. 언제까지나 열렬한 시간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과거는 힘이 없음을 말하는 소설이다. 표제작인 「여름의 빌라」에서 추억 역시 현재까지 오는 데에는 소진된 힘 밖에는 없다고 보여준다.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는 두 부부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만남에서 평안을 빌어주고 끝이 난다.


「고요한 사건」과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에서는 혼란으로 가득한 학창 시절을 불러온다. 어리고 미숙했다. 성장 소설의 궤를 같이 하는 두 편의 소설에서 그래 어떡하든 무사히 통과했잖아 안심하게 만든다. 「폭설」과 「흑설탕 캔디」에서는 이전에서는 만날 수 없던 여성상을 그린다. 「폭설」은 어머니. 「흑설탕 캔디」는 할머니. 그들에게 양보, 배려, 평화의 의무를 강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두 편의 소설에서는 사랑, 자신, 자존감을 토대로 내일을 그리는 여성이 나온다. 그래서 희망이 된다.


그러면서도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와 「아주 잠깐 동」안에는 포기, 체념, 허무로 가득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그린다. 백수린 소설의 장점은 자의식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문장에 있다. 부드럽고 긍정적인 비유를 쓸 줄 안다는 것. 부정과 혐오의 시선이 아닌 긍정과 사랑, 위로의 의식에서 『여름의 빌라』는 쓰였다. 아무 이유 없는 위로가 필요한 시절이다, 지금은.


무턱대고 무책임한 응원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안녕이라고 듣지 못했지만 여름은 다시 올 것이다. 매일 인사를 주고받지 못했더라도 모두 잘 있겠지. 『여름의 빌라』는 다정하지 않았더라도 현재로 오게 되는 기억에게 지금은 괜찮다고 말해준다. 나의 세계로 느닷없이 굴러온 환멸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 『여름의 빌라』를 읽으며 고민한다. 사랑으로 가기 위한 용기를 얻기 위한 책 읽기의 시간으로 가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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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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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될까. 후대인들은 놀라고 신기해할 수도 있겠다, 2020년의 기록을 살펴보다가.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돌았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마스크를 써야 했으며 아이들은 학교 대신 집에서 원격 수업을 했더라는 사실 앞에서. 거리두기 단계라는 제도가 시행되면서 어떤 업종의 가게는 잠정 휴업을 하고 대신 배달업이 번창을 하는. 10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이 내려지고 모임보다는 혼자의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고도.


희망 대신 절망을 꿈이 아닌 좌절의 감정을 쉽게 느끼며 살았다는 2020년의 세계. 가만히 들여다보면 후대인들의 현재도 2020년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 연민과 슬픔을 함께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기록을 멈추지 않고 읽어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사실이 있을 것이다. 빈 병 만 개를 모아 가난한 이웃에게 기부를 하는 부부.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모아 마스크를 사서 기부하는 어린아이. 불어난 물에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아 차를 오지 못하게 해서 생명을 구한 시민.


2020년의 역사는 이토록 굴곡 많고 다채로운 색감으로 기록 될 것이다. 용기를 잃어가는 순간에도 희망을 찾아 서로에게 나누어 주려는 사람들이 있었음이 역사로 기억된다. 최태성의 『역사의 쓸모』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디에서 용기와 희망의 빛을 찾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책을 읽은 시점에 나는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광복절을 기점으로 코로나가 재유행을 해버렸다. 하루 확진자 수가 300명이 넘어가면서 잠시 일을 쉬어야 했다. 원래 일이란 게 하고 있으면 하기 싫고 하지 않고 있으면 하고 싶은 역설이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 징징 대면 안 된다. 끌어모을 용기를 찾아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역사의 쓸모』를 읽어나갔다. 최태성은 역사 속 인물과 일화를 바탕으로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오늘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무작정 힘을 내어야 한다, 습관을 바꾸고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같은 뻔한 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몇 백전에 살았던 인물의 업적과 그들이 품었던 신념을 강의하듯 친절하게 알려준다. 몰랐던 사실 앞에서 혹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았던 진실 앞에서 겸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역사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 희망이라는 말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와요. 말하자면 역사는 실체가 있는 희망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조금 더 살아보자고, 버텨보자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조금만 더 멀리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은 두렵겠지만 나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아요. 세상도 변하는데 나의 인생이라고 늘 지금과 같을까요? 힘든 세상에서 희망마저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태성 『역사의 쓸모』 中에서)


삼일천하로 끝난 급진 개화파가 가졌던 새로운 세상의 열망. 전성기를 늦게 맞이한 약소국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 일제 강점기 때 권력의 편에 서지 않고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걸었던 이회영과 박상진의 신념. 자신의 한계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찾았던 정도전의 돌파력. 거란의 패를 정확히 읽어 전쟁 없이 강동 6주의 땅을 가져올 수 있었던 서희의 뛰어난 관찰력.


『역사의 쓸모』는 능력이 검증된 역사 속 인물의 삶을 통해 어렵고 험난한 이 시대를 돌파해 가자고 말한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빛나는 삶의 기지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보여주었던 모습에서 나의 절망을 조금씩 무너뜨릴 수 있었다. 역사는 오래되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가.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취업을 하는 일에 역사는 당장의 쓸모가 없다는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오늘만 살 수는 없다. 괜찮은 나를 만들고 그런 나가 살 수 있는 내일에 희망을 걸어보는 일에 '역사'가 있다고 『역사의 쓸모』는 힘주어 이야기한다.


선덕여왕은 위기의 순간에 '혁신'을 꾀한다.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어 올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80미터 높이의 아파트 30층에 해당하는 탑을 지어 신라인들이 어디에서나 그 탑을 볼 수 있게 했다. 신라를 괴롭히는 주변국의 이름을 탑에 새기면서 힘 있는 나라로 나아가겠다는 열망을 심어주었다. 강해질 수 있다는 마음을 모으며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2020년은 위기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불안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암담함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위기를 극복하고 서로의 꿈을 위해 연대해야 함을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역사의 쓸모'는 소임을 다한 것이다. 선덕여왕이 신라인의 마음에 열망을 심어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서로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체면 보다는 실리를 따지며 외교와 국방의 안전을 위했던 장수왕에게서는 필요할 땐 한 발 물러서는 용기를 배워야 한다. 정약용은 유배 생활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삶을 읽어나가며 우리는, 지지 않았고 사랑과 걱정으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갔다고 역사는 기록될 것이다. 2020년의 역사는 놀라운 희망으로 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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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티튜트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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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기어이 나를 울리고야 말았다. 예능 보다가도 눈물이 찔끔 나는 요즘이다. 누가 우는 걸 보고 있으면 같이 마음이 짠해진다. 뜨이씨.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다. 『인스티튜트』를 읽은 건. 공포, 호러의 제왕인데. 아니다. 스티븐 킹은 신파, 감동의 황제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주제로 소설을 쓰는 그이지만 그 안에는 인류애, 우정, 사랑이 깔려 있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사랑만이 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킹의 소설은 이야기한다. 뻔한데 뻔하지 않게 쓴다.



집중력이 약해져서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태라면 스티븐 킹을 읽기를 권한다. 킹의 어떤 소설이라도 좋다. 한 번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면 없던 집중력도 생기면서 장엄하게 펼쳐지는 서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 현실을 잊고야 만다. 시간을 들여서 책을 읽는데 재미와 감동이 보장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스티븐 킹은 단 한 번도 배신을 때린 적이 없다. 오히려 반전과 놀라운 결말로 뒤통수를 칠 뿐이다.


『인스티튜트』의 후반부를 읽으면 누구라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연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면서 이야기는 뻗어 나간다. 흩어진 사건의 조각이 모이면서 혼과 눈물을 쏙 빼놓는다. 스티븐 킹. 당신은 정말 찐이다를 외치면서 엉엉. 팀은 전직 경관으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해 있다. 승무원이 경찰에게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승객들에게 부탁한다. 팀은 약간 많은 사례금을 받고 비행기에서 내린다.


의도하지 않게 어쩌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꽉 막힌 도로에서 내려 듀프레이라는 작은 마을로 간다. 그곳에서 야경꾼이라는 고전적인 직업을 갖게 된다. 인생. 마음먹은 대로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팀은 직시한다. 불운으로 경찰을 그만뒀지만 훌륭한 경찰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 야경꾼으로서 완벽한 적응을 한다. 강도를 붙잡고 시민을 구하기도 하면서.


한편 루크는 천재 소년으로 유명 대학에 들어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열두 살이라는 나이로.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SAT 시험을 치렀고 교육비와 주거비 지원을 받기로 했다. 특별한 밤이 찾아오기 전까지. 낯선 이들이 루크의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을 죽이고 그를 납치해 간다. 눈을 뜬 루크는 자신의 방과 흡사한 곳에서 눈을 뜬다. 문밖으로 나가고 그곳에서 담배 사탕을 물고 있는 칼리샤라는 소녀를 만난다.


음모론을 믿으시는가.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경우 그 배후에 음험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지지하던 정치인이 죽거나 영향력이 있는 유명인이 사고로 죽거나 했을 때. 조작이고 날조고 사기라고 소심하게 외쳐본 적이 없는가. 죽음으로 인해 일의 방향이 미세하게 변화했다면? 『인스티튜트』는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사명으로 똘똘 뭉친 비밀 세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워. 워. 오해는 하지 말고.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이니까.


천재 소년 루크와 전직 경찰관 팀이 만나게 되기까지. 만남 이후까지. 『인스티튜트』는 망설이지 않고 질주한다. 루크가 눈을 뜬 그곳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의 꼬마 대장 에이버리가 펼치는 활약. 처음으로 다정하게 대해준 친구를 위해 에이버리는 결심을 한다. 에이버리의 생각을 읽는 어느 누구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데. 『인스티튜트』는 서로를 구할 수 있는 힘은 가식 없는 친절과 애정을 담아 상대를 불러주는 순간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숨어 있다고 스티븐 킹은 믿는 듯하다. 전염병이 돌고 자다가 납치를 당하고 동물의 습격을 받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도 진심이 통하는 단 한 사람을 만난다면 어찌어찌 일의 순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이야기의 제왕은 믿고 있다. 『인스티튜트』는 그 믿음의 결정판 같은 소설이다. 루크와 팀. 루크와 에이버리. 루크와 칼리샤. 루크와 니키. 루크가 만난 그들에게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2020년 최고의 소설. 『인스티튜트』. 아직 2020년은 안 지났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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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미녀들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오언 킹 지음, 이은선 외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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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잠자는 미녀들』을 읽는 나흘 동안 신기하게도 피곤하지 않았다. 심지어 졸리지도 않았다. 대개 책을 읽다 보면 잠이 오게 마련이고 잠을 자려고 책을 읽는 탓도 있고 해서 머리맡에 대충 책을 펼쳐둔 채 잠의 나라로 빠지기 마련인데. 책상에 앉아서 독서대도 펼쳐 놓고 정자세로 읽었다. 스티븐 킹이 책에 각성제라도 뿌려 놓은 거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빠져 보니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않은 이유가 있긴 있다.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인 근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게 되고 말았지만. 힘들고 걱정스러운 이야기는 굳이 해서 누군갈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으니 패스하고. 아무튼 1200페이지 넘는 소설 『잠자는 미녀들』을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읽었다. 한 번 더 생각에 빠져 보니 소설의 내용이 잠에 빠지면 안된다는 설정 이어서 무한으로 감정 몰입이 된 탓도 있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스티븐 킹 미친 거 아냐라는 거였다. 확실히 스티븐 킹은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만든단 말인가.


그의 아들 오언 킹과 함께 쓴 『잠자는 미녀들』은 여자들이 잠에 빠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애팔래치아산맥의 도시를 중심으로 현란하고 폭력적이며 과격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느 날 오로라 병이라고 불리는 수면병이 창궐한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나오는 그 오로라. 파티에 초대 받지 못해 악의 요정이 건 저주에 빠져 잠만 자는 그 오로라. 오로라 병은 여자들만 걸린다. 여자들이 잠에 빠지면 누에고치 같은 실이 온몸에 퍼진다. 곧 실에 몸이 감싸인다.


당황한 사람들이 실을 걷으면 잠에서 깬 여자들이 폭력적으로 변한다. 괴물 같은 힘으로 주변 사람을 물어뜯고 죽인다. 전 세계에서 그 일이 일어난다. 잠에 빠지면 안 된다! 여성 교도소를 배경으로 『잠자는 미녀들』은 시작한다. 사각형의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햇빛에는 관심 없는 저넷. 다양한 죄목으로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여자들. 그 안에서도 폭력은 멈추지 않는다. 성폭력을 일삼는 돈 피터스 교도관. 교묘하게 자신의 죄에서 빠져나간다. 정신과 의사 클린트. 그는 재소자들 편에서 편의를 봐주려는 의사이다.


숲 근처 트레일러에서 약쟁이들이 약을 하려는 그때 이비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티파니는 그녀가 혼자 남자 둘을 죽였다고 신고한다. 벽에 던지고 얼굴을 들이 받았다는 것이다. 클린트의 부인이기도 한 라일라는 현장으로 출동한다. 현장 주변에서 피 묻은 옷을 입고 있는 이비를 발견하고 경찰차에 태운다. 이비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정신 감정을 받기 위해 클린트가 있는 교도소로 데리고 간다. 이비는 묘한 웃음을 짓는다.


점점 여자들이 잠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혼란이 찾아온다. 실에 감기고 그걸 모르고 걷어 냈다가 죽임을 당한다. 곧이어 인터넷에는 잠든 여자들을 불에 태워야 병을 잠재울 수 있다는 가짜 뉴스가 퍼진다. 교도소에서도 여자들이 잠이 든다. 이비는 클린트에게 자신을 일정 시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한다.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 아래 라일라와 교도소장 재니스, 교도관 바네사가 모인다.


교도소 안에서 이비는 잠이 든다. 그리고 멀쩡하게 눈을 뜬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는데도. 이비의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딸이 잠에 빠져 분노에 빡친 동물 관리인 프랭크는 경찰관들을 모아 교도소로 들어가자고 한다. 이비를 지켜야 오로라 병에 걸린 여자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 클린트는 어떤 작전을 실시할까. 한 번 읽으면 멈출 수 없고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의 고군분투 때문에 읽는 사람마저도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마법 같은 책, 『잠자는 미녀들』.


여자들이 없는 세상은 어떤 시간의 흐름으로 흘러갈까. 여자 대 남자의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쓰인 책이 아니다. 혼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여성, 남성의 구분은 무의미한 짓이다. 잠에 빠진 여자들이 넘어가는 세상은 인류가 멸망한 곳이었다. 여성이 사라지고 남성만 남은 곳에서는 파괴만이 있을 뿐이었다. 각각의 개성 강한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 힘. 이야기를 막판까지 몰고 가는 추진력. 킹 부자는 신나게 자판을 두드렸을 것 같다.


이상하게도 『잠자는 미녀들』을 다 읽고 나자 피곤이 몰려왔다. 독자를 안심하게 하면서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결말 때문일까. 현실이 소설을 압도해서 일까. 킹 부자가 그리는 소설 속 현실 보다 책을 읽고 있는 나의 현실이 더 공포적이고 스릴러 같기도 한 기분. 책을 읽으며 킹이 그려내는 긴박한 이야기 안에서 서성이다 보면 현실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완벽하게 불안과 염려를 잊을 수 있었다. 킹 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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