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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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세계는 그립지 않았다. 이따금 생각이 날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무언갈 삼키고 문을 닫고 걸어 내려가는 일만으로도 하루치의 에너지를 다 써버린 기분이었다. 게으르게 살고 있는 죄책감에 빠질 때면 책을 펴는 게 아니라 유튜브를 봤다. 그곳에는 일을 하고 자기 계발을 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어떤 알고리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상 브이로그의 주인공은 여자들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하루를 보여주는 브이로그도 있었고 얼굴을 드러내면서 하루를 공유하는 브이로그도 있었다. 택배를 뜯고 정갈하게 음식을 차려 먹고 아침 출근길에 거울 앞에 서서 출근룩을 보여주었다. 퇴근 후에는 영어를 공부하거나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기도 했다. 보여주어서 봤다.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야지 했지만 이번 생은 그냥 망한 걸로.


한정현의 장편 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등장인물이 대부분 여성이다. 한정현 소설의 세계에서 여성은 단지 성별 구분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여성/남성 구분 자체가 필요 없다. 여성이되 여성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 소설을 떠날 수는 없어서 하루의 마무리를 하는 의식으로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의 몇 페이지를 읽었다. 어떤 날은 읽었다는 일로도 죄책감이 덜어졌다. 무엇으로부터의 죄책감일까. 자꾸 생각하면서.


소설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건드린다. 성소수자, 여성, 불법 촬영, 성폭력 피해자, 빨치산, 여성 외모 비하. 일본에서 교원으로 일하는 설영에게 셜록으로부터 메일이 온다. 셜록은 한때 설영과 친밀했던 지연의 별명이다. 설영은 일본으로 오기 전 사고로 8개월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기억을 잃은 후 지연인 셜록과도 연락이 두절되었다. 함께 살았지만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설영은 셜록의 메일을 토대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다.


한국에서 연정은 성형외과 의사로 일한다. 강남의 병원에서 여자들의 얼굴을 고치면서도 회의감이 든다. 무엇이 여성들을 병원으로 오게 하는가. 연정에게는 자신이 낳진 않았지만 목숨 보다 귀한 아이가 있었다. 친엄마의 뜻을 친한 엄마라고 하며 연정을 따르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동급생들에게 레즈 페미인척한다는 이유로 성폭행을 당하고 물탱크에 버려졌다. 연정은 도영이 좋아했던 추리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버틴다. 일본과 한국에 사는 설영과 연정은 셜록에 의해 만난다.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추앙의 대상이었던 마릴린 먼로는 소설을 좋아했고 지적이었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보고 싶은 면만 보려 한다. 보고 싶지 않은 면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버리거나 조롱한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자신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며 강요한다. 다른 삶의 행보가 보이면 지적하고 간섭한다. 셜록이 연구소에서 당한 일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서 끔찍했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서사를 추리소설의 형태로 다룬다.


평등을 부르짖으며 빨치산이 된 자들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폭력이 있었다. 산에서도 산을 내려와서도 여자들은 성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소설 속 인물 김춘희는 자신을 강간한 남성과 결혼했다. 나이가 든 김춘희는 딸의 생부가 따로 있다고 굳건히 믿는다. 폭력은 사람을 멀쩡한 모습으로도 미치게 만든다. 내가 보는 브이로그이 영상 속 여자들은 대부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목 아랫부분이 나올 뿐이다. 그녀들은 부지런하다. 그리고 대부분 말랐다.


한정현이 제안하는 우리들 자신을 마릴린 먼로라고 명명하자고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가 멸시와 조롱이 되어 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셜록이 아닌 지연이 설영에게 하는 말 그래도 살아내자는 말 먼저 죽은 자들에게 해줄 서사를 가득 품고서 살아내자는 말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다른 이름이 되더라도 이 세계를 버텨내자는 뜻이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나는 나이다. 사람들이 여자에게 하는 말. 마르고 귀엽고 머리는 길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내가 내가 될 때 저 말들을 간단하게 물리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세계의 단면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슬프고도 아프게 그려낸다. 겪어보지 않고 누군가의 상처에 쉽게 극복하라고 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소설의 세계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추리의 세계에서. 부지런하지 못한 내가 탐미하는 브이로그의 세계에서. 답은 있을까.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답을 찾아간다. 어떤 세계에서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정답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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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08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당선도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