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 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
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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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까라는 의문으로 지내온지 두 달째. 내일이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라니. 믿을 수 없다. 시간 한 번 거 참 빠르다. 할 새도 없이 빠르게 흘러가고. 나의 의문은 영영 풀리지 않을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변함이 없어서 참 좋다, 좋다고 생각할래. 해결되지도 않을 일에 마음을 쓰는 것보다 워킹 데드 마지막 시즌이나 뿌시는 걸로.


영화를 보면 되는데 영화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을 보고 책을 읽으면 되는데 책을 소개해 주는 책을 읽고 있다. 좋은 걸 보고 싶은데 고르는 기준이 꽝이라. 이러고 있다. 나만 몰랐던 벅차오르는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을 알고 싶단 말이다, 하는 심정으로 오늘도 서평집을 읽는다. 금정연의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은 제목이 근사하다. 글쓰기에서 매번 실패하는 부분이 문장 쓰기인데. 어떻게 하면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을 쓸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읽었다면 답을 찾을 수 없는 책이다,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은. 서평계에서는 나름 유명하다던데 나는 금정연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반성하는 기분으로 차분히 읽어 보았다. 책상에 앉아서. 책의 소개를 쓰고 싶은데 훌륭하게 쓰지 못할 것 같아서 패스.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 위주로. 폴 오스터의 이야기가 있어서. 마루야마 겐지와 윤성희의 이야기가 있어서.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이 있다는 걸 알려줘서. 도입부를 어렵지 않게 쓰고 있어서. 좋았다는 거다. 문학의 저주에 걸린 자의 투병기 같은 글이랄까.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은 서점 장바구니를 클릭, 결제까지 하고. 그리하여 책 택배는 쌓여만 가고 소설을 쓰겠다고 직장을 그만두기까지 한 문학병을 단단히 앓고 있는 자의 글은 강 건너 불구경 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재밌단 말이다. 내가 그러고 있는 것도 모르고서.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은 금정연이 읽은 책에서 밑줄 그은 문장에 기대고 있는 책이다.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앉았는데, 앉아 있기만 할 때, 첫 문장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치사하지만 인용이다. 서평이라는 게 책 소개를 얼마큼 근사하게 하냐인데. 책 소개만 하다보면 뻔하고 나조차도 읽고 싶지 않은 진부한 글이 돼버린다. 색다르게 쓸 수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이제 그만 써야지 한다.


그래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 오늘도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 책을 읽다가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은 문장을 만나면 그걸로 쓴다. 시작이 어렵지 쓰다 보면 온갖 기억이 몰려와 자판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추는 지경에 이른다. 내 이야기 좀 들어줘. 현실에서 이러면 주접떤다고 욕먹는데 글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니까 쓴다. 책 이야기를 하는 척 내 이야기를.


문장은 실패를 모르지만 내 인생은 실패를 안다. 아니다. 내 문장도 내 인생도 실패를 너무 잘 알아 개무시 하고 싶어지는 게 실패의 쓴맛. 요즘 나는 박명수의 어록을 계속 생각하는데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에 떡 하니 박명수의 어록이 실려 있는 게 아닌가. 와. 미친. 대박. 어쩜 이래. 오늘 나는 사람들 앞에서 이름과 나이를 소개했다. 정말 하기 싫었는데. 안다. 내 나이. 무언갈 시작하기에 애매한 나이라는걸.


부끄러운 척 나이를 말하면서 생각했다. 박명수의 그 말을.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너무 늦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땐 너무 늦은 거다. 그러니 지금 시작하라."(박명수, 『맨발에서 2인자까지』) 그래서 난 지금 시작하려고 이 자리에 있는 거다. 문학의 저주에 걸린 채. 심통 난 마녀가 저주를 풀어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여기면서. 또 다른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


오늘도 유익한 서평은 쓰지 못했구나.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이 어떤 책인지 알려주려고 했는데. 바보 같은 내 이야기만 늘어놓았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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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일기 - 공포와 쾌감을 오가는 단짠단짠 마감 분투기
김민철 외 지음 / 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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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한국 문학만 읽는 것 같아서(같아서가 아닌 맨날 한국 문학만 읽는다.) 좀 있어 보이려고(누구에게? 허세 쩐다. 정말.) 제임스 설터의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진도가 잘 나갔다. 글쓰기 의욕을 마구 불러주는 글을 시작으로 제임스 설터가 만난 작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결론은? 다 못 읽고 다른 책을 집어 들고야 말았다는 한심한 이야기.


책이 아닌 나의 문제로 인하여. 제임스 설터가 공군에 있을 때 만난 인물들의 서사가 펼쳐지려는데 집중이 안 돼 책을 덮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심기일전하고 다시 집어 든 책은 작가들의 마감 분투기를 다룬 『마감 일기』.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제임스 설터의 책들. 『마감 일기』는 여덟 명의 작가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마감을 대하는지 이야기하는 책이다.


먼저 김민철 작가. 이 분의 마감 철학은 삶의 철학이기도 해 존경해 마지않았다. 마감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에 주입하며 글을 쓴단다. 내가 늦으면 연쇄적으로 다른 이들의 일에도 지장을 주는 걸 알면 절대 마감을 늦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회사원이기도 한데 그 때문인지 책임감이 엄청나다. 마감을 대하는 자세도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래 맞아. 나도 그래. 고개를 계속 끄덕이게 만든 작가는 이숙명. 이력을 보니 잡지사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했다. 매일이 마감인 인생으로 살아갔으리라. 『마감 일기』를 쓰기 위해 고생하고 실패한 기록이 유머러스하게 담겨 있다. 전 재산을 쏟아부은 주식의 수익률이 천 퍼센트가 난다면 글을 쓰지 않을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서 빵 터졌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보겠단다. 내가 매일 하는 상상인데. 화수분 같은 통장을 가지고 있다면 평생 먹고 놀고 싶다는.


소설가 권여선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마음 한편이 찡했다. 짠하기도 하고. 짝꿍이 괴롭혀서 학교에 가기 싫었다고. 대입 시험을 혼자 치러내는 것으로 학창 시절을 마감한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는 이야기. 소설가로 등단을 했지만 청탁 없이 몇 년간을 버티며 결국에는 학원 강사의 길로 가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기회라는 게 찾아오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 소설가로 살아간 사연이 절절하게 실려 있다.


누가 써 달라고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나대로 글을 쓰고 있다. 마감이라고 정하지는 않았지만 책을 읽으면 그날을 넘기지 않고 리뷰를 쓰려고 한다. 이걸 하지 않고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이런 걸 사서 고생한다고 하지. 리뷰를 쓴다고 해서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조금 있으면 블로그에 쓴 리뷰가 천 개에 도달한다.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책 정보는 전무한 리뷰. 왜 쓰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없고. 그냥 쓴다. 우연히 집어 든 책이 마음에 들어서 그 기분이 어떤지 표현하고 싶기도 하고. 내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문장을 만나면 고맙기도 해서. 『마감 일기』는 작가들의 내밀한 일상을 알고 싶어 읽게 된 책이다. 그들도 빈 화면 앞에서는 어쩔 줄 모르고 괴로워하는 깜빡이는 커서를 외면하고 싶어 하는 지구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읽고 싶은 책을 읽어도 좋다는 계시를 받은 책, 『마감 일기』. 어느 부분에서 그런 계시를 받았는지 묻는다면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서도 『마감 일기』를 읽으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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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의 시간 - 서유미 에세이
서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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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는 아이를 낳고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카페에 그녀 말대로 출근을 해서 다양한 곳에 이력서를 보낸다. 계획은 육아 휴직 후에 직장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유치원에 갈 때 울지 않고 엄마 손을 덜 타는 시점이 되자 주인공 경주는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든 감정은 서글픔이었다. 면접의 기회조차 쉽지 않은 경주의 일상을 보면서 안타깝기도 했다. 채널예스에 실린 서유미 소설가의 인터뷰를 보다가 에세이가 나왔다는 걸 알았다. 소설만큼이나 즐겨 읽는 게 에세이다. 요즘엔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자주 읽는 듯. 비교적 힘이 덜 들어가 있는 글(힘이 덜 들어간다고 썼지만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글은 힘이 들겠지.)인 에세이를 읽으면 괜한 힘이 빠지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한 몸의 시간』은 소설가 서유미가 아닌 엄마 서유미의 입장에서 쓰인 책이다. 결혼할 때부터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옆 사람과 합의도 했다. 계획은 그러했다. 세상만사 계획한 대로 흘러만 간다면 왜 근심, 걱정이 생기겠는가. 어느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소설가의 일상은 차츰 변모한다. 엄마가 되는 일. 걱정이 앞서고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럴 때 소설가는 글을 썼다. 소설가와 엄마라는 자아의 경계에서 흔들릴 때 잡아준 건 글이었다. 두렵고 막막하고 불안한 나날을 글로 옮겼다. 배 속의 아이와 한 몸으로 지내는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 것이다. 『한 몸의 시간』은 서문에서 밝히듯이 육아 지침서나 태교에 관한 글은 아니다. 소중하게 찾아온 인연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엄마로서 살아갈 날에 대한 의지를 다룬 책이다.


『한 몸의 시간』에서 출발한 서사가 소설 『우리가 잃어버린 것』으로 도착했구나를 느꼈다.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고 밝힌다. 커피를 좋아했는데 입덧이 시작되면서 커피의 고소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몸이 붓고 배가 무거워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힘들었다.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불편함은 타인의 고통을 비로소 바로 보게 해주었다.


아이를 가졌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자 많은 축하가 따라왔다. 심지어는 글쓰기 수업에서 공부하는 학생(엄마이자 학생들이었다)들이 육아 용품을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소설이 전부라고 여겼던 삶에 자식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기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넓어진다. 의사의 권유대로 수술로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시련이 시간이 있었지만 사랑과 다정함으로 이겨 나간다.


불안을 불안으로 놔두지 않는 현명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글이란 우리를 훌륭한 어른까지는 아니지만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져다준다는 걸 『한 몸의 시간』을 통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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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곁에 두는 마음 - 오늘 하루 빈틈을 채우는 시인의 세심한 기록
박성우 지음, 임진아 그림 / 미디어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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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책 읽기가 고팠나 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한 권씩 읽는데 엣헴 엣헴 신이 나. 연휴 동안 부지런히 하루에 한 권은 읽을 계획이다. 어디까지 계획이다. 잘 안될 수도 있다. 읽을 책을 쌓아 놓고 있으면 말도 못 하게 행복하다. 앞으로 읽어줄게. 책등을 쓰다듬고 표지 뒤에 실린 글과 서문을 읽으며 괜히 울컥한다. 요즘 쓰는 글에 어떤 단어가 많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음'이라는 단어였다.


내 마음이 그래. 네 마음은 어떠니. 나는 이런 마음에서 그런 거야. 그 마음을 설명할 길이란 없어. 도무지 모르겠는 마음들의 상태. 그래서일까. 도서관 신간 코너에 꽂힌 박성우 시인의 『마음 곁에 두는 마음』을 단박에 골라낸 것은. 무려 마음이 두 번이나 들어 있는 제목의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중간을 펼쳐서 봤는데 귀여운 그림체와 단정한 어투의 글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앉아서도 읽고 누워서도 읽고. 대부분 누워서 읽었다는. 『마음 곁에 두는 마음』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뿍 담겨 있다. 시인이 보는 풍경 안에는 자연과 사람이 공존해 있다. 오후 세시의 고양이. 시인의 집에 찾아오는 고양이는 오후 세시에 정확하게 찾아와 먹을 걸 내놓으라고 운다. 시인은 모른척할 수 없어 간식과 사료를 챙겨 준다. 그 고양이가 한동안 오지 않다가 다시 찾아와 먹을 걸 먹고 눈가를 촉촉이 적시며 운다.


녹색어머니회에 나가는 시인의 아침 풍경. 딸애가 '여기가 아빠 자리야. 창피하게 하지 말고 잘해'라고 격려 아닌 격려 같은 말을 한다. 글을 쓰다 막히면 마당에 나가 별을 보고 물까치떼가 점령한 그곳에 서서 생각에 잠긴다. 마음 따뜻한 친구들은 에어컨을 달아주러 찾아오고 어머니 집 공사도 하루 만에 뚝딱 해치운다. 봉제 공장에 다니며 시를 쓰던 시절에 만난 봉팔이 성의 사연까지.


『마음 곁에 두는 마음』은 읽으면 읽을수록 짠하고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안에는 내 마음과 네 마음을 함께 나누던 사람들의 온기가 묻어 있다. 아파트 경비 대장 어르신이 퇴직할 때 시인은 영양제를 사서 내민다. 어르신은 다시 찾아와 쿠키 한 상자를 내민다. 한 편 한 편에 담긴 일상의 모습이 애틋하다. 딸 친구들이 놀러 오면 자리를 피해 주는 시인 아버지. 서로 먹을 걸 챙겨주느라 바쁜 동네 어르신들.


하루는 길고도 짧다. 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시간은 밤 열시가 훌쩍 넘었다. 공부 조금 하고 책 조금 읽고 밥 한 번 챙겨 먹고. 아, 중간에 청소도 했지. 낮잠도 잤고. 의미 없는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늘 하루 책 한 권을 읽어냈다. 대인기피증까지는 아니지만 사람 만나는 걸 꺼려 하는 나로서는 책 속에 펼쳐진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이야기를 읽으며 사람의 허기를 달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누군갈 만난다면 이렇게 해봐야지. 잘 듣고 잘 웃어주는 일. 그렇습니다. 인간관계를 책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침묵했고 마음과는 다른 말로 상처를 주기도 했다. 방어적으로 사람을 대하다 보니 의심이 많고 친절에도 응답하지 않게 되었다. 『마음 곁에 두는 마음』은 모든 이름을 불러주는 시인의 배려가 과거의 인연들을 기억에만 놓아두지 않으려는 시인의 안간힘이 예쁜 마음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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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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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드는 나이기에 요즘 관심을 두는 작가에는 백수린이 있다기에 책을 사서 읽어 나갔다. 그렇게 친애하는 작가 목록에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신간이 나오면 읽는 것으로 멀리서 미약한 응원을 보낸다. 『다정한 매일매일』이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당장 읽어야지 했지만 핑계겠지만 여차여차한 나름의 사정으로 뒤늦게 읽었다. 너무너무 굉장히 좋았다는 걸 먼저 밝힌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화 하나. 컴활 2급 필기시험을(그렇다. 요즘의 나는 컴활 2급 자격증 시험에 목숨을 걸고 있다. 남들은 독학으로 일주일 만에도 딴다는데 컴맹인 나는 아무리 책을 들여다봐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굴려서 함수식을 넣어보지만 매번 오류가 뜬다. 그놈의 #VALUE! 오류. 그만 좀 떠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컴퓨터로 푸는 CBT 시험이었는데(그렇다. 요즘에는 컴퓨터로 시험을 보는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컴퓨터 사인펜 가져가려고 했지 모야.) 화면에 나온 폰트가 충격이었다. 문제를 읽어야 하는데 폰트가 신경 쓰여 집중이 안 됐다. 아실랑가 몰라. 그 옛날 도스 시절에 컴퓨터 화면에 나오던 폰트. 명령어를 입력할 때 나오던 두껍고 납작한 글자체였다. 찾아보니 둥근 모꼴이란다.


파란 화면에 명령어를 입력해야 부팅이 되던 시절. 그걸 몰라서 컴퓨터를 관상용으로 놔두기만 했던 나였다. 화면으로 글을 읽는 건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마주한 컴퓨터를 포기하게 만들었던 그때의 기억을 불러오는 화면의 글자들을 보면서 충격에 빠지긴 했지만 충격에 빠지면 어쩔 건데 빨리 시험을 봐야지. 집 나간 정신을 부여잡고 천천히 화면 속 글자를 읽어 나갔다.


결과는? 컴퓨터 일반은 무조건 외우면 되는 거라 백 점을 맞았는데 스프레드시트 일반은 65점을 맞았다. 그리하여 엑셀 공부를 진지하게 하고 있다. 실기의 꽃인 계산 작업에 올인하고 있다, 지만 오류만 뜨고 난리다, 난리. 머리를 식히고 감성을 충족해 줄 책이 필요했다. 숫자와 영어만 있는 책이 아니라. 한 달 만에 간 도서관. 평일의 도서관은 조용해서 숨도 나직이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이용 제한 시간이 한 시간이어서 얼른 책을 빌려 나왔다. 부들부들하고 내가 좋아하는 피치색의 표지를 가진 『다정한 매일매일』을 매일매일 읽어 나갔다. 빵과 책이라니. 꿀 조합 아닌가. 이 책은 종종 빵을 만든다는 백수린 작가가 책과 빵을 이야기하는 산문집이다. 책 한 권에 빵 하나씩이다. 소설가 백수린의 리뷰를 모은 책인데(리뷰를 열심히 쓰는 나지만 다른 이의 리뷰를 잘 읽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나여서) 책을 읽으며 이런 리뷰 책이라면 매일매일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이 어떻고 하는(하긴 리뷰는 책이 어떻고 이건 뭐가 좋고 뭐가 얼마나 굉장하고 후세에 드높일 발자국을 남길 만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게 목적이지만) 날카로운 분석은 없다. 자신의 일상을 담백하게 이야기하면서 편안하게 글을 시작한다.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좋아할 줄 아는 이의 명확함이 돋보이는 글들이다. 주로 외국 문학을 소개하고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한국 문학을 더 애호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는 게 쉬우니까. 그래도 읽을 거라고 사 놓기만 한 외국 문학이 있다. 손도 안 대고 있는데 『다정한 매일매일』에서 다정하게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책을 읽고 싶게끔 만드는 책 소개를 하고 있어서 천천히 읽어보리라 다짐한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이 그런 내용이었다니.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소설가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에는 소설가로서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소설을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에는 무엇이 필요한지 성찰한다. 언어를 고르고 언어를 분석하고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기술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소설이 좋아서 소설을 읽고 급기야 소설을 써내기까지 하는 사람. 소설가 백수린.


재능과 노력이 부족해서 소설을 쓰지는 못하지만 시험을 보러 가서 글자체만 보고 있는 나 역시도 소설 읽는 게 좋고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문장을 읽으면 지금 이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엑셀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은 부족하지만 화면에 뜨는 오류들을 보며 내 인생에 오류는 어떤 수식을 잘못 넣어서 된 것인가 고민에 빠지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이런 마음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좋아하는 책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더불어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달콤하고 고소한 빵에 대해 쓰인 『다정한 매일매일』은 우리의 오늘이 그런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책상 위에 놓인 마들렌. 연필과 종이. 키감이 좋은 키보드. 창을 열면 보이는 푸른 하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가지런히 꽂아두는 거. 함수를 이해하진 못하지만 소설가가 애정 하는 책을 소개하는 글을 읽으며 그 마음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어 지금까지 헛산 건 아니구나 위로받았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려 애쓰거나, 그러지 않거나 두 가지밖에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가능한 한 나는, 언제나 사랑의 편에 서고 싶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인생을 실패나 성공으로 요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은 문학 작품은 언제나,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실패나 성공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소설가로서 나는 언제나 서사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 커다란 구멍으로 남아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소설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은 그런 지점들이 아닐까? 우리는 삶과 세계를 하나의 매끄럽고 완결된 서사로 재구성하려 애써 노력하지만, 사실은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단편적인 서사들을 성글게 엮으며 살아갈 뿐이니까. 그리고 바로 거기,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때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서사와 서사 사이의 결락 지점. 그런 지점이야말로 문학적인 것의 자리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지나치게 눈부신 빛 속에 서 있다는 생각에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나고 두려워지면, 언젠가부터 나는 기꺼이 어스름 쪽으로 눈을 돌린다. 창가에 어린 입김과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 냄새, 새벽에 내리는 첫눈과 말이 되지 못한 채 기척으로만 존재하는 마음 쪽으로. 붙잡으려는 순간 사라짐으로써만 존재하는 어떤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中에서)


당신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 책을 매일매일 읽으며 다정함으로 포근해지기를 바란다. 그래도 문학,이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버텨 나가는 당신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 『다정한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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