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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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려고 앉아 있는 지금, 약간 행복하다. 이렇게 쓰기까지 일말의 노력이 필요했다. 자세하게 이야기할 건 아니고 간단하게 말해보겠다. 자격증 공부를 이틀 하다가 멈췄다. 변명 같은 건 안 하겠다. 공부를 멈춘 이유를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이유는 없다. 그냥 멈췄다. 밥 먹고 책상에 앉으려고만 하면 머리가 아팠다. 진짜. 엄살이 심한 나이지만 머리 아프다고는 해본 적이 없다. 비염, 축농증, 배 아픔, 귀울림 이런 걸 가지고 엄살을 떨었긴 했지만.


웬일인지 머리가 아프고 난리다. 공부하기 싫다는 마음의 신호를 몸이 받아들인 걸 수도. 그런 상태로 문제집을 펴봤자 장비빨로 내세운 형광펜으로 색칠 공부나 할 것이기에. 과감하게 드러누워 웨이브에 접속. 서핑하다 '러브라인 없는 드라마 목록'이라는 페이지를 발견, 북마크 해 놓은 걸 보고 한 편씩 뽀개기로 했다. 그리하여 어제 낮부터 《붉은 달 푸른 해》를 보기 시작해 오늘 아침까지 전편을 끝냈다. 우와, 16부작. 이제는 한 회를 쪼개서 32부작. 대장정을 마치고 잠에 들었다.


양심상 일어나서 구인 사이트 훑어보다가 라이언 인형 옆에 놓아둔 이북 리더기의 전원을 눌렀다. 몇 달째 읽고 있는 아고타 크리스토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오늘은 끝내보려고.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다. 그때는 대부분을 모른 상태로 살았고 지금은 약간만 모르는 상태로 살기 때문이 아닐는지. 제3부로 구성된 소설은 충격과 충격을 넘어선 슬픔과 감동을 준다.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어본 사람은 없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는 소설이다. 한 번 읽게 되면 시차를 두고서 다시 읽게 되는 소설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내가 이걸 전부 이해했나 의심하고 내가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외국 문학을 애호하지 않는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단 한 명의 작가는 아고타 크리스토프다. 『어제』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소설의 어느 한 구절을 공책이 바뀔 때마다 앞 장에 적어 두었다.


『어제』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읽을 때마다 전율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외국으로 망명한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모국어인 헝가리 어가 아닌 배워서 익힌 프랑스어로 쓴 소설이다. 왜 이걸 강조하는지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복문이 거의 없다. 단문으로 밀어붙인 소설이다. 문장은 힘이 넘치고 세련되었다. 좋은 소설의 강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문장, 파괴적인 이야기, 충격을 주는 결말.


어머니에 의해 할머니 집에 맡겨진 쌍둥이 형제의 성장 소설처럼 보이는 1부를 지나 한 형제가 떠나고 홀로 남은 형제의 성년기를 다룬 2부, 3부에서 밝혀지는 형제의 진실을 목도하면서 이야기는 나라는 알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마주 보게 만든다. 2부까지 읽으면 자아의 분열이라는 뻔한 주제로 소설을 압축하며 읽는 나를 안심시켜가며 읽을 수 있다. 방심하면 안 된다. 3부에서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나 자신을 작가가 비웃기라도 하듯.


아침까지 본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는 인간이 가진 죄책감을 다룬다. 유년을 함께 보낸 형제자매에게 가지는 죄책감.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방관하며 회피했던 고통의 순간을 기억 속에서 지운 채 어른이 된 아이의 비극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주인공 루카스, 클라우스 형제 역시 고통을 나눠 가지려 했지만 서로를 위해 이별을 한다. 완벽한 이별을 꿈꿨지만 실패한 두 형제의 이야기. 그들은 둘일까, 하나일까.


소설을 읽어갈수록 그들이 애초에 둘이었는지 하나였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중요한 건 나를 이루는 거짓말은 몇 개인가 하는 것. 소설에서는 세 가지라고 밝힌다. 아버지, 나이, 이름. 정리하겠다. 약간의 행복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가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공부를 멈춰 놓겠다는 결심을 한 것. 러브라인 없는 드라마를 이제 한 편 끝냈다는 것.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한 번 더 완독하고 리뷰를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


약간의 고통조차도 허락하지 않겠다. 약간의 고통이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겨울과 봄 내내 알았기에. 약간의 행복을 위해 약간의 기쁨을 위해 집착, 욕심을 제거해 나가기로 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떠올린다. 아버지, 나이, 이름은 거짓말이었다. 나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건 단 하나의 행복이다. 지금의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최선의 행복. 살아 있음의 증거로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잊지 않고 읽어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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