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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건너뛰기 ㅣ 트리플 2
은모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3월
평점 :
한창 《워킹데드》에 미쳐 있을 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나머지 오프닝 건너뛰기를 과감하게 눌렀다. 안다. 오프닝 시퀀스 역시 그것까지 작품에 포함된다는 것을. 《워킹데드》의 오프닝은 훌륭했다. 등장인물들의 본명도 알려주고. 그러나 그걸 읽기에는 다음 편의 이야기가 궁금했기에 얼른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눌렀다. 20~30초의 짧은 시간을 할애하면 되는데 그걸 못 참았다.
지금은 웨이브로 넘어왔다. 한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다들 나만 빼고 이 재밌는 걸 보고 있었단 말이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밌다, 드라마 보기. 은모든의 소설집 『오프닝 건너뛰기』의 작가 에세이에 나오는 것처럼 웨이브에는 오프닝 건너뛰기가 없다. 10초 뒤로 가기 기능은 있다. 세심하게 시간을 조절하지는 못해 그냥 타이틀을 본다. 새삼 놀란다. 이렇게나 드라마를 잘 만들다니. 추리, 범죄, 스릴러물에 심취해 있는 요즘이다.
은모든의 소설 『오프닝 건너뛰기』에는 세 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표제작 「오프닝 건너뛰기」는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의 코로나 일상을 그리고 있다. 2020년은 소설의 문장처럼 누구에게나 지워버리고 싶은 한 해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고 여행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미술 학원 강사인 남편은 월급이 밀려 있다. 아내는 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받으라고 말하지만 남편은 주저한다. 나중에야 원장이 처자식이 있는 직원한테는 월급을 준 사실을 알게 되고 남편은 할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전화한다.
두 번째 소설 「쾌적한 한 잔」은 문학 교사로 일하는 은우의 어느 저녁을 그린다. 모처럼 나간 동창회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얄궂은 농담을 듣는다. 급기야 동창 하나는 고백 아닌 고백 같은 고백을 하고 은우는 부드럽게 거절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호기심으로 보는 저녁의 시간 은우는 단골 술집에서 위안을 찾는다. 은모든의 소설은 일상의 주변을 더듬는다. 주인공으로 내세운 화자는 주인공 같지 않은 위치에 선 채 주변인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들려준다.
마지막 소설 「앙코르」의 주인공 세영 역시 가방을 잃어버린 가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대신 떠난 여행지에서 만난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고자 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게 은모든 소설의 장점이다. 남에게 하지 못하는 슬퍼지는 나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세밀한 일상을 그리는데 탁월하다.
우리 삶을 한 편의 드라마도 본다면 무척이나 지루해서 오프닝이 뭐야 한 편 전체를 스킵 해 버릴지도 모른다. 드라마가 아니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니까. 어쩌면 그게 소중한 이유가 되니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한 문장 한 문장 정성 들여서. 극적인 사건도 아름다운 결말도 없지만 누군가 들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기도 함을 알고 있기에. 쓴다. 은모든의 소설은 이상하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물들이 나누는 주사 같은 이야기는 아침이 되면 전부 잊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간절히 듣고 싶은 나의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