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이데올로기
마조리 켈리 지음, 제현주 옮김 / 북돋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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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우리가 주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을 산산조각 낸다. 회사의 주인이 주주고, 그들의 이익극대화를 위해 주식회사가 운영된다는 그 인식 말이다. 물론 노조가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다. 언론을 통해 나오는 노조의 경영참여에 대한 부정적인 논조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외환은행 론스타 사태에서 보았듯이 주주들이 엄청난 배당금을 받아먹고 튀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한국 재벌의 이상한 기업지배구조도 주식회사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책은 모두 2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경제 귀족주의고, 2부는 경제 민주주의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는 2부 경제 민주주의다. 그럼 경제 민주주의는 어떤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설명을 다룬 장들이 바로 1부다. 여기서 저자는 현재의 주식회사 제도는 중세 왕권신수설을 그대로 닮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설명하고 논증하는 것이 바로 1부인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룬 2부보다 재미있었다. 2부의 해법이 나의 뒤흔들 정도로 매력적이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이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의 숨겨진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원제는 ‘The Divine Right of Capital'이다. 왕권신수설과 비슷한데 표지에서도 나온 주주 몫은 이익이고 왜 직원 몫은 비용이라 하는가에 대한 해설이기도 하다. 자본이 지닌 속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풀어내면서 현대 주식회사의 자본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말한다. 이익극대화가 최상의 목표인 주주들에게 이것에 방해되는 것은 없애야 할 장애다. 그러니 환경이니 복지니 하는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없다. 딴나라 이야기 할 것도 없이 삼성반도체 직원의 백혈병 사건이나 최근의 삼성전자 불산 누출 사건 등만 보아도 너무나 분명하다.

 

2부로 나눈 후 각각 6가지 원칙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경제 귀족주의에서 다루는 것은 성구-세계관, 특권, 재산, 통치, 자유, 주권의 원칙 등이다. 경제 민주주의는 계몽, 평등, 공공선, 민주주의, 정의, 혁명적 진화의 원칙 등이다. 이 원칙들에서 헷갈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와 주권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자유를’을, 주권은 부유한 소수의 경제적 주권을 의미한다. 용어가 만들어낸 착각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 생각하면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쉽게 생각하면 자유무역이란 용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얼마나 다른지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저자는 정치가 민중에게 권력을 이양했지만 경제 주권은 아직 그대로라고 말한다. 경제 주권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른 팟캐스트 ‘나는 꼽사리다’에서 주구장창 주장한 것이라 낯설지는 않지만 이미 10년 전에 나온 책에서 벌써 다뤘다는 사실에 놀랍기만 하다. 물론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경제주권과 ‘나꼽살’이 다루고 있는 것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미국과 한국의 경제 구조와 정치 구조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경제민주화와 노동자 등을 감안하면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경제 민주주의를 다룬 2부 첫 장 제목은 깨어나기, 즉 계몽이다. 특히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언어의 문제다. 주주와 소유주, 투자자와 투기꾼, 재산권과 부유권 등이 대표적이다. 또 이 책에서 주장하는 공식 하나도 머릿속에 담아둬야 한다. 직원 이익 + 자본 이익 = 매출 - 재료비. 현대 주주는 초창기 자본을 낸 주주들이 아니다. 주식시장이란 시장을 통해 자본 이익을 얻기 위해 투기한 사람들이다. 회사의 실질적인 자본 증가엔 특별한 도움을 주지 않고 이익을 빼내어가는 사람들이다. 실제 좋은 회사의 경우 그들이 투자한 돈의 몇 십 배 회수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권리와 이익은 보전된다.

 

여기에 반대 생각으로 만약 회사가 망하면 투자자들이 모두 손해를 껴안는다는 의견이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 초기 투자의 경우나 부실한 기업을 제외하면 그 경우는 더 줄어든다. 대부분 주식시장에는 해당 사항이 드물다. 그리고 이런 경우라 해도 주주의 재산 손실보다 직원의 생존권이 더 큰 문제다. 주식 투자에 올인한 주주들이 많이 있다면 또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역시 이런 일도 흔치 않다.

 

개인적으로 그냥 마구 사용하던 용어 중 하나가 ‘법인’이다. 저자는 주식회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맞다.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법인(法人)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권리를 누리게 한다. 주식회사와 부자들은 법의 테두리를 자신들에게 맞게 조정한 후 이익을 극대화시킨다. 주주는 법인의 탈을 쓴 후 이익극대화를 위해 주변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킨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치 민주주의가 아주 더디고 힘겨운 투쟁을 통해 쟁취했듯이 경제 민주주의도 곧 다가올 것이다. 여기엔 정치와 같은 힘겨운 일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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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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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유 의지.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자유 의지가 단연코 환상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자유 의지 관념이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고,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두 가정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두 가정이 모두 틀렸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논증으로 심리학과 신경학을 이용한다.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저자의 논증에 빠져들게 된다.

 

저자가 질문으로 던진 몇 가지 예는 사실 끔찍한 것이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살인에 대해 아직 우리의 인식이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살인에 우리의 의지가 작용했는지 묻는다. 예를 들면 뇌종양이 있는 환자의 경우다. 좀더 극단적인 예를 들면 최면에 의해 살인한 경우다. 물론 심리학자는 최면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 이 살인에 개인의 의지가 작용한 것일까?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살인이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예로 어린 아이에게 다른 아이를 때리라고 할 때 때린 아이는 자유 의지로 그런 일을 했을 까? 아니다. 그냥 시킨 대로 했다. 그럼 어른은? 여기서 자유 의지와 선택과 결정이 등장한다. 이 선택과 결정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일까?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의 커피와 홍차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왜 오늘 아침은 커피 두 잔일까 묻는다. 이 선택과 결정에 자유 의지가 작용한 것일까? 아니면 의지의 무의식적 작용 때문일까? 또 다른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저자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모든 요인들을 인식해야 하고, 그 요인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22쪽)고 말한다. 실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커피와 홍차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선택이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의식 속에 ‘나타났다’고 하는 표현이다. 이런 일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난다. 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지 못한다. 몰입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상당히 산만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다른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럼 몰입하는 순간은 어떨까? 좀더 생각해볼 문제다.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을 다룬 장에서 “자유 의지를 신봉함으로써 우리는 ‘죄’라는 종교적 개념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과응보에 몰두하게 되었다”(61쪽)고 말한다. 이 두 개념은 인간의 문제들을 개인에게 예속시키는 작용을 한다. 사회 체제나 환경 때문에 일어난 일도 모두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도덕심 부족 등으로 몰아갈 수단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의지가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교육인데 과연 현대의 교육이 이 작업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묻게 되면 그 답은 부정적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쇼펜하우어의 말을 다룬 주석이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랄 수는 없다.”(97쪽) 내가 바라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바라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묻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의지가 바란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혹은 선택했던 수많은 일들이 나중에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괜히 나의 의지박약에 맞는 주제란 생각이 들지만 이 또한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니다. 이런 논증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더욱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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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새
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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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아프리카의 소년병에 대해 말한다. 어떻게 이런 아이들을 전쟁 도구로 사용하냐고?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 열일곱 살에 입대한 작가와 등장인물이 나온다. 아프리카의 소년병들(미군보다는 몇 살 어리다)은 나쁘고 미군은 좀더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올바른 것일까? 이런 생각이 먼저 든 것은 역자가 후기에서 말했듯이 주인공을 포함한 하사와 중위 등의 군인들이 모두 20대 초반이란 사실 때문이다. 이 청소년들은 전쟁을 영화나 게임으로 보았던 세대고, 그 참혹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육이오나 월남 전쟁을 경험한 분들에 비하면 나도 그렇지만.

 

가상의 이라크 도시 알 타파르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매일 미군이 죽는다. 야간 전투에서 어린 군인들은 각성제와 두려움 때문에 깨어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바틀과 머프와 스털링 하사다. 화자인 바틀이 스물한 살이고 머프는 열일곱, 스털링은 많아야 스물다섯을 넘지 않은 어린 나이다. 이 어린 나이에 그들은 무더운 이라크의 명분없는 전쟁에 참여한다. 이라크에 오기 전 그들에게 전쟁은 영화나 게임 그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려움과 만용과 용기가 뒤섞인 이 선택은 그들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다.

 

전쟁을 소재로 했지만 영화에서 나오는 멋진 전투 장면은 없다. 불시에 날아온 총알은 죽음을 부르고, 옆에 선 동료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공포와 둔감해진 감각은 적군이 아닌 민간인에게 총알을 쏟아붓는다. 적은 시체를 이용해 함정을 파고, 갑작스런 공격에 주변은 늘 죽음으로 가득하다. 이런 상황들을 작가는 굉장히 건조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으면 단순히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왜 평론가들이 시적 언어란 단어를 사용했는지 공감하게 된다.

 

구성은 비교적 간단하다. 과거의 한 시점에서 현재로 진행하고, 그 사이사이에 과거의 사건을 넣어서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특히 머프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과 의문은 뒤로 가면서 더 커지는데 사실 이 장면을 보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이 생겼다. 독자가 느낀 의문이 이 정도라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어느 정도일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군에 입대한 청소년들이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싶어 했겠지만 실제 전장은 그 중요한 무엇보다 생존의 본능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소설을 보면서 이라크 전쟁 이후 수많은 병사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렸다는 기사를 다시금 되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전쟁에 참가한 바틀과 머프 등에게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 보여줄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머프의 기이하고 괴상한 죽음과 그의 사체를 두고 일어난 사건은 이 전쟁이 만들어낸 광기의 결과물이다. 이후 바틀이 집으로 돌아온 후 보여준 행동들은 이 결과의 파편이다. 이 두 순서를 바꿔놓아 이야기 속에 더 몰입한다. 단순히 시간 순서를 바꿈으로서 호기심과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부대에 온 대령의 연설 “대원들. 미국 국민이 제군을 믿고 있다. 대원들 평생에 이런 중요한 일은 다시는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119쪽)는 엄청난 거짓말이다. 바틀과 머프의 대화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그들은 이 전쟁이 평생에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전장에 있지 않고 게임처럼 이 상황을 보는 사람에게 이 거짓말은 자기를 정당화하는 최면이자 새로운 신병을 모집하는 광고가 된다. 정치인들 중 단 한명도 전장에서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고 싸우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청소년들을 죽음의 땅으로 내몰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아직 남북이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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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맛 기행 -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맛의 문화사 바다맛 기행 1
김준 지음 / 자연과생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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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바닷가를 낀 도시다. 외할머니가 어시장에서 생선을 파셨다. 할머니의 몸에서는 늘 생선 비린내가 났다. 어릴 때 그 냄새가 싫었다. 지금은 그곳을 가도 바다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매립지와 건물들에 가려져 있고, 다른 곳에서 본 풍경은 어릴 때 배가 가득한 그곳과 너무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선창가를 뛰어다니며 놀던 곳은 이미 사라졌다. 그 친구들도 어딘가로 다 흩어졌다. 기억 속 단편만 살짝 남아 있는 바다, 외할머니, 생선들, 해산물들. 하지만 어머니의 눈과 손질에 그 생선들을 맛본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다. 동으로 남으로 서로 옮겨 다니면 그 지역에 맞는 바다맛이 있다. 사실 자라면서 생선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제대로 그 맛을 몰랐다. 생선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편식도 심했다. 아마 생선 맛을 알게 된 것이 서울로 오면서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그 전에도 좋아하는 생선들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고기를 맛보고 싶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을 모르니 어머니에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바다맛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제 맛을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요즘에야 제철 음식에 관심이 있었지 예전에는 양식과 하우스 재배로 철과 다른 음식을 많이 먹었다. 아마 사시사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즐겁게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면 늘 제철 음식은 상에 올라왔다. 그냥 한 끼 밥과 반찬으로 먹으면서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그중에서 지금도 겨울이 되면 집에서 대구를 사서 말린다. 시원한 대구탕과 말린 대구로 만든 된장찌개는 별미다. 대구 젓갈은 또 다른 맛으로 나를 유혹한다. 얼마 전 먹었던 그 맛은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계속 입속을 감돌았다.

 

책 속에 나오는 음식 중 찾아 먹는 것은 많지 않다. 앞에서 말했듯이 제철 음식이라고 찾아 먹지 않았고 그 맛을 몰랐기 때문이다. 김은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자주 구워먹었고, 국 속에 들어 있는 멸치는 그냥 맛을 내는 재료였다. 제사 때면 늘 탕국에 들어 있던 문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고, 파래는 반찬일 뿐이었다. 전복이 귀하다고 했지만 그 맛을 알지 못했기에 혹은 비쌌기에 그냥 그런 식재료 중 하나였다. 미역국은 생일이면 지겹게 먹는 국이었다. 일상에 늘 접하던 음식들은 그냥 하나의 반찬이었다. 이 음식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만나기 전에는.

 

사실 제철 음식과 지역 특산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때문이다. 과메기와 홍어와 매생이가 대표적이다. 과메기를 먹게 된 것은 술안주였고, 홍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극찬에 맛보았다. 그리고 좋아하게 되었다. 매생이는 굴집에서 먹게 되었다. 명태가 동태나 북어나 황태가 된 후 탕으로 국으로 끓여지면 그것만으로 한 끼 뚝딱 해치웠다. 낙지는 매운맛과 어우러지거나 연포탕으로 속을 녹여줬다. 어릴 때 먹던 칠게를 이제는 특별한 식당에서나 맛보지만 아그작 잘 씹어 먹는다. 간장과의 조화는 오히려 간장게장보다 좋다.

 

오징어. 십 수 년 전 동해에 놀러 갔을 때 회를 시키면 정말 거의 무한정 공짜로 줬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징어회를 돈 주고 먹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 당시 오징어회가 원래 시킨 것보다 맛있어 다들 맛있게 먹었던 것이 기억난다. 전어는 사실 비교적 최근에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자랄 때 철되면 늘 먹었을 텐데 비교적 생선들이 귀한 서울에 오면서 서울 토박이와 방송 때문에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천일염이 얼마나 좋은지, 함초의 효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아마 최근에 알게 된 맛의 대부분은 방송을 본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맛있게 먹은 기억만 나열했지만 저자는 그 맛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알려준다. 각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는 이름과 특산물은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어떤 굴곡을 겪는지 보여준다. 갯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고 어촌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 생존하고 있는지 말한다. 공동체 삶이 그 마을의 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대형화된 어선에 몰락한 어촌의 신산한 풍경도 보여준다. 죽어가고 사라지는 갯벌에 대한 경고는 단순히 맛을 넘어 미래로까지 이어진다. 역사와 사계절 바다 먹거리들을 발로 다니면서 알려주는 저자의 노력은 나의 입맛을 새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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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꽃, 눈물밥 - 그림으로 아프고 그림으로 피어난 화가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
김동유 지음, 김선희 엮음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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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유. 모르는 화가다. 한국 현대미술에 문외한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몇 가지 수식어가 있다. ‘전세계에 현존하는 100대 화가, 생존하는 한국 화가 중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림 시장에서 거래량이 가장 많은 화가’ 등이 그것이다.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사실 그냥 그런 화가 중 한 명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손에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 읽게 되었다. 이 실수는 오히려 화가 김동유를 선입견 없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무명의 지방대 출신 화가가 어떻게 세계적인 화가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에세이에는 김동유 화가의 삶이 담겨 있다. 그 삶의 궤적을 더듬어 오면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집스런 노력과 열정이 있는지 그대로 알 수 있다. 그는 이 과정을 결코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교적 담담하게 읽을 수 있다. 담담하게 읽었지만 그 속에 담긴 열정과 고집과 노력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성공한 화가의 과거가 신산한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보다 그 고비에 어떤 일이 있었고, 그 고비를 넘기기 위해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줄 때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선 사람을 걱정했다. 바로 그의 아내다. 딸이다. 성공 전 그의 삶은 그 정도였다.

 

수없이 좋은 말이 있지만 “재능이라는 것은 성실하게 제 할 일을 해내는 능력일 뿐이다.”(105쪽)고 말할 때 그의 삶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에 운도 분명히 작용했다. 하지만 그 운도 역시 그의 재능과 노력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그의 학창시절이나 무명시절을 생각하면 재능에 대한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걸어온 길이 한국 미술계의 비주류고, 남의 인정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주류에 대한 그의 정의에서 그의 철학과 바뀐 환경이 만들어낸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 자신이 ‘과거는 고난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이다.

 

책 속에 그의 작품이 많이 나온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작품도 여럿 있다. 비슷한 이미지 때문이거나 실제 본 것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이중그림 화법이 이미 유명해졌고, 앤디 워홀의 그림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더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첫 번째 등장한 이야기 속 주인공 아리랑담배와 꽃과 여자 그림이다. 천박한 것을 가공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낸 것에서 낯설음과 낯익음의 이중성을 경험했고, 꽃과 나비를 이용해 착시를 만들고 이것을 통해 여자 이미지를 만들 때 원근과 순간적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매혹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를 세계에 알린 이중그림보다 더 마음에 든다.

 

많이 이야기 중에서 ‘공무원 화가’가 공감대를 형성했다. 세계적인 작가 중에서 매일 작업실에 출근해서 작품을 꾸준히 써낸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낯선 화가의 세계에서 이런 사람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그가 밤늦게 혹은 밤 세워 작업했다는 것보다 더 많이 공감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단순한 영감에 의한 일시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끈기 있고 열정적인 작업의 결과물이란 것을 더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작업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 흔한 말로 그런 노가다가 없어 보일 정도다. 개인적으로 이 에세이가 자기계발서보다 더 효과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니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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