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 팔레스타인 시인이 쓴 귀향의 기록 후마니타스의 문학
무리드 바르구티 지음, 구정은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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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 대한 첫 기억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뉴스에 나온 것들이 대부분 테러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보여준 테러는 이 단체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었다. 어릴 때 뉴스를 그냥 받아들이던 시절이라 화면 너머에 어떤 삶이, 사실이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67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적은 군사로 아랍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사실을 선생들이 알려주었을 때 나는 감탄사를 터트리고 이스라엘 군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의 수준이 그랬다. 물론 선생들의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사실 쉽지 않다. 단순하게 보면 잘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유대인들이 구약을 앞세워 좇아낸 것이다. 착하거나 멍청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수였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편파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이 지역과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으로 아주 복잡하게 엮여 있다. 이 문제를 모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현재 나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다. 단지 파편적으로 정보를 얻고 지식을 쌓을 뿐이다. 이 책도 그런 종류 중 하나다.

 

시인이자 작가인 무리드는 이집트 유학 중에 67년 중동전쟁이 벌어지면서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다. 아랍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그는 갈 곳을 잃었다. 그의 여권은 나라 없는 사람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나지힌, 즉 추방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 나지힌들은 팔레스타인 귀국을 꿈꾼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수백 명의 노인들에게는 귀국을 허가했지만 수십만 명의 젊은 사람들은 들여보내지 않았다. 시인도 30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팔레스타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을 바로 그 귀국을 통해 바라본 팔레스타인과 귀국을 바라며 사는 동안 그가 겪었고 아파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시인은 이것을 상대적으로 냉정하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 속에는 조용히 분노가 흐르고 있다.

 

나라 없는 사람의 서러움은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집트가 이스라엘 측에 붙었을 때 그는 이집트인 아내와 헤어져야 했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추방은 항상 다층적이다. 추방은 당신 주변을 에워싼 뒤 원을 닫아버린다. 아무리 달려 봐도 원은 당신을 에워싸고 있다.” 현재 우리가 너무 쉽게 넘나드는 국경을 그는 아주 힘겹게 넘어야 한다. 입국 허가가 떨어지기 전에는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시인으로써의 그의 인지도가 높아져도 이것은 변함없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전전하고, 자신의 물건을 가질 수도 없다. 어렵게 키운 화분조차 가지고 다닐 수 없는 삶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다.

 

라말라. 처음에는 어떤 곳인지 몰랐다. 검색하니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임시 행정수도라고 나온다. 자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된 나지힌의 삶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직 이것을 표현하기에는 나의 내공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가 본 라말라의 모습은 30년 전과 별 차이가 없다.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함없이 옛날 그대로 머물러 있다. 발전이나 변화라고는 없는 도시가 된 것이다. 신문은 고사하고 서점조차 없을 정도로 이곳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책을 갈망하는 그들을 보면서 우리가 누리는 풍족함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다.

 

정치적인 문제가 곳곳에 나온다. 어쩔 수 없다. 정치를 빼고 팔레스타인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름이 나오는데 주석을 보면 암살당한 사람들이 엄청나다. 예전에 스파이영화를 보고 통쾌하게 생각했던 인물들 중 몇 명이나 이 속에 포함되어 있을까? 격리, 파괴, 학살이란 단어들이 피와 함께 곳곳에서 흘러넘친다. 단지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을 뿐이지 사건이나 사람들에게서 그 흔적과 역사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의 경우는 주석이 그 역할을 맡았지만.

 

이 책은 팔레스타인을 다룬 다른 소설과 접근법을 달리한다. 감상적이거나 자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지 않고 나지힌의 귀향에서 받은 감상과 느낌에 충실하다. 귀향의 기록이란 표현이 딱 맞다. 중동 문제를 읽을 때면 점점 이스라엘의 반대 편에 서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데 개인적으로 작가가 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동정과 달랐으면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를 동정하는 이들이 있지만,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와 우리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는 힘든 것 같다. 그들이 느끼는 것은 패자를 바라보는 승자의 연민이다.” 그리고 시인은 솔직하게 말한다. 그들이 힘에서 밀렸다고. 낯선 아랍 이름들 때문에 조금 힘들게 읽었지만 생각할 거리도 배운 것도 많았다.



 
 
 
수중 용접공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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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은 ABC의 드라마 <로스트>의 공동 원작자 겸 총괄 제작자였던 데이먼 린들로프가 썼다. 그는 이 작품을 <환상특급>에서 아쉽게도 누락되었던 에피소드 중 가장 뛰어난 이야기라고 말한다. 단순히 수중 용접공의 힘든 일상과 부성애를 다룬 그래픽노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미스터리 환상이 곁들여 있다. 덕분에 거친 그림에도 불구하고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후반부로 가면서 작가가 깔아놓은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풀어내고, 그 답 너머에 있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 와 콕 박혔다. 미스터리 환상을 바탕으로 진한 부성애를 다룬 작품이다.

 

거친 그림체를 가졌다. 주인공 잭과 그의 아내 얼굴을 보면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30대 중반인데도 50대처럼 보인다. 이런 얼굴이 작가의 의도적인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무거움과 힘겨움이 잘 느껴진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연출보다 비교적 간결하고 평범한 연출로 그들의 대화와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수중 용접공이란 직업에 대한 설명이나 작업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처음에 예상한 수중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사건도 없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아니다. 물밑에서 발생하는 액션이나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이야기가 있다.

 

잭은 출산 예정일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아내의 반대도 무릅쓰고 얼음처럼 차가운 바다 속 작업장에 들어간다. 이날은 핼러윈 데이 전날이다. 열심히 일하는 그에게 한 인물이 잠수하는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해저에 회중 시계가 하나 놓여있다. 바다 위에서 그에게 통신을 보내는데 어느 순간 신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밖에서는 그가 사고를 당했다고 말한다. 정신을 잃은 후 깨어난다. 몸에 이상은 없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머릿속은 회중 시계와 바다 속 경험들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잭의 아버지도 잠수부였다. 그런데 그는 핼러윈 데이 전날 술을 먹고 잠수했다가 죽었다. 아버지는 늘 바다 속에 가라앉은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혼한 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다로 가서 잠수하고 바다 속에서 수집한 물건을 가지고 나온다. 이 물건들 중 하나를 아들이 가지고 싶어한다. 바로 회중 시계다. 이 과거는 현재와 교차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그러다가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다. 현실의 벽이 무너지고 환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씩 되살려준다. 현실의 아픔과 고통 뒤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현재, 잭은 곧 아버지가 될 예정이다. 그의 아내가 바라는 바를 그는 실천하지 못한다. 아기 침대 조립도 도와주지 않고, 함께 조산원에게 가는 것도 시간의 흐름을 잊은 탓에 놓치고 만다. 만삭의 아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그는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사고가 났던 순간 있었던 이상한 경험이다. 이 부부의 엇나감은 가정의 불화와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미 환상에 사로잡힌 잭에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홀로 배를 몰고 나간다. 그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깊은 바다 속에서 다시 한 번 더 과거의 환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뒤틀었던 진실을 마주한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과정 속에 잊었고 가라 앉아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낯설고 황량하고 외롭던 분위기를 깊은 바다 속 풍경과 기억을 나란히 놓으면서 잘 묘사하고 있다. “시간이 됐어”란 말을 아버지가 하고, 그 시간을 아들이 맞이할 때 꼭꼭 숨겨두었던 기억들이 단숨에 풀려난다. 하지만 바다 속에 잠겨 있던 그를 구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이 구조 뒤에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는 것은 아내 수전이다. 그의 아이다. 집으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그를 맞이하는 것은 그의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가슴 한 곳이 점점 따스해진다.



 
 
 
재회 - 제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요코제키 다이 지음, 이수미 옮김 / 살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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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이다. 이 상에 8번을 도전한 끝에 수상했다고 한다. 대단한 의지와 노력이다. 수많은 도전은 이 소설을 상당히 꼼꼼하게 엮는데 많은 도움을 준 듯하다. 작은 사건이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과거의 사건을 불러오는 구성인데 상당히 깔끔하게 진행된다. 큰 줄거리 옆에 다른 사연들이 곁가지를 치고, 이것들이 다시 하나로 엮인다. 의문이 생기면 다른 곳에서 그 의문을 풀어준다. 그리고 그곳에 또 다른 사실과 사연이 숨겨져 있다. 이것은 마지막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우연이 너무 강하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큰 흐름과 구성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느낌이다.

 

초등학교 동창생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시즌이라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마키코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아들 마사키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 잡혔다는 전화다. 그 전화를 건 것은 점장 사쿠마 히데유키다. 지역 유지인 사쿠마 집안의 장남이자 문제아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엄마는 바로 달려간다. 히데유키가 요구하는 것은 훔치는 장면이 찍힌 테이프와 현금 30만 엔의 교환이다. 좋은 사립학교를 다녀서 다른 문제가 없다면 대학까지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는데 이것이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다. 전 남편에게 연락을 해서 돈을 들고 찾아가지만 그가 요구하는 것은 돈 만이 아니다. 마키코의 몸이다. 더 큰 돈을 마련해서 다시 남편 게스케가 찾아간다. 그곳에 있는 것은 히데유키의 시체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마키코의 시선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끝난 후 동창생 준이치가 등장한다. 그는 형사다. 그런데 술을 먹으면 같이 동거하는 애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 일이 있은 다음날 비번인 그에게 히데유키 살인사건에 대한 연락이 온다. 이제 어릴 때 이후 자신을 괴롭혀온 과거의 그림자와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첫 번째는 희생자의 동생이자 동창생이 나오토이고, 조사에 의해 의문을 품게 된 마키코 등이다. 그러다가 나온 탄흔 정보는 네 명의 동창생으로 하여금 23년 전 함께 묻었던 타임캡슐 앞에 모이게 한다. 왜냐고? 히데유키의 몸에서 발견된 총알이 바로 그때 묻었던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기 때문이다. 이제 누가 죽였는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누가 타임캡슐을 열었는가 하는 의문도 같이 생긴다.

 

마키코, 게스케, 준이치, 나오토. 이 네 명은 초등학교 동창생이었고, 게스케의 아버지 밑에서 검도를 같이 배웠다. 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강한 유대를 맺게 만들어준 사건이 있다. 바로 게스케의 아버지가 23년 전 은행 강도 손에 죽었던 사건이다. 이때 나오토와 준이치가 게스케의 아버지 시체를 발견했다. 같은 곳에 은행 강도의 시체도 있었다. 준이치는 이때 경찰의 총을 훔쳐 타임캡슐 속으로 넣었다. 그런데 이 총이 이번 살인사건에 이용된 것이다. 준이치는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형사들에게 숨긴다. 그러나 이 사건에 유난히 집중하는 형사가 있다. 바로 준이치와 동행한 현경 수사1과 나라 형사다. 그는 이 동창생들의 비밀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역할은 한다.

 

잔혹한 살인사건도 없고, 과장된 명탐정도 없다. 친구들은 서로 비밀을 입 닫고 있고, 형사들은 탐문수사로 한 발 한 발 사건의 범인에게 다가간다. 물론 그 과정에 착오도 있다. 그 착오 중 하나는 나오토다. 나오토의 이야기 속에는 단순해 보였던 이 사건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첫사랑이다. 단순한 첫사랑의 아픔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보면서 가진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른 이야기로 단서와 사연을 제공한다. 만약 이것을 과도하게 사용했다면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었을 텐데 적당한 분량에서 잘 끊어주었다. 화려한 연출을 부리지 않고 견실하게 이야기를 만들어간 작품이다. 



 
 
 
강철 무지개
최인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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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묵직한 우리 소설 한 권을 읽었다. 22세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바로 현실의 문제들이다. 단지 그 문제를 조금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을 뿐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많은 부분에서 이런 미래가 펼쳐질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암울한 미래를 다룬 디스토피아 sf소설이기도 하다. 물론 sf적인 상상력은 기존 장르 소설의 그것을 결코 넘지 못한다. 지금보다 100년이란 시간이 지났는데 기술 발전이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SS 울트라마트 계산직원 지니, 지연의 일상을 단단하면서 견고한 문체로 보여준다. 기계적인 삶을 문장의 리듬에 맞춰 보여주는 도입부는 이 소설 최고의 대목이다. 반복되는 용어와 이어지는 작업들을 이렇게 멋지게 풀어낸 글을 오랜만에 만났다. 덕분에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조금은 더 분명하게 보였다.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의 불안정한 삶이 소모적인 일회성 만남으로 이어진다. 그 시작은 같은 회사의 상사인 브라운이다. 그가 보여준 카드의 위력은 그녀를 사로잡고, 하나의 반복적인 규칙이 된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난다. 제임스, 재선이다. 그도 역시 계약직 택배기사다.

 

서울클라우드익스프레스 하남 출장소 소장 백스터가 등장하여 재선이 일하는 곳의 풍경을 보여준다. 회사 작업카드를 불법 사용한 외국 노동자를 쫓아내는 장면에서 이 세계의 단면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들이다. 계약직 중에서는 일회성 계약직도 있다. 멜라니, 안영희가 바로 그렇다. 이 둘이 함께 낡은 트럭을 타고 러시아까지 물건을 배송해야 한다. 그들은 떠났고, 회사의 말단 관리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나쁜 기억이 있다, 그것은 멕시코에서 있었던 일이다. 회장 한창수의 짐꾼으로 갔다가 생긴 일이다.

 

유기홍 박사와 한창수 회장의 만남이 나온다. 이 둘은 한 회장의 간 이식 때문에 하나로 묶였다. 그런데 이 간 이식이 불법으로 멕시코 소년 아담의 간을 옮긴 것이다. 몇 년 동안 문제없이 잘 살았는데 갑자기 이상이 생겼다. 건강검진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술집에 멕시코에 함께 간 사람들이 모인다. 이 일을 주선한 인물은 강태기 사장이다. 백스터와 더스틴은 단순한 짐꾼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아이리스다. 그녀의 실종은 이 소설의 구성을 미스터리 물로 만드는 큰 역할을 한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남자 친구의 존재가 이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온다.

 

멜라니, 안영희, 마릴린, 프랭크, 나오미는 모두 같은 인물이다. 안영희로 태어나서 마릴린, 나오미, 프랭크, 멜라니 등의 삶을 살아왔다. 이 이름들은 한때 그녀의 삶을 대변한다. 배고프고 굶던 시절 도움인 줄 알고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람들이다. 제리도, 에스더도. 제리는 열한 살 그녀를 매춘으로 몰았고, 에스더는 근본주의 기독교 선교단체의 군인으로 자라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에스더가 아이리스다. 그녀는 나오미와 한때 연인처럼 보낸 적이 있다. 에스더는 다른 이유로 단체에서 쫓겨났고, 먼 훗날 다른 이름은 둘은 다시 만난다. 이 둘은 강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 아이리스가 죽었을 때 프랭크는 그것을 느낀다.

 

각 등장인물이 엮이고 섞이면서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든다. 지연과 재선은 통제된 세상을 벗어나서 살고자 했지만 중일전쟁으로 자신들만의 터전에 쫓겨났고, 지연은 달아나 에너지돔이란 곳에서 산다. 재선은 그녀를 늘 찾고 있고, 지금은 멜라니와 함께 배송을 한다. 하루살이 같은 삶을 유지하는 노동자의 일상을 그가 보여준다. 한창수 회장과 함께 간 그의 부하 직원들이 멕시코에서 겪은 경험들은 솔직히 그렇게 와 닿지 않는다. 중요한 사건에 연결된 부분을 제외하면 불필요하게 분량이 많다. 이렇게 각자의 삶이 뒤섞인다. 시간도 뒤섞인다. 이 장치가 아이리스의 실종과 그녀의 애인이 누굴까 하는 의문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이 거대한 디스토피아 미래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자 장치일 뿐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읽기는 조금 무겁다. 보통의 sf소설을 생각하고 읽으면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마주한다. 노작가가 바라본 한국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이 설정이 하나의 가정이라고 해도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과 미래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 암울한 미래 속에서도 사랑은 존재한다. 이 사랑이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결과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죽이고, 누군가는 엄청난 일로 발전한다. 발전과 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 사회에서 어쩌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재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다.



 
 
 
걸작의 탄생 - 2014년 제5회 김만중문학상 금상 수상작
조완선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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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과 박지원. 사실 이 둘을 엮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허균은 <홍길동전> 때문에 알았고,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에서 단순히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닌 개혁가 허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모습은 낯설지만 흥미로웠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로 그 명성을 떨쳤지만 <허생전>이나 <양반전> 덕분에 실제보다 조금 낮게 본 것도 있다. <열하일기>가 새롭게 해석되고 번역되면서 덩달아 연암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조선 중기 이후 최고의 문장가이자 사상가인 두 사람을 엮어 소설을 쓴 것은 아주 재미있는 시도다. 비록 그 시도가 아쉬움을 더 강하게 남겨놓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소설은 고지식할 정도로 허균과 박지원이 번갈아서 등장한다. 일대일 방식이다. 필요에 따라 이 규칙을 깰 수도 있을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이 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보다 좀더 유연하게 풀어내면서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연암에서 시작하여 교산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연암으로 끝을 맺는데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약간 처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긴장감을 조성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 교차 편집의 너무 빤한 방식으로 풀어내다보니 이 둘의 조합이 억지스럽게 이어지는 듯한 기분도 살짝 든다. 그리고 이 둘의 시간과 공간을 비슷하게 풀어낸 것은 좋은데 사건과 인물들 사이의 밀도감이 떨어진다.

 

연암이 <허생전>을 쓰기 전 금서인 허균의 서책에 대한 정보를 책쾌 조열에서 들으면서 시작한다.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던 그때 허균의 서책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책쾌 마종삼이 조열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그는 조열이 연암에게 교산의 책을 전할 것이란 소식을 이미 들었다. 이 당시는 금서를 소지한 것만으로 사형에 처해지던 시기다. 하지만 허균의 금서 <교산기행>은 연암의 마음을 뒤흔든 상태다. 홍길동의 흔적을 뒤쫓는 과정을 담은 <교산기행>의 행방과 조열 살인을 둘러싼 비밀을 이 두 사람은 조사하고 파헤치면서 따라간다.

 

허균은 홍길동이 문경에서 참수되었다는 문서를 이식에게 받은 후 꿈자리가 뒤숭숭해진다. 그가 꿈꾸던 호민의 원형을 홍길동과 그 무리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서의 내용에 의문이 생긴다. 큰 도적인 홍길동이 사로잡혔다면 상부에 보고하고 시체를 전시해야 하는데 그 흔적이 없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길을 떠난다. 첫 여행지는 바로 홍길동의 생가가 있던 장성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희한한 소문과 모습도 본다. 아직도 홍길동의 영향과 전설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난 봉추거사는 앞으로 이어질 허균의 모험과 조사에 큰 역할을 한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쓰기 전 홍길동의 역사를 발로 뒤좇아 갔다면 연암은 이 허균의 흔적을 <교산기행>의 필사본 몇 장을 통해 따라간다. 이 둘의 행적은 시대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하다. 장성에서도 문경에서도 사건의 중심 언저리에 둘은 머문다. 시간적으로 현재인 연암은 살인사건이 이어지고, 과거 속 허균은 홍길동 전설을 둘러싼 기묘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둘의 모습이 너무 비슷하게 그려지면서 개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허균이 위험에 빠졌을 때 보여주는 모습은 우연과 인연 그 이상이 아니다. 연암도 역시 살인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긴장감을 조성하고 호기심을 자극할 소재들이 살짝 겉도는 느낌이다.

 

작가는 허균의 호민론을 중심에 놓고 사건들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그들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 사건들이나 두 주인공이 이상하게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급박함도 긴장감도 고조되지 않다보니 몰입하기보다 밖에서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 시대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가상의 책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했다면 둘 중 한 명 정도는 강한 카리스마를 품어내어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홍길동의 율도국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도 처음이다. 등장인물의 개성도, 잘 짠 구성의 정밀함도, 엄청난 미스터리도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역사의 두 인물을 교차하여 이야기를 잘 풀어내었다는 정도만 다가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