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들어서자 진한 향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단 걸 깨달은 것은 문에서 일곱 걸음에서 열 걸음정도 발을 뗄 때였다.  난초는 정말 강렬한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향수가 그(녀)가 지나간 뒤, 아니면 오고나서 발휘하는 것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세상에, 그 다음 날도 그 향은 오히려 강해지는 것이다. 그 차고도 넘침은 우러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 놀라움과 세심함들이라는 단어들이 줄을 서게 되는 것이다.


언어를 문제삼는 이들은 많지만, 자세하게 그 길들이 왜 틀어져있는지를 설명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명사에 갇혀 있다거나 만든 명사만의 세계가 추구하는 논리, 조사들은 어떻게 길을 찾게 되었는지 그 다양한 결들로 논의한 이들도 많지 않다. 사전이라는 것도 이미  포획된 주류의 의견만으로 이루어져 시적 충만함이나 해석의 다양성을 주지 못한다.  하물며 부사나 형용사, 동사의 역할은 이 명사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그래서 출발을 의문시한다. 그래 그 영점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다양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급진적인 기획만이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결의 생존가능한 끈질긴 일리들이 겨우 이 상황을 자라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언어는 이분의 이항대립의 산물이기도 하고, 그 고체화된 단어들은 금붙이같다. 녹여내는 용출시키는 어떤 방법들도 부족했다. 그러니 일단 다른 철학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줄기를 잡을 수 있다. 세상에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끊임없는 변화다. 이항대립에서 시작한 언어는 동일자에 대한 집착과 환상으로 넘쳐난다. 하나 하나 붙잡은 단어들은 한결같이 굳어있고 움직일 여유가 없다. 이런 단어들로 이루어진 논리의 집들은 그 단어하나가 무너짐으로써 버텨낼 수가 없다. 과정을 담거나 과정의 변주를 품을 줄 모르는 단어의 집들은 그래서 허망하다. 그 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뱉어낸다. 저주라는 이름으로 악이라는 집착으로 벌레라는 존재로 강 건너편으로 버린다.


다른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없다. 액체라는 이전에 얘기했던 관점으로 돌아가자. 녹인다. 용해라는 관점만으로도 이런 기본 틀을 녹여낼 수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맛볼 수 있다. 단어는 360도 방향으로 비산하는 폭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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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타인과 관계를 추구하는 반면, 남성은 대상과 관계를 추구한다. 94 <호흡의 방식>

 

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리고 나로 존재하는 것과 우리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정의 조직을 바꾸고, 가정은 서로 다른 두 주체들 사이의 동등한 계약에 근거하여 다시 정립되어야만 한다/한 우두머리에 의해 전체가 지배되는 사회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로 조성되는 사회는 각자의 본성을 존경하면서 끊임없이 본능에서 문화로 나아갈 것을 약속하는 수많은 커플들로 이루어진다./성별간의 관계는 수평적 관계의 창출에 있어서 특히 이로운 장소처럼 보인다. 이 수평적 관계들이 사적 생활이나 공적 생활에서, 성인들 사이에서나 아이들 사이에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109 <내가 된다는 것, 우리가 된다는 것>

 

너 , 바꿀 수 없는 초월성: 우리는 이 타인을 우리로 축소시키고, 이번에는 우리가 그를 에워싼다. 우리의 지식과 애정, 우리의 관습으로 말이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고 듣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는 우리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그를 거부하지 않는 한 말이다./타자가 우리를 비추는 때는 우리가 이 타자를 깨닫지 못할 때, 혹은 우리가 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할 때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를 비추는 빛을 우리는 이해할 수도 분석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도 없다. 타자의 전체성, 봄의 전체성, 이따금씩 주변 세계의 전체성은 우리의 인식 자체 판단,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 우리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 것, 어떤 식으로든 우리만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우리와 접촉한다. 내가 아닌 존재인 타자는 우리가 그것을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29-130 <내가 아닌 타자에 다가가기>



친절하게도 블로그에 밑줄친 글들을 옮겨놓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흔적이 남아있다. 그땐 이렇게 필사해서 남기는 방편을 찾곤 했다. 하지만 그리 많이 지속된 것은 아니다. 해러웨이의 인기만큼, 내가 읽은 이리가레를 찾는 일도 드물었고, 회자되는 일도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여러 책들을 통독한 후 몹시도 설레던 기억이 짙다. 아무튼 로지 브라이도티를 통해 다시금 재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여전히 한 땀 한 땀 살펴보니 인상깊다. 들뢰즈에 버금간다는 말이 충분하다. 그녀는 이 주제책의 제목처럼 요가 명상 등등 가능한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남성을 지운 뒤 그 위에 대문자여성을 새기는 일이 아니다. 소문자 여성들은 물론 대문자남성이 지워낸 나르시시즘의 역사와 소외되어 버린 것들의 생명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끔까지 나로 사로잡힌 역사는 물론 방법과 스타일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성의 철학이 가두었던 이항대립의 언어와 소통의 부재에서 낳는 결과물 모든 것을 문제삼는다.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것은 없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듯 기억과 지속, 늘 달라지는 것이다. 덧붙여 이분법의 함정을 파헤쳐보는 것이다. 보바르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버틀러의 섹스/젠더, 젠더 수행성이 갖는 힘과 부작용들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해러웨이가 말하듯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 함정에 보바르가 걸려들었고, 자연문화로 사유하지 못하는 이론이 갖고오는 결말. 그 결핍은 필연적으로 이론을 가라앉게 하고 현실성 없는 환상과 애도, 우울함, 죽음충동을 가져오는 이론을 구성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캉과 헤겔과 지젝의 결핍을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론들의 보완으로 진가를 제대로 살필 수 없던 이리가레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다시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론모임> 세미나 자리가 없었다면, 생기지 못할 사건이기도 하다. 어쨌든 자주 언급하게 될 것 같아 모두에서 멈추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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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일까. 아마 <액체근대>라는 말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고체가 아니라 액체에 가깝다는 말은 많이 했고 나누었다. 그리고 고체, 액체, 기체라는 개념을 거꾸로 자아에 접목시키면 묘하게도 다르게 확장된다는 느낌을 갖은 적이 있다. 엘렌 식수의 <오렌지로 살기>를 다시 읽게 된다. 무척 아끼면서 재독을 한 경험인데 무척 놀라운 기분이 든다, 아니 마른 하늘에 벼락처럼 번쩍거린다. 아직까지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 봤다. 


이런 생각들과 겹쳐지기는 해도, 꼭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니다. 욕심과 욕망. 섹슈얼리티를 도덕과 윤리의 잣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유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벌써 오염된 우리의 사고방식은 있는 그대로 그 개념을 확장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언어가 사람들을 넘어가면서 회자되는 동시에 오염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 단어 역시 개인사의 개념, 개인의 인식틀 안에서 희석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액체라고, 손바닥 안에, 두 손으로 모은 물 한 모금이라고 하자. 그것은 내가 끼거나 소유하는 반지나 키링이 아니다. 욕망은 이렇게 액체라고 해보자. 그러면 욕심은 그것을 고체화시켜 소유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이런 확산은 몸이라는 뜻으로도 전이시켜보게 된다. 샘물이 솟아오르고 어느 정도 흘러내린 고인 공간이라고 해보자. 나란 몸은 액화시켰으므로 들어오고 나오는 고인 시공간 속의 나이다. 그러면 먹고 마시고 자고 놀고 하는 공간은 나의 소유이자 소유물인 고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신중을 기해 모시게 될 어떤 것으로 바꿀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단어와 언어가 포획한 것은 일부분이다. 결코 그것은 담을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굳이 언어로 확대시켜 말의 범위를 넓히지 말자. 아직 거기까지는 아직 단어에서도 정해진 것이 없으므로 지나친 것이겠다. 


<오렌지로 살기>에서 오렌지, 사과, 장미는 무척 이를 무한대로 벌린 사건이다.  온도차, 밀도차, 강도차이가 실로 어마무시하게 크다. 그러니 정말 좁혀보겠다. 내가 어루만지거나 자주쓰는 말들로 국한시켜 보겠다. 


무엇부터 할까. 돈, 사랑, 명예 너무 거창한가. 편지. 아니 오늘 꽃을 피운 난초의 향기로 할까.

향기, 향


이건 기체에서 액체로 축소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나는 읽은 것이 있고, 밑줄까지 그어두기도 한 것이다. 단지 기억에는 없을 뿐, 이렇게 상기시킬 기회가 어제 왔다. 그 대목이 <액체의 '작동'>이라는 장이었다. 문제는 피와 살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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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들뢰즈와 페미니즘을 지그재그하기


사유란 알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며, 이 욕망은 단순히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의식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유 과정의 강도적 구조를 통해, 들뢰즈는 철학의 전철학적 토대로서 체현된 육화된 것을 좋은 출발점으로 놓는다. 146

 

이리가레도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 체현되고 위치 지어진 자아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적인 조건과 기호적인 조건 사이의 협상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체성은 과정으로 명명되는데, 그 과정은 문법적 나의 가상적 통일하게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능동적이고 반응적인 상호작용과 저항으로 구성된 것이다. 주체는 다양한 수준의 권력과 욕망 사이의 끊임없는 이동과 협상을 통해 의도적인 선택과 무의식적인 욕동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149

   

들뢰즈와 푸코는 둘 다 페미니즘이야말로 마르크시즘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남겨둔 것을, 삶을, 사적인 것을 정치화하면서 삶을 사상과 다시 연결시킨 유일한 사회운동이라고 칭찬했다. 171

 

 3장 변신:여성/동물/곤충 되기


자유주의의 문제는 중앙집권적, 통일적인 동시에 복수적인 것으로 주어진 자아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이다. 반면에 정신분석 이론의 문제점은 주체에 대한 정치 경제적 시각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결과적으로 정신분석을 자본주의 생산의 정치 경제의 표현과 발현으로 본다. 마수미가 웅변적으로 표현하듯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개인의 무의식 구조를 투사한 결과가 전제주의라기보다는) 전제적인 정치 구조가 개인화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들뢰즈는 욕망을 사이 공간에 흐르는 동적 정동성으로 재정의한다. 정동, 열망 또는 경향은 “물질에 새겨진 자기 추진 욕동”이다. 220

 

정신분석이 심리적 과정의 해부학을 증명하는 한, 그것은 자료를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다. 푸코는 결과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욕망하는 주체의 규범적이고 정상적인 이성애적 시각을 지지하는 매우 보수적인 학문이라고 평가한다. 237

 

프로이트가 좀 더 보수적으로 표현했듯이 자아는 서구문명의 사회화되고 도시화된 거주자들이 얽매여 있는 종류의 신경증을 번식시키는 어음 교환소이다/자아의 다른 이름은 정치이며, 주식과 교환, 축적와 이익에 기초한 흡혈귀 같은 경제 체제의 목적을 수행하는 주체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의 미시적 파시즘이다. 254

 

철학적 유물론에서 동물의 강점은 영토에 대한 애착과 상호의존성으로 표현되는, 일자가 되지 않는 데에 있다. 동물들은 감각적이고 지각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작고 매우 제한적이거나 한정된 환경의 조각에 의존한다. 곤충, 특히 진드기 같은 기생충과 거미는 들뢰즈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에 속한다. 예술가와 같이, 동물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색, 소리 또는 표시/틀로써 물리적으로 표시한다.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코드화하거나, 점유하거나 또는 틀을 지우기 위해서, 동물들은 끊임없이 신호와 기호를 만들어낸다. 곤충들은 윙윙거리며 모든 종류의 소리를 내며, 고등 영장류는 실제로 이야기한다. 고양이, 늑대, 개는 그들 자신이 생산한 체액으로 땅을 표시하고, 개는 고통과 욕망 속에서 짖고 울부짖는다. 그들은 욕구와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자신들의 몸짓에 내재한다. 인식, 코드화, 대처 과정에서, 동물들은 영토를 표현하고 거주하고 보호하려는 노력으로 인간과 결합하면서 자신들의 순수한 동물성을 초월한다/이것들은 재평가되어야 할 급진적 내재성의 모델이다. 그것은 최상의 비언어적 의사소통이다. 255-226

 

자아는 나르시시즘과 편집증을 모시는 신전인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유목적 주체는 되기를, 인간이라는 단정하게 구성된 버전으로서 ‘합리적 동물’을 그 경계선에 분열시키기를, 내재된 모순을 폭발시키기를 목표로 한다. 의식이 사실 자기 자신의 환경과 타자들과 관련된 내적 양태였다면? 의식이 인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보름달 아래 늑대의 애처로운 울부짖음과 다르지 않다면? 동물의 노하우와 비교로 의식적인 자기 재현이 나르시시즘적 망상에 의해 파괴되어 결과적으로 자기 투명성에 대한 자신의 열망에 눈이 멀었다면 어떨까?/동물되기는 안과 밖이 함께 있는 균형을 맞추는 스침이다. 동물 되기 없이는 창조성도 없다. 그리고 그럼에도 동물 되기는 변증법을 단순히 비합리성으로 역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되기의 다른 길이다. 160

 

신체의 힘을 결정하는 것은 정동들의 강도의 정도와 속도이며, 결과적으로 다른 실재들과 상호작용성 수준이기도 하다. 삶은 욕망의 강도과 긍정을 확인하는 기획으로서, 육체화된 주체의 유물론적 토대 위에 놓여 있다./인간 신체 자체는 더 이상 ‘인간의 가족’의 일부가 아니라 포스트휴먼들의 동물원이다. 261

 

해러웨이 기획의 강점은 영감을 주는 힘이다. 그녀는 무의식을 위한 새로운 담론을 발명하기를 원한다. “이는 예상치 못한 것을 만들어내고, 여러분을 실수하게 허거나 속일 수 있다. 당신은 가족 서사를 벗어나는 무의식을 생각해낼 수 있는가? 또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차원에서 무의식의 구조화에 대해 들을 수 있는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가족 서사를 지역적 이야기로 주장하는 무의식은?” 비오디푸스화된 무의식에 대한 반형상화는 일종의 동물 되기를 추적한다. 266

 

급진적 내재성에 대한 들뢰즈의 철학은 언어의 우리를 폭발시키고 좀 더 복잡한 분석 체계가 필요한 이질적이고 다중적인 변이의 집합으로서 정도성을 제안한다. 프로이트는 결국 자신이 열어준 바로 그 문을 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즉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성의 정동적, 성적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의 목소리를 내지만, 그 후 그는 그것을 자기 시대 문화의 목적에 봉사하는 이원론적 양상으로 개념화한다./치료 정신분석학은 언어적 해석 방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해결하기 위해 가공되지 않은 물질에 언어적 방법으로 접근한다. 이 해결은 언어 기호학적 패러다임에 따라 ‘명시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267-268

 

환상이 경이와 기괴 사이에 위치한 중간 장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토도로프는 환상의 힘은 대부분은 형이상학적 상태나 은유적인 상태를 문자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데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변신과 변이는 환상 문학의 주된 요법이며 그 호소력은 정신-물질 구별의 붕괴에 달려 있다. 19세기에는 이러한 종류의 위반이 광기나 정신병의 고유한 특징이었다고 하며 변신의 재현을 은연중에 위반하게 만들 뿐 아니라, 거의 유아적인 방법으로 범성애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구별의 소거라고 한다. 즉 구별의 소거가 무의식적인 충동 체계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동물의 형상은 환상적인 상상이라는 이 놀이의 결정적인 요소다. 정신분석 담론은 동시대 상상 속의 환상 문학을 대체하는 데에 기여했다. 271

 

사회 상징 영역을 구성하는 자격, 금지, 욕망, 통제의 안무를 통해 자아화 사회가 서로 상호적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오히려 그렇다. 주체는 상호 관련된 사회적 효과와 담론적 효과의 이 네트워크 안에 걸려 있다./ 나는 무의식을 ‘블랙박스’가 아니라, 차라리 들뢰즈와 함께 창조성의 유목적인 과정으로서 접근하고 싶다./들뢰즈는 정신분석적 실천의 많은 부분을 부르주의 개인의 인플레이션과 연루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중 ‘에고심리학’이 궁극적인 예다.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인간화 과정’은 주체를 법, 결핍, 기표가 지배하는 기호학적인 우리 안에 다시 새긴다. 되기 이론은 주체성의 중심에 전복을 다시 새기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동물 되기는 곤충/분자/지각할 수 없는 것 되기로 변한다. 동물 되기는 인간의 고전적인 타자, 즉 내부의 괴물, 지킬 박사, 짐승과의 대화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시선에서 동물을 완전히 해방시킨다. 타자는 유기적이면서 비유기적이고,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이며, 비이원적이고 비대립적인 일련의 실재들로, 즉 포텐티아라는 의미에서 아주 강력한 물질로, 죽음과 유한성을 넘어선 확장으로 변한다. 오비디우스는 카프카와 함께 주체의 타자들을 그의 일원론적 손아귀에서 풀어줌으로써 주체의 카르토그라피를 다시 그리는 것을 돕는다. 276-277

 

동물 되기는 한계와 가능한 전복의 수준으로 실험해야 한다는 요구다. 그것은 또한 개념적 창조성에 도전하여 우리가 내부에서 경험하는 강도를 표현하는 비부정적이고 비병리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지배적인 도덕의 메시지는 ‘너무 많다’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문제를 평형을 목표로 하는 과잉과 결핍의 경제로 번역한다. 반면, 들뢰즈는 이 이원적인 체계를 거부하고, 스피노자의 표지인 일원론에 기대로 있으며, 따라서 내재성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그는 강동의 변이 및 대안적 배치의 측면에서 문제를 제시한다. 즉 지속하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주요 우선순위다. 그것은 정신분석에 매우 중심적인 욕동을 인간화하는 과정에 정면으로 반대된다. 이 과정에서는 구분되지 않는 순수한 감각의 수준이 표현되고 체험되는데, 이는 선과 악, 고통과 쾌락을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강도의 일련의 변이들로 상상한다. 278-279

 

외부, 열린 공간, 체현된 구현을 매우 많이 생각하는 들뢰즈는 ‘내부/외부’라는 점에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낯선 힘, 욕동, 열망 또는 감각의 표현과 지속 가능성의 수준, 우리 경계의 일종의 정신적, 감각적 확장, 내재된 종류의 발생으로 생각하도록 장려한다. 즉 질적 도약이 필요하며 이것이 오히려 주체를 자신의 살아 있는 체현되고 내장된 자아가 주체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아직 미개척된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친숙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덜 불안하게 만드는 방법, 즉 자신의 포텐시아를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의 자유와 복잡성에 대한 이해를 증대시키고, 또한 바로 그 복잡성을 틀 지우고 유지하고 견디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윤리를 고양함으로써 더 강렬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281-282

 

예술은 모방하지 않는다. 예술은 훔치고 도망간다. 화가는 새를 모방하지 않는다. 화가는 새를 선과 색으로 포획한다. 이는 예술가와 예술가의 목적 둘 다를 탈영토화하는 되기의 과정이다. 모방에 대항하여, 리좀 음악은 우리의 음향 습관을 탈영토화하는 것을 목표로, 인간이 천체의 조화를 지배하는 원리가 아님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299

 

G.H 동물 되기는 운동, 진동, 문턱 횡단을 수반한다. 되기는 연결, 동맹, 공생에 대한 질문이며, 다중성의 문제다. 이러한 점에서 되기들의 연쇄, 즉 여성 되기, 아이 되기, 동물 되기, 곤충 되기, 식물 되기, 물질 되기, 분자 되기 또는 지각할 수 업는 것 되기는 계속된다. 311

 

식수에게 핵심 용어는 친연성과 수용성이다. 모든 인간 안의 신성은 상호연결성과 공감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식수에게 이 존재한다는 고양된 감각은 여성성이고, 그것은 시인과 작가라는 창조적인 힘으로서의 여성이다. 신성은 창조성만큼 여성성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급진적 내재성의 철학, 특히 감각적 초월 개념과 일치한다. 313

 

그녀에게서 생명의 이 재발견은 인간의 초월성의 형태, 즉 재생의 힘에 있어서 반카프카적이고, 생성력에 있어서는 여성적이나, 대문자 여성의 심리 성적 정체성을 넘어서는 형태를 취한다./이 과정은 생명을 신성한 것으로서 무신론적으로 재정의하는 결과를 낳는다. 즉 되기에서 재결합된 조에와 비오스를 말한다. 나는 이 소설을 여성-동물-곤충-지각할 수 없는 것 되기의 순서에 따라 분석하고 싶다. 316-317

 

인간은 완벽함의 사다리에서 신보다 한 계단 아래인, 지구 생명체의 정점에 서 있는 합리적인 동물이라기보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팔릴 수 있는 바이러스에 더욱 가깝다. 마수미. 496


볕뉘


독서모임 전 주말 발제도 있어 책을 보기 시작한다. 밑줄을 따라 가보기도 하고, 주 저자의 책들의 밑줄을 살펴보기도 한다. 필사가 된 부분도 살펴본다. 그러다보면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부분들이 도드라진다. 이리가레의 책들이 재출간되지 않는 것이 아쉽다. 다행히 엘렌 식수의 책들이 궁금해서 구입하려는데 최근 몇 년동안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궁금해질 몇 달이다. 곧 가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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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내려온다. 옥천에서 괴산으로 문경세재를 너머 주왕산으로 영덕을 거쳐 여기까지 오토바이로 오다. 내려오다 우박을 만났다는 그는 비옷을 주섬주섬 벗는다. 백차를 한 잔하고 서로 알아둔 저녁 장소 <이리오너라>는 문이 닫혀있다. 카카오는 전화번호조차 없다. 휴가면 휴가라고 해야할터이고, 엊그제도 영업하는 것을 봐둔 곳이다. 어쩌란 말이야. 몇 군데를 검색해서 가는 길, 카카오택시를 부른다. 오 분도 더 걸려서 도착한 기사는 벌써 다른 콜을 받고 간다. 여러가지 변명을 말하지만 궁색하다.


<고바우식당>에서 소맥을 말고, 대전 지인의 근황을 함께 말한다. 뇌경색이 온 친구, 술 한잔 못하고 오년동안 관리해야한다는 진단을 받았단다. 그리고 이번 민주당 당대표 선거이야기다. 밤새도록, 새벽 네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시민빠이다. 좋아하는 정도를 너머 모두가 정답이다.


사람들은 길을 가다보면 나뉜다. 아니 또 가다보면 만나기도 한다. 잘되기도 하고 못되기도 하기 때문에 길들은 여러 갈래다. 그러니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길을 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그 발걸음을 쫓기도 한다. 그러니 서두를 일이 많은 것도 아니다. 지난 여름 그의 어려움을 눈치채고 작은 도움을 주었다. 친구는 그 시점이 절묘했다고는 하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몸짓 마음짓을 보아오거나 느낀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천사일 것이다. 마음과 몸의 빈틈을 찾아들어온, 빈 곳들을 여물게 만드는 가을의 전령인 것이다. 그 친구가 온 것도 절묘한 것이다.


볕뉘


나의 다른 생각들을 전한다.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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