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자산이라고 흔히 불리는 것들은 생산의 여러 과정들을 자본화하는 반면, 무형 자산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취득의 여러 과정들과 그 취득 과정에 관련된 여러 편의적 발명품들을 자본화하는 것으로서, 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분배에 영향을 미칠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69

무형자산의 가장 일반적이고도 전형적인 종류가 '굿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용어는 오늘날 대단히 다양한 종류의 차등적인 영업상의 유리함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이 말이 사업의 용어로 처음 쓰이게 된 것은 단골 고객이 그의 굿윌을 가지게 된 사업체에 관습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에서였다. 원래 신뢰와 상찬 같은 호의적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의미는 사라지고 기업이 독점적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얻는 특별이익을 칭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66-67

산업적 사업과 달리 영리사업적인 거래들 자체는 시간 소요의 문제가 아니다. 이 경우에 시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 금전적 거래의 크기는 그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에 들어간 시간과 어던 함수 관계도 없으며 거기에 생기는 이득도 그러하다. 87 이러한 종류의 거래에서 나오는 특수 이득이란 이미 투자된 부가 낳고 있는 수익 위에 덧붙여서 주어지는 일종의 보너스와 같은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건 마치 길바닥의 돈을 줍는 것과 같다.' 89

옛날 식 자본가-고용주가 산업 공동체의 기술적 효율성을 독점해버렸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현대의 금전적 거물들은 영리사업 공동체의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독점해버린다. 이 자본주의 효율성이란 자본가-고용주가 그 물질적 장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힘으로 삼아 산업 공동체를 꼬드겨서 그것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만큼을 넘는 잉여 생산물을 물질적 장비의 소유자에게 넘겨주도록 이끌어내는 능력에 있다. 하지만 금전적 거물은 재화를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의 국면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망쳐버릴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91 구식의 자본가-고용주는 공동체 전체의 수입을 거두어들여 그 금전적 거물에게 전달해주는 수탈과 이전의 도구, 즉 단순한 중개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상적인 경우라면 이 금전적 거물은 그 총수익 가운데에서 그 자본가-고용주가 계속 영업을 할 유인이 될 만큼만 그에게 수당으로 주어지도록 하고 나머지를 모두 가져가버리게 된다. 92

가장 공공 정신이 투철하며 가장 모범적인 신사들이 정력을 바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은 병아리들이 모두 알을 까고 나온 둥지에다가 계속 암탉을 눌러앉혀두려는 시대착오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현대의 공동체는 영리 활동의 원리들로 푹 젖어 들어 있지만, 그 원칙들이란 이제 구약의 율법과 같은 옛날 것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93

(짬생각 1. - 보수-수구지향. 조선-동아일보를 좋아하는 분께 드리는 메모: 머리의 언어에 설득당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미 단단히 몸의 기억에 매여있다는 것을, 향수에 대한 추억같은 가슴의 언어만 남아있다는 것을. 몸의 언어, 가슴의 언어가 당신을 흔들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행여 당신이 믿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합리가 조금이라도 스며든다면, 당신은 바뀔 수 있으리라. 지난 기억의 사진첩 속에 현실을 추려낼 수 있다면, 당신의 존재가 위태롭다는 것을 한번 더 느낄 수 있다면, 어쩌면 몸의 언어가 아니라 가슴의 언어나 몸의 언어라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조선-동아-중앙은 볼일볼 때 시간밖에 채워주지 못한다. 그 미망에서 화장실용이 아니라 이미 끙끙대며 보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쇼윈도우처럼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한번이라도 그 시선을 의식해보면 어떨런지?)

                                                       소스타인 베블런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를 읽다가

사회자체만큼이나 오래된 분업은 성, 지리, 개인적 재능 등에 내재한 차이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이른바 교역, 거래, 교환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전혀 그 근거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애덤스미스, 19세기 후반의 허버트 스펜서도 분업의 원리를 교역이나 교환과 동일시했으며, 그보다 50년 뒤 폰 미제스와 윌터 리프먼은 이 같은 오류를 되풀이했다. 정치경제학, 사회사, 정치철학 및 일반 사회학의 수많은 저술가들이 스미스의 전철을 밟아, 교환하는 미개인이라는 패러다임을 각자의 과학에서 공리로 확정했다. 62-3

사회공동체는 재난에 의해 그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 한, 그 구성원들이 굶어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같은 재난이 있을 때라도 경제적 이익은 개별적으로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위협받는다. 그래서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 최고의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65 (흔적 2. - 당연하다고 생가하는 공리를 뒤집지 않는 이상, 종언이라는 말이 그 기원을 문제삼는 것처럼 지당한 것을 다시볼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산과 분배에서 질서가 보증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주로 경제학과는 본래 무관한, 두가지 행위 원칙에 의해 주어진다. 그것은 호혜와 재분배이다. 이 원칙은 이윤동기의 결여 -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의 원칙 결여, 최소노력의 원리 결여, 특히 경제적 동기에 기초해서 분리된 명확한 제도의 결여라는 논점 위에 서 있다. 67 (흔적 3. - 혹 칼 폴라니도 수입을 하여 또다른 칼라니 교조주의가 되는 이가 없을까? 말한 것을 되풀이하며 맥락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긴밀한 관계에 조명을 비추이지 못하고, 그래야한다는 당위로만 말하는 것에 그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유행처럼 그 뿌리를 헤아리지 못해 써먹고 마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까? 해석과 현실을 보는 눈이 부족하더라도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이어 결실을 맺도록 뻗어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폴라니의 눈에 지금을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폴라니의 눈으로 지금을 연구하고 관찰하고 긴박하는 것이 어떨까? 조급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는가? 관점이 닳아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관점으로만 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좀더 많고 다른 눈이 현실의 바다를 풍부히 볼 수 있는 것처럼 폴라니로 인해 지금을 달리 품어나갈 우리가 많이 생기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래서 폴라니를 다르게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다르게 봤다면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할 일은 아닌가? )

그러나 이러한 행위원리는 실제로 작용시키는 제도 없이는 효력을 가질 수 없다. 호혜와 재분배가 문서라든가 복잡한 행정조직 없이도 경제체계의 작동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은 대칭성과 중심성이 있기 때문이다. 호혜에 있어 각 개인은 각각 다른 섬에 자기의 파트너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 호혜의 관계는 눈에 띄게 인격화되어 있는 것이다. 부족의 분파들 사이나 거주지역 사이에도, 부족간의 관계에서도 대칭성의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인 주고받기에 의존하는 광범위한 호혜가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중심성도 재화와 용역의 징발, 저장 및 재분배에 길을 내준다. 사회조직이 상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어떠한 개인적인 경제적 동기도 작용할 필요가 없고, 개개인의 나태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68-9 ( 생각흔적 4.- 1. 증여, 포틀란치...어쩌면 우리가 모든 것을 이익을 중심에 넣고, 공기마시듯 당연히 생각하지만, 이것을 이익에 치환해서 그렇게 치밀하게 사유해본 적도 없다. 그저 선물의 개념으로만 환원하여 생각할 뿐, 치환된 호혜가 인간의 관계, 질 사회적, 정치적 행위를 맺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생각의 진도를 나가본 적도 없는 것이다. 돈 생각하듯 그렇게 치밀하게 해본다면 좀더 나은 관계-현실의 적응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돈과 호혜로 저울질만한 생각질이 나올 것인가? 의무를 지우게 하려고 선물을 준다. 사회적 관계를 낚는 방법. 벌써 몸에 배인 것들이 주변에 있나?!! 어쩌면 대부분의 관계가 그러하지 않을 수도.... 2. 지나치다보니 짝을 짓는다는 말에 혹하여 돌아온다. 사회단체 회원간에 주기적은 순환은 어떨까? 각기 다른 책선물, 그리고 또 다른 회원에게 시간방향이든 어떻든 또 다른 부채와 환경을 생각하는 선물...그리고 또 다른 방향으로 건네는 방법의 순환....?? 3. 재래시장의 활용??)

요약

자기자신 또는 자기가족을 위하여 식량을 채집하고 수렵하는 개인주의적인 미개인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가족, 마을, 혹은 장원 등 자급자족단위를 형성하고 있는 것들의 실체는 완전히 다를지라도 원리는 항상 같다. 즉, 집단구성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과 저장이라는 원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래 집안살림의 본질은 이익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생산이라고 강조한다. 사용원리와 이윤원리를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완전히 다른 문명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74-5 서유럽에서 봉건제가 증언을 고하기까지의 이미 알려진 경제체계는 호혜, 재분배,가정(집안살림) 내지는 그 2,3가지 원리의 다양한 조합에 기초하여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특히 대칭성, 중심성 및 자급자족이라는 패턴을 이용하는 사회조직의 도움을 빌어 제도화되어 있었다. 관습이나 법, 주수리나 종교가 함께 작용하여 경제체계에 있어서의 각자의 기능을 궁극적으로 보증하는 행위법칙에 개개인이 따르도록 했던 것이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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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 재분배, 집안살림 중 어느 것도 사회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교역원리도 다른 원리들이 우월한 사회에서는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77

시장은 주로 경제의 내부에서 기능하는 제도가 아니고 제도 밖에서 기능하는 제도이다. 시장은 원격지교역의 회동장소이다. 본래의 국지시장은 거의 중요성이 없다. 더구나 원격지시장도 국지시장도 본질적으로 비경쟁적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지역적 교역, 이른바 국내시장을 창출시키는 압력은 거의 없다 79 (흔적 5. - 시장에 대해 길들여진 앎이 덕지덕지하다. 끝까지 읽고 나서야 납득을 한다.) 수렵 또는 분업의 확장, 이의 연역이 교역의 필연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격지 교역이 재화가 치우쳐 편재하는 분업의 결과이고, 시장을 발생시키고, 화폐나 흥정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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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 풀빛] -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인 의미의 선, 즉 전체적으로 좋은 삶을 윤리학의 기준으로 삼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과 선택은 어떤 좋은 것을 목표로 한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 행복에 대하여(최고의 선/덕)/도덕적인 덕(용기,절제,관후,긍지,온화함,사교상의 덕, 수치심, 부끄러움을 아는 것,정의)/지적인 덕/자제와 쾌락/우애/다시행복에 대하여 ..... 최근 번역된 원전을 보고 싶었지만, 아쉬운대로 청소년권장도서 딱지가 붙은 청소년 철학창고 시리즈 도서이다. 도덕과 윤리가 헛갈리고, 국민윤리라는 것이 몸에 스멀스멀 붙어있는 근대인이라 윤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영 거시기하다. 모두에 있다싶이 윤리학의 기준은 좋은 삶이라 한다. 좋은 삶에 대한 사유의 길목으로 늘 당연시하던, 아니면 늘 구분하지 않고 살았던 우애, 호의, 합심, 자기애, 친구의 조건들도 이참에 결을 나누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할 것 같다.  



[남종회화사,서문당]-일반적인 남종회화사 외에 문방제구, 제호와 낙관의 양식, 색과 조제법 그리고 개인사에 대해서도 세세히 기록되어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남농기념관에 들르면 구입할 수 있다. --녹시씨가 논함에 그림에 색채의 필요성을 말하였다. 하늘에 색채가 있다. 땅에도 색채가 있다. 사람에게도 색채가 있고, 만물에도 색채가 있고, 문장의 언어에 다 색채가 있고 천지간에 어떤 것에도 색채가 없는 것은 없다라구 말이다.  



[황해문화]를 짬짜미 보고 있다. 어젠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두편의 글이 잡힌다. 윤여일, 조영일 님의 글들을 읽다보니, 윤여일의 시선, 조영일의 전투?력 모두 눈길을 끈다. 교조가 아니라 맥락에 대한 이해와 흡수, 노력의 지적바탕에 대한 지적도 끌리고, 글로 봐서는 직선적인 성격이 글에도 나타나는 듯 싶은데 조영일의 글도 눈여겨진다. 고진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지식인의 수입도 그러할 것 같다. 맥락과 바탕, 그룹핑이 되지 않고, 결과보단 과정, 고민에 대한 공유가 자라면 좋을 듯 싶다.  
 

 

 

그리고 궁금증을 쌓고 있는 책들. 

  

 

 

 

 

뱀발. 

1. 도서관에 기다리던 책을 구했던 제1서고에 있다는데 몇시간을 뒤져도 없다는 전갈을 받았다. 아무래도 같은 독서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앞권이 도착했고 있던 책이 없어졌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한바퀴를 더 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구하던 책이 버티고 서있는거다. 횡재를 한 듯 기쁘다. 책장 색이 바래 누렇지만, 오탈자도 좋아보인다. 그렇게 구구절절이 인용하고 있는 원본을 직접보는 것이 나을 듯하여, 잡다한 책들을 끊었다. 비도 오고 온전히 책읽기에 좋은 날씨다. 원본이 해설서보다 쉽다는 것은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접해보면서 몸으로 느끼는 면에서. 일면 그렇단 얘기다.

잠깐 독서하고 있는 다른 책은 베블런의 이 책 .  

 2. 아***에 올린 한권의 책소개 공부도둑을 보다나니, 그래 궁금할 때 멈춰라는 독서팁도 하나의 기술이리라, 시간을 즐기는 한방법, 앎을 담금질하는 방법의 하나라는 느낌도 든다. 그러다보니 허리가 끊긴 책들이 잡힌다. 다음을 봐야하는데... ...뭐였더라..그런데 기억력이 허접해서 바닥이라 상기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더 문제다. 쩌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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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나 되었을까? 산책삼아 가다 보행교 아래 해파리들이 축제처럼 몰려든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매화잎을 심어놓은 듯, 어린 해파리들의 유영이 황홀하다. 그래도 서슴지 않고 다니는 핫꽁치 녀석들하구, 또 일군의 우아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다니는 것이 인상깊다. 어제 그자리를 지나 한바퀴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잔잔한 파도, 정박하였지만 곧, 어디를 달아날 것 같은 배. 오랫만에 땀을 내어본다. 6k 40'  달이라도 비추이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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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일욜 일터에 도착하니 **님 선물이 도착해있다. 한국화도 도자기...꼼꼼 살펴보았을 흔적들이 배여있는 듯. 조금 서둘러 이렇게 담는다. 맘놓지 못해 건진 것이 별반 없다. 고마움을 이렇게 표해도 되는 것인지~ .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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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9-06-1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화집 자꾸들여다보니 다른 재미가 있군요. 고마워요.
 

유명

스치는 느낌을 잡아두다. 친구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접목을 이야기한다. 생물학과 경제학과 융합되는 지점 말이다. 아주 얕은 교류. 그 문턱이 낮음에도 건너지 못하는 모임들의 풍경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과학관련 강연프로그램의 대중화사례를 이야기하며 우리들도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경제학프로그램 가운데 섭외, 대중성 외연확장 방법에 대해서도 들뜬 목소리가 섞여있다. 장사될 것 같다. 장사가 되면 더 깊어질까? 논의가 확장될까? 나무가 성장하는 만큼 뿌리는 깊어지는 것일까? 간간이 논의나 고민지점 사이로 그것들이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무엇, 왜, 어떻게 조심스럽지만 조심스럽지 않게 각기 다른 언어, 다른 공감의 진폭을 만들어내는 것엔 과정의 더깨가 필요할 것 같다. 고민을 여러사람이 다르게, 다른 것을 이상하게 보는 눈을 없앤다면 미리 저만큼 앞길을 가볼 수 있을텐데. 기획의 깊이를 기대해본다. 유명해지는 것과 생각을 품는 이들이, 과정을 담고 품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하는 것인가? 비례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붙어있으며 좀더 현실력을 갖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저기로 여기를 사는 우리

평론의 고원, 작은사고를 감금하는 시대, 큰기획, 큰맞짱만 존재하는 시대의 우울. 시대의 조울. 바닥에서, 처지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모두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래서 늘 잊어버린다. 주변의 덧셈에 대해서, 거대 기획에 함몰해서 작은 나와 우리모둠은 늘 건망이다. 이것또한 지나가리다. 평론의 카타르시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주 작은 것들에 명민하고 고민이 깃들지 않는 이상. 착각은 영원한 자유다. 현실은 늘 그 자리다. 그래 언제 작은 것에 뜨거워본 적 한번 있더냐. 늘 그랬듯이. 나라를 안고사는 이들의 마음 속엔 나라만 들어있는 것을. 작고 소소한 불감이 이렇게, 생각의 중앙집중이 생각이 분권이 되지 않아 늘 거대한 불감으로 이어져 왔던 것을. 한치도 되돌아보지 못하는 아둔함을 낳은 것을.  게으름의 저인망선은 오늘도 유유히 배회한다. 건망의 쌍끌이선이 오늘도 출몰한다. 내게 맞는 말과 표현만 편취한 채 사라질 것이다. 불감의 끝은 돌다돌다보면 그래도 한바퀴돌아 유감인가? 어떻게 해서, 생각들은 몰려다니기만 하는 것일까? 생각들의 유랑단은 늘 쏠려다니기만 하는 것일까? 정박하지 못하는 채. 반성하지 못하는 채. 서로 대통령. 서로 거대담론. 사고는 늘 저기를 기준점으로 자란다. 나의 상처로부터 키우거나 아주 조금씩 만나지 않는다. 저기가 멈추면 사고도 생각도 멈추고 정지한다. 저기의 자극에만 반응하는 거울이다. 저기가 있으면 조금 반짝거리다마는, 여기에서 상처를 저기의 자극을 받아 보듬지 못한다. 늘 여기는 잊혀질 뿐. 저기에 대응해 처리할 뿐.  여전히 처리국면의 한 지점을 지난다. 번번히 성숙의 기회는 불신의 심연을 키우는 지렛대로만 작동되는 닫힌 회로.

종교와 자유

종교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가? 발제자의 질문은 묵직하다. 질문과 달리 종교인의 역할, 영향력 정치행위 등 정작 다른 곳으로 논의가 번진다. 신이 있다고 여기는가? 종교가 필요하다고 여기는가? 그리고 그곳에 개인의 바램까지 보태면서 말이다. 질문을 받자마자 질문을 바꾸어 단다. 종교는 선택?의 자유를 신장시키는가? 종교가 선택의 자유를 신장시키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면, 종교인이 열어두어야 할 사고의 지점은 어디인가? 거꾸로 종교가 얼마나 자유를 신장시킬 수 있는가? 라는 질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종교윤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선택이 아닌 예정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강요한다. 따라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자유와 책임에 대한 윤리의 핵심적 사항을 빼앗아 버린다. 영생을 약속하는 종교교리는 각기 삶을 더 잘 꾸리고자 하는 갈망에 덮개를 씌운다. 인간행동의 근거로 초자연적인 힘을 붙들어 잡는 교리는 행동과 결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을 저해한다.

얼마나 많은 책임있는 자리의 종교인이, 아니면 신자들이 옳고 그른가의 선택의 문제를 선과 악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가? 얼마나 많이 논의를 기도를 받아들렸다고 하면서 원점으로 돌려놓는가? 얼마나 많이 신에게 마음을 저당잡혀 행동과 결과에 대한 책임감마저 느끼지 못하는가? 종교가 가져오는 많은 유익보다 얼마나 인식의 자유나 책임, 이웃에게 해야할 것을 눈을 가리게 하는 현실을 꼼꼼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아닌가? 종교가 인간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보다 종교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신장시킬 수 있는가하는 질문으로도 번져야한다고 여긴다.  어느새 안위의 전당으로 일상의 면죄부의 성소로 자리매김하는 현실을 아파할 줄 알아야 하므로... ...

오천만원과 박봉, 노조

경제를 우리몸에서 잘근잘근 떨어뜨린 연유로, 사회단체는 박봉으로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개인의 헌신이 필요한 것이지 최저임금에 근사하는 생활로도 당연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눈치가 일상이다. 어느덧 사회단체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경제력을 뺀 삶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정도면 단체가 불감한 것이다. 회원들의 살림살이로 나아가지 못한다. 부류의 삶이 있으므로 우리아파트, 옆집이 사는 환경과, 달동네의 비루한 삶이 어느 덧 불감해졌으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 과외/대출/기본경제력비치상품. 그렇게 삶 따로, 운동따로 활동따로, 양심의 가책따로의 나날이다.

왜 일까? 왜 터부로, 금기로 자리잡았을까? 사회단체의 살림살이와 회원의 살림살이, 상근자의 살림살이가 저임금-저활동력-빈곤의 축으로 자리잡아 버린 것인가? 헌신을 강요하고 박봉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버린 것인가? 왜 자신과 다른 삶, 경제력을 인식조차 하려들지 않고, 자신모둠의 경제력에서 벗어나보려 하지 않는 것인가? 생각조차 허락하지 않는 금기사항이 되어버린 것일까? 논의를 만들지 않았으므로 생각이 자랄 틈조차 없던 것으로 여겨야 할까?

오천만 땅기면 눈에 보이는 활동력이 그려진다. 맘만 가득하고 생각만 가득한 것과 현실의 부재의 간극을 채울 수 있다. 과제를 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짬짜미의 분담이 그래도 제법 그럴 듯하게 제도화되는 것이다. 일을 저지르고 볼 만도 하지만 생각이 함께 자라지 않고서는 삶의 아주 작은 부분 할당을 받지 못하고 선, 또 한번 상품에, 그럴 듯하게 마음을 기댈 곳 고르는 곳이 되고 말 뿐이다. 고르고 대행하는 곳이 아니라 내 삶이 묻어날 수 있는 곳이나 설령 잘 못되더라도 채우고 만들어나가는 곳이 되어야 하는 연유다.

오천을 땡기는 일이 그래서 부자에게 적선을 받는 일이 아니라 우리 회원의 삶이 전망이 담긴 마음을 받고 싶은 연유이기도 하다. 그 마음의 두레가 박봉에 시달리는 박봉의 활동에 시달리는 사회단체의 숨꼬를 터주고 그래도 삶이 보이는 공간으로 아주 조금 희망이 존재하는 곳으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뱀발 

금욜,토욜 아***, 참* 집알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기의 강도도 깊어 흔적이 필요하다 싶다. 근대사모임에선 박목사님의 발제에 이은 문제제기가 인상깊다. 그만큼 따듯한 마음과 열린 생각이 가득하시기 때문이리라. 말미 예전에 하시던 사업과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그런 게으름이 스멀스멀 모임을 잠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좋아하는 것과 현실의 격차가 있다는 것일 수도, 개인과 모임의 문화의 간극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이야기겠다.  

그리고 현재의 시국, 시류에 대한 이야기. 지켜봐야겠지만 좀더 그 아픔들이 거봐 내가 그랬잖아. 내가 잘한 거잖아 못한 거잖아로 번지지말고 작은 것들을 이어주는 끈들로, 갈라서는 계기로가 아니라...그렇게 이어지는 실뿌리로 작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전인수는 현실을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삶이, 기획의 시간이 좀더 길어졌으면 하는데, 늘 일회성, 단발성이 아쉽다. 좀 길게 고민하는 친구들이 늘어났으면 한다. 진지하게 경제, 살림살이를 모임에 일상에 붙이면서, 아마추어같은 고민은 많이 줄였으면 한다. 본질적인 문제에 다가서서, 좀더 밀착해서 고민을 나누었으면, 그럴 기회를 더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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