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어서 뭐하는가?


곰곰이 품다. 화자의 의도를 곱씹어 본다.  진리는 세상사람들이 초등학교만 나오면 다 안다. '내가 싫으면 남이 싫다'란 지극히 기본이 되는 상식도 지금 여기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정녕 그러한 순수한 취지라면 받아들인다. 책을 읽지 말자. 무슨 독서인가?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자. 살면 뭐하는가 어차피 죽을 건데. 산에 오르면 뭐하는가 어차피 내려올건데.  독서 무용론이 알게 모르게 스며있다. 아는 체 하는 것에 물려서 일까? 유행처럼 들뢰즈니 누구니 수입상들에게 호되게 당해서 이기도 할 것이다.


 

활동이니 운동이 더 이상 선언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자리하나 꿰어찬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새로운 시선과 시도는 물론, 깊이있는 연구와 물고 늘어짐이 없이는 한치도 내다볼 수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서사와 맥락으로 끊겨진 활동의 간극을 다시 꿰매고 수선해야 될 것이다. 그것을 복구하는데 조건없이 아는 것이 힘이자 즐거움이고 또 다시 큰 그물을 짜는데 도움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질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젝이니 바디우니 등등 지적흐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가쉽꺼리로 전락하는 경우를 보면서, 그저 유명인을 일회용으로 쓰고마는 행사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흡수력이 떨어지는지, 하나라도 건지려는 노력은 없는 것인지 아연해지기도 한다. 생각꼬투리를 물고 있기나 한 것인지 또 다른 포스트모던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적 소비와 유행의 90년대를 지났는데? 그 퇴행을 되물고 있는 것인가?

 

'무식해지자. 다 알고 있는 것 아니냐'에 대한 되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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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문득 그런 불순한 생각이 스며든 것일까?  그녀들을 지켜본지가 꽤나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모임자리마다 깊어지지 않고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불순한 생각이 가끔 까끌하게 돋아올라와도 내리누른다. 잘못 본 것이겠지? 예단하면 되지 않는데... ...


 

그녀들이란 괄호안에 나를 집어 넣어본다.  집도 있고 아이들도 크고, 아직도 몸에 붙지 않은 집, 갖출 건 다 갖춘 이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돈을 벌고 쓰는 규모는 알 수도 없고 알려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 되었으니 미루어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진보를 쇼울처럼 치장하거나,  까다로운 소비를 통해 다른 이들과 구별짓기를 하는 이들의 자연스러움이 목에 넘기기엔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  몸은 의도와 상관없이 일상에 익숙해 있거나 절어있는 습속들이 비슷하여 또 한패가 아니던가하고 뜨끔해지는 것이다.

 

진보를 자랑거리로 삼아서 장삼이사와 다르다는 용도로 쓰는 순간 안타깝게도 의도는 사라진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가져가지 않고, 구별과 차별의 용도로 소비하는 순간 손가락질하는 이들과 달라질 것이 없다.

 

이미 기득권자가 되어있음을 안다. 거느린 자식들의 삶에 연연해하지 않지만 연연한다. 인문학의 자산만이 버텨줄 공간을 준다.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취직도 못한다는 절박이 부모들을 이 경쟁에 목매이게 한다는 사실도 안다. 그 내성이 생긴 인문의 폭만큼 아이들을 다그치지 않을 여유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지금보다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까? 번 것과 쓰는 것에 대해 서로 투명해질 수 있을까? 교육열과 교육비의 격차를 서로 허심탄회하게 나눠 얘기할 수 있을까? 모임의 살림살이를 조금이라도 삶의 결 속에서 얘기를 나누어 볼 수 있을까? 모두 허물이 있음을 알고, 그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껴가며 기댈 수 있을까? 일상의 세세한 결을 나누고 논쟁하고 토론해나가는 방법은 없을까? 

 

진보란 쇼울을 내려놓고...일상을 터 놓고 진지해질 수 있을까? 괜한 생각이 걸려 이제서야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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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로 된 방

 

 

어느날 벽면의 거울을 들여다 봤다. 음 괜찮은데
어떤날 바닥의 거울을 들여다 보는 이가 왔다. 음 저 녀석도
그리고 어떤 날 천정의 거울을 들여다 보는 그녀가 왔다. 음 그녀도
거울이 세면이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렇게 거울 하나씩 가져와 거울로 된 방을 만들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더구나 서로를 볼 수 있다니 말이다.

 

 

거울은 시간이 지나 어느새 육면체로 된 방이 되었다. 놀라운 진화는 계속되었다. 거울은 또 몇면이 늘어 팔면체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손을 들면 보고 싶지 않던 곳에 손길이 닿고 다시 나에게로 왔다. 신기함에 신기함이 더해질수록 거울은 스스로 자랐다. 팔면체 12면체로 그럴수록 시선과 손길은 저 멀리 가는 듯했다.

 

 

어느 날 문득 날카로운 빛이 날아들었다. 낯익은 목소리, 낯익는 웅성거림에 빛은 더 반짝였다. 그들은 손을 들었고, 꿈 속에서도 거리를 나서도 더 반갑게 인사했다. 그 거울은 손가락질을 하면 수십개의 손가락이 되어 되받았다. 화를 내면 수십개의 화가 되어 되받았다. 옳다고 하면 수백개의 더 옳음이 되받았다. 더 벼리면 더 벼렸다. 실금 사이로 더 빛났다.

 

 

거울로 된 방에서 산다.
거울로 된 방에서 할일하며 산다. 실금은 신기하게도 자랐다.
실금이 자라는 만큼 거울을 보며 컹컹 짖었다. 거울은 따라 컹컹 짓었다.

 

 

그래도 평온하다.
비누방울같은 거울로 된 16면체 속에 할일하며 산다.
실금간 한쪽면의 거울이 쩍 갈라지더니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비눗방울이 펑~ 터지는 사이 거울은 조각조각되어 바닥에 쏟아져 거울로 된 방의 틈사이를 되비춘다. 

 

 

조각난 사금파리 같은 거울파편들은 햇살을 와르르 먹고 분수처럼 뿜는다.


 

그래도 비눗방울 같은 32면체 속, 거울로 된 방에 산다.


 


 

뱀발 

 

그렇게  뒤집힌 거울에 비추는 많은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보고싶은대로만 보지 않는다면
보고싶지도 않아도 애써 그 결들을 살필 수 있다면
거울에 비추인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어디로 쏠려다니는지도
거울에 비추인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마음길을 걷는지도 
거울을 하나씩 거꾸로 돌려  그 많은 면으로  그들의 몸질, 마음길을 살피는 이력과 구력, 근력이 있다면

암흑물질처럼 뭉뚱그려 하나로 보지 않고

그들을 원하고 바라는대로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다면  그래도 조금은 다른 시작을 해볼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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