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 한밭대 앞 차창밖 리베란 간판이 일베로 읽힌다. 그런 걸보면 정치란 것이 일상의 마음 한올에도 영향을 미치는 예민한 놈이다. 정치에 냉소하고 회의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정치적인가? 악취가 진동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분리수거와 재활용뿐만 아니라 발생원을 철저히 없애는 일이기도 하다 . ᆞᆞ리베란 간판이 리브나 라이브로 읽히는 정치를 기대하고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느낌과 아픔이 스며드는 정책과 정치가 난무했으면 좋겠다. 작고 적은 것들에 예민했으면 싶다. ㅡ 참 정치 지분하게 한다 싶다. 루쉰이 그래서 늘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고 했지 않았을까? 정치가 추억이나 향수, 행세가 되는 집단에게는 ᆞᆞ

 

 

2.

 

다가올 열차를 기다리지만 물기 머금은 바람,산과 산의 공제선 사이 안개와 구름이 피어오르는 저녁은 흔치 않을 듯 싶다. 서울 손님이 많아 빈자리가 여의치 않다. 원고를 품다품다. 폰을 끄고 잡다한 일을 끊고 자판과 대면하는 글감옥을 만든 뒤 7시간쯤 지나서 마무리했다. 요즘은 딴생각이 많은지 글쓰기가 싫다. 글을 업으로 삼지 않아 다행이다 싶지만 글로 업을 삼는 이를 염두에 두니 투정도 부리지 못하겠다. 삶이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고 문외한이라는 것도 없는 것으로 치자. 그러고나니 글감옥의 말미 다가오는 묘한 뿌듯함 비슷한 것을 외면하지 말아야겠다 싶다. 중독성도 있을 것 같아 며칠 글감옥에 틀어밖혀 끄적이고도 싶다. 그 뫔감옥에서 벗어날 쯤 가을비도 촉촉하고 산안개와 익은 바람, 벗 그리고 막걸리 한사발 있으면 좋겠다 싶다. 열차는 아직 안개비에 막힌 듯 ᆞᆞ레일의 소리여운이 희미하다.

 

 

3.

 

다큐 3일을 물끄러미 보았습니다. 하늘공원의 빈소를 찾는 이들을 담더군요. 여의치않아 오지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전령 역할을 하는 10년차 여직원은 근무하면서 느낌을 이야기합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점점 좁아지는 듯하며 하루하루 잘해야되는 얘길 전합니다. 하루하루 못함이 쌓여 삶과 죽음의 간격,그 심연을 넓히는 어른들을 향해 아이 조문객들은 '그때그때 잘하지'하며 밝은 표정으로 답하더군요. 그래서 고마웠습니다. 죽음의 울타리가 저 만치 두려움에서 멀어지고, 삶에 대한 애정이 이만큼 다가서니 말입니다. 금기나 금지의 울타리는 나누다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죠. 나누려고 하지 않는 마음의 선, 시대의 선이 더 문제겠죠. 문득 그런 느낌이 다가서더군요. 당신의 금기는 뭐죠 ㅡㅡ 묻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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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이후의 재진단


 

신세대들은 국가나 민족이나 민중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대신에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값을 직접 구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나는 나'라는 선언 속에는 '그것 말고는 나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숨어 있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으므로, 멈춰 서 있는 것은 도태를 뜻하게 되었으나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문화, 그리고 그 문화의 개인적 발현으로서의 '취향'만이 빈자리를 대신하였다...

 

.사람들은 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그리고 문화를 가져야 한다는 새로운 획일성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강렬하고 약간은 어긋난 문화적 열망은 이전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피로감을 동반했다. 때문에 벼락같이 열렸던 문화적 가능성들은 새로운 미학적 탐험이나 실험보다는 소비와 소유라는 비교적 간편한 실천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방식들로 수렴되기 시작했다...IMF 외환위기를 벗어나자, 한국 사회에는 더 이상 소비를 두려워하지도, 죄악시하지도 않는 소비자-시민-대중이 정체성과 욕망과 자아실현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들고 무리지어 있었다. 56-57

 

90년대의 수많은 문화적 실천들 중에서 합법적으로 승인된 형식은 소비뿐이었으며, 이것을 용인하는 한에서 다른 부수적인 자유들이 얻어지는 것에 가까웠다....학생운동이나 민주화 같은 대의가 사라진 공백들을 취향과 정체성을 위한 문화적 실천들로 채워졌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비를 통해 사회를 재조직하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이 소비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 자본주의가 폭력과 회유, 도덕과 훈육을 통해서 노동자를 만들어내듯이, 소비자 역시 형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은 '문화적'으로 또 미학적으로 일어나야만 한다. 62

 

관용이라는 전략

 

관용은 왜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허락과 인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일부러 누락하고 있다. 금지하는 자가 아니라 허가하는 자가 갖는 커다란 권한의 효율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열심히 일하지 않는 이주 노동자, 문란한 동성애자, 고부고분하지 않는 이주 결혼 여성들이 나타난다면 그들은 물론이고 비슷한 처지의 모두를 광장에 매달겠다는 엄포이기도 한 것이 온정주의적인 관용이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는 관용이라는 훌륭한 정치적 전략을 통해 잉여를 길들이고 있다. 106-107


 

유행과 자유의 위험성


프롤레타리아들은 그 누구보다 프롤레타리아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고,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들의 자리에는 아직도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패배자인 운동권들과 노동자 문화를 '쿨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힙스터들만이 서성이고 있다. 이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탄압이 아니라 유행이 되는 것이다. 탄압의 고통이 차라리 무언가를 굳건하게 만드는 반면, 유행은 순식간에 혼을 빼놓고 그것을 뿌리째 뒤흔들어놓는다. - 잉여가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오늘날의 체제가 그간 존재했던 모든 체제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게 잉여를 처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체제가 '자유'라는 것을 영리하게 전유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특정한 형태의 '새로운 자유'이고,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인양 운명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107-109

 

진실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를 넘는 법


자본은 눈속임과 사탕발림이 아니라 진실을 찾고 그것을 드러내려 애쓴다. 쏟아져 나오는 수맣은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유사 스토리들의 난립은 진실을 모종의 '형식미'로 전화시켰다. 진실은 진실처럼 보여야 하고, 그것을 결정하는 장치와 형식이다...영화처럼 재현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 자체가 이미 무력해졌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실들은 언제나 그것에 반하는 또 다른 진실들을 가지고 있고, 네트워크는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전했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보았다는 것을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하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잉여를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줄 진리의 자리 같은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현실이 뒤틀리고 혼재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잉여 역시 뒤틀리고 혼재되어 있다. 잉여는 올바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잉여적인 것들에는 고통과 희열이, 증상과 직관이, 가능성과 위험이, 미래와 과거가 뒤섞여 있다. 필요한 것은 정지해 있는 사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힘에 대한 사유이며, 나 역시 그 흐름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대중과 서사

 

혼란스러운 대중의 모습을 어떤 이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 아홉 개 달린 괴물인 히드라에 빗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대중을 제어하고, 예측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실패로 끝났다. 사상가들은 대중을 찬양하거나 경멸했고, 마지막에는 항복했다. 역사란 결국 이 히드라가 만들어놓은 혼란스러운 궤적들의 다발이었고, 거기에 어떤 목적이나 끝을 상정하는 모든 주장은 궁극적인 오류를 피할 수 없었다. 74

 

병맛 그 새로운 서사의 탄생


 

재미있는 것은 이 "쩔다"의 모호성이다. 가령 "그 선생님 쩔어"라는 발화는 맥락에 따라 극단적 긍정과 극단적 부정의 두 가지 의미로 모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쩔어"가 곧 어떤 과잉을 지칭하는 언어라는 점이다. 이전의 표현으로 풀어보자면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존나 좋은" 것이고, 그냥 싫은 것이 아니라 "존나 싫은" 것이며,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존나 잘하는" 상태에 대한 경외감이 쩔어라는 단어에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맛이 쩐다"는 발화에는..

 

병맛 웹툰들이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게 될지는 언제나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것을 하나의 징후로, 시대적 감정으로 읽으려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으 머리와 마음속에서 나타나는 일상적인 통찰을 드러내고 있는, 어쩌면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 불가능성에 대한 자조와 공포


 

많은 사람들은 농담과 진담 사이의 어딘가쯤에서 "내가 고자라니!"를 외쳐댔다...이렇게 스스로 잉여성을 인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희에 가까운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두 가지의 상반된 동기로부터 이루어진다. 하나는 말 그대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바닥으로 삼고자 하는 동기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의 상태를 과장하고 너스레를 떨면서 그것보다 더 깊은 심연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함이다. 요컨대 이런 자조의 놀이화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지와 그것을 회피하려는 목적을 각각 혹은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171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는다. 다만 커다란 접시 위에 우리들을 올려놓고 휘청거리며 춤을 출 뿐이다. 서글픈 것은 흥겹게 춤을 추던 자본주의가 삐긋하더라도 가장 먼저 떨어질 것은 접시의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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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편으로 내려오는 길  [월경독서]가 손에 잡히네요. 책을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읊조리 듯 사귀는 모습을 보니 따라해보고 싶더군요. 벗책들을 곁에 두고 연애하듯 ᆞᆞ 최인훈의 가면고, 이사도라 던컨 ... ... 난쏘공이 다시 읽고 싶어지는 구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사사키 아타루 이 친구는 여러번 읽을 책들만 품고 대여섯번은 반복해보고,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열다섯번 이상 읽었다네요. [잘라라 기도하는 손을]의 저자이기도한데 대담집을 읽다나니 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시월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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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마시고 "김일성만세"라고 외치면 끌려가던 시대에 김수영시인은 아무렇지 않게 "김일성만세"를 썼다.  아무렇게 "혁명만세"라고 쓰자.  입춘대길처럼 문짝에 크게 쓰자. 자본만이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쓰는 말  그 "혁명"을  "왜 이렇게 살아야지"에 저며넣자.  눈만 깜박거리면 들리는 말이 혁명인데 왜 우리는 숨죽여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듯 덧칠을 하며 지우고 있는 건지

 

밥먹듯이 탐욕과 자리보전을 위해 쓰는 혁명이란 말은 그들 몫이 아니라 정작 우리 몫이었다. 귀천에 떠도는 숨진 넋들의 가슴 속엔 이 말이 사리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계약직과 파견직 청춘들의 자기(삶의)소개서에 씌여져야 할 말은 이것이다. 자본만 끊임없이 혁명을 발설하고 있지만 세상의 제도와 시스템은 가진것없는 잉여들을 위해 한치도 혁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은 목없는자에게 돌려져야 한다. 자기소개서에 자기의 색깔만큼 혁명만세라고 쓸 수 있어야 하며, 죽은 넋들의 마음을 담아 열외자의 사발통문에 역시 혁명만세라고 씌여져야 한다. 노인들의 피폐한 일상만큼, 달동네 끼니거르며 매맞을 걱정하는 아이들의 대물림에도 이 말이 걸려야 한다. 혁명이라는 말이 돈냄새가 쫑긋한 곳에만 맴돌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그늘지고 아파하는 곳에서 자라야한다.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로 옮겨와야 한다. 여기로 가슴 속으로 가까이 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머리 속에 심어져야 한다. 삶의 사발통문에 담긴 비통과 고통의 혁명만세는 전염처럼 흔적없는 이들의 마음에 번져야 한다.  삶의 비탄과 통탄을 다 받아안아야 할 그말이 "혁명"이다. '혁명'을 품지 않고 녹슨 그 단어를 다시 쓰지 않아, 이렇게 말같지도 않는 세상이 유예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자본은 혁명하라 혁명하라 사주해서 제 잇속차리기에도 급급하다. 그래서 삶들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벼랑끝으로 내몰지만,  열외자 목없는자 겨우사는자  줄이고, 가진자들도 돈맛이 아니라 살 맛나게 살자는 이들은  이말을 벙긋도 하지말아야 한단말인가...

 

계절은 어김없이 우르르 단풍으로,  첫눈으로, 곳곳에 꽃으로 혁명하는데, 왜 우리는 혁명을 뫔 밖에 바스러지게 둔 것인지.  발 한걸음 딛지도, 꿈도 꾸지 못할 듯 그 말을 지우면서 살아온 건 아닌지. 경제가 밥이고 문화도 예술도 공기같은 것이라면 혁명도 산소같은 것이다. 자본에도 그것이 산소같으므로.                                          혁명만세라 쓴다. 검정빨강푸른 하늘을  한점 찍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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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혁명을 그려라
    from 木筆 2013-10-08 14:01 
    "혁명을 혁명과 유사한 가짜 혁명(개혁)과 구분해 주는 것은, 개혁과 달리 혁명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혁명은 영구혁명이기에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기치는 또다시, 철저히 혁명에 귀속된다. 반면 개혁에는 끝이 있다. 그렇다면 카페인 없는 커피, 니코틴 없는 담배, 사정 없는 발기와 같이 혁명 없는 개혁의 패를 다잡은 이 땅의 진보가 가닿을 곳은 어딜까? 바로 ‘공정한 우파’, ‘상식이 통용되는 우파’, ‘존경받을 수 있는 우파’다. 혁명의 이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