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만세

 

"혁명을 혁명과 유사한 가짜 혁명(개혁)과 구분해 주는 것은, 개혁과 달리 혁명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혁명은 영구혁명이기에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기치는 또다시, 철저히 혁명에 귀속된다. 반면 개혁에는 끝이 있다. 그렇다면 카페인 없는 커피, 니코틴 없는 담배, 사정 없는 발기와 같이 혁명 없는 개혁의 패를 다잡은 이 땅의 진보가 가닿을 곳은 어딜까? 바로 ‘공정한 우파’, ‘상식이 통용되는 우파’, ‘존경받을 수 있는 우파’다. 혁명의 이상을 폐기한 진보는 그 목표를 향해 한발씩 전진한다. 지은이가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자음과모음, 2012) 개정판 서문에 쓴 “한국 사회에서 진보로 알려진 것들이 대체로 보수주의에 속한다”는 말은 일점 의혹 없는 진실이다."

 

"이들은 ‘이석기 부류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양비론으로 기각되기 쉽지만, 제대로 된 진보나 자유민주주의자가 ‘이석기 부류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비하자면 고자질을 넘어 박해에 가까운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장난감 총’을 웃음거리로 삼는 꾀를 쓴다. 그들은 그런 조롱을 동원해서 자신의 남루(‘혁명 없다!’)와 탈이데올로기 본색을 감추었고, 장난감 총을 희화화하는 일에 재미를 들여 혁명의 잠재성과 그것에 대해 사유할 기회(conference)마저 몽땅 내버렸다. 진보는 뇌사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05959.html 장정일_ 진보의 가면

 

 

뱀발.

 

군입대하는 녀석때문에 얻은 휴가. 오전 시간 말미가 나 오랜만에 활자신문을 훑게된다. 이 기사가 걸려 관심있는 컬럼들도 있었는데 읽지 못했다. 장정일의 진보의 '가면'이 서걱거린다. 아~ 이 정도 기사라면 페북에서 논란이 될 만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녀석을 보내고, 모임을 갖고 난 연후, 시간이 지났음에도 연결된 소식이 하나없이 조용하다.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적막이 흐른다. 하루가 가기전에 가벼운 코멘트를 남기고 페북에 연결해보았다. 신문기사 댓글도 없다.  이동하는 짬들 사이사이 글을 읽다가 드는 잡생각이 흐려졌다 짙어졌다 한다.

 
문체들이 하나같이 단문에다가 유행처럼 쉬워야 한다고 말한다. 대세다.  비문이 없는 만연체 아니 다른 문체가 왜 문제가 되는 건지? 문체가 다 똑같아야 한다는 주장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병맛은 뭔가? 문체반정. 이상이 어려운가? 어려운게 왜 문제인가? 문체반정을 조장해야 하는 것이 작가생태계를 위해 더 나은 것은 아닌가? 과도한 유행이 문제는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낙거린다. 유행이 다 잡아먹는 것은 아닐까? 휩쓸려가다가 정작 남는 것은 없고, 자기 색깔도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고....휴우 - 

 


그러다가 이 역시 진보, 좌파가 사실도 잘 모르거니와 해법과 대안도 없으면서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가 원인이라고 둘러대는 것은 아닐까? 하는데까지 의심이 번진다. 깊숙히 찾아보고 만들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조금만 막히면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가 어째서 그렇다고 회피하기에 급급한 것은 아닌가. 여러 딴생각이 들었다 놨다 올렸다 놨다 한다.

 


문화와 예술, 심미적 접근을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당사자는 제도안을 어떻게 흔들어놔야 하는지 관심도 없다. 떡 하나에 연연해 한다. 현실에서 당한 그 고통을 제도의 그림으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다. 현실의 구체적인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연결고리가 끊긴 그 지점에서 외친다. 잘해달라고 말이다. 이렇게 '피해받고 있으니 제발 눈길 좀 다오'하는 것은 아닌가?  그토록 많은 시인이 배출되지만 시인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요구하지 않는다. 먹고살지 못하겠다고 먹고산다고, 몇날며칠을 품고 갈고 닦은 작품이기에 얼마를 달라고 하지 않는다.

 

진보진영 안의 무수한 대안과 논쟁점들은 혁명적 수준에 가깝다. 마니넬레라도 그러하며, 유럽의 시민교육도 그러하며, 대학이라는 것도 지금이땅의 현실에 비하면 개혁으로 고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갇힌 혁명 수준이다. 틀안에서 나아진 개선은 다른 부문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학생들의 삶, 일터의 삶, 노년의 삶 어디에도 그 담을 넘지 못한다. 제도밖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제도안에 관심이 없다. 제도안밖을 들낙거리는 이는 관-산학협력밖에 없다. 들낙거려도 무엇을 먼저해야 하는지 우선순위가 없다.  혁명이라는 과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목표를 크게 삼고 지금 여기의 문제들과 삶을 직조하지 않으면, 개선에도 잠시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큰 틀과 주춧기둥에 대해 건드린 것이 없으므로 오히려 체제 공고화에 기여하고 유행이란 걸로 욕망이 다스려져 문제없다.

 


갇힌 혁명, 우물에 갇힌 개혁과 혁명이 아니라 열린 물길을 내는 혁명의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도 많은 대안을 가지고 있고, 너무도 많은 삶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고,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단 그림들이 파편으로 쪼개지고 나눠져 있다. 그 그림을 그려 이어놓지 못한다면, 산산히 찢겨진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나락의 삶으로 죽음의 재단에 바쳐지고 있는 건 아닌가. 죽음과 주검이 아무런 눈길도 받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지금여기에 견디고 있다.   지젝은 상상이상의 것을 이야기한다. 지젝은 이땅의 현실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레닌을 이야기하고 혁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땅은 현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가슴을 열고, 열정을 열고, 침잠한 현실의 무수한 것을 건져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이을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혁명이라고 할 큰 그림을 수백가지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공표할 수 있지 않을까?

 


지지율 1%, 1%는 서로 지분거리,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마주보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말을 걸어봐야 소용없다. 등돌리고 있는 나머지 속으로 들어가 퍼즐 하나 하나가 맞추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조금 조금 실루엣같은 흔적이 보일 쯤에서야 돌아설 것이다.


하나 둘. 진보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잃을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은 시간이요. 얻을 것은 힘밖에 없지 않는가?  아직도 수중에 남은 것이 있다고 여기는가? 모두 다 버려 더 버릴 것이 없는 바닥이 아닌가? 그림을 더 자세히, 먼저 그리는 재주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려낸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밑져야 본전 아닌가? 혁명을 그려낸다고 , 꼼지락거리는 혁명들을 이어서 더 꼼지락거리게 한다고 문제될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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