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재능

 

서구 사회는 살인, 절도, 강간에 대한 고대의 터부와 결별하였기에, 오늘날 '재미 삼아' 다른 사람을 멋대로 폭행하는 데 대한 아무런 내적 자제심이 없는 비행 청소년들, 그리고 역시 의심할 나위 없이 '재미 삼아' 수학의 게임 이론을 실천하여 수천만의 인간 말살을 유유히 계획할 수 있는 비행 어른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현재 알려진 어떤 터부가 지배하는 사회보다도 훨씬 원시적이며, 훨씬 더 비 이성적인 상태로 뒷걸음질하고 있다. 유효한 터부가 없기 때문이다  122


의례언어를 통한 효과적인 표현과 의사 전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던 것처럼, 터부도덕적 훈련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이 둘이 없었다면, 인류의 발달 과정은, 수많은 강력한 통치자나 국가가 정신병적 폭거나 생명을 억압하는 타락 후에 망한 것처럼, 이미 예전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122


언어에는 논리적 실증주의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특질들이 있다. 막연함, 불확정성, 애매함, 정서적 덧칠, 보이지 않는 것이나 확인할 수 없는 일에 관여하기 등, 이른 바 언어의 '주관성'이다. 그런데 이런 특질들이야말로 애초부터 언어는 생생한 인간의 경험을 감싸 안는 도구이지, 정의 가능한 형해화된 관념들을 접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가르킨다. 풍부한 음성 표현이 절제된 지적 대화보다 훨씬 세월이 앞섰음에 틀림없다. 128


언어는 의식으로 향한 정신의 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무의식으로 향하는 지하실의 문을 약간 닫아 지하 세계의 유령과 악마들이 점점 더 바람 잘 통하고 밝아진 위층 방들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였다. 이런 거대한 내적 변용을 무시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변용이 가져온 근본적 변화를 도구 제작 덕분으로 돌린 것은, 지금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오류였다. 130


많은 미개 언어들이 문법적 복잡성와 형이상학적 치밀함을 보여준다.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경험적 자료를 가시적 비가시적 현실의 쌍방에 폭넓게 연관시켜주는 풍부하게 유형화된 지적 총체로 전환하려는 화자들의 엄청난 관심을 증언한다. 이 방대한 상징 구조는 음성에 의해 구축되고 전승되었다. 그것은 추상, 연상, 기억, 인식, 회상의 위업이었으며, 처음에는 정력적인 집단적 노력이 필요했음이 틀림없다. 이 노력은 쓰기가 발명된 훨씬 후에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되었으며, 지금도 모든 살아있는 언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39


인류의 언어는 인간 두뇌의 가늠할 수 없는 잠재력에 걸맞는 무한한 잠재력으로 충만하였다. 언어가 여기에 이르자,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의 살아있는 일부가 되었다. 145


인류의 최초의 말들은 엄밀한 표준화가 없었다면, 또 주술적 정확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글쓰기가 발명되기 훨씬 전에 바람 속에 흩어져 아무 흔적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언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훼손되거나 토막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마도 주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단어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언어의 형성 단계에서 그런 강제적 질서는 필수였다. 언어는 생기면서부터 당연히 '신성하여' 범할 수 없었다. 153


공자는 가장 위대하며 가장 영향력 있는 도덕가의 한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그가 당대의 사회질서를 견고한 토대 위에 확립하고자 왜 두 가지 수단에 의존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고대 의례의 부활이며, 다른 하나는 언어의 명료화였다. 이들은 사회적 협력과 통제를 위한 두 개의 가장 오랜 수단이었으며, 향후 인간화를 진전시키는 모든 발전의 기초였다. 154


원시 인류는 언어를 정확한 서술과 기록을 위하여 그리고 마침내는 규제되고 조직된 사고를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훨씬 전에, 공들여 은유를 연마함으로써 언어 예술을 우선 유희적으로 또 연극적으로 발달시켰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전환의 특징을 말하기 위해 무심코 사용한 그 단어들 -씨앗, 개화, 운반, 도구, 암반 - 은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은유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정보를 전달하는 비교적 흔한 말들에까지 배어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160


신화와 은유를 거부하는 것은 똑같이 중대한 왜곡을 낳는다. 언어 원초의 은유라는 '질병'의 싹이 조금이나마 끼어드는 것을 막으려고 인류의 경험을 아무런 생명력 없는 도구로 해부하려는 노력은, 병소를 적출하던 외과의사가 초조한 나머지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다른 기관을 제거해 버리는 식의 위험성을 안겨준다. 거칠 것 없는 은유적 시어가 컴퓨터의 비자연적 언어에 완전히 자리를 내준다면, 인간의 창조성에 필수적인 것이 과학에서조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161


발견하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


화이트헤드의 관찰에 따르면, "역사적 전통은 물리적 환경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전승된다." 물론 환경이 통일적이며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조건에서는 물질적 축적은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물질적 축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지라도 상당하였을 것이다. - 초기 인류가 의례와 언어에 그처럼 많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던 여건  185


무엇이든 얻고자 하는 사회의 기초는 풍요한 사회의 기초보다 앞서 놓였던 듯하다. 186
인간은 원래 잡식성이다. 순수한 채집자, 순수한 사냥꾼, 순수한 고기잡이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초기 인류는 결코 한 가지 식량원이나 한 가지 생활양식에 전념하지 않았다. 187


언어와 의례와 마찬가지로, 몸치장은 인간다움, 인간의 의미, 인간의 목적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다른 모든 행위와 노동은 헛된 일이었을 것이다. 192


활과 화살은 자연의 어떤 것과도 비슷하지 않으며, -1의 제곱근 개념처럼 생소하고도 독특한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이 무기는 물적 형태로 변형된 순수한 추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원시 기술의 세 가지 주된 원천인 나무, 돌, 동물 내장을 이용하였다. 196


사나운 남성적 기질을 과도하게 발휘해야 한다는 강박증은, 융의 방식으로 해석하면, 남성 무의식의 여성적 요소를 확대시켰을지도 모른다. 구석기 예술에서 이른바 어머니 여신은, 수렵자들이 일에서 살상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을 성의 향락과 보호의 정에 점점 더 관심을 쏟게 함으로써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본능적 시도의 표현일 수도 있다. - 조직적인 동물 살상에 대한 의식변환  202


춤과 노래, 언어가 의례에서 독립된 것이라면, 그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래 모든 예술은 신성하였다. 인간이 미적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은, 오직 신성한 힘과 교섭하기 위한 것이다. 춤과 의례, 그림을 그리는 움직임이 어우러진 동작에서 우리는 여러 동굴 벽에 그어진 마카로니 같은 불가사의한 선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추상적인 그림들은 의례 몸짓들의 부산물이었을지 모른다. 204


살인적 잔혹성과 극도의 미적 세련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은, 중국에서부터 아즈텍 멕시코까지, 네로의 로마에서 메디치가의 피렌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시대를 잊지 않는다면 나치의 학살 수용소 입구에 아름답게 심어진 화단의 전시에까지, 기나긴 일련의 역사적 사례들에서 알 수 있다. 208


동물 사육과 식물 재배 전단계


혁명이라면 과거의 방식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 방식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농업혁명은 일어난 적이 없다. 고고학자들은 오크스 에임스가 영장류시대에서부터의 식용식물에 관한 부단한 지식의 '전승시대'라 일컬은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하여 중석기 단계에서 식용식물, 특히 일년초를 체계적으로 재배하기 전까지 식량 채집 집단이 중요시했던 열대 과실과 견과류 수목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개량하게 되었다. 에임스는 이 기나긴 서곡이 지닌 의미를 강조하였다. ...고고학자와 인류학자가 생각해온 이상으로 기나긴 농업의 시기가 있었음을 시사한다...222


문화에서 변화의 증거만 찾고자 한다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인 지속의 증거를 놓칠 것이다. 문화는 많은 특징이 사라지기도 하고 확인할 수 없게 되기도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거의 없는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225 문화의 총체에서는 영속적 형질과 잔존체가, 아무리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훨씬 큰 영역을 차지하며 더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은 둘 다 똑같은 자연의 한 단면이다. 239

 

텃밭, 집, 어머니


위대한 어머니 신화에서 남성은 별 중요치 않는 연인이나 부속물로서, 결코 대등한 짝은 아닌 존재로 표상된다. 동물 사육화/식물 재배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승리라는 이런 다른 측면을 잊는다면, 전체 이야기를 미화하고 왜곡하게 될 것이다. 256


인류가 지금까지 키웠고 보호했으며 아끼고 사랑하기까지 했던 동물을 그처럼 냉혹하게 죽이는 것, 그들에 대한 연민을 억제하는 것은 인신 공희와 함께 동물 사육이 지닌 추한 단면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단계 인류 발달에서 나쁜 선례가 되었다. 왜냐하면 로렌츠의 토끼와 비둘기 연구가 보여주듯이, 길들여진 인간의 야만성과 가학성은 번번이 어떤 육식동물보다도 심하기 때문이다. 대량 고문과 몰살을 저지른 히틀러의 악마적 공범자들은 '선량한 가정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262


우리가 지난 3세기 동안의 기계화 속도에 비추어 판단한다면 동물 사육/식물 재배화는 초기 단계에는 느리기는 했지만, 실상은 모험적 적응과 쓸모 있는 돌발사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운 먹거리, 과일의 크기와 품질 향상, 실을 잣고 베를 짜는 데 유용한 새로운 섬유, 통증을 완화하고 상처를 치료하며 피로를 이기는 새로운 약초,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발견할 때마다, 최신형 자동차나 로켓 모델보다 더 순수한 이유로 기쁨과 놀라움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264


19세기 이전에 신석기 시대보다 발명이 많았던 시대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선택되거나 교배된, 혹은 많은 수확을 올린 새로운 식물들은 모두 새로운 발명이었기 때문이다. 265


신석기 문화와 더불어 생긴 제도들도 그 어느 기술적 발명 못지않게 문명에 기여하였다. 조상의 생활방식과 지혜를 존경하였기에 글로는 담아낼 수 없던 수많은 관습과 의례를 보존하였다. 여기에는 생명을 키우는 것, 공동 재화의 공유, 미래에 대한 대비, 사회질서 유지, 자기훈련과 자기 통제 확립, 지역 집단의 보전이나 번영 유지에 필요한 모든 과업에 대한 아낌없는 협력 등, 도덕의 기본 원리가 포함되었다. 271


마을은 불탄 자리에서 돋아나는 잡초처럼 폐허에서 일어났다. 이 사회적, 기술적 성공에는 두 가지 비밀이 있다. 공동체의 성원은 누구나 문화유산을 가까이하였고, 대개는 그 모든 부분에 정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떠한 권위의 질서, 어떠한 우월성의 위계 서열도 없었다. 연령이라는 자연적 질서만이 예외였다. 전문화의 정도가 아주 낮았고 기술과 일을 쉽게 바꿀 수 있었기에 마을 문화에는 융통성과 여유가 있었다. 이것은 동물 사육/식물 재배라는 최초의 거대한 실험이 이루어진 후 생긴 보수주의를 상쇄하였다. 도공이나 대장장이처럼 그런 공동체에서 필요한 부분이 되었던 전문가들조차 수확기에 부르면 곧장 공동 작업에 참여해야 했다. 272


신석기시대 농업에서 처음으로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여 누구나 똑같이 다양하며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즐거울 수 있는 정해진 일을 가짐으로써, 주로 채집을 하던 경제에서 가능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복지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이 일상적 일들은 '현실 원리'와 '쾌락 원리'를 통일하여, 한쪽이 다른 한 쪽의 조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생활과 내부 생활을 조화시켜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지도 않았거니와,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면서 한 가지 기능들만 과도하게 강조하지도 않았다. 농경민들은 안전도 확보하고 즐거움도 얻기 위하여 곡물을 얻는 데 꼭 필요한 이상의 일을 하였다. 273


오늘날 신경증 환자에게 정상적 활동과 정신적 안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작업 요법으로 뜨개질, 모형만들기, 목공일, 그릇 빚기 등 신석기시대의 주요 예술을 이용하는 것이 단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이런 조형 작업의 반복적 성격은 불안정한 인성 탓에 어쩔 줄 모르는 충동을 통제하도록 도와주며, 결과적으로 건설적 일상을 따르는 데서 오는 기분 좋은 보상을 제공한다. 아마도 이것이 신석기 문화의 작지 않은 공헌이리라. 그것은 인간에게 성이나 부모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규칙적인 일의 중요성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망각하여 위난에 빠진다. 277


원동력으로서 왕


이 모든 기술적 진보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뒤에는 간과되어 온 더 중요한 동력이 있었다. 곧,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존재의 모든 차원을 변화시킨 새로운 종류의 사회조직의 힘이었다. 그런 변화는 작고 현실에 밀착된 초기 신석기시대 규모의 공동체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선사시대의 가설적 재구축을 시도하면서 내가 보여주려는 것은, 모든 기술적 진보는 그 이전과 이후의 필연적인 심리적, 사회적 변환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즉, 의례의 정서적 교감과 엄격한 단련, 관념적 언어 소통의 시작, 터부와 엄격한 관습을 단련하여 모든 행위의 도덕적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집단 협력을 확보한다는 변환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314


고든 차일드는 이런 거대한 힘의 폭발과 자신만만한 인간 지배를 주로 쟁기와 전차 같은 발명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 곧 피라미드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인 기술적 과시가 실은 끌, 톱, 망치, 밧줄 같은 작고 간소하며 기계적으로 원시적인 도구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기자의 피라미드까지 수 마일이나 수송된 거대한 돌들은 나무 썰매로 운반된 다음, 바퀴나 도르레, 권양기, 기중기, 심지어 동물의 힘조차 빌리지 않고 오로지 기계화된 인간의 힘만으로 제자리에 들어 올려졌다.  321


동물 사육화/식물 재배화를 가능하게 했던 꼼꼼한 관찰, 밀착된 관계와는 종류가 다른 새로운 과학이 나타났다. 새로운 과학의 기초는 셈하고, 측정하며, 정확하게 기록한다는 추상적, 비인격적 질서였다. 일찍이 이런 속성들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피라미드 같은 원숙한 기념 건조물은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날을 헤아리고, 음력 달과 양력 해를 관측하고, 나일 강의 수위 상승과 범람 시기를 정하는 이 모든 일은 사제 계급이 할 일이었다. 이 새로운 권력과 질서는 이집트 최초의 태양력 확립에 의해 효과적으로 상징화되었다. 328


"너희들 말 대신에 내 말이 운명을 결정하게 하라. 내가 한 것은 변경할 수 없으리라. 내가 말한 명령은 취소할 수도 바꿀 수도 없으리라." 이 말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말들은 새로운 집단 기구가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335


왕권이 이윽고 어느 정도 인간화, 도덕화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로 마을 공동체들의 완강한 저항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 같은 생활 관습과 양식의 많은 부분이 촌민들의 이주와 함께 새로운 도시 속으로 퍼졌다. 우리는 민주적 기술과 권위주의적 기술 간의 투쟁이, 안으로는 역사내내 진행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340


비교적 온건한 함무라비 법전조차 고문을 한다든지 영구적으로 불구의 몸을 만들어 처벌하는 제도를 인정하였다. 그런 관행은 철기시대 이전 고대의 소규모 사회 공동체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가학적 방법은 교육에도 적용되었는데, 그 흔적은 지금에 와서야 겨우 제거되고 있다. 348

 

뱀발.  이른 잠, 한밤 중에 일어나 책마실을 다녀오다.  그는 총괄적인 조망, 아니 그 시공간안에서 전체를 보면서 날 것의 생동감있는 시선을 요구한다. 시체나 주검을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서 미치는 힘의 자장을 그대로 볼 것을 바란다. 칼 폴라니가 경제를 설명하면서 썼던 'embeded' 사회에 함침되어 있는 모습대로 봐야한다. 사회에서 인간과 자연을 발라내어 상품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기술 역시 사회에 배태되어 있는 것, 사회 조직원리가 기계나 기술의 원리로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문제 인식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도구의 관점에서 보고있는 상식이 심각히 왜곡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신석기시대를 농업혁명이 아니라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물사육/식물재배화의 기나긴 조정시대임을 증명해내고 있다.

 

그의 언어, 몸짓, 의례, 예술의 기원에 대한 탐색은 마치 잠비스타 비코가 설명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인간 세상은 수학과 물리학으로 파악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만들어진 것이고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의 역사를 탐색하는 것으로 진리가 발견된다고 한 말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가 말하는 통찰은 인류가 외적형성만큼 내적형성의 영역을 넓혔고 넓히고 있다는 자각을 들게 만든다. 평행우주와 마음을 읽어내는 과학의 속도만큼 내면의 이드와 초자아, 무의식의 발견도 그 만한 속도로 우리의 영역을 넓혀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단지 그가 말하고 주장하는 것은 신석기 시대가 19세기 이후 발명을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발명을 해왔으며 그 기술들이라는 것이 사회안에 숨쉬고 호흡하는 손에 잡을 수 있던 것들이고, 지금도 언제든지 숨쉬고 우리 몸에 각인된 유전자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동물을 사육하는 과정이나 식물의 종을 토양과 기후에 맞게 개조하는 순간순간 사회, 마을 사람은 같이 호흡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한다.

 

 

식물이 성장할 때 특정한 성분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미량원소가 필요하듯이 인류는 너무 극단적인 상황만을 가정하고 기술을 개발해왔는데, 그 땅 속을 자라고 있는 뿌리의 영양분까지 고려하는 내면탐색은 너무도 없었다는 안타까움으로 그의 기술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키워왔듯이 증오나 집단학살의 잔인성의 영역도 같은 크기로 자라게 했다는 이중성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양측면을 조망하지 못하면 인류가 도착적이거나 극단적 파멸의 경험을 반복할 수도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피라미드라는 거대기계는 사회라는 조직, 수직적인 위계, 신을 재현하는 왕이라는 사회조직의 출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위적인 조직, 사회의 출현이 권위적인 기술을 낳고, 심지어 19세기 이후 사회에서 발라져 나온 기술, 거대기계는 인간성도, 자연과 호응하지도 못하면서 통제불가능한 잔인성과 파멸의 징조까지 보여준다고 한다. 날이 희윰해져 오늘을 챙기려 두시간 남짓 새벽잠을 청했다. 친구들이 꿈 속에 자주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참터 - 몇 꼭지가 눈에 띤다.  도심 열섬 현상과 대안 모색 바람길에 대한 예비시험, 실측 데이터, 하수종말처리장 악취문제에 대해서 독일 사례, 타지역 수림대조성 보기, 지역별 악취실측 데이터 등등 학생들이 만든 자료와 데이터들이 무척 꼼꼼하고 좋다 싶다. 기술은 마치 짐승과 같아서 잘부리고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권위적이기도 하고, 민주적이기도 하고...기술만 불쑥 떨어져 나온 것 같지만 지역 주민과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전한다. 악취와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 기술들이 결합해서 기대이상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이 사례가 다른 문제가 있는 곳에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으니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큰 일을 한 것이라고 격려한다. 년수로 6번째 이제서야 시간을 내어 참가하니 그래도 듬직하다 싶다. 고생하시는 멘토님의 자극과 격려 속에 그래도 학생들이 서로 좋은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것 같다. 2년전 참여한 대학생 멘토도 그 때는 힘들고 귀찮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기억에서 제일 많이 남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2. 공주대학에서 충남-세종-대전 역사 축제가 있었다. 동학 120주년 기념이었다. 역사동아리와 활동 등이 인상적이었고 교류가 샘날 정도로 좋다. 전에 가본 우금티 고개를 다시 갔다. "농민들이 이 고개를 넘어 공주에 가려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농성하러 갔다. 말이 하고싶어서 우리는 이런 나라를 원한다고 시위하고 싶어서 목숨을 담보로 고개를 넘고자 했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교수님은 아이들의 솔깃한 마음을 뚫고 말한다. 뒷모습에 어리는 강단있는 모습과 목소리 떨림, 아이들의 눈빛이 그 억새와 바람이 참 좋았다. 까르르 까르르 억새밭에서 셀카봉으로 사진 찍는 학생과 선생님들의 여운이 짙다.  벗의 부부와 막걸리 한잔에 마음을 더 담다가 헤어졌다. 말과 말 사이 마음 속에 눈물이 마른 흙에서처럼 스몄다.

 

 

3. 지역은 원자력 문제로 몸살이다. 집값, 위험, 대안이 겹쳐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데이터와 사례들이 없는 사이를 뚫고 이해관계는 자란다. 이해가 몰려다니게 되면 사실까지 덮힐 수도 있다. 생협과 정당활동 사이, 제도 밖에서 할 일, 제도 안에서 할 일, 나누고 챙겨야 할 일, 시간의 자장에서 챙겨야 할 일들이 구분되지 않으면 이해만 남게 될 수도 있다. 저녁 모임의 많은 부분이 이 이야기였다. 결론이 쉽지 않겠지만 토론회로 조금은 시야를 확보하면서 가면 어떨까 싶었다.

 

 

 

 

4. 곰나루터를 거닐고 싶었지만 공주보에 갇힌 강물은 저수지처럼 고여서 흐르지 못한다. 하늘 속엔 경비행기 소리가 뿌옇다. 속절없이 가을은 깊기만 하다. 남겨두고 오는 곳이 내려오는 마음을 따라오지 못한다. 허하다. 공허 사이에  새긴 단어가 박힌다. 아리다.

 

 

 

 

 

 

 

 

 

 

볕뉘. 외모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모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 예로 오드리햅번의 삶, 그리고 말풍선의 말이 남는다.  "인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이다." 라고 ... ... 돌아보면 볼 수록 부끄럽다. 좀더 잘할 것을....늘 덧붙는 후회지만.... 어느 덧 시월도 말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적 전망

 

현재의 상황이 요구하는 종류의 인간은 지금까지 인간의 성장을 제한한 문화와 역사의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종족이라는 문신이 뿌리 깊이 새겨져 있거나 토템의 터부에 제약되는 사람이 아니며, 계급과 생업이라는 경직된 옷으로 삶을 꿰매고 있거나 직업적 갑옷에 틀어박혀 그것이 생명을 위협해도 벗을 수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영양분이 있음을 발견한 정신적 식품을 종교적인 식이 요법의 규제에 구애받지 않고 함께 나누는 사람이며,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라는 안경의 방해 없이 세상을 보는 사람이, 즉 다른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걸친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계를 비롯해 더 빈번하게는 안경 없이 정상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개시된 세계를 힐끔 보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보는 사람이다.  247


삶이라는 행위 자체에 의해 인간은 언제나 어느 정도로는 자신의 지식과 신념의 불완전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치 끊임없이 자신을 개시하는 창조성 속에서 삶 자체가 풍부해지듯, 즉 우리가 삶에 대해 형성할 수 있는 어떤 개념보다도 그 자체로 더 풍부하게 존재하는 삶처럼, 인간 자아의 경우도 그러했다. 인간은 단지 무엇을 구축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훌륭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257


인간은 지금까지 자기 완결적인 그 어떤 역사적 문화가 공급한 것보다도 더욱 건전한 양분을, 미세한 미량 원소까지 포함해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더 충분한 햇빛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하의 무의식계에서도 더 풍부한 토양을 필요로 한다.  259


우리가 추구하는 자아, 아직 사용하지 않은 우리의 자원에 대해 더욱 고양된 의식을 갖는 자아를 앞으로 창조해야 한다. 지금까지 방향이 잘못되고 어리석은 '자연 정복'에 아무 생각 없이 낭비한 에너지의 적지 않은 부분을 그러한 자아를 형성하는 데 돌려야 한다. 현재 우리의 외향주의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내면세계에 집중하는 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조만간 내면과 외면 사이를 왕래하는 에너지의 교류를 허용할 균형과 전체성의 달성을 기대할 수 있다. 때가 익으면 통합된 자아는 세계 문화를 낳을 것이고, 다시 세계 문화가 그 새로운 자아를 뒷받침하며 더욱 고도으 발전으로 향하게 하리라. 261


우리는 그 자체로 삶의 다양한 속성을 갖는 하나의 합리적 틀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영원과 변화, 통합과 다양,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인과적인 것과 목적론적인 것, 과정과 목적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지난 2세기 동안 이러한 철학을 정식화하고자 한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단일한 빈틈없는 체계를 만들고자 한 철학 자체의 전통적 경향에 방해받아 자만으로 가득찬 완벽함을 과시한 나머지 다른 사고에 의해 수정되고 확대되지 않는 철학이 왰다. 헤겔, 콩트, 마르크스, 스펜서가 시도한 종합에 대한 초기 노력에서 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그 모두는 자신들과 대립하는 모든 체계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 자체가 표방한 통일성을 파괴했다. 심지어 그 근거를 수정할 수 있고 이미 구축된 건전한 부분을 파괴하지 않을 채 상부 구조를 더할 수 있는 과학도, 비지성적인 창조 방식을 배제하는 과학의 방법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 외의 어떤 종류의 경험도 수용하지 않았다. 262

 

 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대다수 현대 철학자들의 길을 따르고, 그 결과 종합과 통일을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 포기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새로운 전환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 경험의 모든 측면을 통합할 수 있고 모든 국면을 통한 인간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철학에 의해 눈을 떠야 한다. 17세기 물리학의 무인격적이고 무목적적인 '세계상'은 과학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실추된 것임에도, 방대한 양의 과학 지식은 주로 그 영향 아래 형성됐다. ...심지어 인문 과학에서도 같은 한계를 볼 수 있다. 복잡한 것을 단순한 방식에 의해, 고차원의 것을 저차원의 방식에 의해, 전체를 부분의 방식에 의해 설명하는 전통적 과학의 환원적 기술은,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는 통합과 발전과 창발의 길을 따라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을 갖지 못하고 있다. 263


인간이 출현한 시점에, 그보다 1억 년이나 전의 시기보다도 더 많은 마음이 존재했음을 알고 있다. 인간이 출현한 이래 마음은 양적 차원만이 아니라 질적 속성의 차원에서도 커졌다. 즉 인간의 감수성, 감정, 사랑하는 능력, 그리고 상징의 도움을 받아 전체를 더 크고 완전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발달했다. 인간의 경우 물질과 유기적 삶을 통해 활성화된 맹목적 힘은 지금, 과거에는 이룩하지 못한 의식, 즉 그 기원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고 가능한 선택과 가능한 운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의식을 확보하고 있다. 많은 퇴행과 일탈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성숙돼 왔고, 처음에는 생식과 양육의 필요에서 생긴 사랑은 그 영역을 넓혀 왔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어떤 이론도 이러한 사랑의 영역의 확대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사랑이야말로, 지성과 분업보다도 인간을 인간다운 상태로 완전하게 창발하게 만드는 특징이다. 인간은 성숙이라는 행위 속에서 사랑의 대상과 방법을 증대시킴에 따라 생존을 더욱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265


이 새로운 방향은 단순히 삶의 위의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더욱 분명하게, 의식적 존재인 인간적 인격 속에, 또 삶의 진로를 해석하고 방향을 정할 책임이 있는 지위에, 최고의 찬사를 부여함으로써 일방적인 환원적 기술과 분석적 기술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는 동물적 욕망과 충동이나 더욱 저급한 물리-화학적 구성 요소로 환원해 인격을 저평가하는 대신, 모든 자연적 사건을 인격의 인식 범위 안에 넣고 신선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266

 

사랑


인격의 철학은 경험의 모든 측면을 포함한다. 즉 힘의 실재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재를, 그리고 반복되고 표준화된 것의 실재와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개성적인 것의 실재를 포함한다. 인격 속에서는 내재성과 초월성, 필연과 자유가 모두 경험의 사실이 된다. 이러한 인격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과거의 것과 기지의 것만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지식 너머에 있는 잠재적이고 관념적인 것도 포함하는 모든 차원에서 삶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곧 사상의 모든 분야에 빛을 비추고 상호 관계와 통합의 지각을 활성화하며, 그렇지 않으면 잠들어 있을 진리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대극화 이념이다.  267


창조성과 신성에 결부된 인격의 개념은 본래 단일한 개인에게 국한됐다. 즉 신과 동일시돼 숭배된 나라의 최고 통치자였다. 지금은 그것이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인간 발전의 본질적 특징이 됐다. 과거 물리적 과학의 낡은 규준에 따랐던 때에 그러했듯이 인격 속의 인간이 머리를 숙이고 퇴장하는 대신, 지금 그는 무대의 중심을 차지한 채 자기가 없으면 연극의 상연 자체가 적어도 의식의 극장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한, 그것은 무의미한 무언극에 불과하리라 268

사랑은 마음 자체와 마찬가지로 유기적 세계를 통해 서서히 힘을 모아 왔다. 인간이 구상하고 연기한 드라마에 사랑이 뒤늦게 도입된 까닭에 인간의 노동과 학습 활동 속에서 사랑은 거의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격의 발전에서는 실제로 사랑이 통합의 중심요소다. 즉 성적 욕망과 생식적 출산력으로서의 사랑, 미의 이미지와 관련되면서 그것을 새롭게 만드는 열정과 미적 환희로서의 사랑,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는 동료감과 이웃의 친절로서의 사랑, 부모의 배려와 헌신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상을 과도하게 평가하고 이에 따라 찬양하며 이상화하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처음으로 보이는 무엇을 사랑하기 위해 해방시키는 기적과도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랑이다. 사랑과 사랑의 모든 측면에 대한 적극적인 집중이 없다면, 우리는 지구와 그곳에 사는 모든 생물체를, 지금 지구를 위협하는 증오와 폭력과 파괴라는 비정한 힘에서 구하고자 희망할 수 없다. 그리고 인격의 철학 없이는 누가 감히 사랑에 대해 말하겠는가? 270

 

우리는 생산물과 생산 체제에 대해서도 그 노동이 인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어떤 유형은 받아들이고 다른 유형은 거부할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중시하는 영향은 단순히 기계적 효율성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사랑, 동료관계, 가정생활, 시민 생활에 대한 것이다.  272 생활경제가 약속하는 것은, 완전한 종류의 인간 성장을 위한 교육의 제공이지 기계의 더욱 큰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 개발이라는 개념도 인문주의자의 각고나 낭만주의자의 자의까지는 뜻하지 않는다고 해도, 개인의 행복은 사회의 행복과의 분리 속에서 확보될 수 있다고 하는, 또는 적어도 자기 도야는 사회와 무관하다는 기축 종교의 일반적 신념과 결부돼 있다. 그리하여 인격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잘못 동일시 되고 있다. 273


'파이데이아 paideia'란 삶의 모든 측면이 각각 하나의 역할을 하는 인간 인격의 평생에 걸친 전환으로 파악된 교육을 뜻한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교육과 달리 파이데이아는 그 자체가 의식적인 학습 과정이나 남녀 학생들에게 공동체의 사회적 유산을 전수하는 데만 한정되지 않는다. 파이데이아는 도리어 삶 자체에 형식을 부여하는 일이다. 즉 삶의 모든 기회를 자아 형성의 수단으로 취급하고, 사실을 가치로, 과정을 목적으로, 희망과 계획을 성취와 실현으로 전화시켜 가는 더욱 큰 과정의 일부로 취급한다. 파이데이아는 단순한 학습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제작이자 형성이다. 나아가 인간 자신이 파이데이아가 형성하고자 추구하는 예술 작품이다.  274

마르크스가 정의한 미래 사회에서는 "'파편적 인간'이 '완전하게 발달한 개인'으로 대체될 것이고, 그런 개인에게 상이한 사회적 역할이란 선택적인 활동 형태일 뿐이다. 사람들은 직업적인 어부나 사냥꾼이나 문학비평가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거나 문학비평에 종사할 수 있게 되리라." 275

 

정복하는 영웅, 고난당하는 성인, 열렬한 연인, 용감한 모험가, 인내심 강한 과학자, 요컨대 과거의 문화가 이상으로 삼았던 모든 인간 유형은 자신의 그러한 개성을 평생 유지했다. 그들은 군인, 상인, 직인이 자신의 유일한 천직에 헌신했듯이 자신들의 특수한 덕에 구속됐다. 그 각각은 자신들의 역할에 의해 비좁은 밀실에 갇혀 자기 집에 다녀오지도 못했다. 성자가 연인이 되면 더는 성인일 수 없었다. 현자가 모험가가 되면 더는 현자일 수 없었다. 직업과 도덕상의 이러한 영원한 역할 고정화는 삶 자체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를 시정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적 개성이 수행해야 할 행복한 과제 가운데 하나이리라. 276


개인의 재능이 아무리 크다해도 그 결과는 언제나 불완전하리라. 우리가 추구하는 평형은 역동적인 것이고, 우리가 추진하는 균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욱 큰 성장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휘트먼이 말했듯이 "어떤 성공의 결실도 그것에서 더 큰 고투가 필요한 무엇인가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은 없다. 이는 사물의 본질 속에 준비돼 있다."

 

 

볕뉘. 마지막 장을 마저 본다. 우리의 자아는 외부대상만을 위해 썼지 그만큼 넓어지고깊어지는 내면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한다. 잠재적이고 관념적인 것도 넣을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보지 않았고, 인격의 인식 범위에 자연적인 사건을 넣지 않은 결과 지금의 현실이라고 한다. 학문은 완벽함을 추구하고 이겨야된다는 강박증은 과학조차도 다른 것을 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문의 실패이지 철학의 실패라고 한다. 철학은 인격의 철학과 삶을 끌어안을 때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한다. 새로운 자아는 열려있고 세상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삶철학, 삶정치?  인격의 철학을 한번 품어보면 어떨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사인

 

"나의 모든 수단은 정상적이지만 나의 동기와 목적은 미친 것이다." 186


 

공감과 감정 이입, 상상력과 사랑을 가지고 타인의 삶에 참여하는 능력은 후사적 방법론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후사 문화는 모든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후사인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해도 결함을 지닌 인간이며 궁극적으로는 잠재적 괴물이 된다. 그 결함의 병리적 본성은 그의 높은 지능 지수에 의해 지금까지 은폐돼 왔다. 이러한 괴물은 평범한 기성복으로 위장하고 평범하게 실제 의견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현대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191


자연과 의미깊은 교류에 참여하는 대신, 그는 기계가 제공하는 제품과 대용품이 만족스럽기만 하다면 노력 없는 안락의 삶을 택하고는 자신을 폄하한다. 아니 도리어, 기계가 강요하는 상품에 아무리 싫증이 나도 그것을 소비해야 한다는 의무만 없다면, 그 안락은 그를 전혀 힘들게 하지 않는다. 사고하게 하는 자극, 감정과 행위를 낳는 자극, 즉 삶을 낳는 자극은 곧 사라지게 되리라. 198


 

세계 문화


맥스웰의 특이점 - 이러한 학설은 역사 속에서의 인간 개성의 직접적 충격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 충격이란 대중 운동에 의한 충격만이 아니라, 적시 적소에서 적절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개입하고자 충분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개인과 소집단에 의한 충격이기도 하다. 그러한 순간(부처,예수,마호메트) 단 한 사람의 인격이, 명백하게 저항할 수 없는 제도의 관성을 극복할 수 있다. 맥스웰이 지적했듯 다행히도 시스템이 고차원적이고 복잡할수록 그 속에서 특이점이 생기는 빈도는 높아진다. 즉 물질계보다 생물계에서 특이점이 더 많이 생기고, 개미의 생활보다 인간의 생활에서 더 많이 생겨난다. 따라서 지금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지금까지 알려진 전형적이고 예상할 수 있는 것에 근거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 208


인간이 지금까지 계속 이룩한 자기 전환을 개관해 보면, 인간 공동체의 기초를 확대한 것이 설령 단속적이고 산만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인간 역사의 누적적 성과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통일은 여러 민족과 지역을 그 개별적 능력을 넘는 교섭과 처리의 측면에서 통일하는 하나의 세계 정부라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표현되는 시점까지 왔다. 이는 인간의 발전이라는 공통의 이상에 의한 정치 경제적 통일이라는 어려운 과제로 박차를 가하게 되리라. "그것은 필요하다. 따라서 그것은 가능하다."라고 말한 것은, 지금 세계 문화를 수립하는 과제 전체에도 적용되리라. 나아가 우리는 만일 그것이 쉬운 일이라면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덧붙일 수 있다. 211

 

지금까지의 역사적 분석에 대한 결과로서, 인간 과거의 어떤 측면도 실제로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우리는 신세계 이데올로기가 그 유토피아적이고 공리주의적이면 낭만적 철학에서 범한 중대한 과실을 수정한다. 설명 우리가 역사의 저장된 가치를 이용하지 않는 쪽으로 의식적으로 선택한다고 해도, 살아 있는 과거는 지표 아래에 여전히 존재하면서 자율적으로 내리는 결정으로 보이는 것을 왜곡하며, 새로운 전진을 후퇴시켜 우리가 그러한 압력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더욱더 유효하게 작용한다. 가령 과거 사회가 식인과 근친상간의 관행을 근절했듯이, 우리는 정당한 이유에 의해 전쟁이라는 제도를 일소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 기록의 좀더 즐거운 측면에만 중점을 두고자 전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무지 자체가 이러한 악을 새로운 가장으로 재현하는 것을 복돋우는 날을 예고하게 되리라. 나아가 우리의 평화를 위한 교육에 군인의 헌신과 규율, 그리고 고통을 이겨 내고 죽음에 직면할 각오를 포함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계 문화를 위해 필요 불가결한 고상한 성격의 가장 중요한 측면 하나를 상실하리다. 212-213


다른 모든 새로운 통합과 마찬가지로, 각 부분이 거대한 전체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운 자아와 우리가 전진시키는 새로운 문화에 의해 실행할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낡은 형태로서의 그것은 죽어야 한다. 이러한 재생을 감내하지 못한 결과 이집트인, 유대인, 중국인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큰 짐이된 고색창연한 역사적 선례에 훨씬 일찍부터 매달려야 했다...과거를 그 미래의 더 큰 발전을 통해 선택하고 재평가하며 재고하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참된 문화적 르네상스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213


세계 문화와 통합된 자아 사이의 관계는 상호 작용적이다. 전체주의적 노예화와 자동화와는 다른 수단에 의해 세계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통일된 인격, 즉 자신의 모든 부분을 비롯해 인류라는 가족 전체와도 편한 관계를 갖는 인격이 그 거대한 모든 다양성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창조하는가에 달려 있다. 통합된 인간은 이드에 우위를 두지 않고 이드를 수용해야 한다. 즉 자신의 더욱 완전한 표현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초자아가 억압하지 않게 하면서 초자아를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 통찰과 균형 및 창조성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세계 문화란 강제적 악몽으로 쉽게 퇴화하리라.  214


과거의 세계 정부나 세계 교회에 의해 추구된 순환적이고 자기 제한적인 역정도 슬플 정도로 어리석게 보인다. 따라서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문명조차 빈곤하고 반쯤 깨인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한 문명의 구성원들 중에 자신들의 협소한 동물적 역할을 넘어 발전할 기회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혜택을 받은 엘리트조차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자연적 한계에 이르기 훨씬 전에 비틀거리고 멈춰 섰다. 나아가 더 큰 장애는 거대한 문명이 섬들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그 섬들은 공간적으로 직접적인 이웃과 격리됐고, 시간적으로는 더 넓은 간극으로 그들 자신의 과거의 부 또는 인류의 다른 부분의 부에서 단절됐다.  216


인간의 모든 역사는 지금까지 이러한 목표를 향해, 지그재그로 전진하면서 가끔 멈추어야 했으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숙고되지도 못했다. 무엇이 발생하고 있고 앞으로 무엇이 발생할지에 대한 의식의 결여야말로 발전에 중요한 장애가 됐다. 실제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건설적 노력은, 의사소통과 공유와 협력을 실현하는 수단의 확대,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의 있고 목적적인 결합을 만들 수 있는 과거에는 제국이나 교회, 지금은 대도시라는 공통의 제도 수립을 포함해 왔다.  217


진보 학설과 창발적 진화 학설이 함께 보여 주는 일면적인 해석을 시정하기 위해, 우리는 당연히 사회의 섬유적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즉 인간 삶의 여러 부분은 그 실을 움직여서 그것들을 모든 시간의 층 속에 관통하게 하고, 새로운 단계를 각각 유기체와 사회적 기억으로 짜는 섬유로 장식한다는 사실이다. 220


우리는 과거의 유용한 기여를 이용해야 하고, 그것들을 새롭게 재생시켜야 한다. 이러한 안정된 사회 구조는 인간적인 개성 형성의 여러 재료를 낳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단편적인 상징과 기념물만을 남긴 그러한 인간적 모험도 화학적 미량 원소가 생리적 성장에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발전에도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21


연령, 성별, 인생 경험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혼합에서 나오는 공동체 집단은 그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대표한다. 이는 한정된 목적을 위해 형성되거나 단일한 직업 또는 연령에 근거한 어떤 특수화된 결합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석기 문화가 초래한 마을과 가족 집단의 패턴은 지금도 여전히 기본적인 것이고 오히려 과거보다 더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친밀감, 연대감, 기본적 이해, 의견 일치를 낳을 수 있는 것은 가족과 이웃, 노동 동료와 유희 동료로 구성된 폐쇄적 혼성 사회뿐이다. 223


우리는 앞으로 결코 보지 않을 사람들과 지속적인 거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또한 일상생활의 너무 많은 부분이 간접적인 사람들 또는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손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나와 너의 관계'를 소생 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가 없다면 인간은 조만간 개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한낱 물건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특히 어린 시절에, 우리를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 주고 우리의 자발적인 충성의 대상이 되는 눈에 보이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이 친밀한 집단이라는 확실한 존재는 우리에게 인류의 여타 부분을 참조하는 준거이자 목표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224


유대인 공동체 - 바빌론 유수 이후 반복된 이주와 박해의 타격에 저항한 그 능력의 비밀은 아마도, 나이가 젊거나 늙거나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 적어도 주 1회는 얼굴을 마주보며 모인 시너고그 Synagogue에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작은 일차공동체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문명의 해체기에 대도시 주변에서 목적 없이 떠돈 인간의 먼지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225

 

비행사는 처음 보는 공항에서 착륙 활주로를 찾을 때, 다른 곳의 익숙한 활주로 배치와 국제 신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데 감사한다. 무의미한 차이를 유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차이를 일소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 정도로 삶을 억압한다. 따라서 우리는 걱정없이 그러한 획일화의 지속적 확장을 기대해도 좋다. 획일화는 문명이 최초 단계에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도입한 예측 가능한 행동과 공통 이해의 영역을 더욱 확대하기 때문이다.  227


기축 종교가 유지해 온 무한한 의미와 무한한 가능성의 감각이 없다면 세계 문화를 향한 길은 그것이 요구하는 노력의 가치를 지불할 만한 가치가 없게 되리라. 평화, 질서, 권력, 안전, 부, 지식이라는 한정된 목표가 삶의 궁극적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목표들은 영혼의 갈증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희망없는 신기루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230


모험은 우리가 피상적으로밖에 접할 수 없었던 많은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의 집중과 강화 속에서, 신세계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변화하고, 그럼으로써 그 이데올로기의 최초 비전과 기술의 천박함에서 구출되리라. 확장과 정복이 아니라 집중적인 경작, '무엇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 권력, 이윤, 생산성, 특권을 위한 전반적 기계화가 아니라 인간적 필요에 따라 측정되고 활기찬 규범으로 제한된 기계화라는 방향 설정이 경제적, 사회적 사업의 성질이 되리라. 이는 화폐 경제에서 삶의 경제로의 일반적 변화를 뜻한다 231


사람들의 재정주, 자원의 재풍부화, 풍경의 재개발이 이루어진다. 요컨대 생물적 환경과 원시민족 문화 모두에 가해진 맹목적 공격, 그리고 도시 생활을 향수하게 해 주는 전원 풍경을 분별없는 도시 확대로 말살한 이 문명의 현재를 전반적으로 원상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결국 그간의 풍부한 지식을 이용하여, 끈질긴 탐욕의 결과를 시정하고 기계 일변도의 계획에 대한 기술자의 과신으로 황폐화된 환경을 재건하게 되리라. 233


하나의 세계는 정의상 개방된 사회일 것이다. 밀접한 결합이 달성되는 것은 과거와 같이 성벽 안에서의 고립과 적대적인 배타성에서가 아니라, 공통의 목적에 대한 집중, 공통의 중심을 향한 인력, 공통의 행위를 향한 동원에 의한 것이고, 이는 일단 목표가 달성되면 긴장에서의 해방과 힘의 재분배를 수반하게 되리라. 더 명확한 경계나 더 항상적인 강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러한 개방된 사회의 환대와 자유를 경험할 때의 편안함을 도리어 불편하게 느끼리라. 현재와 같은 정치적 반동과 무감동 속에서는, 개방된 사회가 의미하는 바가 공허한 꿈으로 보일 수 있다. 237


지구 자원의 충분한 활용을 위한 시책으로 세계 문명은 각국이 지불 의무를 지는 누진적 세계 소득세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연의 맹목적인 편애를 시정하고 모든 사람에게 최저한의 생활필수품을 제공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 경제란, 위기 시에 반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그 힘을 빌리는 단순한 시혜와 같은 타산적인 박애주의 차원이 아니라, 정의 차원에서 점진적인 평등화와 역동적인 균형을 추구함을 뜻한다. 239


하나의 세계 원칙과 조화된 새로운 정치 경제 활동의 틀이 창조되기 전에, 고전적 자본주의와 획일적 공산주의에 잔존하고 있는 많은 미신이 제거돼야 한다. 인류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고려되는 실제성과 유익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도입해야 한다. 가령 산업의 추진력으로서는, 좋은 good 삶이 상품 goods의 삶을 대체해야 한다. 240

 

 

볕뉘. 이 책은 1956년에 발행된 것이다. 토마 피케티가 말한 세계 소득세를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재분배의 방향과  삶의 설계, 방향, 문화의 향유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후사인은 역사 이후의 인간, 지금 현대인을 지칭한다. 소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끊임없이 다른 소비만 탐할 뿐이라는 지적 속에 이후 나아가야 할 인류 문화를 말하고 있다. 정치, 조직, 경제, 문화, 예술, 삶의 전반에 걸쳐 총체적인 그림을 그려주며 일말의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그런면에서 보면 각자 갇힌 쇠로된 방에서 닫혀있다고 여긴 문을 과감히 열어야 할 듯 싶다.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나만이 아니라 너가 있고,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고 할 수 있다. 생산, 소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삶의 창작자이자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