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전망

 

현재의 상황이 요구하는 종류의 인간은 지금까지 인간의 성장을 제한한 문화와 역사의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종족이라는 문신이 뿌리 깊이 새겨져 있거나 토템의 터부에 제약되는 사람이 아니며, 계급과 생업이라는 경직된 옷으로 삶을 꿰매고 있거나 직업적 갑옷에 틀어박혀 그것이 생명을 위협해도 벗을 수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영양분이 있음을 발견한 정신적 식품을 종교적인 식이 요법의 규제에 구애받지 않고 함께 나누는 사람이며,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라는 안경의 방해 없이 세상을 보는 사람이, 즉 다른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걸친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계를 비롯해 더 빈번하게는 안경 없이 정상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개시된 세계를 힐끔 보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보는 사람이다.  247


삶이라는 행위 자체에 의해 인간은 언제나 어느 정도로는 자신의 지식과 신념의 불완전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치 끊임없이 자신을 개시하는 창조성 속에서 삶 자체가 풍부해지듯, 즉 우리가 삶에 대해 형성할 수 있는 어떤 개념보다도 그 자체로 더 풍부하게 존재하는 삶처럼, 인간 자아의 경우도 그러했다. 인간은 단지 무엇을 구축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훌륭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257


인간은 지금까지 자기 완결적인 그 어떤 역사적 문화가 공급한 것보다도 더욱 건전한 양분을, 미세한 미량 원소까지 포함해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더 충분한 햇빛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하의 무의식계에서도 더 풍부한 토양을 필요로 한다.  259


우리가 추구하는 자아, 아직 사용하지 않은 우리의 자원에 대해 더욱 고양된 의식을 갖는 자아를 앞으로 창조해야 한다. 지금까지 방향이 잘못되고 어리석은 '자연 정복'에 아무 생각 없이 낭비한 에너지의 적지 않은 부분을 그러한 자아를 형성하는 데 돌려야 한다. 현재 우리의 외향주의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내면세계에 집중하는 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조만간 내면과 외면 사이를 왕래하는 에너지의 교류를 허용할 균형과 전체성의 달성을 기대할 수 있다. 때가 익으면 통합된 자아는 세계 문화를 낳을 것이고, 다시 세계 문화가 그 새로운 자아를 뒷받침하며 더욱 고도으 발전으로 향하게 하리라. 261


우리는 그 자체로 삶의 다양한 속성을 갖는 하나의 합리적 틀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영원과 변화, 통합과 다양,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인과적인 것과 목적론적인 것, 과정과 목적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지난 2세기 동안 이러한 철학을 정식화하고자 한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단일한 빈틈없는 체계를 만들고자 한 철학 자체의 전통적 경향에 방해받아 자만으로 가득찬 완벽함을 과시한 나머지 다른 사고에 의해 수정되고 확대되지 않는 철학이 왰다. 헤겔, 콩트, 마르크스, 스펜서가 시도한 종합에 대한 초기 노력에서 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그 모두는 자신들과 대립하는 모든 체계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 자체가 표방한 통일성을 파괴했다. 심지어 그 근거를 수정할 수 있고 이미 구축된 건전한 부분을 파괴하지 않을 채 상부 구조를 더할 수 있는 과학도, 비지성적인 창조 방식을 배제하는 과학의 방법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 외의 어떤 종류의 경험도 수용하지 않았다. 262

 

 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대다수 현대 철학자들의 길을 따르고, 그 결과 종합과 통일을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 포기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새로운 전환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 경험의 모든 측면을 통합할 수 있고 모든 국면을 통한 인간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철학에 의해 눈을 떠야 한다. 17세기 물리학의 무인격적이고 무목적적인 '세계상'은 과학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실추된 것임에도, 방대한 양의 과학 지식은 주로 그 영향 아래 형성됐다. ...심지어 인문 과학에서도 같은 한계를 볼 수 있다. 복잡한 것을 단순한 방식에 의해, 고차원의 것을 저차원의 방식에 의해, 전체를 부분의 방식에 의해 설명하는 전통적 과학의 환원적 기술은,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는 통합과 발전과 창발의 길을 따라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을 갖지 못하고 있다. 263


인간이 출현한 시점에, 그보다 1억 년이나 전의 시기보다도 더 많은 마음이 존재했음을 알고 있다. 인간이 출현한 이래 마음은 양적 차원만이 아니라 질적 속성의 차원에서도 커졌다. 즉 인간의 감수성, 감정, 사랑하는 능력, 그리고 상징의 도움을 받아 전체를 더 크고 완전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발달했다. 인간의 경우 물질과 유기적 삶을 통해 활성화된 맹목적 힘은 지금, 과거에는 이룩하지 못한 의식, 즉 그 기원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고 가능한 선택과 가능한 운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의식을 확보하고 있다. 많은 퇴행과 일탈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성숙돼 왔고, 처음에는 생식과 양육의 필요에서 생긴 사랑은 그 영역을 넓혀 왔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어떤 이론도 이러한 사랑의 영역의 확대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사랑이야말로, 지성과 분업보다도 인간을 인간다운 상태로 완전하게 창발하게 만드는 특징이다. 인간은 성숙이라는 행위 속에서 사랑의 대상과 방법을 증대시킴에 따라 생존을 더욱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265


이 새로운 방향은 단순히 삶의 위의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더욱 분명하게, 의식적 존재인 인간적 인격 속에, 또 삶의 진로를 해석하고 방향을 정할 책임이 있는 지위에, 최고의 찬사를 부여함으로써 일방적인 환원적 기술과 분석적 기술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는 동물적 욕망과 충동이나 더욱 저급한 물리-화학적 구성 요소로 환원해 인격을 저평가하는 대신, 모든 자연적 사건을 인격의 인식 범위 안에 넣고 신선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266

 

사랑


인격의 철학은 경험의 모든 측면을 포함한다. 즉 힘의 실재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재를, 그리고 반복되고 표준화된 것의 실재와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개성적인 것의 실재를 포함한다. 인격 속에서는 내재성과 초월성, 필연과 자유가 모두 경험의 사실이 된다. 이러한 인격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과거의 것과 기지의 것만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지식 너머에 있는 잠재적이고 관념적인 것도 포함하는 모든 차원에서 삶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곧 사상의 모든 분야에 빛을 비추고 상호 관계와 통합의 지각을 활성화하며, 그렇지 않으면 잠들어 있을 진리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대극화 이념이다.  267


창조성과 신성에 결부된 인격의 개념은 본래 단일한 개인에게 국한됐다. 즉 신과 동일시돼 숭배된 나라의 최고 통치자였다. 지금은 그것이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인간 발전의 본질적 특징이 됐다. 과거 물리적 과학의 낡은 규준에 따랐던 때에 그러했듯이 인격 속의 인간이 머리를 숙이고 퇴장하는 대신, 지금 그는 무대의 중심을 차지한 채 자기가 없으면 연극의 상연 자체가 적어도 의식의 극장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한, 그것은 무의미한 무언극에 불과하리라 268

사랑은 마음 자체와 마찬가지로 유기적 세계를 통해 서서히 힘을 모아 왔다. 인간이 구상하고 연기한 드라마에 사랑이 뒤늦게 도입된 까닭에 인간의 노동과 학습 활동 속에서 사랑은 거의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격의 발전에서는 실제로 사랑이 통합의 중심요소다. 즉 성적 욕망과 생식적 출산력으로서의 사랑, 미의 이미지와 관련되면서 그것을 새롭게 만드는 열정과 미적 환희로서의 사랑,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는 동료감과 이웃의 친절로서의 사랑, 부모의 배려와 헌신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상을 과도하게 평가하고 이에 따라 찬양하며 이상화하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처음으로 보이는 무엇을 사랑하기 위해 해방시키는 기적과도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랑이다. 사랑과 사랑의 모든 측면에 대한 적극적인 집중이 없다면, 우리는 지구와 그곳에 사는 모든 생물체를, 지금 지구를 위협하는 증오와 폭력과 파괴라는 비정한 힘에서 구하고자 희망할 수 없다. 그리고 인격의 철학 없이는 누가 감히 사랑에 대해 말하겠는가? 270

 

우리는 생산물과 생산 체제에 대해서도 그 노동이 인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어떤 유형은 받아들이고 다른 유형은 거부할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중시하는 영향은 단순히 기계적 효율성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사랑, 동료관계, 가정생활, 시민 생활에 대한 것이다.  272 생활경제가 약속하는 것은, 완전한 종류의 인간 성장을 위한 교육의 제공이지 기계의 더욱 큰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 개발이라는 개념도 인문주의자의 각고나 낭만주의자의 자의까지는 뜻하지 않는다고 해도, 개인의 행복은 사회의 행복과의 분리 속에서 확보될 수 있다고 하는, 또는 적어도 자기 도야는 사회와 무관하다는 기축 종교의 일반적 신념과 결부돼 있다. 그리하여 인격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잘못 동일시 되고 있다. 273


'파이데이아 paideia'란 삶의 모든 측면이 각각 하나의 역할을 하는 인간 인격의 평생에 걸친 전환으로 파악된 교육을 뜻한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교육과 달리 파이데이아는 그 자체가 의식적인 학습 과정이나 남녀 학생들에게 공동체의 사회적 유산을 전수하는 데만 한정되지 않는다. 파이데이아는 도리어 삶 자체에 형식을 부여하는 일이다. 즉 삶의 모든 기회를 자아 형성의 수단으로 취급하고, 사실을 가치로, 과정을 목적으로, 희망과 계획을 성취와 실현으로 전화시켜 가는 더욱 큰 과정의 일부로 취급한다. 파이데이아는 단순한 학습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제작이자 형성이다. 나아가 인간 자신이 파이데이아가 형성하고자 추구하는 예술 작품이다.  274

마르크스가 정의한 미래 사회에서는 "'파편적 인간'이 '완전하게 발달한 개인'으로 대체될 것이고, 그런 개인에게 상이한 사회적 역할이란 선택적인 활동 형태일 뿐이다. 사람들은 직업적인 어부나 사냥꾼이나 문학비평가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거나 문학비평에 종사할 수 있게 되리라." 275

 

정복하는 영웅, 고난당하는 성인, 열렬한 연인, 용감한 모험가, 인내심 강한 과학자, 요컨대 과거의 문화가 이상으로 삼았던 모든 인간 유형은 자신의 그러한 개성을 평생 유지했다. 그들은 군인, 상인, 직인이 자신의 유일한 천직에 헌신했듯이 자신들의 특수한 덕에 구속됐다. 그 각각은 자신들의 역할에 의해 비좁은 밀실에 갇혀 자기 집에 다녀오지도 못했다. 성자가 연인이 되면 더는 성인일 수 없었다. 현자가 모험가가 되면 더는 현자일 수 없었다. 직업과 도덕상의 이러한 영원한 역할 고정화는 삶 자체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를 시정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적 개성이 수행해야 할 행복한 과제 가운데 하나이리라. 276


개인의 재능이 아무리 크다해도 그 결과는 언제나 불완전하리라. 우리가 추구하는 평형은 역동적인 것이고, 우리가 추진하는 균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욱 큰 성장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휘트먼이 말했듯이 "어떤 성공의 결실도 그것에서 더 큰 고투가 필요한 무엇인가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은 없다. 이는 사물의 본질 속에 준비돼 있다."

 

 

볕뉘. 마지막 장을 마저 본다. 우리의 자아는 외부대상만을 위해 썼지 그만큼 넓어지고깊어지는 내면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한다. 잠재적이고 관념적인 것도 넣을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보지 않았고, 인격의 인식 범위에 자연적인 사건을 넣지 않은 결과 지금의 현실이라고 한다. 학문은 완벽함을 추구하고 이겨야된다는 강박증은 과학조차도 다른 것을 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문의 실패이지 철학의 실패라고 한다. 철학은 인격의 철학과 삶을 끌어안을 때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한다. 새로운 자아는 열려있고 세상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삶철학, 삶정치?  인격의 철학을 한번 품어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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