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결혼식, 궁중혼례(일정을 맞추면 괜찮을 듯 싶군요. 전통혼례가 아니라...한달에 두번 정도 혼례를 대행해주니 더 더욱...) 맛도 보고 행궁을 둘러보았습니다. 아이들도 손수 도자기-한지만들기, 한과만들기도 제법 재미가 쏠쏠하더이다. 그렇게 마실삼아 횡하니 주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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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에 갔다가 로비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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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027

 참**치 후원의 밤 - 오랫만이라 머쓱하기도 하다. 참터이름으로 후원쪼끔. 충대 토론자로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자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흡족.), 심사원으로 챙겨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

 민*총 운영위원들과

+:  언듯 회의자료를 봄. 참터와 회원수는 비슷하지만, cms는 1/3정도 어려움이 엿보임. 안면이 있는 분들이 있어 수월함. 박시장 기획담당분야 사람들이 염시장 재직시 문화분야 정책을 실기하여 팽당했던 사람들이라는데, 이번에 모조리 재활하여,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키려는 조짐이 농후하다고 함. kaist와 엑스포공원을 청소년문화허브로 만든다고 뜬금없이 기사에 나왔는데, 정작 시 담당부서조차 내용은 오리무중이라고. 많지 않은 문화분야 예산이 기획의도로 편중되면, 소액 문화지원활동도 급격히 위축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음.

+송감독이 참터에 관심을 많이 보임. 홈피는 많이 들어와보셨고, 과학다큐관련한 관심. - 시인(민작 사무처장): 행시사시 모두  3차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함, 공무원생활도 10년, 현재는 논술을 하신다는. 특히 수학...특별한 경력의 시인은 감수성도, 배려심도.. 외모도...인상적이다. 

+ 현직 교사분인 부회장과 전*조 이야길 한참을 나눈다. 초면에 오버를 한 것 같기도 한데. 현실과 삶, 윤리의 문제에 대해 차이를 보이고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됨.

-: 선생님들 학과별 네트웤 구성의 한계. 조합원으로서 한계. 머쓱하니 모두 얻어 먹다.

*: 연합 문*강좌가 논의되었다. - 아**미-문화*연대-민*총: 민*총은 분과별 실기위주로(무료): 사무*장의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으로 이어져야함을 코멘트. 지역소식의 정보공유틀 마련(kaist 동향, 정보소통이 전무)

/: 원론적인 부분이라 급속히 분열해가는 현실에 있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생활인들의 평균감감과 양식은 그룹화되어있다. 모자르다고 여기지 자신은 과잉이라 여기지 않는다. 자식들에게 못해준 것이 맘에 거스르지 여건이 남달라 해주지 못한 것은 마음의 문턱에 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현실은 당연한 것이 되고 논의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해 늘 물밑에 있다. 활동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수평적으로 느끼는 감각의 회복과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좋은 사람들을 본 것이지 그것에 대해 한걸음도 논의를 진척시키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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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많은 철학자들을 동네 친구처럼 불러내어, 이야기 하는 현인?들의 능력에 현기증과 어지럼증이 섞인다.현실 속에 지난 일들을 지난 학자들의 시선으로 새롭게 녹여내는 모습에도 정신이 없다. 따라가기는 커녕 그 심연에 가슴이 막혀 막막하기도 하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새롭게 열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파헤쳐지고, 재정립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2. 무지렁이의 생각이 다른 곳을 쳐다본다.  그 학문은 욕망이 없는 것일까? 당대의 내놓으라는 대가들은 다른 학자의 시선으로 완결구조를 만들고 서열화시키려는 욕구는 없는 것일까?  사문화된 학자를 되살려내고, 지금에서 활보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경외만 해도 되는 것일까?

3. 아는 것을 전제로, 새로운 개념이든 아니든, 그 아래 무수한 정합을 만들어 완결판을 만들려는 지적요구. 지금에 당대를 풍미했던 대가들을 불러내어, 십년이든 이십년이든 삶의 경험과 정보가 녹아 이 세상을 다시 본다면 어떻게 바라볼까? 아리스토텔레스든, 헤겔이든, 칸트든, 맑스든...공자든 맹자든....

4. 세상을 다르게 보고 느낀다는 것은 많은 시선차이에 의한 공간을 만들어 놓는다. 그런데 그 합목적적인 공간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총괄하거나 전일적 해석을 해야된다면, 시선에 빗겨나거나 보이지 않던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5. 우리의 학문의 풍토는 유행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자중심성이 충만해 다른 정합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구태가 몸에 배인 것은 아닌가?  새로움에 충만해, 익숙해지는 것은 곧 낡은 것이되고 새로운 것에 전도되어 비평,평론으로 시각차이만큼 약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지식인들에게 옮겨지다 색이 너무 쉽게 바래지는 것은 아닌가? 학문은 상아탑에서만 쌓여지고 논쟁하고, 구심력에 익숙해져 그룹핑되어 소통은 없고, 아성을 지키기 위한 피나는 잠깐의 쟁점만 있는 것은 아닐까? 

6. 노마디즘은 안녕한가? 미시권력은 안녕한가? 묵자는 잘 살고 있는가? 구조주의는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었을까? 일상의 파시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은? 정리당할 새로움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약발이 떨어져 새로움에 시선이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6. 삶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사는 일상들. 욕지기와 악다구니는 어쩔 수 없는 원심력이다. 상호연결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상이기에 친구이름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 그들의 이름이 박혀있다. 사람 수 만큼 철학이 있고 표현하지 못하는 역사와 세계가 있다. 다만 소통되지 않고 살 뿐.

7. 왜 학문은 하방을 해서 바닥을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바닥에 주저않지 못하는 것일까? 녹아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8. 유행처럼 왔다가 학계를 떠돌다 지식인 곁이나 자본과 바람나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일까? 단 한마디라도 내려온다면 삶이란 것이 세상이란 것이 마음을 울리고 살아지는 일상을 멋진 선생님 만나듯 삶을 지탱해나간다면,,,, 구심이 아니라 원심이 삶인 우리에겐 큰 울림일텐데. 학문의 세계와 <상계동아이들>,<장석조네 사람들> 사이엔 소통하는 실낱같은 통로가 있을까? 끊임없이 보내는 에스오에스 신호를 감지할 수 있을까?

9. 개념에서 출발하는 학문의 욕망과 정합성을 기본으로 하는 논리, 삶을 전제로 한 지식의 체계, 그 단수명은 몸과 관계, 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는 건강하지 못하지만 건강함에 짧지만 끊이지 않는 수명. 인식이 역으로 삶을 규정할 수도 있다면, 우리 인문학은 너무 비루하며 유행을 따르며 자중심적이며,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지식을 가지고 생활하거나 노는 사람도 일방적이다. 그런 점에서 별반 나도 다른 점이 없어, 이 기회로 되돌아 본다.

 

11. 한 평생, 몸의 사유지만, 칸트처럼, 니체처럼, 들뢰즈로, 헤겔로, 맑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산개해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만을 적셔, 염색물이 들 듯,  염색물이 빠지면 다른 물을 들이고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지난 것은 거의 바란채로 삶을 희석화시키고 관점만 재정립시키는 것은 아닐까? 사유가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언어란 곳으로부터 개념을 만들지 않고,  삶의 이력-몸의 경로는 전달되거나 남는 법은 없는 것일까? 그렇게 무지렁이로 살다가는 것은 그냥 묶어서 한덩어리로만 취급될 수 밖에 없는가?

12. 061221. 유사한 생각이 담겨있어 놀란다. 서언부분 k-1에 대한 접근은 놀라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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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부르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검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막막한 소리로 거듭 울어대면

어느 틈에 비슷한 새 한 마리 날아와/시치미 떼고 옆 가지에 앉았다.

가까이서 날개로 바람도 만들었다.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새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다.

한적하고 가문 밤에는 잠꼬대 되어

같은 가지에서 자기 새를 찾는 새.

 

방 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이끼 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뱀발. 난독의 시대, 짧은 궤적으로 이름짓고, 지어진 이름으로 전부를 견디기 힘들다. 상처나거나 길을 잘못들어섯거나, 공연한 발저림들로 책망하고 있는 우리들.  인연이 닿는다면 지난 중동말고, 거나하게 부서진 마음들 모아 아래목에 지지고 싶다. 무릇무릇 오르도록..


꿈꾸는 당신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늘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뱀발.  당신은 꿈꾸는가?  마음길들은 안개처럼 자욱하고, 신열처럼 들뜬 마음가지만 잔바람에 쓸려 나뒹굴어진 것은 아닌가? 허기에 지쳐 이젠 꿈꾸어야 할 시대는 아닌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일상이지만, 그래도 꿈불두덩이 맘 속에 넣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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