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자본주의로 읽으며
선명해질 듯하면, 다른 개념으로 뭉개져서 미끌어지고, 미끌어져서 아무것도 아닌 듯 싶지만, 고개돌리면 어렴풋이 남아있는 흔적이 있다. 호미 바바에 오면 더 정신분석학 냄새가 풍겨와 졸리기까지 한다.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있어야 지나온 경로와 스스로 존재에 대해 확인할 수 있듯이 다른 각도로 보고, 흔적을 남기길 바라고 있다. 튼튼히 축적된 일상의 가치와 몸의 기억 때문에 곧 그것은 눈길 밖으로 빗겨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각지대의 것이 실제로 몸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우리의 가치체계는 너무나 확고하고 무의식까지 질서정연하므로 그 실뿌리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일 상
“아~ 심심해!“ “ 뭐, 놀만한 거 없을까?“
1) 선택지 - 네가 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러저러저러이러 한 것이 있고, 이것저것저것이것을 하면 이러저렇게 재미있으므로 네가 원하는 저것이것을 해보고... ...
2) 만들지 - 네가 만들어 재미를 느낄 수 있으려면, 이러저런 것을 경험해봐야 하는데 네가 힘들어도 이것저것저것이것을 꼭 해봤으면, 그러면 너와 내가 다음에 대해 나눌 수 있는 것이 이것저것이 될 것 같아. 만약 경험하고 ‘차이’가 있다면 그것으로 더 재미있는 것을 구상할 수 있지는 않을까?
English와 english
- ‘수동적 식민’과 ‘자발적 식민’의 차이가 무엇일까? ‘인문’없는 영어강독? 자발적 식민화를 밟고 있는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개인’으로 내면화하는 일?
자 본
서발턴(하위 주체)으로 부르조아는 사회에 ‘자본’이란 위계를 이식해 놓으므로 불과 2-3세기만 전 지구적 소통체계와 무의식적 내면화 구조를 만들어내었다. ‘자본’을 대체하여 다른 어떤 것, ‘사회’나 ‘인간’을 넣어 치환가능한 일인가? 또 다른 위계를 만들지 않을까? ‘균열’을 내는 일이 가능한가? 치환하려는 노력은 무색했던 것은 아닐까? 대위법, 다른 관점에서 상흔을 남기는 일? 상처가 쌓여 나타났다 사라지더라도 미시권력을 만들어내는 일, ‘소외된 주체’의 코드, 그물로 공고한 체계에 던지는 일?
경계는 없고, 타자도 없다
자본에 대한 식민화의 경험 - 상상력을 빼앗고, 꿈을 한계짓는다. 꿈은 자유롭지 않다.
경계가 없는 것을 경계를 만들어서 경계의 끝단은 늘 모순의 결절점이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호함을 만들어낸다. 인식론적 폭력이 오히려 더 무섭고 오래가게 되는 것이다. 그 시선으로만 대상을 보게 만들고 나머지 것을 잘라내어 버리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송합니다요. 정리되면 쉽게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굳이 읽어주실 필요까지 없습니다. 제 흔적일뿐 양해바라구요. 오월 마무리 잘하세요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