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일로 판교와 부산을 번갈아 어제 오늘 다녀오다. 시스템이 바뀌면서 일들이 무척이나 늘다. 이러다가 상반기를 온전히 넘길 체력들은 되는지 걱정이 앞선다. 어제 일을 마치니 11시가 훌쩍 넘었는데, 여전히 바쁜 일상들이 채워지고 있다. 퇴근길 동네 한 후배와 홍탁에 소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어설피 마신 술로 세시가 되어서야 잠든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 기차삯이 예사롭지 않다. 가고 올때 후배와 함께 오니 뭉텅이 돈이 들어간다.

서울을 점점 배를 키우고 공간을 이어주는 삯이 아예 돈이 없으면 다니지 말라는 소리. 비행기삯이나 기차삯이나. 어떻게 소리소문없이 올라버렸을까?

부산으로 갈수록 새싹은 짙다. 한낮기온은 불쑥 20도가 넘어서고 그늘과 경계가 별반 없다. 잠시 국밥으로 요기하고 뉴스에 들리는 소리는 조류독감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날계란은 어떻게 되는걸까? 타미플루...  지난 [조류독감]이란 책을 보면서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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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톡톡, 꽃잎에선 툭톡, 번지는 연두잎엔 새침, 봄비는 토닥~ . 지난 밤 꿈에 한부분이 돌연 떠오른다. 이야기하다가 화이트보드에 빨간 펜으로 그린다. 수직선과 수평선에 수영하는 졸라맨을 그리고 수직으로 점의 개수를 세었다. 수영을 하려면 강약약,중간약약 놀면서 얼마든지 마음의 선과 몸의 선이 이어지면 쉬면서 할 수 있다. 박자를 잊어버리거나 마음만 작심한 연유도, 마음없는 몸만 움직이다보면 늘 원점에서 뱅뱅돌 뿐.  혼자에게 하는 소리였을거다. 맘만 한그득, 한가득 그리고 생각길만 뭉글뭉글.

지금. 주춤거리고 있다. 봄비가 톡톡. 연둣빛은 스며들고 번지는데.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토닥거리고 있다.

티벳 세미나에 참관. 영상-아카**-. 인권과 평화라는 레토릭은 잊지말되 시선을 여러가지를 둘 수는 없을까? 정치-문화-경제..를 x축으로 두고 민족 1, 2, 3, 4(미국-유럽-아프리카-중국)으로 두면 방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12 시선이 나온다, 티벳을 보는 열두가지 시선. 지금여기 가지고 있는 고정된 관점 곁에 11개의 다른 시선을 둘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세번의 만남으로 넓고 깊어질 수 있을까? 색깔이 조금다른, 나눔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 마음 속으로 가져가는 시선을 점선으로 조금 더 열어놓고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찾아보는 것. 아픔을 좀더 예민하게 찾아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싶다.

돌아오는 길. 밤은 톡톡. 별은 툭톡. 번지는 생각들은 새침. 마음은 토닥~. 오늘 아침 선거를 끝내고 밀린 잠을 잠깐 잘 무렵. 아버님이 전화를 하셨다. 잠결, 거기 노*찬. 노*찬나왔지요. 그런데 정당은 민*당일지 진*신당일지 고민하신다. 아들생각이 듣고 싶었는지. 어르신이 찍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단 한번이라도. 늘 부친과 튼튼한 연대다. 엷은 미소가 번지기를 바래보면서 말이다.

지금. 이미 세상은 열 가운데 하나를 점령한 연둣빛을 본다. 갈피를 잡지못하는 세상은 늘 새로움으로 화려한 틈새를 어느 사이에 바꾸어 놓은 것이다. 봄비와 봄바람을 호각신호로~. 어쩌면 그렇게 아픔을 담은 마음들은, 서로 토닥인 마음들은 신호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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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0 2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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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1 0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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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양아치스들, 그 삶과 결(作)

생각이 번진다. 이름표를 붙이는 일이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경계를 넘어서고 삶을 관통한 듯. 일상은 점점 퍽퍽해진다. 어지간해서 사람에 구별을 두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말이다. 청소를 하던 쫄병이든, 허듯렛일을 하던 묵묵하고 열심인 모습만 보려고 하였다. 좀더 가진 행세를 해도 그 속에서 다른 것 다른 관점을 찾으려고 하였다. 굳이 나쁜 색깔을 칠하고 싶지 않았다. 들어주고 받아준다.

습속.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면, 고통이 몸속으로 들어와 버둥거리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그 고통과 짓이기는 슬픔은 열에 아홉은 열매맺지 못한다. 강팍한 삶은 몸에 엉겨붙기 시작한다. 말로, 행동으로 잔인함으로 비열함으로 맹신으로 다른 쾌감으로 서서히 실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고통을 뚫고 슬픔을 뚫고 현실을 관통하는 새순이 아니라 덕지덕지 갑옷같은 일상이 몸과 동선을 채우기 시작한다.

나보다 약한 것에, 소비자라는 완장을 차고, 인사성이 없다고, 서비스가 이렇게 후지냐고 하면서, 공부하지 않는다고 세상의 슬픔을 뱉어낸다. 어느새 거리는 추잡-긴장-비루함으로 뒤섞인다. 그렇게 조금씩 일상은 구석기시대 정글에 일용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사회를 없애버린다. 밥먹일 식구와 나만, 경쟁만이 있는 곳이란 세뇌라는 무의식을 일용한다.

팍팍.

힘에 붙고, 힘을 먹고, 힘을 싸고, 쌓인 것을 더 약한 놈에게 뱉어낸다. 그리고 더 욕망을 탐하며 욕망으로 인해 속은 더 허망해지고, 그렇게 자신에게 골다공증같은 빈속을 키워가는 수레바퀴는 아닐까? 욕망은 비열함을 먹고, 비열함은 잔인함을 낳고, 잔인함은 더 큰 호색함을 먹고, 호색함은 수채구멍같은 개인으로 침몰한다. 무궁무진할 것 같은 혼자는 뻥튀기처럼 커지지만 비루하고 보잘 것 하나 없는 구멍숭숭한 나. 친구까지 뱉어내는 빌어먹은 나날은 아닐까

양아치는 양아치가 아닐려고 힘을 쥐어짜고 밑을 긁어내어 위에 붙는다. 힘이 닿는 한. 양아치임을 알기에 그 양아치를 언제 뱉어낼지 안다. 자신도 양아치이므로 어떻게 양아치들을 다뤄야할지 안다. 양아치는 양아치임을 드러내지 않으면 소멸함을 안다. 양아치질의 발버둥.  양아치는 숙주에 기생하는 기생충일지 모른다.

퍽퍽.

힘에 기생하고, 욕망을 키우고, 비열함을 뱉어내는 닫힌 그물. 그 일상이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는 사회와 마을과 남이 없다. 오로지 나만 있을 뿐. 내새끼, 내집, 내로또, 내꺼. 내돈. 나만 있을 뿐. 나와 곁에 너도 없는 안타까움이다. 공정무역을 한다구. 그것은 나의 이해관계를 떠난 일이다.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그것 역시 나를 떠난 일이다. 내새끼, 내돈과 관련된 일이라면 불나방처럼 시뻘건 눈을 하고 달려든다. 어느 덧 청맹과니의 세상이 된지도 모른다.

우리동네를 위한다고, 우리라는 말마저 불순할 것이다. 내돈을 위할 것이다. 보잘 것 있는 힘과 근친하고 빌붙기위해 쌓인 긴장을 뱉고, 허전한 빈속을 채우기위해 허망에 일상을 쫓는 무한의 삼각구도. 그 소멸하는 나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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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8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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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9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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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9 18: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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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1 0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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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혼란 그리고 즐거우 ㅁ(作)

혼돈.

정치, 원정치,초정치,정치적인 것
불화,잘못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
자본의 관계에 대한 재정의
미학과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평등
말없는 말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규정한다 계급?
언어의 순환구조, 학문의 완결욕망
과학의 자충수

혼란.

누구는 말한다. 자본의 순환고리에서 소비의 고리를 끊으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누구는 말한다 혁명이 가능하다고 헤겔과 칸트가 다시 필요하다고, 누구는 말한다. 프로이트는 근본이 잘못되었다고, 그리고 거기에서 출발한 과학은 거기에서 토대를 쌓았으므로 무효하고. 누구는 말한다. 겨우존재하는자는 말할 수 없다고, 그 전유로 인해, 여전히 겨우존재하는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별반없다고. 그리고 삼중고-사중고로 응축되는 지점을 응시해야된다고. 누구는 말한다 나는 안다와 나는 할 수 없다라는 정식에서 출발한 어떤 것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누구는 말한다 자본의 생산고리를 끊으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개념으로 존재한 모든 언어의 장벽에 대해 의심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예술,도덕,종교.... ...민주주의... ...

정치는 별반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이야기한다. 예술은 현실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현실의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문학은 현실의 바다에서 빠져나왔지만, 문학의 종언만은 아니라고 한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원자화된 개인주의화된 민주주주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겨우존재하는 것을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정치적주체들이 이런 것을 공동체의 미학으로 변형시키는 것. 이것이 평등이라고.  사회학을 복원시키고 ,정치를 복원시키고, 윤리를 복원시키고 또 다시 학문을 관통하며 자유롭게 사유하고 만들고 하는 흐름의 맥락을 잡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


즐거우?? ㅁ

학문적맥락이 어떻게 손을 잡고, 어떤 곳에 뿌리를 내리고 합종연횡하는지? 쌓아놓은 단어들. 개념이 좌불안석이라는 것만 알겠다. 하나를 흔들면, 그로인해 단단하게 여겼졌던, 결코 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상상력은 비집고 나온다. 언어에 의해 구축된 세계는 또 다른 언어를 낳고 그 말로 인해 사유의 체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느끼겠다. 하지만 누가 옳은지는 관심밖이다. 어느 나라에서 어디까지 학문의 진전이 있었는지? 그로 인해 어떻게 만들어져가는지가 몹시 궁금하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을 소개하는 분들(역할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의 용어가 처음이 낯선것은 이해하겠는데. 여기저기 다 다르다. 기둥을 나타내는 개념이 흔들흔들하니 뒤만 돌아서면 낯설다. 입문을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스피박-랑시에르-울리히벡-루만-김우창 이 만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 지젝-라이히-고진....또 다른 설계...

뱀발.

모임이 겹쳐 일요일만 온전한 시간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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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04-0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마저 사치라고 한다.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용역공급자의 의뢰인으로 사제마저 성사의 배급자로, 타인과 교류가 정치적-사색적 지평을 상실시키고 있다한다.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라 지적했던 모습과 다를 것이 별반 없다한다. 민주주의적 개인주의는 어느 때보다 소유욕이 강한 빈곤층을 만들어냈으며, 자신만의 특권을 열망하고 있다한다. 이런 개인화는 필연적으로 엘리트사상과 결합할 수밖에 없다. 이는 엘리트에겐 이롭지만 문명에게는 재앙이라한다. 민주주의의 존재양태는 욕망-필요성의 무한증식이 아니라 공과 사, 정치-사회적 경계들을 끊임없이 변경시키는 무한의 움직임이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존재와 시민존재의 이원성 사이, 여성이 구조로 편입되기까지 흑인이 편입되기까지 새롭고 다른 것을 요구한다.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부는 국가중심적 과두체제와 경제중심적 과두체제의 견고한 결탁으로 이루어졌다. 공화주의의 명제에 반하는 학교의 평등, 민주적 인간이 아니라 소비적 인간을 만들어내는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이라 한다.

그런면에서 68혁명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한 표현이고, 개인화라는 어마어마한 잘못을 담은 것이라 한다. 낭만성과, 단순한 증오의 행동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인식과 활동을 요구하는 것 같다.
 









손전화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벌써... 포사시 버전. 벚꽃이 곱고 황홀하다.색들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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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7 16: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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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7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밀밭 2008-07-16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사진찍는거 좋아하는데, 사진가공하는 법 배우고 싶네요.^^

여울 2008-07-16 14:43   좋아요 0 | URL
손전화사진이구요. 손전화사진 프로그램이예요. ㅁ 특별한 것 없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