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양아치스들, 그 삶과 결(作)
생각이 번진다. 이름표를 붙이는 일이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경계를 넘어서고 삶을 관통한 듯. 일상은 점점 퍽퍽해진다. 어지간해서 사람에 구별을 두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말이다. 청소를 하던 쫄병이든, 허듯렛일을 하던 묵묵하고 열심인 모습만 보려고 하였다. 좀더 가진 행세를 해도 그 속에서 다른 것 다른 관점을 찾으려고 하였다. 굳이 나쁜 색깔을 칠하고 싶지 않았다. 들어주고 받아준다.
습속.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면, 고통이 몸속으로 들어와 버둥거리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그 고통과 짓이기는 슬픔은 열에 아홉은 열매맺지 못한다. 강팍한 삶은 몸에 엉겨붙기 시작한다. 말로, 행동으로 잔인함으로 비열함으로 맹신으로 다른 쾌감으로 서서히 실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고통을 뚫고 슬픔을 뚫고 현실을 관통하는 새순이 아니라 덕지덕지 갑옷같은 일상이 몸과 동선을 채우기 시작한다.
나보다 약한 것에, 소비자라는 완장을 차고, 인사성이 없다고, 서비스가 이렇게 후지냐고 하면서, 공부하지 않는다고 세상의 슬픔을 뱉어낸다. 어느새 거리는 추잡-긴장-비루함으로 뒤섞인다. 그렇게 조금씩 일상은 구석기시대 정글에 일용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사회를 없애버린다. 밥먹일 식구와 나만, 경쟁만이 있는 곳이란 세뇌라는 무의식을 일용한다.
팍팍.
힘에 붙고, 힘을 먹고, 힘을 싸고, 쌓인 것을 더 약한 놈에게 뱉어낸다. 그리고 더 욕망을 탐하며 욕망으로 인해 속은 더 허망해지고, 그렇게 자신에게 골다공증같은 빈속을 키워가는 수레바퀴는 아닐까? 욕망은 비열함을 먹고, 비열함은 잔인함을 낳고, 잔인함은 더 큰 호색함을 먹고, 호색함은 수채구멍같은 개인으로 침몰한다. 무궁무진할 것 같은 혼자는 뻥튀기처럼 커지지만 비루하고 보잘 것 하나 없는 구멍숭숭한 나. 친구까지 뱉어내는 빌어먹은 나날은 아닐까
양아치는 양아치가 아닐려고 힘을 쥐어짜고 밑을 긁어내어 위에 붙는다. 힘이 닿는 한. 양아치임을 알기에 그 양아치를 언제 뱉어낼지 안다. 자신도 양아치이므로 어떻게 양아치들을 다뤄야할지 안다. 양아치는 양아치임을 드러내지 않으면 소멸함을 안다. 양아치질의 발버둥. 양아치는 숙주에 기생하는 기생충일지 모른다.
퍽퍽.
힘에 기생하고, 욕망을 키우고, 비열함을 뱉어내는 닫힌 그물. 그 일상이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는 사회와 마을과 남이 없다. 오로지 나만 있을 뿐. 내새끼, 내집, 내로또, 내꺼. 내돈. 나만 있을 뿐. 나와 곁에 너도 없는 안타까움이다. 공정무역을 한다구. 그것은 나의 이해관계를 떠난 일이다.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그것 역시 나를 떠난 일이다. 내새끼, 내돈과 관련된 일이라면 불나방처럼 시뻘건 눈을 하고 달려든다. 어느 덧 청맹과니의 세상이 된지도 모른다.
우리동네를 위한다고, 우리라는 말마저 불순할 것이다. 내돈을 위할 것이다. 보잘 것 있는 힘과 근친하고 빌붙기위해 쌓인 긴장을 뱉고, 허전한 빈속을 채우기위해 허망에 일상을 쫓는 무한의 삼각구도. 그 소멸하는 나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