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에선 어쩌면 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바보스러운 일이다. 바보들, 바보들. 그 바보들이 너무도 없기에 세상은 늘, 바보같지 않은 놈들로 인해 점점 바보같아지는지 모른다. 진흙탕에 연꽃을 피우듯, 그 힘을 주체못하는 저 교활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의 틈속으로 그래 그 바보들이 녹아든다. 사이사이. 그래 우리 바보들이 피울 수 있는 것이란, 너희들을 자양분으로 뿌리채 그래. 저 한점 화사한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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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5-25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미끌어지듯 차창은 아늑한 소리만을 담고 달립니다. 밤새 다가온 격한 감정의 물결과 애틋한 아린 상처같은 마음들. 진록으로 향하는 여름은 무장무장하기만 합니다.  문득문득 주류의 공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 하나. 점점 침침해지는 눈. 점점 소통의 끝이라도 잡으려는 몸부림. 늘 비주류의 공간을 경험하지 못한 아둔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빗장걸고 소통조차 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가, 너가 그 아둔함으로 인해 끼치는 어리석음의 끝은 어디일까? 하고 말입니다. 

글을 쓰고, 보태고, 활자화된 공간에 노닐지 못하거나, 노닐 수 없는 접근금지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노약자가 아니라, 정말 눈보다 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알까? 그들의 심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주말 참* 모임에서 당연한 듯 이야기하는,  평균적 참*회원이라는 것이 인터넷을 하고, 인터넷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하고, 활자화된 글의 문맥을 활자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스스로 문턱을 높이 만들어 놓아 스스로 공간을 편집해놓은 무책임에 대해 생각을 해봅니다.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반영되는 것일까요? 투병 중인 사람들의 의견을 개진할 할 수 있는 틈조차 없는 사람들. 중산층의 서울사람들이 쓰는 언어처럼, 표준어에 밀려난 언어들이 살아숨쉬는 일상들의 비주류에 대해 마음을 걸어봅니다. 게시판의 공간에 마음을 나누고 걸고, 그 편린에 대해 당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만한 자신감이 과연 자신감이 될 수 있는가? 입으로 말할 수 있는 표현들이 얼마나 몸의 말과 구체성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걸쇠에 주춤서는 스스로를 봅니다. 

그렇게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주류는 극히 비주류를 배제하며 급속히 얇고 폭이 좁아집니다. 모아지지 않으며 절규를 외치는 마지막 목소리들은 주류에 한점이나 미미한 물결의 파동도 만들지 못한 채 사라집니다. 끊임없이 서로 멀어지는 소통의 질곡만 남습니다. 씨앗이 될 수 없는, 자극이 될 수 없는 명멸하는 외침만 주류의 바깥을 수놓을 뿐입니다. 

밀려나는 사람들의 아규와 최소한의 그물망도 갈갈이 찢기는 현실 속에서 님들의 마음 행간을 보며 다독입니다.   

090523 몇분의 노** 분들과 함께했습니다. 심려가 느껴지고 어루만질 다독임이 간절하기도 하겠지요. 090524 지인과 갑*에서 지인의 노래와 마음을 들었습니다. 김광석,날마다날마다.눈깔.벽.절망.미친놈 부분부분 듣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품평의 자리까지 마련한 친구의 마음과 단란함이 들어오더군요.  

2. 

그래요. 제 몸뚱아리가 얼마나 주류에 거꾸로 머리박고 사는지, 다른 표현수단하나 만들지 못하는 백치의 나날을 통과시키고 있는 것인지? 얼마나 말로만 비주류인지?  치라는 표현이 맹이라는 표현에 걸려 넘어지기만 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그런 불감 속에서 간신히 느끼는 감각이란 것이 소소함의 폄하로 이어지는 것인지? 상처받은 마음들, 저질렀던 마음들의 책임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인식의 얕고 좁음에 대해 돌아봅니다. 

비주류의 나락의 경계에 선 분들의 절박에 대해, 비주류인 분들에게, 행여 비주류의 폭격을 맞은 절망을 감싸안은 그대에게, 손한번 내밀지 못하는 무능에 대해 자책하면서 부디 세상과 절연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부디 상처난 마음과 상처난 우울을 서로 보듬고 기대길 바래봅니다. 혼자 올린 심연을 늘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므로, 마음한점 그대에게 던져봅니다. 늘 기댈 것은 당신의 따듯한 품이었고 따듯한 세상을 나누고자 하는 당신들의 열정이었으므로, 벽에 스러지지말길 바랍니다.  

주류의 안온함에 대해 불신해봅니다. 그리고 그 경계에 흠집을 내봅니다. 그대의 경계로 흘러들어가고, 그대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이 스며나오도록 애써봅니다. 아마 아마 조금은 서로 따듯해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시선은 더 단련될 수 있을까요? 위태로운 현실에 서서 삶을 극한으로 밀어내는 일들이 더는 없었으면 합니다. 힘잃는 눈빛을 피하지 말고 따듯한 포옹 한번 힘껏 해드리면 좋겠습니다. 서슬퍼런 벼랑에 선 우리들에게 따사로운 마음의 포옹 한번, 말한번 들어드리면, 소주 한잔 이웃 테이블에 건네드리면 좋겠습니다. 모르는 이웃이라도 맥주한잔 소주한잔 건네드리면, 담배 한대 건네드리면 좋겠습니다.  

모진 마음 더 먹지 않도록, 모진 마음의 결을 조금이라도, 따듯한 목소리 한점, 온기한점 서로 그 결에 불어넣어주면 좋겠습니다. 악다구니 같은 세상,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말 한점, 그저 건넸으면 좋겠습니다. 

아...제발 숨막히는 일들 벌어지지 않고, 마음 깊이깊이 다독일 수 있는 한주가 새롭게 시작하길 바래봅니다. 우리는 정말정말 많은 물꼬를 터뜨릴 수 있을 겁니다. 절망의 벽만 넘어선다면..간절한 마음들이 스며든다면... 어렵지만 따듯하게 안아드리며, 술 한잔 담배한대 건네며 넘어섰으면 합니다. 무심히 끊기는 전화 한통화의 여운을 마다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정말, 아니 무시무시한 시대를 건너고 있으며 더욱 눈과 마음을 감고 있는지 모릅니다. 불감을 깨뜨리려는 마지막 기회를 외줄로 타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더이상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라는 분기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더이상 밀려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나의 작은 포옹, 마음의 포옹이, 그렇게 온기를 부여잡고 건넜으면 좋겠습니다. 외로운 눈망울, 눈물한점 피하지 말고 보듬고 넘어섰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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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의 책 뒷표지에 적힌 말이 인상깊어 찾아보는데 책소개글들에 없다.  농사라는 것도, 사람의 의도가 가미되기 이전의 수렵이나 야생의 황량한 들로부터 보아야 한다. 저 광활한 들엔 의도와 상관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곡식이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야초도 쑥쑥, 이것 저것 자로 잰다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 횡행한다. 야생의 들에서 인간의 의도가 가미된, 도덕과 윤리는,  농토처럼 농사짓기 시작한 이후의 사람의 족적일뿐, 그 이전의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다음에 윤색된 일이다. 이런 취지의 소개글은 신화의 넓고 깊고도 오묘한 공존의 모티브를 다시 보게 만든다. 

도덕과 윤리에 친숙?한, 실제로 그러하지 않으면서 그런 채 하도록 길들여진 지금은 어떨까 싶다. 그 매듭이 갖는 엄청난 정보량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하는 것인지? 상상력을 빗나가는 신들의 숨결이 조금은 지금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을까? 잠깐잠깐 보다나니, 진보라고 자칭하는 분, 타칭하는 분들이 어쩌면 그들의 인문이 도덕과 윤리에 과도하게 집중해서 스스로 동선이나 현실을 보는 눈이 편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나 해석을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짐에도 늘 보는 잣대가 제한된 것은 아닐까? 스스로 옷을 입어 제 주변의 변화와 현실에 둔감한 것은 아닐까? 강박처럼 그러해야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벗어나지만 너무 몸에 착근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래서 질곡같은 현실을 타넘거나 타넘은 경험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늘 바라보는 시선만으로 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제한된 시선이 늘 제몸을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로가 아니라, 스스로 도덕적, 윤리적 당위성이 있다는 우쭐함까지 섞여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도덕적 윤리적 머리진보에 대한 강박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현실의 아이러니를 넘는 일은 그렇게 시선을 만들기전 마음의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아닐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이 현실에 더 가깝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야 현실을 보는 눈이 지금보다 낫게 생기는 것은 아닐까? 점점 나이에 생활환경에 같은 부류의 사람이 섞임에 따라서 그 가속도에 비례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불감에 대한 경고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슬금슬금 생각이 안절부절이다.  현실의 경계를 보는 눈은 늘 갇힌다. 인과에 익숙하기도 하고 당연한 것에 익숙한 것이 사람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 안목을 늘 벗어난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경계를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넓게 넓게 그 극한의 양쪽을 고려해야 한다.

뱀발. 몸이 천근이어서 책을 보고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가벼운 영화들을 본다는 것이 이것저것 중동잘린 단편들을 이어서 본다. 대전 인디영화 제목들과 소개팜플렛을 훑어본다. 이번주, 담주 월요일까지이지 아마. 보고싶은 영화도 많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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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걱정하기에도 벅찬 사람들]의 시대

주체할 수 없다. 걱정은 산을 이루고, 끊임없이 파도는 나를 향해 다가와서 포말을 터뜨린다. 남이란 단어가 살아있는가. 나의 언어집에서 남을 잘근잘근 씹어삼킨지 오래다. 남을 나의 언표에서 쫓아낸지 오래다. 집나간 남은 궁금하지 않다. 걱정은 산을 이루고 포말을 터뜨리는 파도는 끊임없이 다가오고.

한 땐 남이 나인지? 내가 남인지? 인적 드문 곳처럼 사람을 그리워한 적도 있으리라.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 있었다. 시루에 빼곡히 박힌 콩나물같은 나는 쑥쑥 너의 땀냄새로 아귀이다. 그 너로인해 나만 생각하게 되었고 그 남으로 인해 내걱정은 산만큼 커졌고, 그래서 남이 지겹도록 미워졌으므로 나만 산다.

내자식과 내새끼와 내가족으로 향한 끝없는 복제. 나는 진화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증식. 나로 뒤덮히는, 나의 더깨만 쌓이고, 나만 배설되고 나는 산을 이룬다. 걱정은 나를 벗어날 수 없고, 나의 경계안에 걸린다. 온통 경계안에 들어선 것은 나이므로 점점 농염하게 채워지는 나의 그늘만 있으므로 너는 점점 멀리 가속도가 붙은 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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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0 1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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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1 0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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