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씨앗-세상을 바꾸는 또 다른 방법들

자유 - 저는 '자유' 그 자체만을 떼어서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다소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건 마치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내를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이런 차원에서 자유란 안전보장이라는 개념과 결혼한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자유없는 '안전보장'이란 노예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안전보장 없는 '자유'란 혼란이자 불확실성이며, 계속되는 두려움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자유와 안전 사이의 관계를 선형적인 발전 과정이 아니라, '진자운동'과 같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48-49


문명화 - 문명화란 자유와 안전보장의 상호교환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합겁니다. 그가 지적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안전보장을 얻는 대가로 너무나 큰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양산한 '불확실성'에 연유하는 겁니다...현대 세계는 불안정한 안전보장, 불확실한 확실성, 불안전한 안전을 특징으로 합니다. 52-53


부수적인 피해 - 사적인 영역을 전면적으로 노출해야 한다는 요구가 극심해졌습니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적인'장이 이제는 '사적인' 영역까지도 파고들어 이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 프라이버시의 위기라는 것은 비단 사적 영역의 침범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의 파괴까지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라는 권리의 침범이자, 약간의 안전을 얻기 위한 대가로 인간의 근본 존엄을 지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3


사회성의 상실 - 지금 우리의 아고라는 소위 '고해성사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정치적인 의제나 정책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유명인사에 대한 사적인 관심 격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될 것입니다. 정책의 문제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인 반면, 사적 대화란 진실 혹은 거짓, 도덕적인가 부패했는가, 진정성이 있는지 아니면 속임수가 있는지 등을 따져 묻습니다. ...사적 공간과 공적 영역을 잇는 이 다리가 없다면 공동의 대의는 목적지를 잃은 풍선처럼 떠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 갖는 고통과 문제 상황은 사회적 문제로 수렴되지 못한 채 고립될 것입니다. 64-65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 법률상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느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기회는 주어졌고, 그 기회를 사용하지 못했다면 이것은 애석하게도 당신의 잘못입니다....하지만 진정한 개인, 즉 실질적 개인이 되기 위해서 모든 인간은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든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든 당신은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무직 상태로 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나 자신의 능력에 걸맞은 직업을 갖는 것 등도 이에 포함됩니다. 이것은 당신이 어떤 도시나 지역공동체 등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것도 해당됩니다. 67-68


표류하는 잉여인간 쓰레기들 -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루이 쇼벨이 르몽드에 쓴 칼럼의 제목 배제된 청년들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여기서 쇼벨은 프랑스 대학생들에게서 "분노를 넘어선 증오"를 이미 몇 년 전부터 감지했다고 말합니다. 74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지극히 개인적이고 향락적인 개별 소비자들이 단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요? '프로레타리아'나 '중산층'이라는 용어는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용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울리히 벡은 이것들을 이미 "좀비가 된 용어들"이라고 규정할 겁니다. 가이 스탠딩 교수는 이러한 개념들을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로 대체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가 양산한 최대의 결과 중 하나가 '중산층의 프레카리아트로의 전락'이니까 말입니다....이런 고통들은 합쳐지지 않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분화하고 갈라놓습니다. 그들은 서로 비슷한 운명이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연대를 요청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로 치부합니다...개인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장의 부재에는  필연적으로 치욕과 자기 경멸이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종래의 프롤레타리아를 투쟁하는 계층으로 전환하는 데는 엄청난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프레카리아트들은 원자화되었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투쟁 주체의 탄생은 점점 더 불가능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84-87


도덕적 신경안정제 - 소비주의 시장경제는 도덕의 영역을 식민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이 물건을 사세요."라는 광고들을 따라 소비주의적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아버지나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느낌이지요. 그러니 선물은 도덕적 죄의식을 경감시켜주는 신경 안정제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겁니다. 그거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현상입니다....고통이 없었으니까 병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치료하기에 너무 늦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시장을 통해 제공되는 도덕적 신경 안저제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경 안정제는 여러분이 가족, 이웃, 배우자 등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끔 만든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인간 유대의 연약화'라고 부르는 사회 현상의 주된 원인입니다. 90-93


허약한 윤리, 무력한 주체, 무한한 타자  - 레비나스는 도덕적 자아의 탄생과 행동 양식을 '두 명의 도덕적 당사자'라는 개념에 기반하여 설명합니다. 나와 타자의 원초적인 대면이 그 출발점이며,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도덕적이기를 요구하는 ' 타자의 얼굴'과의 조우가 도덕의 탄생지라는 것입니다.(내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그것을 하도록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 '좋은 정치', 혹은 제 역할과 임무에 충실한 '정치'란 도덕적 경험의 원초적 장면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사회 정의를 향한 추구를 제 목적과 존재 이유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2인 사이의 도덕적 책임을 무한히 지면서, 제3지대로의 초월을 감행하는 형태 말입니다. 95-98


행복들 하십니까 - 괴테는 자신의 시에서 "화창한 날이 계속되는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행복한 나날이 연속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금세 지루해지고, 짜증이 절로 나며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환상이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제가 '삶의 기술'이라고 부른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 될 겁니다.  101 행복이란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이데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약 삶을 살고자 선택했다면, 당신은 앞으로의 삶에서 맞닥뜨리게 될 어려움들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정확한 길입니다. 102-103 저는 이전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엄밀히 말해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삶의 공허함과 의미없음을 피하기 위한 방안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바로 불행이 우리 삶에서 갖는 가장 고결하고 위대한 지점입니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 의미없음입니다. 104


권력과 정치의 결별 - 현재 우리에게는 '정치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권력'과 '권력을 빼앗긴 정치'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둘을 다시금 결합시키는 일입니다.  111


포스트 베스트팔렌 시대 - 20세기 30년 동안 참혹한 세계 전쟁이 끝나고 생긴 것이 '유엔헌장'입니다. 제2조 4항을 보면 다른 국가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한 그 어떤 무력의 공격을 금지하고 있고, 제2조 7항을 보더라도 한 국가의 통치권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위급한 것이든 이에 대해 외부에서 개입할 여지를 분명히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국민국가와 정치, 국민경제 등등 상호의존성의 범위와 이에 대응해야 하는 기구들이 미치는 범위 사이의 간극은 이미 골이 깊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간극을 메우거나 그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일이 우리의 '메타 도전'이 될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몰두하고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란 바로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현존하는 정치 기구가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입니다....이 모든 것들이 교황의 월권으로부터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기독교 유럽의 군주들이 단행했던 투쟁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13-119


유럽 문명 - 유연성과 역동성의 측면에서는 단연 독보적입니다. 유럽 문명이라고 불리는 고유한 삶의 양식은 분명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존재-하는 것'에 대한 특유의 반감과 '아직-도래하지-않은 것'을 향하는 본능적인 기질, 그리고 그러한 반감과 불만을 행동과 실천으로 재구성하려는 본래적 저항 정신, 즉 경계를 뛰어넘는 초월 정신 등을 그 안에 가집니다....하버마스에 따르면, 민주적 법치 국가의 힘이란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통해 사회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에 선행하지 않습니다. 정치 공동체가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산물일 뿐입니다...유럽에게 주어진 과제는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의 보편적 통합"과 "영구 평화"라는 소명을 달성하고자 희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21-124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열려 있는 협동-리차드 세넷

 

 


새로운 대안, 변혁의 가능성 - 사람들은 '함께 있음'의 경험에 순식간에 중독된 것입니다. 바로 연대의 힘에 말입니다. 이미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곧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겠죠. 이를 달성하는 데는 큰 노력이 들지 않았습니다. '혼자'를 뜻하는 이 고약한 단어에서 철자 하나를 바꾸어 '연대'로 변화를 꾀하는 정도의 노력 정도라고 할까요? 이 연대는 요구가 관철되는 그 순간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연대는 특정한 대의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갖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와 너와 광장에 있는 우리 모두가 목적을 갖는 것이고, 곧 삶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름텐트 시위를 하는 이스라엘 여성) 137


군중이 불이다 - 이스라엘의 중산층 봉기의 슬로건인 '우리는 닿을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중산층과 중하류층의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이 '미래'가 결코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고, 바로 이 사실을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141


새로운 인텔리겐치아의 출현 - 막스 베버가 묘사했던 현대적이고, 합리적이며, 제도화된 자본주의적 구조가 형성되어 굳어버리기 전에, 특정한 사회적 요소들은 사전에 탄탄한 기반을 형성해야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청렴하고 강직한 재판관, 정직한 상인, 사리사욕 없는 사회적 활동가,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수공업자 등이 사회를 먼저 구성해야만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선행되지 않고 전근대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아 답습하게 된다면, 이러한 선결조건들을 만들거나 토대를 다지기는커녕, 이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으며, 또 이들의 부재를 메울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브로델의 이러한 논리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예가 바로 러시아의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148


인간 가능성의 실천 -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이와 함께 치욕 속에 있는 이들도 있다. 세상이 그 어떤 역경을 줄지라도, 나는 이 둘 모두에게 충실할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신념이 담긴 이 선언이 공동선의 실천에 대한 답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넷의 말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열령 있는 협동"에 맡기면서... ..158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프란츠 카프카의 메시아처럼 지혜나 예견이라는 것은 결국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만 온다는 것이죠. 거듭해서 시도해보지 않는 한.  166


문예와 과학 사이 - 사회에 대한 탐구는 언제든 폄하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직 인간 조건이 타락할 때에 동반되는 일이라는 것. 하지만 인간 조건이 추락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막아내는 바로 그 노력이 모든 사회학적 탐구의 본질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과학의 기준을 바탕으로 얻어진 진리란 실제로 그렇든 가정된 것이든 데카르트의 주체/객체 이분법의 적용가능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그러한 이분법이 적용되는 한에서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니 객체, 즉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의 '과학'에서만 유의미한 논쟁이라는 겁니다....존재론적이나 인식론적으로 배치되지 않는 실험자와 피실험자의 인간적 정체성이라는 지위가 또 존재하는 것입니다...사회과학이 '인간의 얼굴'을 잃는 한, 그것의 학문적 토대는 금세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167-176


액체근대 - 근대는 견고한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무시무시한 징후들과 어두운 전망으로 촉발되었습니다. 하지만 몇세기 후, 고체성과 액체성, 지속가능성과 변화가능성, 견고함과 유연함 등의 가치 우열은 뒤바뀌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역전의 변화 속에서 이제 세상의 모든 가치와 체계는 설령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고 해도 전복되거나 뒤바뀌거나 폐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유대는 쉽게 깨질 수 있게 되었고, 의무는 쉽게 저버릴 수 있는 것이 되었으며, 원칙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이 이상의 많은 것들이 유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새로움을 찾아 영원히 멈추지 않는 사냥을 해야 하는 처지에 내던져진 것입니다. 191

 

볕뉘.

 

1. 마지막 꼭지를 읽어두었지만 남겨둔다.(나르시시즘, 사랑 외) 읽는 내내 깔끔한 기획과 준비, 인터뷰 항목의 깊이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그 사이를 루쉰이 절망으로 끌고 가며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했다면, 그 사이 희망주의자들이 제3의 지대를 만들고 채워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불행을 안은 행복, 절망을 감안한  희망은 동전의 양면이다.   

 

2. 리차드 세넷이 여러차례 인용된다. 먼댓글의 메모 흔적이 남아 있다. 이리 정신이 없다니...참고하시면 더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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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멍게

멍게는 다 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
버린다. 어물전에선

머리 따윈 필요 없어. 중도매인 박 씨는 견습인 내
안경을 가리키고

나는 바다를 마시고 바다를 버리는 멍게의 입수
공과 출수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지난 일이여. 나를 가만두지 말길. 거
대한 입들이여.

허나 지금은 조용하길. 일몰인 지금은
좌판에 앉아 멍게를 파는 여자가 고무장갑을 벗고

저녁노을을
손바닥에 가만히 받아보는 시간

 

 2

 

 

액체근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세 가지 조건 속에 내던져진다는 뜻입니다. 첫째,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예측하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결코 측정되지 않는 지속적인 위험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삶에는 늘 감당하기 힘든 변수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셋째, 신뢰의 위기 속에서도 과감히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믿을 만한 일들이 미래에는 비난받거나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단 일의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 적용되는 진실이기도 하지요. 이제 우리는 개인의 어깨에 지워진 책임의 무게를 넘어, 자기 결단과 해방의 자유, 거대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공동의 노력을 향한 책임의 '통각'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17


거대 기업들의 총수들은 회사를 파산시키고도 거액의 퇴직금을 챙기고 책임을 회피하려 도망치는 모습을 늘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책임이 표류하고 있으며, "책임이 주인을 잃어버렸다"고 노골적으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사회적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액체근대' 속에 내던져졌다는 미명 하에, 이러한 책임의 부재는 더욱 명백하고 분명한 진실이 되고 있어요. 먼 옛날, 집단적 실천을 꾀했던 이들의 과제는 약자들에게는 제한된 선택권을 주면서 책임의 무게를 그들의 어깨로부터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정확히 그 반대가 되었지요. 따라서 힘없고 소외된 약자들은 자기 결단과 해방을 무기로 삼아 거대한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는 책임의 소명을 발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2

 

새로운 시대에는 이전과는 다른 삶의 양식과 사회적 비전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진정한 배움이란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이며, 견고한 지평을 뒤흔드는 도전이어야 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로 이 지점에 희망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22

 

3

 

68혁명 당시 우리는 자유로운 몸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바이마르 시대 독일에서도 똑같은 감각숭배가 벌어졌고,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로까지 그 연원을 추적할 수 있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감각적 해방은 무척 부르주아적인 자유 개념인 듯하다. 여느 쇼핑처럼 감각을 소비하는 것이다. 자신의 느낌을 '접촉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충동이다. 이것은 진지한 변화를 이루기 위한 지속 가능한 처방이 아니다. 따라서 [무질서의 효용]에서 나는 다른 심리적 발달 경로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청소년기는 필연적으로 젊은이가 자신이 사는 세계를 많이 경험하기에 앞서 그 세계를 정의하고 판단해야 하는 시기이다. 청소년의 정체성은 경직된 상상 속 구성물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성인의 경험을 하면서 이런 경직성을 풀어헤쳐야 한다. 인간은 복잡다단한 경험을 하면서 절대성과 확신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의심이 해방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승리와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도시 생활에서는 경제적, 민족적, 인종적 혼합이 가차 없이 분리되고 격리된다. 그리고 신기술이 낳은 새 상품들이 넘쳐나는 덕분에 도시 중산층은 소비가 제공하는 심리적 기대를 점점 더 키운다. (아이폰이 약속하는 자기실현이 누드 수영을 하면서 얻는 자기실현보다 더 좋은지를 판단하는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겠지만) 사회적으로 분리되고 감정적으로 피상적인 경험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우리는 어른의 세계관을 갖지 못한다. 10-13

 

 

 

 

뱀발.

 1.  주말 아이들과 함께 있으며 식객을 번갈아 본다. 웹툰에 익숙한 막내녀석두 푹 빠진다 싶다. 이야기와 수다를 좋아하는 막내는 내꽈가 아니다.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지만 통증으로 인해 마음이 짠하기도 해 덩치 큰 녀석을 안고 보듬어 준다.  내려오는 길 서점에 들러 백석 시 정본과 몇권의 책을 함께 보기 시작한다. 

 

2. 바우만은 리차드 세넷을 언급하고, 리차드 세넷은 이 책이 1970년에 쓴 논문이라고 하는데 다시 서문을 쓰며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한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와 노력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도시는 열려있지 않기에 사람들을 어른으로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같은 무리들끼리 모여살 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못하는 숙맥제조기일 뿐이라고 말이다. 기괴한 삶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이어진다.  바우만는 책임지지 않는 사회를 다시 한번 되짚고, 희망이 머무는 자리를 다시 한번 새긴다. 절망과 같은 자리에 서있는 희망에 다시 한번 말을 건다. 깊이 있는 배움이 한주 머무르면 좋겠다 싶다.

 

3. 성윤석시인의 시를 음미하고 있다. 페북으로 알게되었지만, 생선가게를 하며 쓰는 작품과 이력에 관심이 가 이렇게 사보고 조금씩 맛보고 있다.  멍게는 탐험을 하다시피 살면서 성체가 되면 바위에 정착해서 신경절의 필요도 느끼지 못해 자신의 뇌를 먹는다고 한다.  자본주의나 이 사회는 어쩌면 애초의 통각을 죄다 잃어버린 멍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무엇을 느껴야 어떻게 진화해야 되는지 아예 잊어버린 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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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급중상계급의 응답자들이 심미적 평가를 한 반면, 노동계급 응답자들은 감정적 평가를 했다. 434


노동계급 사람들이 낭만적 순간을 창조하는데 정말로 더 적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간계급과 중상계급 응답자들에게는 낭만적 분위기가 표출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아 개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분명하다. 443


노동계급 응답자들의 경우 인터뷰의 평균 길이가 한 시간이었다. 반면에 중간계급과 중상계급 응답자들의 경우 인터뷰는 빈번히 두 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노동계급 사람들은 짧고 사실적인 답변을 한 반면, 중간계급과 중상계급 응답자의 어조는 기탄없고 밝았으며 자주 내밀했다. 445


중간계급과 중상계급 응답자들은 노동계급 응답자들보다 낭만적 순간의 육체적, 물질적, 분위기적 요소에 대하여 훨씬 더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453


인터뷰에서 낭만적 기억은 전형적으로 중상계급 응답자들보다 노동계급 응답자들에게서 시간적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한 노동계급 남성은 '12년전'의 경험을 거론한 반면, 중상계급 응답자는 며칠 전 또는 인터뷰 바로 전날에 일어난 낭만적 순간을 언급했다. 노동계급 응답자들 중에서 인터뷰 일주일 전에 낭만적 저녁을 보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61


중상계급 커플에서 남녀 모두가 '이야기하기'에 놓은 가치를 부여한 반면, 노동계급 커플 가운데서 그런 대답을 한 것(하지만 논쟁과 지적인 도전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은 여성들뿐이다. 475


중상계급 사람들은 일단 초기 흥분 단계의 뒤를 이어 편안함의 단계에 도달하면, 시장으로부터 자극을 획들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강렬한 의사소토 유형을 유지함으로써, 그들의 낭만적 경험을 바로 평범한 것의 텍스처 내로 통합시킴으로써 권태를 회피할 수 있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필연적 결론은 중상계급이 지속성과 장기성을 요구하는 사랑 정의와 강렬하고 쾌락적인 유대로서의 사랑 정의 간의 문화적 모순에 대처하는 데 더 잘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491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실생활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들의 삶이 '결핍'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고 제시한다. 노동계급 남성들에게 그들의 직업이 요구하는 감정적 억압과 언어적 표현의 불신은 노동계급 여성이 채택한 중간계급의 친밀성과 표출성의 이상과 상충한다. 즉 그들의 삶의 조건, 다시 말해 소득, 여가시간, 교육의 한계는 노동계급이 '낭만적 꿈'에 접근하는 것을 더욱 방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간계급, 그리고 더욱 특히 중상계급에서의 자기 인식과 표출적, 대인관계적 기술에 대한 관심의 집중은 이 집단의 여성들이 이룩한 일터에서의 최근 성과와 마찬가지로 젠더 차이를 완화시키고, 그들의 관계를 미디어가 조장한 낭만적 기준에 부합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506


이로부터 세 가지 일반적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1) 사적 삶의 영역과 상품 교환은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차한다. (2) 로맨스는 우리의 사회구조에 불평등하게 분포된 하나의 재화이다. (3) 사랑은 일터에서 이미 일정 정도의 객관적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개인적 자유를 제공한다.  507


 

근대성은 사랑의 의미에,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과 도덕적 덕성 간의 관계에, 그리고 헌신의 소멸과 전근대적 사랑의 안정성 간의 관계에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은 우리가 우리의 낭만적 삶을 더 많이 통제하고, 더 많은 자기 인식과 더 많은 양성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이다......예측 가능한 미래에 대부분의 사회에서 평등과 자율성의 이상은 그것들이 탈근대 문화의 쾌락주의적, 공리주의적 특성과 지속적으로 결합하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탈근대적 조건이 가져온 상실과 이득에 대한 더 나은 이해가 우리에게 우리의 낭만적 운명과 사회적 운명 모두를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509

 

 

볕뉘.

 

1. 지금 여기  이 세상은 노동도 판도라의 상자에 감금해두고, 계급이란 이야기도 건네지 못한다. 가진자와 더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만 말과 칼, 그리고 권능이 주어져 있다.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마지막 장 '사랑의 계급'이다.  일과 비루한 사회에 목이 메여있는자는 그만큼 살과 근육을 탐한다. 로맨스로 피난가려하나 신에 귀의하는 것처럼 그 로망이 실현되기는 복권당첨만큼이나 어렵다. 로맨스도 사랑도 연애도 이렇게 계급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사회가 유아기를 너머서며 삶의 질을 서로 건네려면, 우리 사회가 참 이야기를 건넬 것이 많은 것 같다.  서로 가져가는 불평등을 짚고, 노동을 이야기하고, 계급도 이야기하고  로맨스의 경중완급도 나눌 수 있으려면 참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2. 노동자들이 이 글을 읽고 중간계급, 중상계급처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들을 제시하라고 할 수 있다면...그런 사회를 꿈꿀 수 있겠는가?

 

3. 물론 이 책의 전제는 사람들이 꿈꾸는 로망이라는 것 역시 자본처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것이라고 한다. 자본주의란 사회 안에서 그 이해를 통해 조금은 낭만적 운명을 가늠해볼 여지를 살펴보았다는 점이며, 사회적 운명을 건들지 않고서는 가늠한 로망 역시 위태롭기 그지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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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을 마주 대하면 가끔 설레이기도 한다.  느릿하게 8번레인을 걷다시피 돌다가 몸도 걸음도 익숙해질 무렵  몸을 구석구석 다시 쭈욱 편다. 여기저기 쭉쭉 펴고 풀고 하다가 1번레인으로 들어선다. 호흡을 거칠게 부드럽게 편하게를 되풀이 한다. 400미터 트랙의 1번레인과 8번레인 사이는 54m 차이가 난다. 10 회전을 하면 540미터가 차이가 난다.  사람들은 대부분 심장 방향으로 트랙을 돈다.   1번레인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다. 8번레인으로부터 시작하여 3번, 4번 레인....  에서 노을과 달빛, 가끔 조명등에 몸을 기댄다. 

 

트랙을 찾게 되면 설레인다.  다시금 성한 몸뚱아리를 빌릴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달리고 서서히 땀이 차오르고, 심장의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벅차기도 하다. 몸이란 녀석은 약간 굶긴 상태에서 운동을  벅차게 하면, 몸은 그 상태를 기억한다고 한다. 그 관성을 말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나 질량 보존의 법칙이 아니라 몸과 근육은 그 뜨거움을 기억해 펌프질을 계속해댄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몸보신에 대한 과욕과 육체 노동의 피로, 제 몸뚱아리를 생각하는 것 조차 사치인 그 사이에 존재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 먹여 살리는 일까지 이 무더위에 그런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이들에겐 제 몸을 다루는 일 역시 먼 나라의 일이기도 하다.  달은 공평하게 걸려 있는 듯하지만 형평하지 않다. 세상처럼... ... 가끔 우울을 쫓아내는데는 땀방울이 제격이기도 하다.  1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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