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그 접힌 흔적을 남겨두지만 애써 지워버리기로 한다. 책의 한 가운데로 가로지르거나 어느 길로 들어섰는지 잊어버릴만 하면 그 지나온 나무들과 숲을 다시한번 눈치채게 해준다. 책장을 덮고 어떻게 이 느낌들을 펼쳐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 어디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숙제처럼 제출해야 하는 의무감도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갈피와 받은 소회를 남겨두지 않으면 아마 번거로운 수고를 다시 할까 싶기 때문은 아닐까? 백목련은 지고, 자목련의 자태가 조금 정신을 잃을 듯 산발하기 직전이다. 눈치없는 비라도 세차게 뿌린다면 계속 눈길을 줘야 할지 걱정도 되지만 밖의 자색과 핏줄, 안의 뽀얀 흰색은 시선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봄날이다.


세넷은 어떤 점을 늘 염두에 둔 것일까? 몸으로 배운다는 것, 음악을 한다는 기예,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예를 말한다. 몸으로 익히는 과정, 리허설, 듣고 반응하고 다시 되먹임하는 과정들에 명민하다. 맥루한이 소설과 문학에 심취한 문학도였다는 사실이, 매스미디어란 학문의 심급을 뒤흔들어 올려놓았듯이, 줄리어드 음대생의 삶의 흔적은 그가 추구하는 학문과 호흡하여 사회과학 인문과학의 변증법적 정합성을 뒤흔들어 놓는다.  대화적 대화와 감정이입이라? 변증법적 대화가 중앙집중식이거나 이념편향이어서 문제의 소지가 많다는 것이나 공감의 몰입버전이 아니라 순간순간 주체의 갈길에 간섭하지 않는 감정이입을 두드러지게 한다.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의 구별도 그러하다. 좌파의 역사 가운데 중앙집권식의 정치적 좌파는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념적 연대는 물론,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고 시도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적 좌파가 집중의 문제나 실질적인 연대의 문제를 제기하고 상향식의 과정을 도외시 한점을 든다. 몇세기의 역사가 그 상향식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역사에서 배워야 할 사실들을 여전히 잊어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자본주의라는 짐승을 길들이지도 못하면서 끌여온 결과는 무엇일까? 경쟁만이 전부라고 하거나, 철저히 개인을 고립시켜 움츠러들게 만든 결과 사람들은 사회적 해결을 위해 협력이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지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세상이 울화를 만들어내고, 그 분노는 그대로 거울처럼 자신에게 돌아와 우울이라는 전염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 작금은 현실은 아닌가?


이념형의 진보, 정치적 좌파가 몇세기를 거쳐 그 실패의 싹과 증거를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면, 인류가 실험해봐야 할, 사회적 좌파가 건드리고 검토해보거나 르네상스, 종교개혁, 농노제, 노예제도의 붕괴가 가져오는 변곡점은 정녕 없는 것일까? 씨앗처럼 뿌리내리면서 자라나는 좌파가 챙겨야 할 역사적 맥락와 시연과 리허설고 사회-문화적 좌파의 고리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써넷는 말한다. 미국 사회당 당수 토머스의 삶을 말하고, 누누이 반복해서 예절의 배경과 역할, 의례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당부한다. 의례가 반복되고 작은 시공간을 트이게 만들어 변화가 시작되는 사례를 짚는다. 논리와 이념, 정치적 습속이 아니라 연주 리허설에서 시연을 하고 고개짓으로 다시 고칠 것을 요구하는 과정을 미세하게 들여다볼 것을 조율한다. 구직을 원하는 중년의 구직자를 위해 카운셀러가 갖고 있는 카드는 구직자의 처지에 따라 침묵의 카드부터 백여개도 넘는 디테일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정녕 다시 돌아봐야하는 것일까? 역사에서 잊고 있던 큰 장면들은 어떠한가? 일상에서 협력이 되지 않거나 미쳐 듣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보수적인 팩트의 현실로 가는 길조차 모르는 것은 어떤 이유때문일까? 정치적이란 말과 사회적이란 말을 구분할 수 있는가? 변증법적 관계와 대화적 관계로 변화가 현실의 꼬인 매듭을 풀 수 있을까? 그가 말하는 감정이입과 공감의 버전의 차이가 아직 낯설다. 야생의 동물같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부드럽게 시작의 물꼬를 다시 놓으므로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저자의 말을 믿어도 될까? 늘 사회나 곁을 빼놓고 사고하는데 익숙해진 우리 자본주의인간이 불쑥 도움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문화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정치적 권력만 잡게 되면 바꾸는 건 순식간이라고 하는 엘리트주의 천지인 현실과 정치의 오만함을 어떻게 숨죽이고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풀릴 듯한 생각들도 다시 접혀진다. 나는 혼자다. 아직도 곁의 너-나-의 촉수가 자라지 못해서 일까? 저자의 책이 관념덩어리로 혼을 잠시 빼내어서 흔들리는 것일까? 그래도 읽지 않는 것보다 읽고 느낌을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도 인문서치고는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당신의 건독을 빈다. 그리고 작은 느낌이 피고, 그 느낌을 봄꽃처럼 술 한잔에 나누고 털고 싶다. 게 중 하나의 꽃씨라도 척박한 토양에 떨어지면 좋겠다. 꽃이 피든말든, 새싹이 자라든 말든.....한잔 술 건배하자

 

투게더 책갈피 !! 

 

브뤼노 라투르는 어느 의미심장한 구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라는 것이 그 자신이 만든 테크놀로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홀바인 이후 거의 4세기가 지났지만 탁자 위의 도구들은 여전히 신비스러운 대상물이다. 협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라투르의 선언을 고치고 싶다. 우리는 아직 근대인이 아니다. 몽테뉴의 고양이는 사회가 아직 더 길러내야 하는 인간의 능력을 대변한다. 440

 

프로이트는 누군가 질 높은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자 "사랑하고 일하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조언에는 공동체가 빠져있고, 사회적 팔다리는 절단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는 공동체적 삶을 하나의 소명으로 끌어안았지만, 그녀가 말한 공동체는 대부분의 빈민들이 직접 경험하는 종류의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화된 정치적 공동체, 참여자들이 모두 동등한 입지에 서있는 공동체였다. 우리는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 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432

 

토머스는 1930년대 이후 왜 노조가 점점 더 구조화되고 내적으로 관료화되어가면서 생명력이 고갈되었는지를 몰었다.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원들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행동할 줄은 알지만, 노조원들과 비공식적으로 허물없이 어울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는 자발적인 멤버십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는 더 급진적이 되라고 촉구했다. 이는 더 많은 것을 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다르게 행동하라는 요구였다. 바로 이런 도발적인 비판을 그는 미국의 다른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던졌다. 공동체적 헌신의 세 가지 형태 가운데,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즐거움의 방향으로 가장 많이 기울어진 것이 토머스의 경우였다. 430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그저 자부심이 낮아진 증상으로 보는 통념을 공격했다. 그는 우울증이란 그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 분노는 그다음 단계로서 자신에게 향하게 된다. 자기 비난이 타인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더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그는 우울증이 부모, 배우자, 연인, 친구에 대한 분노를 은폐하는 가면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감히 그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분노이다. 403

 

중성적이고 비인격적인 가면은 배우가 외부를 보게 하고, 그럼으로써 관객과 함께 누리는 공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복잡한 협력은 그런 외향적 전환을 실행하여 공통의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일상의 외교는 표현력 풍부한 사회적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 추상적 교훈에서 구체적인 정치적 결과가 따라 나온다. 390

 

가게 외부에서는 로컬169의 노조 조직가들이 한국인 상인과 싸우면서 노동법과 적정 임금, 근로시간 등을 준수하도록 강요했지만, 이 싸움 자체가 사회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조직가들과 뉴욕 주는 노동법 세미나를 열기 시작했고, 세미나에 참석한 한국인 상인들에게 수강확인증을 발급해주었다. 뉴욕 시 경계 지역인 플러싱에서 한국인 상인 250명가량이 이런 1일 대학을 졸업했다. 요는 그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369

 

전문적 중재자들은 폭풍우가 불고 나면 상황을 정리하여 생산적 결과를 얻어낼 방법을 찾는다. 중재자 없는 중재도 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만, 그 경우에는 질서라든가 일반성 같은 것은 거의 찾기 힘들다. 긴장감의 근원이 수리 과정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발언과 침묵 사이의 균형은 양편 모두에서 외형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이렇게 다시 균형 잡는 행동에서 모종의 예절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370

 

전문적인 구직 카운슬러와 직장 클럽의 조직자들은 모두 실망감을 다루는데 능숙해져야 한다. 이런 카운슬러와 조직자들은 사회의 리얼리스트들이다. 반면 우리 부모 세대와 같은 수준의 완전고용 상태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약속하는 정치가들은 사회의 환상가들이다...그들의 노력이 구직자와 조언자 모두에게 귀중한 이유는 경제적이기보다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으로 무엇이 수리 작업에 개입되는지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마음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하더라도 타인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361

 

사회과학은 체화라는 보기 싫은 전문용어를 써서 신체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을 연결한다. 우리는 세 가지 종류의 체화를 찾아보려 한다. 신체적 노동의 리듬이 어떻게 의례에 체화되는가, 신체적 동작이 어떻게 비공식적 사회관계에 생명을 불어넣는가, 물리적 저항을 뚫는 기능공의 작업이 사회적 저항과 차별성을 상대한다는 과제에 어떻게 빛을 던져주는가, 하는 것이다. 319


현대적인 예절의 형태는 분노의 폭발을 융통성 있게 조절하게 해주며, 팀워크의 안일한 친밀함과 피상적으로 예절만 차리는 태도를 기피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선조들은 공손함을 실행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을 규범화하고자 한 데 비해, 지금은 예절이 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성으로 변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 규범을 스스로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규범화되었든 비공식적이든 예절을 실행시키는 것은 의례이다. 외향적 행동은 반복되어 하나의 습관으로 각인된다. 단기적 시간 단위는 예절을 녹여 없애는 용제이다. 이 때문에 금융자본주의는 무례함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 업계의 엘리트들은 단기적 시간 단위를 통해 이득을 얻었지만 평범한 노동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285


"영국의 가장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이 유복한 가정의 아이들에 비해 TV와 인터넷 모니터 앞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시를 연구자 에드 메이요와 애그니스 네언은 발견했다. 그들의 자료는 충격적이다. 빈곤 가정의 아이들은 더 형편이 나은 아이들에 비해 컴퓨터 앞에서 밥을 먹을 확률이 9배, 잠들기 전까지 컴퓨터를 하고 있을 확률이 5배 더 높다. 그들이 발견한 내용은 티브 시청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연구와도 일치한다....소셜 네트워크와 관련해서 매우 기본적이지만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 있다. 직접 만나는 관계, 개인적인 인맥, 또는 직접 참석한다는 것이 특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35

 

PR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처음 지적했듯이, 차별화하는 비교는 열등감을 이용한다. 홍보하는 사람은 신랄한 구절로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를 설득하여 그 자신이 뭔가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을 '지위'광고라고 불렀다. 광고인의 과제는 소비자들에게 대량생산된 물품을 구입함으로써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데 있다....자신들이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지위대상은 그런 감정을 달래주는 용도로 쓰인다. 230

 

연대는 현대의 정치학에서 하나의 강박이 되었다. 한 세기 전에 좌파가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향식으로 연대를 이루고자하는 진영과 상향식으로 이루고자 하는 진영이 연대의 방식을 양분한다. 하향식 정치학은 협력의 실천에서 특별한 문제에 봉착하는데 그 문제는 정치적 제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종종 사회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드러난다. 반면 상향식으로 구축된 연대는 상이한 사람들 사이의 결속력을 확보하려고 애를 쓴다. 이것은 대화적 원칙의 또 다른 측면이다. 210


의례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는 연극적 표현이다. 결혼식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구글웨이브에는 바로 그런 표현적인 요소가 부족했다. 구글웨이브에서는 교환이 감정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정보를 공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컴퓨터의 연극적 내용이 빈약했던 것이다. 157

차별화하는, 대화적인 교환에는 전혀 다른 차원이 또 있다. 그 경험이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르다는 것이 반드시 더 낫거나 더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중세의 모든 길드의 모든 작업장에서는 하루 일과를 끝낼 때 이런 기도문과 비슷한 것을 읊었다. 매일 일과가 끝날 때 각 개인이 공동체에서 공동의 선을 위해 기여한 바를 의례를 통해 부각시킨 것이다....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성을 찬양하는, 즉 각 개인의 특유한 가치를 긍정하는 의례들은 차별화하는 비교의 쓴 맛을 줄여주고 협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144

도시의 산책자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자신이 본 것에서 자극을 받았으며, 이런 인상들을 집으로 가져갔다. 18세기의 여행자가 19세기에는 관광객으로 바뀐 것도 이와 동일한 변화였다. 여행자는 자유롭게 문을 두드리고 그 집이나 농장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관광객들은 대개는 매우 신중하게 안내서를 손에 든 채 둘러보았지만 자신들이 여행하는 지역의주민들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것은 꺼려했다. 142


오스트리아 빈 태생인 카우츠키는 독일에서 천직이던 기자 직업을 버리고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젊은 시적에 월간지인 [현대]를 창간했다. 중년에는 혁명의 불가피성이라는 교조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생애 후반인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정부의 외무부 관리가 되었다. 전사로 살아온 긴 생에세서, 그는 자신의 운동이 그 조직적인 정치적 칼날을 잃는 순간 독일에서의 사회적 개혁과정이 중단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이 된 1920년에 러시아 그루지야를 여행하고 그루지야의 사회민주주주의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교해본 카우츠키는 환멸을 느꼈다 114

 

1844년 오웬은 일련의 규율, 즉 로치데일 원칙을 작성했다. 그것은 마르크스 추종자들보다는 덜 전투적인 노선을 따르는 좌파의 횃불 역할을 했다. 첫째, 작업장은 누구에게나 개방된다.(평등고용의 원칙). 둘째, 1인 1표(작업장에서의 민주주의), 셋째, 거래에 따른 잉여금의 분배(이윤공유), 넷째, 현금 거래9그는 추상적인 빚을 혐오했으므로 현대의 신용카드를 기피한다.) 다섯째, 정치적, 종교적 고립(그러므로, 작업장에서의 차이에 대한 관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째, 교육의 진흥이다. 85

 

굳이 읽으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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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숨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from 木筆 2014-07-29 16:33 
    자유 - 저는 '자유' 그 자체만을 떼어서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다소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건 마치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내를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이런 차원에서 자유란 안전보장이라는 개념과 결혼한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자유없는 '안전보장'이란 노예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안전보장 없는 '자유'란 혼란이자 불확실성이며, 계속되는 두려움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자유와 안전 사이의 관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