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민아카데미 올해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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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특질

 

1. 종교비판

 

밀레토스이 자연철학자가 신 없이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리디아니 페르시아의 침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 폴리스에서 빈부차이가 생기고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여 이소노미아가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폴리스가 신들이나 씨족적 전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계약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재확인시키려고 했다. 자연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사회철학이다. 108

 

2. 운동하는 물질

 

자연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시원물질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물질과 운동이 분리불가하다. ..탈레스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주술적인 사고를 도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술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기 위해 스스로 운동하는 시원물질을 생각한 것이다. 111

 

밀레토스학파가 물질의 자기운동을 생각한 것은 물질의 자기운동의 배후에 무언가를 상정하는 것, 즉 제작자로서의 신들을 상정하는 신화적 사고를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인에서는 밀레토스학파가 내쫓은 신들이 되돌아온다. 물론 아리스토펠레스는 신들을 부활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운동의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을 발견한 셈이다. 113

 

자연철학에는 질료가 스스로 운동한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이 생각은 화형에 처해진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에 의해 능산적 자연으로 파악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뒤집고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브루노는 그것을 지지했지만, 동시에 코페르니쿠스를 비판하며 태양계는 무한한 우주에 존재하는 다수의 세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것은 우주는 무한한고 우리의 세계는 다수의 세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낙시만드로서의 생각을 부활시킨 것이다...부르노의 능산적 자연이라는 사고를 전면적으로 전개한 이는 스피노자이다. 114-5

 

3. 제작과 생성

 

이오니아학파는 목적인을 거부한다. 자연의 생성은 목적을 가지지 않기에 제작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생성을 이처럼 생각하는 것이 제작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는 제작이나 기술을 중시하고 그에 기반하여 생성을 생각했다. 116

 

생물 고찰을 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는 탈레스에서 원자론의 데모크리토스에 이르기까지 목적론을 거부하고 우주의 생성, 생명의 발생, 생물의 진화, 그리고 인간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118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아테네철학이 이오니아적 사고를 압도하고 억압하게된 것은 그들의 동시대나 헬레니즘시대보다는 오히려 기독교가 확립된 시기였다. 즉 아테네의 철학은 기독교의 신학 안에서 계속 살아남은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이오니아적 진화론은 서양에서 근대물리학이 발전해도 부활하지 않았다. 다윈의 종의기원에 이르러서야 근본적으로 부정된다. 121 다윈의 획기적 의의는 우연성을 근저에 두고 모든 목적성을 거부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때 다윈은 자신도 모르게 이오니아학파의 사상을 회복시켰다. 122

 

젊은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에게서 목적론과 기계적 결정론이라는 쌍방을 원자운동의 편차에서 비판하려는 시도를 발견했다.....양자역학은 어떤 의미에서 질료와 운동은 불리할 수 없다는 이오니아학파의 사고를 회복시킨 것이었다. 즉 양자는 입자(질료)임과 동시에 파동(운동)이다. 123

 

4장 이오니아 몰락 이후의 사상

 

자연철학은 물질이 자기운동하는 것, 물질과 운동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사회철학으로서 볼 경우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개인들이 존재하는 것과 이동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바꿔 말해, 이동의 가능성이 없다면,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127

 

이오니아 도시들의 구성원은 이동해온 자들로, 그들은 또 언제든지 다시 이동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조건이 자유롭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이소노미아(무지배)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식민자의 이동이 계속 이어짐에 따라 이동할 프런티어가 소멸되어 갔다. 그와 더불어 폴리스 내부에 빈부의 격차와 지배관계가 생겨났다. 기원전 6세기 전반에는 이오니아 각지에서 그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28

 

아테네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은 귀족정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태어났다. 참주가 민중의 지지를 얻은 것이다. 한편 사모스 섬에서는 원래 이소노미아가 존재했었고, 그것을 회복하려는 데모크라시 안에서 참주가 출현했다. 129

 

피타고라스는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지상의 생활이란 실은 바로 혼의 죽음이다. 다시 신적 본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윤회전생의 바퀴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혼은 지혜(소피아)를 구해야 한다.이런 의미에서 철학(필로소피)이란 윤회전생의 바퀴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방법이다. 129

 

피타고라스교단에서 구성원은 청정을 지키고 육식을 끊고 침묵 속에서 자신의 혼을 주시하는 수행을 부과받았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교단과 달리 피타고라스학파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예를 들어, 크로톤에서 피타고라스학파는 화폐주조에 종사했고 신흥 상공업계급과의 결부를 기반삼아 폴리스의 정치와 관계했다 131

 

피타고라스가 남이탈리아에서 만든 교단조직의 존재방식은 그가 이오니아의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대중의 자유로운 의지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대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지도자가 육체’(감성)의 속박을 넘어선 철학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는 그저 독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33

 

아시아로부터 발전된 과학지식을 얻고 스스로도 개발했지만 이오니아에서는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할이 진행되지 않았다. 탈레스는 이집트에서 토목기사로서 일한 인물이자 삼각함수를 사고한 수학자이자 일식을 예언한 천문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특별히 만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탈레스는 확실히 걸출했기 때문에 지자’(현인)로 꼽혔다. 하지만 그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이오니아에서는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바꿔 말해, 이오니아에서는 지중세계가 성립하지 않았다. 135

 

정치가를 지망했던 플라톤에게 있어 소크라테스가 민주파에 의해 처형된 사건은 첫 번째 큰 좌절이었다. 출신 때문에 귀족파로 지목된 플라톤에게 이 사건은 공인으로서의 진로가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후 아테네를 떠나 피타고라스처럼 각지를 방랑하다 마지막으로 남이탈리아의 탈라스에 있는 피타고라스학파 학원에 견학을 갔다. 그는 거기에서 그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온 민주정에 대한 의문과 극복에의 열쇠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137

 

헤겔은 피타고라스가 수를 실재로 간주한 것을 관념론의 초기적 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수는 개념과 사물의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수는 사상의 시작이지만 가장 낮은 시각이다. 즉 피타고라스는 아직 사상=개념에 이르고 있지 않다. 그것이 개념이 된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라고 헤겔은 말한다. 하지만 실제는 반대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피타고라스의 사고, 즉 수를 실재로 삼는 사고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142

 

2.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의 이중세계라는 관점을 부정한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는 끝까지 물질성과 그것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자연철학의 시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은 물질임과 동시에 운동이다. 크세노파네스는 의인적인 신 관념을 비판하며 소나 말이 신을 생각해 그린다면 소나 말의 모습을 그릴 것이라고 야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그가 의인적인 신들을 비판하는 근거로서 유일한 신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유일한 신은 신들과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하며, 모습에서도 사유에서도 죽어야 하는 자들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유일한 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 세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크세노파네스에게는 이런 자연=세계야말로 신인 것이다. 150

 

헤라클레이토스가 유니크한 것은 만물에서 하나가 생겨나고, 하나에서 만물이 생겨난다.”는 사고에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하나는 만물의 다양한 겉모습 너머에 본질로서의 동일성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과는 다르다. 만물의 성은 물질성이나 운동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자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152

 

3. 파르메니데스

존재의 진실은 되다이며 존재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사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되다라고 말합니다. ‘되다가 원리인 것입니다...‘있다’(존재)에서 ‘-되다로의 이행은 위대한 사상의 힘을 보여줍니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제까지의 철학에서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 것-운동의 관념-이 보충됩니다. 여기서는 운동 그 자체가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156-7

 

이것도 사실은 아니다.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아르케(시원)에서 운동하는 물질을 발견했다. 즉 물질과 운동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분리한 이가 피타고라스이다. 157

 

제논은 당신들의 비겁에 질렸다고 말한다. ...그의 선동은 시민을 움직여 참주타도를 실현시켰다. 이와같은 인물이 스승으로 우러러본 파르메니데스가 헤라클레이토스 못지 않을 정도로 격하게 투쟁적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159

 

파르메니데스는 공허나 무로부터 세계의 생성을 보는 사고를 부정한다. 공허는 있지 않은것이다.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 한편 있는 것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물질의 항존성을 의미한다. 공허나 무로부터의 세계생성이라는 사고를 부정하는 것은 전이오니아적 사고(헤시오도스)와 포스트 이오니아적인 사고(피타고라스)에 대한 비판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오니아적인 사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160

 

신화에서는 모든 것이 사후적으로 보인다. 즉 이미 일어난 사건이 신들의 의지나 목적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가 부정한 것은 신들이라기보다 호히려 사건을 사후적 내지 목적론적으로 보는 관점 자체이다. 그들에 의해 물질운동이 목적론적이 아닌 것으로서 파악된다. 그러므로 거기서 진화론적인 관점이 생겨났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에게 운동은 사후적인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세계야말로 진정한 세계이다. 161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크세노파네스 =일자도 간접증명을 통해 제시되었다. “만약 신들이 태어났다면, 그 탄생 전에는 무로 있었을 것이다. 또 만약 신들이 죽는다면, 신들은 무가 될 것이다. 신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란 생각할 수 없다.(불합리하다) 그러므로 신들은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들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논법도 그것과 같다. “는 불생불멸이다. 왜냐하면 가령 가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하자. 생성된다면 로부터이고, 소면한다면 로이다. 그런데 는 말도 생각도 할 수 없다.(불합리). 그러므로 는 불생불멸이다.“ 164-5

 

원자론을 자연철학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철학으로서 볼 때 중요하다. 오늘날은 원자론, 즉 개체에서 전체를 설명하는 이론이 사회철학의 주류이다. 이에 대해 전체론, 즉 개체에 대해 전체의 선행성을 주장하는 관점으로부터의 비판이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헤겔처럼 개체와 전체의 변증법적인 상호규정을 보는 관점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개체와 전체를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여기에는 개체와 개체가 관계하는 차원이 결락되어 있다. 개체와 전체라는 관점 자체가 개체와 개체의 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구조를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다....이 책에서 네 가지 교환양식이 결합과 분리로 사회사를 보려고 한다. 그것은 전체와 개체라는 관점에서 사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개체와 개체가 관계하는 형식들을 기본으로 하여 사회구성체를 보는 것이다. 174

 

엠페도클레스 이후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는 사상가들은 더 이상 폴리스에 입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개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가 일종의 제국으로서 군림하게 되고, 각 폴리스의 자율성이 내적, 외적으로 상실된 것과 관계가 있다. 그때까지 사상가는 각자의 폴리스에 있으면서 다른 폴리스의 사상가들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갔다. 몰론 거기서 폴리스(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들 대부분은 지식을 파는 상인으로서 활동했다. 175

 

 

볕뉘. 사람과 삶을 읽지 않고는 한 걸음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무지를 통감한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 순환의 맞물림과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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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민아카데미 2015 송년회]

이번주 금요일(18일), 송년회 잊지 않으셨지요? 영화 안내 나갑니다.

대전 메가박스(로데오타운)
1)히말라야 19시20분
2)대호 19시30분
3)스타워즈 19시40분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회신 부탁드려요. 사무국에서 한꺼번에 예매하겠습니다.

영화관람 후 아카데미 책방에서 뒷풀이와 `나의 추천도서 선물하기`가 진행됩니다. 회비는 1인 2만원. 추천도서 한 권씩 준비해주시구요, 책방으로 바로 오시는 분은 밤10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자~이제 번호를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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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밤

조례부결소식을 타고 든
몇몇 지인들의 눈물과 고함이
밟혀 더 아프다

오랜만에 만나
주장과 고픈말들만 안으니
잔상처럼 어른거려
안타깝다

간만에 통화해
어쩌니저쩌니
답이아니라 할일만
전하니 마음이 저린다

아프고
안타깝고
마음 저린 일들만
비처럼내려 어쩌지 못하는 밤

발. 1. 모임에 직책은 왜 만들어 놓아. 지도를 거꾸로 펼쳐들 듯. 회원은 위 운영위 사무국 장 대표단 아래로 마음이 흘러내리는 것이라면 서로 그 마음을 받들어 모셔. 마음은 병목이 생기지 않게 서로 예민해져. 새로운 생각 누군가 물고오면 화들짝 함께 놀라. 0.5도 따듯해질 순 없을까. 꿈같은 일이지만 사발-통문같은 모임 속을 거닐고 싶다. 사발 속 마음들 구슬처럼 이님저님 꽃맘 전할 수 있게. 늘 미로같은 마음찾다 온 길도 잃기전에.

2. 유성구의회 상임위에 만명 서명을 받은 원자력관련 조례가 새누리의원의 반대 속에 부결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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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공공성

 

아렌트는 파리아’, 즉 공공적 공간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근본문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공적 공간에서 추방된 사람들과 사회의 항쟁은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을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문제는 단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현실적인 존재인가에 있다.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현재 주고 있는 최대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현실성과 존재의의를 의심하게 하여, 그를 그 자신이 보아도 비실재의 위치로 환원하는 것이다.

 

버림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의심하는 데 있다. ‘사적으로 사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현실성에 의심을 품게 한다. 그것은 자기가 잉여자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15

 

공사를 나누는 경계선은 담론에 의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담론 이전의 것, 정치 이전의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처럼 성별역할분업을 정당화하는 담론에 의해 공공성에서 배제되어왔던 가사노동이나 부양 등을 정치적인 쟁점으로 재파악하려는 대항담론의 좋은 예이다. 가정폭력, 성희롱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 사적인 불운’,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여겨졋던 많은 일들이 공공적인 부정의로 재파악되었다. 또 가족이 해야 하는 사적인 일로 여겨진 돌봄에 대해서도 불완전하게나마 공적인 제도가 마련되었다. 35

 

담론자원 - 자신들의 필요에 대해 바깥으로부터 부여된 해석을 문제 삼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의문시하며, ‘정상이 아니다’, ‘열등하다’, ‘뒤쳐져있다는 식으로 폄하되어왔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으로 재파악하는 등, 재해석 재정의의 실천이 시도될 것이다. 37

 

대항적 공공건의 대부분은 그것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생명을 배려하는 친밀권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자기 말이 타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응답받는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다. 이 경험으로 회복되는 자존 또는 명예의 감정은, 타자로부터의 멸시나 부인의 시선, 혹은 일방적인 보호의 시선을 물리칠 수 있게 한다. 자기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는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37

 

고독이란 문제를 사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결국은 문화 자체의 질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쓸모의 유무에 따른 유용성의 기준이 타당한 공간은 확실히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공간이 터무니없이 팽창하여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삼켜버리고 있는 데 있다. 아렌트는 많은 인간을 끊임없이 잉여자로 만드는 공리주의적 사고의 침윤을 문제 삼았는데, 그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는 쓸모없는 자를 즉시 잘라버리는 것이 정답으로 여겨질 정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40

 

하버마스 비판 55-56

 

공공적 공간은 공통세계에 대한 다원적인 관점이 존재할 때에만 그것들이 서로 교환되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관점의 복수성을 잃었을 때, 공공적 공간은 종언을 맞이한다. 세계를 오직 하나의 관점으로 남김없이 설명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복수성을 파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전체주의라기보다도 대중사회 소비사회의 획일주의이다. 거기서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균일화 때문에 복수성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공통세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것을 둘러싼 판단이 회피되는 냉소주의가 관점의 축소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66

 

매우 흔한 현대의 현상, 즉 판단을 전적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광범한 경향...자신의 범례,자신이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선택하는것에 대한 주저 무능력, 그리고 판단을 통해 타자와 관계하는 것에 대한 주저 무능력으로부터 진정한 걸림돌이 발생한다....이 점에서 공포가,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악의 평범성이 존재한다.” 67

 

아렌트가 보는 한, 근대사회의 인간에게 근본 경험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기소외가 아니라 세계소외이다. 즉 신앙을 잃은 결과,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 과정으로 내던져졌다는 경험이다. 이 생명 과정은 나의 내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도 있다. 즉 근대 인간이 세계에 대한 배려의 상실을 대신해 손에 넣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자기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만인에게 동일한 생명에 대한 배려이다. 67

 

어떤 사람의 의견이 상실된다는 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점이 상실된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공공적 공간에서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세계가 빈약해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는 이렇게 보인다가 복수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69

 

푸코와 아렌트

프랑스혁명은 -정치의 역사적 개막을 의미하지만, 아렌트가 보는 한, 그것은 필연성=빈궁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절박성때문에 자유의 창설에 대한 관심을 격퇴해버린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75 조에, 비오스

 

자기의 욕구를 (명료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든가, 대화 장소로 이동할 자유 혹은 시간이 없다든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다든가,자기의 말을 들어줄 타자가 주변에없다든가, 오랜 동안 심각한 곤경에 처해져 있었기 때문에 희망을 품는 것조차 기피한다든가(‘적응적 선호 형성’)하는 등등, 새로운 욕구 해석의 제기는 새로운 자원의 배분을 청구한다. 81

 

존 롤스, “자유주의의 핵심적 가정은 모든 평등한 시민은 서로 비교할 수 없고 서로 타협할 수 없는,참으로 다양한 선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선의 구상이란 자기의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지도적인 가치에 관하여 개개인이 가지는 해석들이다. 그것은 가치가 상쟁하는 신들의 투쟁의 시대에는 각인각양이어서 거기에서 공약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약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어떠한 선의 구상을 가지고 있건, 어떠한 삶의 계획을 추구하건, 누구나가 축소되기를 바라기보다는 확대되기를 바라는 가치이다. 존 롤스는 그러한 가치를 기본재=기본적인 선이라고 부른다. ”기본재는 시민이 가진 욕구가 무엇인가를 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이 그 견해를 추구해가는 경우, 모든 사람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확실히 간주되는 것이다.“ 정의는 이러한 기본재(자유, 기회, 소득과 부, 자존의 기초)를 어떠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우선순위로 분배하는가에 관한 기본원리이다. 85

 

공공적 가치를 입장에 다라 나뉘는데 센은 기본적인 잠재능력으로 해석한다. ‘잠재능력이란 어떤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열려 있는 삶의 폭’,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의미한다. 센이 공공적 가치를 기본재로 정의하는 롤스의이론을 비판하는 것은 사람들이 기본재를 이용하여 실제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관점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똑같은 기본재가 주어졌다고해도 건강상태, 연령, 장애의 유무 등의 차이에 의해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것에는 커다란 간격이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어는 정도 이상의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재화를 사용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어떠한 상태에 둘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욕구를 재화의 필요가 아니라 행위와 존재에 대한 필요로 재정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이는 삶의 폭이 상실된 사람들에게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을 보조하는 직업...동성애자는 공공시설 숙박이 거부되는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놀 기회를 박탈당하는가...센이 잠재능력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적절한 영양을 얻는 것, 병에 걸리지 않는 것, 요절하지 않는 것,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것, 친구를 사귀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 커뮤니티에서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86-7

 

센의 접근법에 따르면 빈곤이라고 일컬러온 사태는 재화의 결여가 아니라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로 파악되어야한다. 박탈이라는 척도는 제3세게의 개발 방식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도 실제로 공헌해왔지만, 그에 그치지 않는다. 이 척도를 이용하면 소위 선진국에서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무엇이 박탈되어 있는지도 뚜렷하게 부각된다. 느긋하게 휴양할 수 있는 것, 오염되지 않은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 소음에 고통받지 않는 것, 자통차 사회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이동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가지는 것 등등이 박탈되어 있는 것이다...장기간에 걸친 고독은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의 하나로 꼽아야 할 것이다. 87-8

 

사회국가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회보험의 성립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회국가는 1880년대부터 1890년대에 걸쳐 탄생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국가는 자본제 경제의 진전을 조건으로 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다양한 부정적 산물에 대한 대응으로서 성립되었음을우선 지적하고자한다. 사회보험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노동재해나 실업과 같은 폐해에 대응해, 위험을 개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합화함으로써 대처하는 제도로서 만들어졌다. 88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명하게 이반되기 시작한 결과 사회적=국민적 연대에 심한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강력한 균형책을 취하지 않는 한, ‘하나의 국민이란 표상은 더 이상 성립하기 어렵게 되어 오히려 두 개의국민, 두 종류의 시민이라는 이미지가 조성된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부문과 비생산적이고 복지에 의존하는 부문의 두 개로 나뉘어 양자 사이에는 원한의 정치’(강자가 약자에 품는)가 항상 잠재하게 된다. 시민의 대부분은 사회적 연대를 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가지게 되어 사회국가는 다수의 지지를 잃어간다. 사회국가는 국민의 통합이 아니라 역으로 그 분단을 야기해온 것이 아닌가하는 관점이 지배적이 된다. 사회적 연대에 대한 의심, 단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92

 

이를 보완하고자 한 OECD의 능동적 사회로 변화되면 공적부조를 받음으로써 생존하는 사람들은 자기 통치 능력이 결여된, 혹은 그런 의욕이 없는 사람들로서 표상될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잉여자로서만이 아니라사회의 질서를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위험한사람들로서 표상될 것이다....“반영속적이고 준범죄적인 사회층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는,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의 대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규율의 대상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대상이 된다. 즉 사회의 안전에 위협을 주지 않도록 가능한 한 낮은 비용으로 일괄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95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에서 주로 인종 종족에 의한 거주지의 분리는 실제로 심각한 문제인데 사회적 공간의 분리를 어떻게 막는가는 정치적인 삶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비록 인터넷 상의 공공성이 현실적 공간의 틈을 중개할 가능성을 얼마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회적 조건을 살아가는 타자가 현실에 접할 기회를 잃어간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이는 편협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97

 

최근 사회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왔는가를 살펴보면, 사회적 연대의 공동화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공간적 분리이다. 자유주의적인 정의론이 대상으로 삼아왔던 사회적 연대의 자원은 눈에 띄게 부족해지고 있다. 우리는 운명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라고 하는 롤스의 말이 빈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서로 차단된 공간을 살아가게 된 현상황에서노동시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기민으로 만들지 않고자 한다면 앞으로 어떠한 생명 보장의 방법을 구상해야 할 것인가? 98 답은 99-101

 

친밀권

 

공공권과 친밀권을 분석적으로 구별하는 적절한 기준은, 공공권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문제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하는 데 반해, 친밀권은 구체적인 타자의 삶/생명에 대한 배려 관심에 의해 형성 유지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친밀권의 타자는 안면 없는 일반적인 타자, 추상적인 타자가 아니다. 친밀권의 관계는 간-인격적이어서, 그러한 인칭성을 결여한 공간은 친밀권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둘째로 친밀권의 타자는 신체를 갖춘 타자이다. 친밀권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타자의 생명 신체에 대한 배려가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체이다. 거기에서 비오스라는 삶의 위상은 조에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106

 

자조그룹은 정보나 의견의 교환을 통하여 직면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외부를 향하여 문제를 제기해가는 공공권의 측면을 가지기도하지만, 그 경우에도 서로의 삶의 구체적인 곤란에 주의를 기울이는 측면은 역시나 불가결하다. 이것보다도 좀 더 느슨한 연결, 즉 기회 있을 때마다 서로 방문하는 친구들 사이의 관계나 의논 잡담을 즐기기 위한 살롱적인 관계도 친밀권에 포함된다. 타자의 구체적인 삶/생명에 일정한 배려나 관심을 갖는 것이 친밀권의 최소 조건이다. 108

 

새롭게 창출되는 공공권의 대부분은 친밀권이 전환되어 생겨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면 1990년대 후반부터 각지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실천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주민 사이의 대화의 친밀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민투표가 쟁점으로 삼아온 것은 원자력발전소, 산업폐기물처리장, 군사기지, 토목건설 공공사업 등이다. 그것은 위험을 주변에 강요하고, 생태게를 파손하고, 부정적 유산을 후대에 남겨주는 사업을 감행하는 문화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었다. 새로운 가치 판단을 공공적 공간에 던지는 문제제기는, 다수와는 다른 가치관(생명관,자연관,인간관)을 유지 재형성해온 친밀권에서부터 생겨난 것이 많다. 미나마타병 환자와 교류한 경험도 이의 하나이다. 109

 

새로운 가치의 제기가 담론의 정치라는 형태를 곧바로 취한다고 할 수 없다. 가치관을 달리하는 타자에 대하여 호소하거나 설득하는 언어를 가지고 마주하기보다도 오히려 다른 식의 작품 제시라는 스타일, 다른 식의 행동양식의 제시, 다른 식의 삶의 방식 제시라는 스타일을 취한다. 그러한 다른 식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에 의해 담론의 차원으로 번역되거나 그것을 모방하는 미메시스의 실천을 촉발해간다. 110

 

친밀권의 감정의 기제는 양의적이다. 지지하는 것과 잡아매는 것, 배려하는 것과 집어삼키는 것, 주목하는 것과 감시하는 것...요약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과 상대적으로 위험한 것은 표리의 관계에 있다. 친밀권이 동화와 억압의 공간으로 전환할 위험성은 항상 잠재해 있으므로, 거기에서부터 벗어날 자유는 제도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지 않고, 자신의 말이 묵살되지 않는 사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존감에 있어서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렌트는 자신의 행위나 말로 공공적 공간에 현상하는 용기를 정치적 덕성으로서 중시하는데, 부인이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덕성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어딘가에서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을 배경으로 가질 터이다. 112

 

아렌트는 주체 내부에 있는 복수의 가치 사이의 대화를 사고라고 부른다. 이 시각에서 보면 주체에게 위기는 다양한 가치를 질서 짓는 어떤 중심적 지배적인 가치가 결여되어 있음(정체성의 위기)이 아니라, 거꾸로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가 주체를 지배하는 정체성이라는 위기이다. 복수성은 공공성에서 정치적인 삶의 조건임과 동시에, 주체의 정신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타자를 잃는다는 것은 응답받을 가능성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상실을, 언어를 가진 동물로서의 정치적인 존재자에게 죽음을 초래한다. 114

 

복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기에 가장 정치적인 로마인의 언어에는 살다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다, 또는 죽다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의어로 사용된다. - ‘사이의 상실 115

 

공공성은 생명의 보장이나 공통 세계의 정의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차원은 개별적 삶의 공약 불가능한 위상에 대응한다. 이 차원에서 공공성은 사람들이 소유활 수 없는 세계의 제시(언어나 행위에서의 현상’)를 보고 듣고, 향수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차원에서 정치는 이미 공약 가능한 가치의 정의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다른 가치나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윤리로서의 정치라고 할 만한 요소도 포함할 것이다. 117

 

푸코 - 내게는 이러한 문제 설정이 우리 사회에서 분명 대단한 중요성을 지녔던 실천들의 총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존재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인간들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 행동 규칙을 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성의역사2:쾌락의 활용 117-118

 

아렌트는 그 윤리를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타자에게 현상하기 원하는 대로 존재하라 Be as you would wish to appear to others” 이것은 다름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타자에게 현상하기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에게 현상하라 Appear to yourself as you wish to appear to others" 118

 

 

볕뉘.  한나아렌트, 하버마스, 비롤리, 롤스, 필립페팃 등 공공성 최신 논의를 끌어내면서도 그에 대한 아마티아센, 너스바움 등 최근 학자들의 연구흐름들을 감안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론적 인 탐색뿐만 아니라 공공선의 변화에 대한 개념(친밀권의 공공성 탐색)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유를 구체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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