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공공성

 

아렌트는 파리아’, 즉 공공적 공간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근본문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공적 공간에서 추방된 사람들과 사회의 항쟁은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을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문제는 단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현실적인 존재인가에 있다.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현재 주고 있는 최대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현실성과 존재의의를 의심하게 하여, 그를 그 자신이 보아도 비실재의 위치로 환원하는 것이다.

 

버림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의심하는 데 있다. ‘사적으로 사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현실성에 의심을 품게 한다. 그것은 자기가 잉여자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15

 

공사를 나누는 경계선은 담론에 의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담론 이전의 것, 정치 이전의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처럼 성별역할분업을 정당화하는 담론에 의해 공공성에서 배제되어왔던 가사노동이나 부양 등을 정치적인 쟁점으로 재파악하려는 대항담론의 좋은 예이다. 가정폭력, 성희롱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 사적인 불운’,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여겨졋던 많은 일들이 공공적인 부정의로 재파악되었다. 또 가족이 해야 하는 사적인 일로 여겨진 돌봄에 대해서도 불완전하게나마 공적인 제도가 마련되었다. 35

 

담론자원 - 자신들의 필요에 대해 바깥으로부터 부여된 해석을 문제 삼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의문시하며, ‘정상이 아니다’, ‘열등하다’, ‘뒤쳐져있다는 식으로 폄하되어왔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으로 재파악하는 등, 재해석 재정의의 실천이 시도될 것이다. 37

 

대항적 공공건의 대부분은 그것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생명을 배려하는 친밀권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자기 말이 타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응답받는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다. 이 경험으로 회복되는 자존 또는 명예의 감정은, 타자로부터의 멸시나 부인의 시선, 혹은 일방적인 보호의 시선을 물리칠 수 있게 한다. 자기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는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37

 

고독이란 문제를 사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결국은 문화 자체의 질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쓸모의 유무에 따른 유용성의 기준이 타당한 공간은 확실히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공간이 터무니없이 팽창하여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삼켜버리고 있는 데 있다. 아렌트는 많은 인간을 끊임없이 잉여자로 만드는 공리주의적 사고의 침윤을 문제 삼았는데, 그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는 쓸모없는 자를 즉시 잘라버리는 것이 정답으로 여겨질 정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40

 

하버마스 비판 55-56

 

공공적 공간은 공통세계에 대한 다원적인 관점이 존재할 때에만 그것들이 서로 교환되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관점의 복수성을 잃었을 때, 공공적 공간은 종언을 맞이한다. 세계를 오직 하나의 관점으로 남김없이 설명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복수성을 파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전체주의라기보다도 대중사회 소비사회의 획일주의이다. 거기서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균일화 때문에 복수성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공통세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것을 둘러싼 판단이 회피되는 냉소주의가 관점의 축소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66

 

매우 흔한 현대의 현상, 즉 판단을 전적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광범한 경향...자신의 범례,자신이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선택하는것에 대한 주저 무능력, 그리고 판단을 통해 타자와 관계하는 것에 대한 주저 무능력으로부터 진정한 걸림돌이 발생한다....이 점에서 공포가,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악의 평범성이 존재한다.” 67

 

아렌트가 보는 한, 근대사회의 인간에게 근본 경험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기소외가 아니라 세계소외이다. 즉 신앙을 잃은 결과,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 과정으로 내던져졌다는 경험이다. 이 생명 과정은 나의 내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도 있다. 즉 근대 인간이 세계에 대한 배려의 상실을 대신해 손에 넣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자기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만인에게 동일한 생명에 대한 배려이다. 67

 

어떤 사람의 의견이 상실된다는 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점이 상실된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공공적 공간에서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세계가 빈약해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는 이렇게 보인다가 복수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69

 

푸코와 아렌트

프랑스혁명은 -정치의 역사적 개막을 의미하지만, 아렌트가 보는 한, 그것은 필연성=빈궁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절박성때문에 자유의 창설에 대한 관심을 격퇴해버린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75 조에, 비오스

 

자기의 욕구를 (명료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든가, 대화 장소로 이동할 자유 혹은 시간이 없다든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다든가,자기의 말을 들어줄 타자가 주변에없다든가, 오랜 동안 심각한 곤경에 처해져 있었기 때문에 희망을 품는 것조차 기피한다든가(‘적응적 선호 형성’)하는 등등, 새로운 욕구 해석의 제기는 새로운 자원의 배분을 청구한다. 81

 

존 롤스, “자유주의의 핵심적 가정은 모든 평등한 시민은 서로 비교할 수 없고 서로 타협할 수 없는,참으로 다양한 선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선의 구상이란 자기의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지도적인 가치에 관하여 개개인이 가지는 해석들이다. 그것은 가치가 상쟁하는 신들의 투쟁의 시대에는 각인각양이어서 거기에서 공약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약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어떠한 선의 구상을 가지고 있건, 어떠한 삶의 계획을 추구하건, 누구나가 축소되기를 바라기보다는 확대되기를 바라는 가치이다. 존 롤스는 그러한 가치를 기본재=기본적인 선이라고 부른다. ”기본재는 시민이 가진 욕구가 무엇인가를 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이 그 견해를 추구해가는 경우, 모든 사람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확실히 간주되는 것이다.“ 정의는 이러한 기본재(자유, 기회, 소득과 부, 자존의 기초)를 어떠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우선순위로 분배하는가에 관한 기본원리이다. 85

 

공공적 가치를 입장에 다라 나뉘는데 센은 기본적인 잠재능력으로 해석한다. ‘잠재능력이란 어떤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열려 있는 삶의 폭’,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의미한다. 센이 공공적 가치를 기본재로 정의하는 롤스의이론을 비판하는 것은 사람들이 기본재를 이용하여 실제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관점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똑같은 기본재가 주어졌다고해도 건강상태, 연령, 장애의 유무 등의 차이에 의해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것에는 커다란 간격이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어는 정도 이상의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재화를 사용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어떠한 상태에 둘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욕구를 재화의 필요가 아니라 행위와 존재에 대한 필요로 재정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이는 삶의 폭이 상실된 사람들에게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을 보조하는 직업...동성애자는 공공시설 숙박이 거부되는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놀 기회를 박탈당하는가...센이 잠재능력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적절한 영양을 얻는 것, 병에 걸리지 않는 것, 요절하지 않는 것,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것, 친구를 사귀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 커뮤니티에서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86-7

 

센의 접근법에 따르면 빈곤이라고 일컬러온 사태는 재화의 결여가 아니라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로 파악되어야한다. 박탈이라는 척도는 제3세게의 개발 방식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도 실제로 공헌해왔지만, 그에 그치지 않는다. 이 척도를 이용하면 소위 선진국에서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무엇이 박탈되어 있는지도 뚜렷하게 부각된다. 느긋하게 휴양할 수 있는 것, 오염되지 않은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 소음에 고통받지 않는 것, 자통차 사회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이동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가지는 것 등등이 박탈되어 있는 것이다...장기간에 걸친 고독은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의 하나로 꼽아야 할 것이다. 87-8

 

사회국가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회보험의 성립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회국가는 1880년대부터 1890년대에 걸쳐 탄생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국가는 자본제 경제의 진전을 조건으로 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다양한 부정적 산물에 대한 대응으로서 성립되었음을우선 지적하고자한다. 사회보험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노동재해나 실업과 같은 폐해에 대응해, 위험을 개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합화함으로써 대처하는 제도로서 만들어졌다. 88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명하게 이반되기 시작한 결과 사회적=국민적 연대에 심한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강력한 균형책을 취하지 않는 한, ‘하나의 국민이란 표상은 더 이상 성립하기 어렵게 되어 오히려 두 개의국민, 두 종류의 시민이라는 이미지가 조성된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부문과 비생산적이고 복지에 의존하는 부문의 두 개로 나뉘어 양자 사이에는 원한의 정치’(강자가 약자에 품는)가 항상 잠재하게 된다. 시민의 대부분은 사회적 연대를 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가지게 되어 사회국가는 다수의 지지를 잃어간다. 사회국가는 국민의 통합이 아니라 역으로 그 분단을 야기해온 것이 아닌가하는 관점이 지배적이 된다. 사회적 연대에 대한 의심, 단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92

 

이를 보완하고자 한 OECD의 능동적 사회로 변화되면 공적부조를 받음으로써 생존하는 사람들은 자기 통치 능력이 결여된, 혹은 그런 의욕이 없는 사람들로서 표상될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잉여자로서만이 아니라사회의 질서를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위험한사람들로서 표상될 것이다....“반영속적이고 준범죄적인 사회층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는,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의 대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규율의 대상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대상이 된다. 즉 사회의 안전에 위협을 주지 않도록 가능한 한 낮은 비용으로 일괄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95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에서 주로 인종 종족에 의한 거주지의 분리는 실제로 심각한 문제인데 사회적 공간의 분리를 어떻게 막는가는 정치적인 삶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비록 인터넷 상의 공공성이 현실적 공간의 틈을 중개할 가능성을 얼마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회적 조건을 살아가는 타자가 현실에 접할 기회를 잃어간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이는 편협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97

 

최근 사회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왔는가를 살펴보면, 사회적 연대의 공동화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공간적 분리이다. 자유주의적인 정의론이 대상으로 삼아왔던 사회적 연대의 자원은 눈에 띄게 부족해지고 있다. 우리는 운명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라고 하는 롤스의 말이 빈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서로 차단된 공간을 살아가게 된 현상황에서노동시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기민으로 만들지 않고자 한다면 앞으로 어떠한 생명 보장의 방법을 구상해야 할 것인가? 98 답은 99-101

 

친밀권

 

공공권과 친밀권을 분석적으로 구별하는 적절한 기준은, 공공권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문제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하는 데 반해, 친밀권은 구체적인 타자의 삶/생명에 대한 배려 관심에 의해 형성 유지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친밀권의 타자는 안면 없는 일반적인 타자, 추상적인 타자가 아니다. 친밀권의 관계는 간-인격적이어서, 그러한 인칭성을 결여한 공간은 친밀권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둘째로 친밀권의 타자는 신체를 갖춘 타자이다. 친밀권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타자의 생명 신체에 대한 배려가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체이다. 거기에서 비오스라는 삶의 위상은 조에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106

 

자조그룹은 정보나 의견의 교환을 통하여 직면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외부를 향하여 문제를 제기해가는 공공권의 측면을 가지기도하지만, 그 경우에도 서로의 삶의 구체적인 곤란에 주의를 기울이는 측면은 역시나 불가결하다. 이것보다도 좀 더 느슨한 연결, 즉 기회 있을 때마다 서로 방문하는 친구들 사이의 관계나 의논 잡담을 즐기기 위한 살롱적인 관계도 친밀권에 포함된다. 타자의 구체적인 삶/생명에 일정한 배려나 관심을 갖는 것이 친밀권의 최소 조건이다. 108

 

새롭게 창출되는 공공권의 대부분은 친밀권이 전환되어 생겨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면 1990년대 후반부터 각지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실천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주민 사이의 대화의 친밀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민투표가 쟁점으로 삼아온 것은 원자력발전소, 산업폐기물처리장, 군사기지, 토목건설 공공사업 등이다. 그것은 위험을 주변에 강요하고, 생태게를 파손하고, 부정적 유산을 후대에 남겨주는 사업을 감행하는 문화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었다. 새로운 가치 판단을 공공적 공간에 던지는 문제제기는, 다수와는 다른 가치관(생명관,자연관,인간관)을 유지 재형성해온 친밀권에서부터 생겨난 것이 많다. 미나마타병 환자와 교류한 경험도 이의 하나이다. 109

 

새로운 가치의 제기가 담론의 정치라는 형태를 곧바로 취한다고 할 수 없다. 가치관을 달리하는 타자에 대하여 호소하거나 설득하는 언어를 가지고 마주하기보다도 오히려 다른 식의 작품 제시라는 스타일, 다른 식의 행동양식의 제시, 다른 식의 삶의 방식 제시라는 스타일을 취한다. 그러한 다른 식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에 의해 담론의 차원으로 번역되거나 그것을 모방하는 미메시스의 실천을 촉발해간다. 110

 

친밀권의 감정의 기제는 양의적이다. 지지하는 것과 잡아매는 것, 배려하는 것과 집어삼키는 것, 주목하는 것과 감시하는 것...요약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과 상대적으로 위험한 것은 표리의 관계에 있다. 친밀권이 동화와 억압의 공간으로 전환할 위험성은 항상 잠재해 있으므로, 거기에서부터 벗어날 자유는 제도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지 않고, 자신의 말이 묵살되지 않는 사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존감에 있어서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렌트는 자신의 행위나 말로 공공적 공간에 현상하는 용기를 정치적 덕성으로서 중시하는데, 부인이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덕성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어딘가에서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을 배경으로 가질 터이다. 112

 

아렌트는 주체 내부에 있는 복수의 가치 사이의 대화를 사고라고 부른다. 이 시각에서 보면 주체에게 위기는 다양한 가치를 질서 짓는 어떤 중심적 지배적인 가치가 결여되어 있음(정체성의 위기)이 아니라, 거꾸로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가 주체를 지배하는 정체성이라는 위기이다. 복수성은 공공성에서 정치적인 삶의 조건임과 동시에, 주체의 정신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타자를 잃는다는 것은 응답받을 가능성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상실을, 언어를 가진 동물로서의 정치적인 존재자에게 죽음을 초래한다. 114

 

복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기에 가장 정치적인 로마인의 언어에는 살다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다, 또는 죽다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의어로 사용된다. - ‘사이의 상실 115

 

공공성은 생명의 보장이나 공통 세계의 정의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차원은 개별적 삶의 공약 불가능한 위상에 대응한다. 이 차원에서 공공성은 사람들이 소유활 수 없는 세계의 제시(언어나 행위에서의 현상’)를 보고 듣고, 향수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차원에서 정치는 이미 공약 가능한 가치의 정의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다른 가치나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윤리로서의 정치라고 할 만한 요소도 포함할 것이다. 117

 

푸코 - 내게는 이러한 문제 설정이 우리 사회에서 분명 대단한 중요성을 지녔던 실천들의 총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존재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인간들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 행동 규칙을 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성의역사2:쾌락의 활용 117-118

 

아렌트는 그 윤리를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타자에게 현상하기 원하는 대로 존재하라 Be as you would wish to appear to others” 이것은 다름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타자에게 현상하기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에게 현상하라 Appear to yourself as you wish to appear to others" 118

 

 

볕뉘.  한나아렌트, 하버마스, 비롤리, 롤스, 필립페팃 등 공공성 최신 논의를 끌어내면서도 그에 대한 아마티아센, 너스바움 등 최근 학자들의 연구흐름들을 감안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론적 인 탐색뿐만 아니라 공공선의 변화에 대한 개념(친밀권의 공공성 탐색)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유를 구체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