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거리 한가운데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둥글게/더 둥글게/파문이 번졌을 테니까/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2.

거울 저편의 겨울 2

새벽에/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무슨 숙제처럼/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던진다면
빛은/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때로/두 손으로 간신히 그러쥐어 모은/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차갑거나/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그 꿈을 기억한다

3.

그날 우이동에는/진눈깨비가 내렸고/영혼의 동지인 나의 육체는/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캄캄한 불빛의 집)
아아 첫새벽/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늘 거기 눈뜬 슬픔,/슬픔에 바친다 내/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첫새벽’)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회상’)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 (‘서시’)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괜찮아/왜 그래, 가 아니/괜찮아/이제 괜찮아 (‘괜찮아’)

4.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두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투명한 칼집들을 그렸다
(살아 있으므로)/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볕뉘.

0. 저녁, 새벽, 거울, 겨울, 살얼음, 죽음, 심장, 피, 눈, 눈물, 영혼, 불꽃, 빛 - 단어를 그러모아 본다. 주루룩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린다. 다시 거꾸로 뒤집어본다. 한송이 한 송이 함박눈처럼 살얼음위에 내려앉는다. 빛이 반짝였다. 사르르 녹았다. 달항아리에 부었다. 봄꽃가지를 넣었다. 매화같은 눈물이 피었다. 얼어붙어 볼 수 있는 슬픔이 아니라 나뭇가지 혈관을 타고 올라 피어나는 희망의 파편들... ...

1. 잊힐까 싶었고, 아쉬웠고, 밑줄그은 곳들이 새록새록 올라와 남긴다. 고통으로 빛의 지문을 찍는 작가라는 표현. 맞는 말일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 뿐이야. 빛은 빛은 무엇일까 공만은 아닐거야. 빛은 숙제. 그래 아직 숙제. 시가 남긴 질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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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0. 산문시인 파리의 우울에 끌려 미술비평가이자 현대시를 연 시인인 보들레르를 읽는다. 34살차이나는 두번째 부인에게서 난 보들레르 6살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한 아버지를 여위었다. 부친의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고 물쓰듯이 돈을 뿌리고 다녔던 보들레르는 재산을 압류당하다시피하고 매달 조금씩 받아썼다. 그렇다고 그 버릇이 바뀐 것을 아니었다. 삶과 일상을 늘 위태로운 지경으로 모는 그는 그 경계를 늘 글과 작품으로 단련시킨다. 시대의 우울을 고스란히 품고 작품으로 추출해낸다. 그 책 속의 책 가운데 하나가 말라르메였다. 말라르메의 시집. 평생 극히 적은 시를 쓴 그는 작품을 낳기 위해 끊임없이 삶을 채근한다. 그리고 조금씩 읽다가 늘 주시당하던 그 책 글렌굴드 피아노 솔로를 보게된다. 그리고 다시 보들레를를 그 책 안에서 만났다.

1. 예술을 위한 예술. 그 예술에는 예술만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치열한 삶 아니 괴팍스럽기까지한 원칙과 철칙. 어쩌면 시대가 말하지 못하는 멜랑콜리를 그대로 안고 있는 것 같다. 작품을 지켜주는 것은 사유와 삶, 고독이었다. 능히 즐기는 고독. 밤새워 자신과 작품과 부단히 씨름하는 나날의 연속인 듯싶다. 보들레르는 젊을 때 걸린 성병으로 말년 자주 의식을 잃기도 하고 아팠다. 그 날선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원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엄중했다. 그를 읽으면서 이시가와 타쿠보쿠가 겹쳤다. 드나들던 유곽. 빚에 대해 빚처럼 생각하지 않던 삶의 방식. 타쿠보쿠는 시에 자신의 성찰과 내면의 부끄러움을 거침없이 넣었다. 삶의 부끄러움을 넣을 줄 알던 시인. 그것이 그의 단명한 목숨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마흔여섯에 유명을 달리한 보들레르 역시 날선 자학과 귀족주의가 번갈아 감돈다.

2. 음악은 쉽지 않다. 결국 만나는 길이 음악이라고 하지만, 글렌굴드 피아노 연주를 듣거나 읽으면서 기괴하면서 이해할 수 있기도 한 것 같다. 연주자가 연주를 하지 않고 몇달 동안 몇 주 동안 서성거린다. 기껏 연습이라고는 일주일에 한 두번. 될 수 있으면 피아노란 사물과 거리를 둔다. 사물이 아니라 건반의 느낌과 발성상태까지, 그날의 습도까지 감지할 것 같은 연주자. 단 한번인 피아노의 음내림을 기원하는 무당같은 연주자. 시간이 아니라 한음 한음 공간을 만든다는 연주자.

3. 어떻게 하다가 이런 볼 것 같지 않은 책의 숲길로 들어섰는지 모르겠다. 한번 괄호를 다시 한번 치면서 읽고 싶다. 음악 대신에, 유행 대신에...또 다른 무엇. 사유의 갱부들... ...예술가의 낯설고 날선 일상들로 사유의 폭을 찢어버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이번 달은 이 들 사이에서 더 앓게 될 듯 싶다.

..........................................................................................

1.보들레르

2. 말라르메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꽃을 보았다면 너는 그저 그런 꽃 한 송이를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네가 정말로 무심한 상태에서 그 꽃을 보았다면 너는 우주의 한 얼굴을, 지극히 작은 얼굴이지만, 본 것이다. 말라르메에게서 낡고 우연한 관념들을 차례로 부정하고 색조와 선율로 하나된 인상이 되려는 이 시어의 지평선에 순수 관념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시구를 파들어” 간다는 것은 마음 속에 이 투명한 거울을 마련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한 시인에게서 그의 언어의 고행은 바로 그의 실존의 고행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32

얼음에 갇힌 백조가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노력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명철하게 알면서도 순백의 얼음에 능동적으로 자신을 붙박을 때도 38

책의 개념은 그의 시쓰기 속으로 들어와 내적 비평의 기능을 했으며, 사물과 생각과 말의 관계에 대한 성찰의 틀을 마련했다. 41

말라르메의 [최신유행]이란 8호까지의 잡지는 치밀하고 난해한 말라르메의 시와 반짝이는 작은 장식품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아름답고도 무의미한 유행의 세계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19세기 이후 현대의 패션 산업이 어떻게 예술화의 길을 밟았으며, 모던파의 예술이 어떻게 현대의 유행에서 영감을 받았는가를 기술하는 가운데 이 잡지를 그 중요한 단계에 위치시키고 있다./”사물이 아니라, 사물에서 산출되는 효과를” 그리려 했던 말라르메의 시법이 다른 방법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42

외국어 속에 마법으로 묶여 있는 저 순수 언어를 자기 언어를 통해 풀어내고,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저 순수 언어를 작품의 재창조를 통해 해방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번역가의 과제”라는 벤야민의 말이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44

3. 글렌굴드

굴드의 고독은 찢김이 아니고 스스로 아무는 상처였다. 풍요로운 은신처, 모아들이는 장소, 그는 묵상을 했던 것이다. 릴케처럼 그도 “나는 과실 속의 씨처럼 일 속에 있습니다.”fㅏ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1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 – 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37

연주회는 음악을 현재형으로 만들려고 ㅎㅏ지만, 사실은 청중을 그들이 듣는 것에서 멀어지도록 한다고 굴드는 믿었다. 연주회에서 연주를 할 때, 그는 음반이나 텔레비전 연주와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이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ㅅㅏ람들이 가장 생생하고 가장 직접적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스튜디오 안에서 이루어지는 빛나는 아름다움의 탐구의 죽은 그림자라는 듯이. 절단, 동시 녹음, 반복 녹음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 보들레르라면 ‘화장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했으리라. 보다 노골적으로 굴드는 상궤를 벗어난 아름다움, 임상실험, 해부를 원했다. 48

그의 부재는 보다 강렬한 현전이라 할 수 있다. 굴드는 청중을 원했으며, 더 많은 ㅅㅏ람들이 열정적으로 그에게 올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할 줄 알았다. 59
자신의 생각들과 함께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 어렵지 않게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 상대방을 괴롭히지 않고 그의 공격을 살짝 피해 갈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이 우정의 본질이 아닌가?/굴드는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을 거부했지만, 그가 거부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시대‘라는 명목으로 팔아먹은 이 텅 빈 말, 비의사 소통이었다. 그의 고독은 고독 속에 있는 각자를 만나려는 수단이었다. 굴드는 우리에게 우정을 증명해 주었다. 65

이 예술가의 이같은 별난 행동들을 기인의 전설로 치부해버리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할 것인가? 나는 반대로 이 육신의 병, 이 공포가 음악가에게 기계의 작동에 ㄷㅐ한 극도의 예민함과 섬세한 조음감각, 그리고 그의 세련된 연주를 가능케했다고 믿는다. 72

굴드에게 있어 음악은 일종의 ‘아래‘에 대한 사랑이다. 음향은 아래로부터, 피아노에서 오는 것이지, 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손가락은 단지 이 음향을 해방시키기 위해 있다는 생각. 아무리 낮게 내려가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다. 84/음향이 밖에서 전달되어 오지 않고, 마치 악기의 내부로부터 추출되는 것 같다. 85
그는 ‘아름다움‘을 접합과 절단, 합성과 분해, 외과적인 미의 개념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술은 정보를 재생해 내는 도구가 아니고, 예술적 의미에서 정보를 조작하는 도구라고 보았다. 스튜디오는 그에게 피아노와 똑같은 악기였다. 89

그가 무대를 떠난 것은, 연주홀이 음악을 듣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아니라는 확신에서였다. 그곳엔 형상들이 현존하며, 따라서 고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연주회는 부도덕했다/악마의 간계. “예술가는 위험에 처한 존재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90

굴드는 놀라운 방식으로 시간을 얽히게 하고, 도취 상태에서 기다림을 따라 잡는다/연주회에 대해 굴드가 가장 꺼렸던 점이 어찌 보면 시간성이다. 그는 연주회 시간을 혐오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연주자가 움직이는, 방향지어지고 역전 불가능한 시간. 95, 96

더 잘 연주하기 위해 거리를 둘 것. 이것이 굴드의 미학이다./듣기보다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자신의 몸의 지체를 분리시키고, 자신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음악가의 시도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시도이다. 그렇지만 굴드는 적극적으로 주장했다./굴드의 미학은 발견을 돕는 미학이다. 본능적으로 연주가들은 제거하기보다는 첨가하는데, 그의 미학은 제거하는 편을 택한다. 99, 101

굴드가 남긴 것은 무게가 없는 거대한 것, 느끼기보다는 명명하기 더 어려운 것, 가까이 다가갈수록 잡히지 않는 무엇이다.(미는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것, 우리를 그 영향력 속에 가두어두는 것이다.)/아름다움은 견딜 수 없고 냉혹하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우리의 눈길을 후려치고, 귀를 유혹하고, 대기중인 우리의 말들을 낚아챈다. 104, 105

그는 음악을 따고, 들어올리고, 아니면 공중에서 낚아채는 듯했다. 언제나 밖에서, 뒤로 물러서며 끝없이 한계를 넓혀 가는 어떤 공간 속에 있듯이 그는 음악 속에 있었다...친숙해지면 음악이 꺼져 ㅂㅓ리고 만다...무서운 것이 잊혀지고 나면 아름다움은 부재한다./우리의 원래 모습보다 한 발 앞선 곳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아주 스타카토적이고 점묘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이 secco식의 연주를 통해 탁월한 밀도와 놀라운 연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106, 107, 108

굴드는 피아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본다. “네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 지 내가 알려면 너는 아주 분명한 분석적인 ㄱㅐ념을 가지고 내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더없이 추잡한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피아노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한다. “이것이 정말 네가 바라는 것인가?”라고 물으면서 그 너머로 나아가도록 다그친다. 굴드는 피아노의 이같은 점을 좋아했다. 그의 방해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113

굴드는 유채색을 싫어했으며, 화려한 빛깔의 방에서는 일을 할 수도, 분명한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회색과 암청색을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 정도였다./그는 상상의 음질을 원했으며, 존재하지 않는 음을 찾곤 했다. 잃어버린 음이 아니라, 부재하는 음을/”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이 된다”는 바그너가 ㅍㅏ르지팔의 기본 미학으로 삼았던 원칙이었다. 굴드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갱도를 파는 광부, 혹은 ㄱㅏ장자리를 둥글게 다듬는 조각가가 생각난다. 울림을 지닌 재료를 가지고 하는 작업. 다시 시작하거나 회복이 불가능한 작업/음악의 촉각적 공간적 개념을 공유한다. 즉 색채가 입체감을 인지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굴드가 음악에서 과육을 제거하기 바라는 것은 색채와 무관한 자체의 구조, 그 골조의 아름다움을 환한 빛 속에서 보기 위해서이다. 122, 123,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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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환기 – 안목의 김환기편을 보다. 죽음을 예감한 후기작을 못봐 다소 놀랐다. 극찬을 아끼지 않은 유홍준비평가의 글이 참 좋다. 그러다가 다시 김환기의 색감에 마음이 갈 무렵, 매화도 피고, 매화와 항아리, 달.....그랬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방에서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을 접하고 무척 달떴다. 사진과 글, 그림들. 편집도 곱게 해서 그만 수중에 넣어버렸다. 천재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 일본에서 그의 죽음을 맞이했던 그의 부인인 변동림. 그녀는 지적갈망 못지 않게 나혜석에 버금가는 신여성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시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나 김환기의 호였던 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몇년 뒤 삶을 함께 꾸린다. 그 가운데 몇몇 엽서들. 안좌도에서 보낸 엽서의 한 귀퉁이 목포 유달산의 모습이 선명하였다. 옛 해수욕장에서 본 모습도 그러했다. 지성과 새로움이 끌고가는 관계들로 묘사하는 그들의 사랑도 담았다.

2. 진은영과 한강 – 숱한 불면의 밤, 새벽들. 망막함 속에 칠흑처럼 어두워지는 하늘은 온통 쇠감옥이자 쇠우리다. 통유리다. 자고 일어나면 더 짙어지는 암울함. 하루하루가 우울이자 멜랑콜리. 부수어도 부수어도 그 자리인 시지프스의 삶일 수밖에 없음. 그(녀)들은 말한다. 목없는자. 숨쉬지 못하는 자, 목이 없어진자. 없어질 자에게 연민을 쏟는다. 한결같이 우리 몸이란, 우리 육체란 항아리는 슬픔, 아픔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 항아리 안의 마음의 물결은 파문을 일어 몸의 가장자리로 번지는 것이라 말한다. 죽음은 저기 먼 것이 아니라 늘 곁에 지금 현현한 것. 스스로 죽지 않고서는 스스로 필 수 없는 것. 나는 죽음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늘 사라짐과 나타남으로 감지되는 것. 그렇게 죽음을 곁에 두고 삶을 강렬하게 돋을 새김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너가 물리적인 신체로 각별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버무려져 있음을 눈치채는 것. 스스로 엄중해지는 것. 그런 존재라는 것.

3. 말과 활 – ‘오늘날 대중운동에서 외부란 무엇인가‘란 제목아래 현재 사회운동 시론 3편을 실었고, 21세기 공장의 불빛, 서동진의 글 세편을 넘겨보았다. 사회운동시론에는 기분도 분위기도 정동도 아무 것도 없다시피했다. 강령이 필요하고 광장안밖의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좌파재편이 필요하다란 당위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무미건조함이 그 코드인가. 오히려 이주노동자들과 목없는자들의 생생한 ‘ 21세기 공장의 불빛‘이란 꼭지가 대신 답을 말하려는 듯하다. 서동진 그는 마음 감정, 심정성, 정서, 기분, 정동, 분위기, 불안, 강박, 경쟁, 고투, ㅍㅣ로, 탈진, 좌절, 포기, 불만, 원한, 불신, 반감, 피로, 수치심, 모멸, 단속 등의 개념으로 사회를 읽는 것에 불만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그의 이론적 접근의 발단이 정동에서 시작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도함이나 과잉, 유행적 비평이 문제있음을 지적하려는게다. 그는 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흐름들이 하이데거의 세계내(안)존재 철학의 과잉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 아류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존재론적 좌파라고 한다. 과도하다. 이것만이 ㅇㅏ니라 체계나 구조에 대해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변증법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편의상) 역사유물론적 좌파라고 칭한다.

4. 요약하자면 서동진교수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맑스주의자였지만, 지금은 맑스주의는 사라지고 실존논의만 범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동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역사정치경제의 생생함을 곁들여 변증법적 사유를 하자는 것이다.

볕뉘.

0. 따로 생각해보건데, 우리는 멀리떨어져서 숲의 조망권을 확보해보는 것이 아니라 숲길 하나하나 나무사이사이 활력들과 분위기와 정서, 감정을 곁들여서도 사유를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또 한편으로 일과 노동과 경제적 살림살이와 계급의 틀로도 제대로 사유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일천하여 숨통트이는 논의조차 없던 것은 아닐까. 핵심을 명료하게 하여 실전의 느낌이 나는 논쟁들의 불꽃이 일었으면 좋겠다.

1. 진은영은 문학의 아토포스에서 비인칭이라는 ㄱㅐ념을 쓴다. 하이데거의 죽음을 말하면서 발라낸 개인을 말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비인칭의 죽음. 정체성은 없다가 새로운 사유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아방가르드, 시도, 실험, 논의의 확장, 논쟁의 계절이 다시 유행처럼 왔으면 싶다. 더 이상 손해볼 것도 없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냐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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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

정신의 투쟁 역시 여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하다. 라고 한 랭보의 말이 적확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는 냉혹한 말의 의미도 간파하게 되었다. 37

그들의 사고를 통찰하는 데 그들 각자의 나이를 아는 게 필수 조건임을 깨달은 건 처음이었다. 51

나의 생각을 언제나 더 크고 새로운 감탄으로 차오르게 하는 두가지가 있다...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도덕률이다..../ 여름밤의 떨리는 미광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달의 형태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우정, 영원으로 형성된 고도의 가ㅁ각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71

사랑은 지고의 율법이며, 이런 사랑은 연민이다. 76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6

멋진 책을 펼쳐들면, 제대 앞에 선 신부의 부케처럼 책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88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104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적을 두기 마련이다. 128

어린아이가 쓴 듯한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다. 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132

볕뉘.

0. 메모지에 글을 쓴다. 글은 씌여지되 낯설은 느낌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글이 미끄러져 나가는 느낌. 내 글이되 내 글이 아닌 것 같아 무척 낯설다.

1. 책으로 사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책 속의 책들이 대기하고 있지 않을 수 있을까. 글 속에는 만차라는 여성을 등장시킨다. 사랑들이 그 모든 것을 변화시켜 집 한채를 거뜬히 지었다고 쓴다. 돌로 된 날개도 퍼덕이며 비상한다고 말이다. 어느 한 편은 돈오돈수요 또 한편은 돈오점수란 말인가.

2. 보들레르는 여배우였던 혼혈여인을 사랑했다. 지성과는 거리가 먼 그녀는 보들레를를 그리 깊이 아끼지는 않았던 듯 싶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나 반편불수가 된 그녀를 보들레르는 극진히 보살핀다. 삶을 예술의 자양분으로 썼던 그는 사랑을 믿었던 것인가.

3.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는 연민이 있다. 사랑에 다가서는 그 무엇이 있다. 책 속에도 현실에도 있다. 어느 문을 열더라도 그리로 통할 것이다. 삶을 놓치려하지 않는 안간힘들. 안타까움들. 그런 것들을 사랑이라 불러도 될까.

4. 간간이 나오는 짚시의 삶. 몰아서 폐기시키는 삶이 아니라, 자족과 명랑의 삶, 그리고 그 시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또 다시 그려져야 할 것. 이름도 묻지 않고 학교도 묻지 않고, 직업도 묻지 않고 만남의 질로만 서로를 평가하는 관계들.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것들을 만들어가는 재미.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나이와 관계없는 양식. 책의 즙을 짜내는 일을 하는 주인공을 통해서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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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들은 노래

봄빛과
번지는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볕뉘.

0. 아껴둔 한강 작가를 이제 읽기 시작한다. 시집엔 참 많이 들어 있다. 마음의 편린들이 아파 피는 봄, 저녁, 그리고 새벽들. 늘 피로 잠겨있는 눈. 슬픔들. 파문을 일으키는 슬픔의 항아리란 육체.

1. 푸른 새벽도, 새벽도 아닌 새벽에 들은 노래라. 불면의 밤은 얼마나 깊었을까. 꿈속의 꿈들은 얼마나 허망하였을까. 그런 시인이 정작 노래하는 것은 저녁이라. 저녁입사귀. 저녁의 어둠인 줄 알았는데 새벽이라고. . .

2. 피눈. 피 눈. 피눈물. 피 눈물. 거울 속의 겨울. 그녀의 아파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아파하는 투정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림자 짓만 한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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